제61장. 소원(3)
칼리안의 고운 미간이 보기 좋게 찌푸려졌다.
"형님."
"왜."
목소리 하나와 시선 하나가 칼리안을 향했다.
정확히는, 낮은 목소리와 짙은 보라색의 시선이 칼리안에게 함께 돌아왔다. 문제를 깨달은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들."
"뭐."
"얘기하거라."
"좀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뭐가."
"우리가 무얼 잘못한 것이 있더냐."
이번에는 칼리안의 어여쁜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우와.
우리란다.
우와, 되게 친하시네. 언제 그렇게 친해지셨을까. 그 때 그 와인이 진짜 맛있긴 했나보다. 누가 보면 둘이 형제인 줄 알겠다. 두 분 다 희끄무레하시니까 그냥 나 빼고 두 분이 형 동생 하면 딱 좋겠다.
"······ 진짜 너무들 하시네요."
외롭다.
땅콩과 귀리를 갈아 만든 고소한 스프, 속은 촉촉하고 겉은 바삭하게 구운 하얀 빵과 올리브 오일, 우유와 치즈를 듬뿍 넣은 오믈렛.
트러플 오일에 잘 구운 두툼한 송아지 고기 스테이크, 소금과 후추만 넣고 구운 닭가슴살에 조린 땅콩 소스를 올린 요리, 아삭하게 구워진 아스파라거스와 새하얀 버섯 볶음. 그리고 피망 없는 샐러드. 거기에 더해, 체이스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와인까지.
맛있을 것 분명한 요리가 '희끄무레한 두 형님' 앞에 잘 차려져 있었다.
물론 칼리안의 앞에도 무언가 있기는 했다.
세크리티아에서 가장 청명한 지역의 산에서 퍼올린다는, 뼛속 깊은 곳까지 시리도록 시원하고 맑은 맛으로 아주 유명한 최고급 물이 한 잔 놓여 있었다.
그래. 매우 비싼 맹물이다.
그래서 외롭다.
잘 차려진 식탁과 제 앞의 물을 번갈아가며 보던 칼리안의 눈길이 플란츠에게 가 닿았다. 이 자리가 누구의 뜻깊은 생각 덕에 만들어졌는지 너무 잘 알 것 같아서였다.
체이스가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않나.
"미안하구나. 오늘 북서부 귀족들과 회의가 있는 날이라. 식사도 못하고 시간도 부족해서 부득이하게 이런 자리가 되었다."
체이스였다.
닷새 가까이 자다 깨서 이제껏 뭐 하나 먹지도 못하고 이제야 간신히 물 한 잔 마실 수 있게 된 동생 앞에 최상의 고기 만찬을 차려놨다.
칼리안이 아직 아무것도 못 먹는 줄 몰랐단다.
그렇다고 정성스레 준비한 식탁을 물리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니,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은 채 플란츠와 밥을 먹었다. 최고급 맹물 벌컥거리는 칼리안을 앞에 둔 채로.
"그래서. 맛은 있습니까."
"맛있어."
나쁜 사람들이다.
아르나이젤보다 무심하고 다누보다 배려심이 없다.
"네. 많이 드십시오."
"알았어."
란델보다 나쁘다. 란델은 싫어하는 걸 내놓기라도 했지, 좋아하는 걸 혼자 먹진 않았다.
"그러게 왜 그리 다쳐서 왔느냐. 몸을 좀 조심하지 않고."
쟤 때문에요.
형님 앞에 앉은 다른 형님 쟤 때문에요. 이런 날에만 고기 잘 처드시는 저기 풀 많이 닮은 쟤 때문에요. 바닷물에 푹 담궈졌다 나온 다음 날에 나무 뿌리 캐다 다쳤는데요. 제가 왜 이렇게 다쳤는지 저기 식물 친화적인 저 형님 저하 쟤가 모를 리가 없는데요. 그런데 어쩜 저렇게 야무지게 잘 드시나 모르겠네요.
그것 참 기특하기도 하셔라.
"그러게요. 제가 왜 그랬을까요."
다친게 죄다.
아무튼 우리 히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다른 방법을 찾을 걸 그랬다. 얀 마음 고생만 시키고 밥도 못 얻어먹고 있다.
