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장. 소원(2)
칼리안이 정신을 차리기 조금 전.
"니아옹······."
꽃향기 가득한 정원에 유일하게 꽃이 없는 곳. 온 사방에 가득한 꽃 대신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심겨진 곳.
여전히 이름을 물어보지 못한 붉은 꽃의 정원을 지나 역시나 이름을 모르는 커다란 나무 아래의 벤치에 앉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는지 따져보지 않았는데, 어느새 나왔는지 모를 두 고양이가 찾아왔다.
- 딸랑.
엘프 마을에서 칼리안이 챙겨나온 방울을 입에 문 채였다.
칼리안의 주머니 속에서 방울과 편지들을 꺼내 살펴보다 편지는 도로 숨겨놓고 방울은 꺼내두었었는데, 그 사이 그것을 물고 나온 모양이다. 시끄러운 것 싫어하면서 방울은 괜찮았는지, 아니면 신기했는지. 딸랑딸랑 하는 소리를 이곳저곳에 퍼뜨리며 다가오는 고양이를 플란츠가 불렀다.
"루시."
가만히 걸어 온 루시가 입에 물린 방울을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는 애옹 하고 대답을 했다. 방울을 거기 내려놓으면 어떡하냐고 말하려는데, 이름 안 불린 다른 한 녀석이 발치에 몸을 부비며 관심을 끈다. 그래서 조용히 손을 뻗어 안네를 안아들었다. 떨어진 방울은 조금 뒤에 주우면 될 일이니까.
품에 안긴 안네가 냐옹냐옹, 예쁜 소리를 냈다.
"여기선 마음대로 나오면 안 된다고 했는데."
"냐옹."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안네가 큰 눈을 몇 번 깜빡이다 몸을 말았다. 방금 내려놓은 방울은 새까맣게 잊은 루시가 플란츠가 앉은 벤치 위로 뛰어올라왔다. 그리고 손과 발을 몸 밑으로 넣고 엎드린 채 꼬리를 살랑거렸다. 남은 한 손을 내어 루시의 등에 올린 플란츠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햇살은 좋고 나무그늘은 한가득이니 두 고양이에게 말을 걸어봐도 특별히 이상할 것 없는 날이 아니던가.
"루시. 문 닫았는데. 어떻게 나왔어."
"므에옹."
"살 많이 쪄서 못 나올 줄 알았더니."
"애옹!"
"배가 둥그래졌는데. 뭐."
"애오옹!"
루시인지, 안네인지, 둘 다인지.
또 어디서 맛있는 것을 얻어먹었는지 고소한 냄새를 풍긴다. 그것에 어쩐지 웃음이 났다.
"아무거나 먹지 말고."
"애오옹."
"냐옹."
고양이라는 생물은 의외로 섬세하다.
평소에는 곁에 있는 사람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보고 있는 서류 위에 제멋대로 몸을 말고 눕기도 하고 갑작스레 펜대를 붙들어 잡는 바람에 서류를 망쳐놓기도 한다. 제 편할 때 다가와서는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머물다가 또 어느 순간 미련없다는 듯 휙 가버린다.
그러다가도 이렇게, 속 복잡한 날에는 어떻게 알고 옆에 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는 것이다. 헤이시아 궁을 바라볼 때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도.
"답답해도 조금만 있어."
안네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잠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안 짖고 착한 두 고양이 말고, 어마어마하게 짖어대는데 안 착하기까지 한 까만 고양이 때문이다.
"곧 돌아갈 테니까."
"애옹······."
"그래. 깨면."
누구보다 드센 발톱을 가졌으면서 그 대단한 것을 제 살 갉아내는 데에나 써먹을 줄 아는 그 까만 고양이 말이다.
아무튼 칼리안은 허튼 소리를 안한다.
다누 뿌리 캐다 그냥 세렌티를 만나고 오겠노라 하더니 정말 만나고 올 생각을 한 모양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가늠이 되고 왜 그랬는지를 모르지도 않았다. 그러니 누구 하나를 붙들어 잡고 탓할 길도 없었다.
- 저벅.
