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장. 가능하다면, 꿈은(6)
분홍빛 반짝이가 바삭거리며 부서졌다.
겉면을 살짝 코팅한 분홍색 설탕과 그 안을 가득 채운 바닐라 크림, 그리고 블루베리 잼이 곁들여진 촉촉한 빵이 함께 떠올려져 포크 위에 올라갔다. 달콤한 향이 확 퍼진다.
함께 둘러앉은 이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지에는 관심 없다는 듯, 아리안느는 블루베리와 산딸기로 장식된 분홍색의 작은 케이크를 음미하는 데에 온 신경을 썼다.
다디단 것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예쁜 모양새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아리안느에게 딱 어울릴 디저트가 아닌가. 함께 온 손님보다는 아리안느를 위해 체이스가 마음을 쓴 것일 테니 받는 입장에서 충분히 즐거워해주는 것으로 보답할 수밖에.
"맛있어."
"다행이네. 피곤하진 않아? 어제부터 계속 제대로 못 쉬었는데."
"단 거 먹어서 괜찮아."
이렇게 말하던 아리안느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아, 전하 혹시 나 나가라고 하는 말이야? 그럼 나갈게."
혹시나 자리를 비켜달라는 뜻으로 이야기 한 것인지를 묻는 말이었다. 곧바로 체이스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그런 것 아니야, 아리안느. 피곤한가 걱정돼서 물어본 거야. 안경을 썼기에."
"걱정 안해도 돼. 오는 길에 마차에서 계속 잤어. 벗어두고 오는 걸 깜빡해서 그냥 끼고 있는 거니까."
"그래."
아리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에서 반짝이도록 세공이 된 금 구슬과 노을 빛을 가득 담은 샴페인으로 장식된 안경줄이 흔들렸다. 한쪽에 달려있는 짙은 보랏빛의 깃털 모양 유리 펜던트가 안경줄에 부딪혀 예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둘과 함께 있던 또 다른 한 사람이 잠시 아리안느 쪽으로 눈을 돌렸다 체이스를 쳐다봤다. 서로를 걱정하는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든 모양새가 된 사람. 세르제인이었다.
"······ 때문에 이곳에 찾아오게 된 겁니다. 여러모로 문제를 일으킨 것에는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지금 아리안느가 체이스에게 평소와 같이 말을 내리고 있는 것과 체이스 역시 아리안느를 편안하게 대하는 것은, 세르제인이 본래의 모습을 한 채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날 세르제인과 신성기사들을 인계받은 아리안느는 그 길로 밤새 달려 다시 수도로 돌아왔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왕궁의 기사단에 신성기사들을 넘기기 위해서였다. 그런 아리안느에게 세르제인은 체이스와의 만남을 부탁했다. 단, 다른 사람들에게 눈에 띄지 않도록.
이야기를 들은 아리안느는 세르제인의 변장을 다른 것으로 바꾸도록 했다. 그렇게 아리안느와 함께 체이스를 만나게 된 세르제인은 아예 변장을 풀었다. 어차피 사실을 알고 있다 하니 무의미한 연극을 더 이상 계속 할 필요가 없던 까닭이다.
"그래서. 사석에서 나를 만나려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하께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얘기해요. 들을 테니."
"저에 대해 그리하셨던 것처럼 왕궁의 감옥에 붙들린 신성기사들도 모르는 척 해주셨으면 합니다. 다시 풀어준 뒤 없던 일로 해주신다면 그들을 조용히 처리하는 것은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체이스의 시선이 아주 잠시 아리안느를 스쳤다. 갑작스레 찾아온 세르제인이 숨겼던 것을 왜 먼저 털어놓고 사과를 건네는지, 이런 부탁을 할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분명 아리안느가 세르제인에게 조언을 했으리라.
"우선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왜 그들에 대해 내가 눈을 감아야 하는지."
"말씀드린대로 지금 저는 카이리스의 1왕자를 반드시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신성기사와 대치한 것이 텐실에 알려지면 저 뿐만 아니라 텐실 국왕 전하께도 위해가 갈 수 있습니다."
"그대를 경계하는 귀족들이, 그대가 혹여 이 일을 문제삼아 자신들을 공격할까 우려된다는 말입니까."
"네. 그래서 저는 그들이 저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다는 것을 '몰라야' 합니다. 제가 알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면 안됩니다. 카이리스의 플란츠 왕세자와 칼리안 왕자 측은 제가 다시 만나 이 일에 대해 묵과해주길 부탁해볼 수 있습니다. 만약 불만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 부분은 제가 반드시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렇다면. 세크리티아에 왔던 신성기사들이 갑작스레 죽은 것을 두고는 무슨 이유를 댈 생각입니까."
"제 편에 있던 기사들 역시 죽었습니다. 제가 엘프의 마을에 간 동안 서로간에 분란이 일어 좋지 않은 결과가 있던 것으로 해 두면 됩니다."
"서로 싸우다 함께 죽었다고요."