용돈 몇 푼 쥐고 왕궁 밖으로 쫓겨났던 날이 생각나서 더 서글퍼진 칼리안이 오늘따라 참 맛있는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런 마음 알 길 없을 두 놈, 아니. 지고하신 두 형님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래서, 세르제인과는 얘기를 다시 나눠봤습니까."
"이틀 전에 잠시 만났습니다."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혹시 궁금해해도 괜찮을까요."
텐실, 그리고 제온과 관련된 문제라면 체이스도 함께 알아야 할 일이 아니던가. 때문에 플란츠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전하의 탄신일 축제 기간에 카이리스에 방문할 수 있도록 전하께 말을 해보겠다 했습니다."
"그렇게 원하더니, 란델 왕자를 만나게 되겠군요."
"세크리티아의 국왕 전하······ 께도 그 말을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란델 왕자를 데려다 왕세자위에 올리겠다, 그리 말했습니다. 당장 텐실 내에는 왕이 될 만한 이가 없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습니다."
"그럴 바에는 그냥 직접 오르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세르제인으로 올라가든 본인이 올라가든. 어차피 근본도 없는 나라인데 왜 굳이 란델 형님을 데려가려 하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마지막 말은 칼리안의 것이었다.
아리안느가 한 말과 똑같은 소리를 또 들은 것에 잠깐 웃은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올라 보아야 좋을 것도 없는데 직접 왕위에 올라 무엇하겠느냐. 기사로 살아왔으니 스스로가 왕위에 오르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머릿속에 없었을 테지. 다만 이제는 생각을 해보긴 하겠구나."
"세르제인이 카이리스에 오겠노라 한 이유가 좀 달라졌기도 하겠습니다. 본래에는 란델 형님을 설득시켜 텐실의 왕세자위에 올릴 생각을 했다면, 이제는 란델 형님이 나을지 본인이 나을지를 비교해 볼 테고요."
플란츠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칼리안이 그런 플란츠를 보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제온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 바가 없다고 합니까."
"그래."
"아델리아에 대해서도 그렇습니까."
"그래."
"그럼 아델리아와는 어떻게 만난 사이라 합니까."
칼리안이 잠들어 있던 동안, 세르제인을 혼자 만난 플란츠가 무엇을 물어봤을지 이미 다 안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런 모습에 이제 더 느낄 감흥도 없는 플란츠는 신기할 것도 없다는 듯 평온한 대답을 꺼냈다.
"어쩌다보니."
"······ 형님 왜 저한테만 말 짧게 하십니까."
"어쩌다보니."
"네."
그러시겠죠.
또 외로워지려는 것을 애써 꾹꾹 누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 날은 그럼 우연히 만났다는 겁니까. 아니면 자세히 말하기 어렵다는 겁니까."
"우연히. 그 날 아침에 찾아왔다던데."
"조약돌을 무엇으로 만드는지 알려주면 어머니 나무 위치를 가르쳐주겠다고요."
"그래."
칼리안이 잠시 테이블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긴 사이 체이스의 말이 들려왔다.
"아델리아는 세르제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겠구나."
"네. 그렇겠네요. 아마도 제온이거나, 혹은 텐실 왕세자를 공격한 귀족들 세력과 연결되어 있거나. 둘 중 한 가지일 가능성이 높겠습니다."
잠시 발칸의 미친놈들을 떠올려보던 플란츠가 진심어린 말을 꺼냈다.
"호기심 같은데."
"네. 저도 아델리아가 제온과 동맹을 맺었다기 보다는 마법사들의 그 호기심 때문에 함께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델리아의 성향을 보면 그들에게 일방적인 도움을 줄 리도 없거니와, 진지한 거래를 할 것 같지도 않으니까요."
"리베른 쪽은."
"스승님이 나머지 7서클 마법사를 만나러 얼마 전에 다시 리베른에 가셨습니다만. 무슨 이유인지 만나는 것을 거절했다 합니다. 만약 그 마법사가 마탑을 벗어나는 경우 스승님이 알아챌 수 있도록 손을 써 두고 오셨다 하니 몰래 빠져나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래."
곧 식사를 마친 체이스가 칼리안을 보며 물었다.
"엘프들의 대장로를 또 만나 볼 생각인지 걱정이 되는구나."
"전하의 탄신일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왕궁 상황도 확인해야 하고, 란델 형님 쪽도 살펴야 해서요. 당장은 못 만날 것 같습니다. 우선 숲에는 다녀왔으니 축제가 끝나고 세르제인이 돌아간 뒤에 만날 수 있겠네요. 축제 기간 중에 그 자가 왕궁에 찾아온다면 만나볼 수도 있겠지만요."