답답한 마음만큼 무거워진 손을 다시 안네에게 가져다 댔을 때 발 소리가 났다. 기분 좋게 잠이 들려던 안네가 귀를 쫑긋거리고, 엎드려있던 루시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손등 위에서 눈을 뗀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을 땐 키 큰 사람의 그림자가 어느새 플란츠 쪽으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어지간해선 플란츠를 따로 찾아올 리 없는 사람. 특히나 지금같은 때에는 절대 칼리안의 곁을 떠나지 않을 사람. 키리에였다.
"······ 왜."
잠시 안네를 보는 듯 고개를 숙였던 플란츠가 키리에를 쳐다봤다. 작은 종이 쪽지 하나를 손에 든 채 플란츠를 찾아온 키리에가 간단한 묵례를 보이며 한 걸음을 더 다가왔다.
"세자 저하 앞으로 편지가 와서,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내도록 칼리안의 곁을 지키던 키리에를 얀이 쫓아냈다.
곧 일어날 때가 됐다 하니 일단 가서 쉬라는 말로 내보냈다. 그렇게 강제로 가지게 된 휴식 덕에 칼리안의 방에서 나왔을 때, 왕궁의 시종 한 명이 키리에를 불렀다. 그리고 카이리스에서 전서응을 통해 플란츠의 앞으로 보낸 편지 한 장을 전했다.
일행이 세크리티아 왕궁이 아닌 별장에서 머무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앨런 뿐이다. 그리고 앨런은 굳이 그 말을 다른 이에게 전하지 않았을 터였다. 왕궁보다 덜 안전한 별장에 왕세자와 왕자가 머무는 것을 알려 보아야 좋을 것 없었으니까.
별장에 머무는 것 모를 사람이 세크리티아 왕궁으로 편지를 보냈고 플란츠는 때마침 왕궁으로 돌아와 있던 탓에. 더 오래 걸리지 않고 편지를 받게 되었다.
"카이리스 왕궁에서 보낸 것입니다. 레릭이 아직 별장에 있어서 검수는 제가 했습니다만. 내용은 보지 않았습니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가 손을 뻗어 편지를 받았다.
검을 휘둘러 볼 만큼의 상황은 되지 못했고 얀의 말마따나 쉬기도 해야 했던 탓에, 키리에는 칼리안을 대신해 검술 연습을 도와주겠다거나 하는 등의 다른 말 없이 고개만 숙여 보였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발을 내딛었다.
- 딸랑.
루시가 물고 온 방울.
플란츠에게 대답하겠다며 바닥에 내려놓았던 것. 안네가 안아달라 조르는 통에 곧바로 주워들지 못했던 것.
그 방울이 키리에의 발에 살짝 채여 소리를 냈다.
키리에의 시선이 발 밑을 향했다.
플란츠의 시선이 키리에를 향했다.
키리에가 허리를 숙여 방울을 주워들었다.
- 딸랑.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고양이들이 키리에를 쳐다봤다. 플란츠는 고양이를 내려다봤다. 키리에는 플란츠를 봤다.
연두색 눈이 키리에를 향했다.
검은 눈을 한 번, 푸른 눈을 한 번, 그리고 다시 검은 눈을 한 번. 서로 다른 색의 눈을 번갈아가며 그렇게 한참동안을 바라보다가.
"키리에."
정확히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올려놓으려 키리에를 불렀다.
브리센이 키리에와 히나의 부모에게 무엇을 했는지. 사실 확신은 이미 진작부터 했었지 않나. 그저 시오나의 입을 통해 한 번을 더 확인하겠다는 무의미한 핑계를 두고 일을 미뤄왔던 것 뿐.
- 딸랑, 딸랑.
키리에가 두 걸음을 다가왔다.
방울 소리가 두 번을 울렸다.
- 탁!
키리에가 그것을 벤치 위에 내려놨다. 낯익은 것을 본 루시가 그것에 다시 앞발을 가져갔으나 플란츠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방울을 집어 든 플란츠가 한 번, 두 번, 세 번,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입을 열었다.
"이건."
"모릅니다."
같은 시간.
키리에가 플란츠를 찾아간 것은 보지 못한 칼리안. 그런 칼리안의 옆에 앉아있던 히나가 '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모르는 채로.
"모릅니다. 이제는."
키리에는 그 방울 역시 모르겠다는 답을 먼저 했다.
* * *
'반짝반짝.'