"그렇습니다."
신성기사들이 세르제인을 공격했으나 실패했음을, 그들의 정체를 세르제인이 알게 되었음을 확신하면 귀족들이 세르제인과 텐실의 국왕을 먼저 공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때문에 세르제인은 이 일을 그냥 묻어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세르제인의 호위기사들도 신성기사들도 모두 죽고 세르제인이 다른 티를 내지 않는다면, 세르제인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 귀족들도 섣부르게 움직이지는 않을 테니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당장의 대가를 약속드리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렇게 해주시면 향후 언제라도 반드시 보답을 하겠습니다."
"보답이라."
"물론 제가 지금 이 모습을 하고 있다 하나, 저 한사람으로서의 약속이 아니라 세르제인 왕세자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약속입니다."
"텐실에서 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을 텐데. 보답을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세크리티아의 선왕과의 일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무엇때문에 텐실에 적대적인 모습을 취하셨는지도 이미 잘 압니다. 저 뿐만 아니라 텐실의 국왕 전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속내를 알 수 없을 미소가 체이스의 얼굴에 그려졌다.
그것이 뜻하는 바를 읽어내지 못한 세르제인이 말을 이으려 할 때, 체이스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글쎄. 나는 텐실 왕가에는 큰 관심이 생기지 않는데."
다 늙고 힘없는 왕.
제대로 된 대리인도 내세우지 못해 한낱 호위기사에게 제 역할을 맡긴 왕세자.
"지금 당장 내세울 거래 조건 하나 없는 그들이 나에게 줄 수 있는 보답이라. 그것이 과연 얼마나 대단할까."
세르제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길다 할 평생을 바쳐 충성을 다한 왕가였다. 그들을 위해 체이스의 앞에 고개숙이고 부탁을 전한 것의 결과가 이런 모욕이었다.
그런 세르제인의 참담한 마음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란델 왕자를 만난다면. 그를 왕세자로 세우고 동맹을 요청하려 했습니까."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마음을 간신히 다잡은 세르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란델 왕자 외에는 텐실의 다른 왕족이 없는 까닭입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왕족이 아닌 귀족들 중에서는······ 국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춘 이를 찾기 어렵습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체이스가 다시 물었다.
"지금 나에게 그런 도움을 청하는 것은 그대의 생각입니까, 아니면 그 사이 누군가의 조언이 있었습니까."
"숲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자마자 곧바로 린 영애를 만났습니다. 그 사이 누군가와 그 어떤 접촉도 하지 않았음은 린 영애가 더 잘 알 겁니다."
"조언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나는 그것을 물었는데."
"······ 없었습니다. 제 판단입니다."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곁에 앉아있는 아리안느를 바라봤다. 어느새 주먹만한 케이크 한 접시를 다 비운 아리안느가 레몬 향 가득한 홍차를 마신 뒤 내려놓고 있었다.
"아리안느. 오늘 하루만 이 손님을 맡아줄 수 있을까."
잠깐 체이스와 세르제인을 번갈아 본 아리안느가 흔쾌히 답했다.
"알았어요. 전하."
체이스의 시선이 다시 세르제인을 향했다.
"고민할 시간을 주겠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거래 조건을 찾아온다면 원하는대로 텐실의 신성기사를 내어주겠습니다.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전하. 말씀드린대로 그것은······."
"나는. 텐실 왕가 말고.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세르제인이 체이스를 쳐다봤다.
웃음기도, 노기도 찾아볼 수 없을 고요한 보랏빛 눈이 세르제인을 마주했다. 그런 세르제인이 한참동안 대답을 하지 않자 곁에 있던 아리안느의 입이 열렸다.
"텐실 왕세자님 이름 말고 당신 이름 걸고 약속하라는 말씀이에요. 체이스 국왕 전하랑."
"텐실의 왕가에서도 당장의 약속을 드릴 수 있는 것이 없는데. 일개 기사라면 더더욱 힘들지 않겠습니까."
"우리 전하 '일개 기사'랑 거래하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두 사람의 대화에 일절 참견하지 않았다 하여 듣는 귀도 없는 것은 아니었던 아리안느가, 내일 날씨가 어떨지 예측해보는 정도의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당신 이름 걸고 텐실의 왕이 되면, 그땐 거래할 것이 생기겠죠. 텐실 국왕과 왕세자의 목숨이 더 중요하면 당신이 직접 그 사람들 지킬 힘을 가지면 되는 것 아니에요? 어차피 왕세자가 직접 왕위에 오를 길이 없어졌다면 왜 다른 나라 왕자 데려다 어려운 일을 만들어요? 카이리스 국왕님이든 칼리안 왕자님이든 란델 왕자를 그런 이상한 소굴에 보낼 것 같지 않은데. 그냥 당신이 해요. 그 나라 왕."
"린 영애."
"그렇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직접 왕위에 올라도 상관 없지 않아요? 어차피 텐실은 근본없는 나라인데."