"그건 그렇겠구나."
"네. 게다가 약속한 것이 있으니 이곳에서 알게 된 내용을 알려줄 겸 이야기를 좀 나눠볼 겸 시오나도 만나보아야 하고 말입니다."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듯 흘려 넘긴 말에,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을 들었다.
와인잔을 향한 그 눈길이 찰나와 같이 플란츠에게 닿았다 떨어진 것은 칼리안만 눈치를 챘다. 시오나가 알고 있을 브리센에 대한 사실에, 키리에와 히나는 물론이고 칼리안과 플란츠까지 전부 얽혀 있으니 마음을 쓰는 것이다.
"그럼······ 언제쯤 돌아갈 예정이더냐."
"아마 하루 이틀 내로 스승님께서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델리아가 팔찌를 부수는 바람에 연락이 되지 않으니 직접 오실 것 같아요. 그런데 바로 이동을 하기에는 제 상황이 썩 좋지만은 않습니다. 히나의 말로는 스승님이 오시더라도 닷새 쯤 뒤에 출발하는 것이 낫겠다 했습니다."
닷새.
돌아가는 일정이 정해졌다.
체이스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와인 한 모금을 더 마셨다.
한겨울을 다 보내고 봄이 지나가도록 세크리티아에 머물렀다. 그리고 아직은 조금 더 시간이 남았다. 게다가 이제는 수정판도 있으니 카이리스에 돌아간 뒤에도 얼마든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앨런과 함께 언제든지 세크리티아에 오는 것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돌아가야 하니까.
때문에 아쉬움을 채 숨기지 못한 체이스의 표정을, 그 표정이 담긴 얼굴이 와인잔에 가려진 것을, 이번에도 칼리안은 눈치를 챘다.
"어머니와 아리안느를 불러 다 같이 식사라도 한 번 더 하자꾸나."
"네. 좋습니다. 언제든지."
그래서 칼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칼리안이 계속 머무르길 바라서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기 때문에 아쉬워하는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 * *
체이스는 다정하지만 바쁜 왕이었다.
식사와 대화를 굳이 함께 준비한 것이 허튼 소리는 아니었다는 듯, 저녁 식사를 마친 체이스는 곧바로 집무실로 돌아갔다. 귀족들을 만나느라 마치지 못한 일을 끝내야 했던 탓이다.
'과거'의 기억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왕위에 오른 뒤 몇 년 동안 나라를 잘 이끌던 기억이 없었다면 아무리 체이스라 하더라도 나라를 이렇게 빠르게 안정시키지는 못했을 테니까.
"기억이 있다 해서 무조건 나쁜 일은 아니니까요."
그 점을 언급한 칼리안이 생글거리는 얼굴로 셔츠 소매를 가리켰다. 어두운 가운데에도 다이아몬드와 루비로 장식된 커프스가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게 된 덕에 돈 많이 벌고 있다는 소리다.
능력 좋은 상단주 멜피르를 살린 덕에 카이리스 마법 학교와 폴룬 상단에 아주 큰 지분을 두게 되지 않았던가. 물론 휘트린 영지를 통해 모인 자산이 없었다면 멜피르가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만큼의 부유함을 가지지는 못했겠지만, 그 모든 일에 멜피르의 도움이 컸다는 것 역시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었다.
"잘생긴 얼굴도 보셨고요."
"못 봤다고."
"나중에 보시겠다면서요. 잘생겼다는 건 알아둬야 알아보실 것 아닙니까."
"아니어도."
얼굴 몰라도 알아볼 수 있다고.
검 쓰던 놈 머리가 왜 그렇게 길었느냐고. 그래서야 못 알아볼 수가 없지 않겠느냐고.
소득없을 말을 하려던 플란츠는 그냥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꾸지 말라고 하더니."
"네. 차라리 꿈도 안 꾸고 아예 기억이 안 돌아오는 게 낫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비어 있는 수련장으로 향하던 길.