햇빛이 반짝이고 옷가지는 꽃잎같았다.
'히나. 햇빛이 반짝여?'
'아니, 사람들. 반짝반짝 기분 좋아 보여.'
오랜 겨울을 보내고 난 뒤 완연히 따뜻해진 어느 날에, 창 밖으로 내다 보았던 거리의 풍경은 그야말로 봄날이었다.
'블루베리 아이스크림도 있을까?'
'블루베리 아이스크림도 있을 거야.'
'그럼 그건 무슨 색일까. 궁금해.'
'하늘색이겠지, 히나. 블루베리는 파란색이니까.'
'그렇겠다. 왕궁에 가면 그런 것도 구경해 볼 수 있겠지? 먹지는 못하더라도. 그치.'
'그래.'
날 좋은 날 너나 할 것 없이 널어놓은 빨랫감을 내려다보던 날. 두 번째 딸기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던 날.
그것이 히나에게는 첫 봄이었다.
그래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반짝거리는 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이야기하지 못했다.
칼리안을 만나고, 히나와 함께 왕궁에 들어가게 되고, 히나는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자신은 검을 배울 수 있다는 말에 들떠서, 키리에 스스로도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
칼리안이 누구의 아들인지.
그리고 누구의 동생인지.
술 처먹는 나쁜 놈이라던 그 사람이 누구의 아들인지. 어느 집안의 핏줄인지. 그 집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스스로도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던 연결고리를 칼리안이 돌아간 뒤에야 깨닫게 되었음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원히 말하지 않으려 했다.
'오늘 오빠랑 자상한 왕자님 사냥 가셨던 동안 큰일 날 뻔했어.'
'왜. 무슨 일이 있었어?'
'고양이가 장미 정원에 들어갔어. 잃어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 고양이를 데리러 들어갔는데 무서운 왕자님이 계셨어.'
'거길 왜 들어갔어. 기다렸어야지.'
'어쩔 수 없었어. 단호한 시녀님도 자리를 비웠었단 말야.'
'그래서 어떻게 됐어. 혼나진 않았어?'
'둘째 왕자님이 도와주셨어.'
'······ 왜?'
'모르겠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서는 도와주셨어.'
'그래.'
'그 분, 나쁜 사람 아니야.'
'히나.'
'자상한 왕자님이 그러셨잖아. 나쁜 사람이라고. 아니야, 나쁜 사람. 좋은 분이야.'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려줘야 하겠다 마음을 먹었다. 친분을 쌓는 것을 막고자 함이 아니라, 행여 섣부른 믿음을 주었다가 히나가 상처를 받게 될까봐.
'히나. 얘기해 줄 게 있어.'
키리에의 어머니가 남긴 편지.
그리고 조금 더 자란 키리에에게 전해줄 말이 담긴 편지.
참 예뻤던 누군가로부터 편지 전해주기를 부탁받았다던 어느 엘프가 건네고 간 편지. 그 속에 적힌 이야기들.
- 딸랑······.
그 엘프의 검 끝에 달린 것.
귀 밝은 키리에는 절대 잊지 못할 방울 소리까지.
그 모든 것을 히나에게 이야기했다.
'그렇구나.'
그리고 히나는.
'그래서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됐나보다.'
하고.
웃었다.
* * *
이제야 이유를 알게 됐다.
키리에가 그 도박장에 있던 이유를 알게 됐다.
그곳에 있으면 언젠가 에반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곳에서 버티고 있다 보면 에반에게 칼을 드리울 수 있을 테니까.
칼리안을 위한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울 만큼 플란츠에게 살의를 보였던 이유 역시 알게 됐다. 에반이 휘트린에게 했던 일을, 휘트린의 남편에게 했던 일을, 키리에 역시 알고 있었다.
"또 몰랐네. 나는."
또 몰랐다.
키리에 속이 왕궁의 숲처럼 헤집어지고 있었던 것을 몰랐으면서, 그것을 그리도 반성했으면서, 또 몰랐다. 그보다 더 큰 것을 눌러담고 있었음을 몰랐다.
키리에도, 그리고 히나도.
- 저는, 자상한 왕자님이랑, 좋은 왕세자님이, 몰랐으면 했어요. 알더라도, 나중에. 한참이 지나서, 다 같이 조금 더 어른이 되면, 그때 알았으면 했어요. 그래서 얘기 안했어요. 오빠한테도, 티내지 말자고, 제가 그렇게 말했어요.
칼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히나의 말이 이어졌다.
- 저는 늘, 최선을 다해서, 살았어요. 그런데 이제와서, 모르는 일들을 가정해서, 제가 살았던 시간이, 더, 불행했다고 단정짓고, 억울해하고, 아쉬워하고 싶지는, 않아요. 물론 부모님이 계셨으면, 더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몰라요. 힘든 일도 덜 겪고, 덜 울고, 키도 더 많이 컸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목소리 내는 법을, 잊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히나의 말이 맞았다.
만약 에반의 일이 없었다면 히나는 조금 다르게 살아왔을 것이다. 어쩌면 아주 많이 다르게. 지금과는 정말 많은 것이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 모르는 일이니까, 몰라요. 없었던 일이니까. 없던 일을 두고, 지금이 더 불행할 거라고, 멋대로 짐작하는 건, 그건 너무, 불행한 일이잖아요. 저는, 제가, 정말 열심히, 잘, 살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그냥 그렇게, 살고 싶어요.
히나는 그 자체로 생이었다.
칼리안의 생이었고 빛이자 이유였으나, 그것을 빼더라도, 전해지는 온기를 빼더라도, 이미.
- 자상한 왕자님은, 그냥 자상한 왕자님이고, 좋은 왕세자님은, 그냥 좋은 왕세자님이고, 저는 그냥, 저로, 오빠는 오빠로. 그렇게만 생각하면서 살거예요. 저는, 두 분도, 그 일을 지금까지 가져와서, 억지로, 불행하게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히나는 이미 오롯한 생이었다.
"우리 히나 다 컸네."
그래서 칼리안은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다.
기특한 자식새끼 혹은 손주새끼 취급에 어느새 이미 익숙해진 바람에, 히나 역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러다 퍼뜩 고개를 들곤 눈썹을 동그랗게 찌푸렸다. 그래서 칼리안도 아차 하는 얼굴이 됐다.
- 더, 클 거예요.
아.
그 문제가 아닌가보다.
자식새끼 혹은 손주새끼 취급에는 문제를 못 느끼는 모양이다. 너무 익숙해져서 아예 그냥 지나간 모양이다.
재밌다는 듯 다시 웃음을 터뜨린 칼리안이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알았어. 이제 가서 쉬어. 맛있는 것 먹고 잠도 자고 푹 쉬어. 고생 많았어."
고개를 끄덕인 히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나나, 귤, 딸기, 우유, 특히 고기, 무조건 안 된다고. 칼리안 뿐 아니라 이제 막 방으로 들어온 얀을 붙들어다 놓고 다시 한 번 신신당부를 했다. 그 뒤에는 얀이 등 뒤로 숨겨두었던 바나나 한 개를 야멸차게 빼앗은 뒤 얀까지 한바탕 혼내놓고는 밖으로 나갔다.
한숨을 푹 내쉰 칼리안의 눈길이 창 밖에 가 닿았다.
카이리스 왕궁의 세뉴 관 앞에 심겨진 것과 신기하리만치 닮아있는 가문비나무, 그 아래 앉아있는 사람 한 명, 고양이 두 마리, 그리고 키 큰 사람 한 명이 보인다.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얀의 목소리가 들렸다.
"뺏겨버렸네요."
아쉬울 것 하나 없다는 말투로 칼리안의 시선을 돌린 얀이 침대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칼리안이 덮고 있던 이불 주름을 펴 줬다.
"몰래 가져 올 생각 하나도 없었지, 너."
히나가 나가고 나서 들어와도 될 것을 일부러 히나 있을 때 들어왔다. 덕분에 칼리안이 더 이상 바나나 하나만 숨겨다 가져다 달라는 말도 못하게 만들어버렸지 않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퉁명스럽다.
평소 같았으면 울고불고 우리 왕자님 또 다쳤다는 둥 우리 왕자님 눈 뜨자마자 바나나 찾으셨는데 그걸 못 드려서 어쩌냐는 둥 다시 나가서 어떻게든 숨겨오겠다는 둥 했을 텐데 이번에는 달랐다.