밥 못 먹는 것 말고는 '싹 다 나은' 칼리안이 얌전히 침대에 누워 있을 인물이던가. 기운이 딸리니 검은 못 휘둘러도 닷새 동안이나 미뤄 둔 플란츠 검술을 봐 줄 수는 있으니 함께 나온 길이었다. 동생 놈의 이런 고집은 못 꺾는 것을 이미 잘 아는 플란츠는 그냥 조용히 따라 나왔다. 그러다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히나가 그런 말을 해서요. 자신은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고. 그렇게 살았으니까 과거가 어떻든 앞으로도 그냥 히나로 살겠다고······. 그 말 듣고 저도 생각이 좀 많았습니다."
플란츠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항상 곧은 히나의 눈을 떠올려 본 칼리안이 입을 한 번 꾹 다물었다 열었다.
"죽기 전에 형님을 봤습니다. 제가."
플란츠의 걸음이 흐트러짐 없이 계속 이어진다.
대신 언제나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울리던 발소리가 조금 줄어들었다.
"그 때의 형님과 말을 나눠보지는 못했습니다.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던 상황이라, 그냥. 저 새끼가 말 더럽게 짧던 그 새끼구나. 그렇게 가벼운 감상만 들었습니다."
"······ 안 가벼운데."
"그 정도면 가벼운 것 아닙니까."
저녁 식사에 대한 복수인지 말 더럽게 짧은 편지에 대한 복수인지 모를 것을 끝낸 칼리안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다 헤르츠 경이 찾아왔고요. 그래서 저는 거기까지만 알고 있었는데. 엘프 도시에서 제가 다누를 만나고 형님 검을 가져왔던 그 날에, 전에는 몰랐던 일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플란츠의 검을 내려다 본 칼리안이 여상한 얼굴을 한 채 계속 발을 옮겼다.
"시나스타. 그걸 주셨습니다. 형님이 저에게. 사실 제가 그걸 가지고 싶어서 카이리스까지 갔었는데 형님한테 뺏겼던 것이라서. 아마 경매장에 갔을 때 저는 못 봤지만 형님은 저를 보셨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잘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두 번을 살아도 그 검을 두 번 다 못 써보는 줄 알았는데 결국 한 번씩 다 가져보게 됐습니다."
베른의 위에 올려 준 것이 한 번.
칼리안에게 던져 준 것이 한 번.
"형님께서 보지 않으셨던 것. 그 자리에서 눈 감고 귀 막고 안 보려 하셨던 것. 그겁니다. 기껏 쳐들어간 나라 대문 막고 있던 사람 위에 검을 올려두셨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어 보지 않은 모습.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쭈그리고 앉아서 보지 않았던 모습.
"그냥 그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저도 모르니, 안 보고 안 듣고 그렇게 계셨던 건 잘 하셨습니다. 그건 정말 잘 하셨습니다. 다만 그 순간, 형님을 스쳐갔던 '형님'이 한 일이 미친 짓은 아니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건 그냥, 그 날의 플란츠가 그 날의 베른에게 검을 전해주던 모습. 단지 그뿐이었다고.
"미련하긴 했지만."
미련하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고.
"상상하시는 것만큼 끔찍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상상하신 것보다 끔찍할 수도 있지만요. 뭐가됐든 그 일을 무조건 보지 말고 피하시라 말씀드리는 건, 그 때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막으려 했고 형님은 최선을 다해 쳐들어오셨던 것 아닙니까."
"······ 궤변을 달변처럼 내뱉는 재주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알고 보면 별 것 아닐지도 모르니, 이번 일로 너무 겁먹지는 마시라 말씀드리는 겁니다. 다누가 몹쓸 짓을 한 바람에 굳이 볼 필요 없는 것까지 보게 될 뻔했지만, 그 이전의 일들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되도록 꿈을 안 꾸셨으면 하는 건 여전하고, 꾼다면 가능한 늦게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그대로입니다만."
히나가 그 말을 꺼냈던 것과 이유는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히나가 그랬던 것처럼 그 때의 플란츠 역시 생을 살았던 사람이니까. 베른이 분명히 살았던 것처럼.
"그 때의 형님에게 겁 먹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든,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할 테니까요. 제가."
이미 여러 번 했던 약속을 다짐처럼 또 꺼내놓았다.
그리고, 스치듯 보았던 자신의 모습에 지레 겁을 먹고 발을 물릴 필요까지는 없다고. 그 모습이 과거 플란츠의 전부였던 양 끔찍해하거나 부정하지는 말라고. 그렇게 말했다.