또 다쳤으니까.
조심하라고, 다치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음에도.
"얀."
"왜요."
배는 고픈데 바나나도 못 먹고 히나한테 혼나자마자 얀한테 혼나고 있다.
쟤네 아빠한테는 무조건 비밀로 해야 한다고, 안 그러면 다누 뿌리 진짜 뽑힌다고, 다누 뿌리 뽑히면 카이리스 농사 다 망친다고, 플란츠가 이렇게 적당히 입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앨런한테까지 혼이 날 뻔했다.
"아······ 어떡하지."
이마를 감싸 쥔 칼리안이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잘못한 것이 맞긴 맞으니 억울하다 말도 못하고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만 커진다.
"얀."
"네."
"내 주머니 좀."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선선히 대답한 얀이 칼리안의 옷장을 여는 대신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검은 색의 마법사 주머니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잠들어있던 사이, 플란츠가 가져가 제 방에서 살펴봤나보다 하는 생각을 흘려 넘긴 칼리안이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성급하지 않게 그 속을 몇 번 뒤지다 무언가를 하나 꺼내 얀에게 건넸다.
"받아."
"뭔데요."
"선물."
"무슨 선물이요."
대구 먹으러 가던 길에 잠시 들러 산 물건이었다.
에일라에게 줄 비녀 하나, 그리고 얀에게 줄 선물 하나.
란델에게 준 것만큼은 아니겠으나 그래도 멋들어지게 포장해서 제 날짜에 주려고 했는데 지금 얀의 기분을 좀 풀어주려면 별 수 없겠다 싶어 꺼냈다.
"생일이잖아. 곧."
손에 들린 은색의 네모난 것을 내려다보는 얀을 향해,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뭔지 알아?"
"하모니카······ 요."
하모니카였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그저 숨을 쉬는 것만으로, 고작 그것만으로 음을 내고 음악을 만드는 악기. 숨을 쉬는 것에 선율을 내어주는 악기.
음을 내는 방법을 연습하지 않아도, 손을 짚는 방법을 배우지 않아도, 오로지 숨만 쉬면 되는 것이 마음에 들어서 배웠던 것. 베른이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유일한 악기였다.
"알고 있네. 혹시 다루는 법도 알아?"
"아뇨. 처음 잡아봤어요."
"내가 가르쳐줄게. 다 배우고 잘 불게 될 때까지 가르쳐줄게."
이렇게 말하며 하모니카를 가리켜보인 칼리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너 두고 어디 안 갈게. 어디 안 가고 내가 다 가르쳐줄게."
하모니카 붙들고 있던 얀의 손이 뚝 떨구어졌다.
큰 눈에 그렁그렁하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걱정한 만큼, 애를 태운 만큼.
"······ 하루에 하나씩만 배울 거예요."
"알았어."
"노래 연주하는 건 일 년에 하나씩만 배울 거예요. 평생 죽을 때까지 완전히 다 안 익힐 거예요."
"그래. 그렇게 해."
아직 입에 대보지도 못한 하모니카에 둥근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것을 보며 웃은 칼리안이 저보다 나이 많은 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키 내기 한 것도 안 잊어버렸어. 너보다 더 커질 때까지 잘 있을 테니까."
"저 평생 클 거예요."
"그래. 그것도 그렇게 해."
평생 자라난 새끼코끼리는 대체 얼마나 클지 모르겠지만. 뭐든 다 좋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후둑 후둑 떨어지는 눈물 방울 수 만큼 얀의 등을 토닥였다.
"그런데 이것도 미스릴이에요?"
"······ 아니. 그냥 대구 먹으러 가던 길에 산 건데."
"왕자님 너무하시네요. 저는 왕자님 탄생일 때 휘트린 영지에 별장 지어드렸는데요."
"······ 미안."
"실망했어요."
"돌아가면 더 좋은거 사 줄게."
"내년에요."
"그래. 내년에."
"그 다음에는 더 좋은 걸로요."
"응."
"또 그 다음에도요."
"알았어. 그렇게 할게."
이러다 한 80년 쯤 지나면 시종장에게 나라 하나를 사 준 국왕이 되어 있는 건 아닌가 진지하게 걱정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