"아무튼 제가 마지막에 본 형님은, 미친새끼처럼 보이긴 했어도 답없는 새끼같진 않았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플란츠가 실소했다.
"가능하다면."
"네. 가능하다면."
플란츠는 알겠다고 대답하거나 그렇게 하겠다 대답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해 주는 이야기를 잘 배우겠다며 무리하다 또 이번 같은 일을 만들진 않아야 했으니까. 그것 역시 이번에 배웠으니까.
이번에도 쏙쏙 잘 골라서 잘 배운 똑똑한 완두콩 보면서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고 있는데, 플란츠가 잠시 발을 멈추더니 물었다.
"내기에서 이겨서 하는 말이면."
무조건 따라오려고 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만큼만 걷겠다 하기에 기특하다 생각한지 3초도 안 지났다. 그런데 그새 또 엉뚱한 소리를 한다. 사냥 내기에서 이겨서 한 말이면 그냥 가르쳐 준 대로 하겠다고 말이다.
"아닌데요."
미간을 찌푸린 칼리안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플란츠의 재킷 주머니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그거, 빨리 열어보시라고. 내기 이긴 부탁으로는 그 말 할 겁니다."
원래는 다른 부탁 하려고 했지만.
마음이 바뀌었으니.
"전하께서 보낸 편지 아닙니까."
"······ 맞는데."
르메인은 무심하면서 바쁜 왕이었다.
적당히 좋은 왕일 수는 있었겠으나, 좋은 아비는 결코 아니었다.
"겁 먹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유일하게 르메인에게 '내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사람. 유일하게 르메인을 꺼려하지 않는 사람. 그러나 유일하게 르메인의 아들이 아닌 사람.
그런 사람, 칼리안의 말에 르메인의 아들이 큰 숨을 들이쉬었다. 숨이 막히는 것처럼.
"아. 혹시 전하 편지가 보기 싫어서 두시는 거면. 괜한 소원 빈 것이면, 다른 것으로 바꿀까요."
플란츠에게 란델이 르니에리같은 사람인 것처럼 르메인도 마찬가지라면 소원이랍시고 억지로 열게 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그저 머뭇거렸을 뿐인 플란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키리에가 낮에 전해주고 갔으나 아직 열어보지 못한 편지를 꺼냈다.
누가 보냈는지 쓰여있지 않은 탓에 키리에가 검수를 했다. 때문에 겉봉투에는 한 번 열었던 흔적이 있었다. 그 덕에 별다른 노력 없이 봉투를 연 플란츠가 안을 살폈다.
르메인의 인장으로 봉해진 편지 한 장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 툭.
하고, 무언가가 플란츠의 손 위에 떨어졌다.
손가락 두 마디 만한 동그란 로켓이 달린 목걸이. 뚜껑을 열어 안에 든 것을 확인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물건이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플란츠를 향해 묵례를 했다.
"배고파서 수련 못 봐드리겠네요. 먼저 들어갈 테니 천천히 오십시오."
대답 없이 칼리안을 쳐다보는 언젠가의 미친왕, 지금은 그냥 질풍노도의 완두콩인 형을 남겨둔 칼리안이 왕궁 쪽으로 주저없이 발을 옮겼다. 같이 봐도 될 것과 같이 보면 안 될 것을 구분하는 방법 정도는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칼리안의 뒷모습을 일별한 플란츠는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로켓을 차마 열지 못한 채 편지를 먼저 펼쳤다. 그리고는 신기하리만치 플란츠의 것과 참 많이 닮은 필체를, 그 필체로 적힌 내용을 한참동안 들여다봤다.
스쳐 보아도 이미 모두 외울 수 있을 짧은 내용을 한참 들여다봤다. 그렇게 참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로켓을 열었다.
- 달칵.
작은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린다.
로켓 만큼이나 작은 그림.
어린 아이의 초상화가 하나 들어있었다.
옅은 에메랄드 색의 머리를 뒤로 묶은 어린 아이. 연두색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는 어린 아이. 어린, 남자아이.
플란츠의 어린 시절이 그려진 초상화였다.
"······ 하."
똑똑한 플란츠는 잘 알았다.
그 시기에는 어떤 초상화도 그린 적 없었던 것을.
- 곁에 두지 않은 동안 또 얼마나 자랐을지 궁금하구나.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고 있으마.
짧은 편지를 다시 읽었다.
- 보고 싶구나. 플란츠.
하염없이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