칼 쓰는 사람이라 왕위에 관심 없던 이에게 욕인지 조언인지 모를 것을 건넨 아리안느가 체이스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악의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소리를 했는지 모르는듯한 아리안느를 향해 세르제인이 무언가 말을 하려 했을 때.
- 드드드드득!
방금 전 아리안느가 마시고 내려놓은 찻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렸다. 아리안느의 것 뿐만 아니라 체이스의 앞에 놓인 잔도 마찬가지였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세르제인의 홍차가 살짝 쏟아져 테이블에 흘렀다. 그러나 체이스도, 아리안느도, 세르제인이 차를 쏟은 것에 대해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누가 보아도 그것은 세르제인의 탓이 아니었으니까.
지금껏 묵묵히 체이스의 뒤를 지키던 테일란이 체이스에게로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체이스는 아리안느를 살폈다.
왕궁 건물이 미약하게 흔들리다 곧 잠잠해졌다.
지진이었다.
* * *
상상과 현실은 다르다.
괜찮으리라 장담했던 말을 믿지 말아야 했음을, 섣부르게 데려오지 말아야 했음을, 체이스가 아직 어리다 말하던 플란츠는 체이스보다도 더 어리다는 것을, 제 입에 담은 뒤에야 깨우쳤다.
두 번을 살아도 여전히 이렇게나 세심하질 못하다.
그것을 알려주기 위한 다누만의 방식이든.
아니라면 처음 언급한대로 경고를 원했든.
- 콰아아아아앙!
그 어떤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여놓는다 해도 칼리안의 짧은 인내심으로는 다누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땅에 서 있다 하여, 네가 감히 나를 우습게 본 것이냐."
"당신 숨결 하나로 죽여버릴 수 있는 인간이라 해서, 당신이 감히 나를 우습게 본 겁니까."
"이 땅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하였거늘."
"나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 겁니다."
"나에게 맞서는 네 자만이 지나치구나. 시스파니안이라도 찾아와 네 편을 들어주리라 믿는 것이냐."
"시스파니안은 안 옵니다."
찾아와서 말리지 않길 바라리라는 것을.
시스파니안은 이미 이해하고 있을 테니까.
"열어주지 않는다면 이 참에 세렌티 얼굴이나 보고 올 생각입니다. 볼 땐 보더라도, 한 가지는 하고 갈 겁니다."
붉은 빛이 또 한 번 세상을 메운다.
"천고가 지나도 낫지 않는 상처. 똑같이 새겨놓고 갈 겁니다. 내가. 당신에게."
진득한 피 냄새가 다시 치민다.
붉은 빛이 또 한 번 세상을 뒤흔든다.
* * *
온 세상을 비춰내던 별이 저물기 시작한다.
별빛 하나로 혼연하던 세상에 색이 깃든다.
꿈 속에서 본 별빛을 왜 칼리안과 연관지었을지, 혹시 꿈에서 무언가를 보았으나 저도 모르게 기억 저 편으로 밀어내고 별빛만 기억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지. 미처 생각을 마치지 못했던 꿈에 대한 의문을 이제라도 다시 따져볼까 하다가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리고 그저 지켜봤다. 온 시야를 가득 메우던 별의 장막이 서서히 거두어지며 드러나는 것을. 장막 너머의 또 다른 세상을.
그래.
'참극'이라 일컬어진 그 모습을.
빛을 밟고 있던 발이 어느새 가는 자갈을 디디고 서 있었다. 그 언젠가 보았던 이곳의 하늘은 그리도 청명하였으나 지금은 피를 머금은 듯 검붉은 하늘만이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직접 본 적 없던, 굳게 닫힌 외성문을 이렇게 보게 되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방에 가득한 피비린내, 그리고 검은 재가 내뱉는 탁한 내음이 느껴졌다. 실로 선명하게.
"이것을 궁금해하진 않았는데."
자조섞인 웃음 끝에 낮은 목소리가 더해진다.
저 앞 어딘가. 떨어져 있어 자세히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종막이 보였다. 그를 따라 함께 추락한 머리카락이 보였다.
저 모습을 '내'가 그렇게나 눈에 담았나.
그래서 세상이 온통 푸른 은빛이었나.
떠오르는 생각을 다시 한 번 접었다. 곱게 접었는지 구겨 접었는지 모르겠으나 갈무리는 했다. 그러자 멈추지 않는 생각의 꼬리에 또 다른 의문 하나가 얽매여 떠올랐다.
'왕관에, 왜. 자수정을.'
체이스의 즉위식 날 문득 들었던 의문.
왜 하필 그런 빛의 보석이었을지. 귀하고 값비싼 보석도 아니고 루비도 아니고 체이스의 눈보다도 현저히 옅은 보라색의 보석을, 하필 왜 그것으로 왕관을 장식했는지.
이유없이 떠오른 의문의 답을 알 것 같아서.
이제는 그 답을 알 것 같아서. 딱 열 걸음만 더 앞으로 걸어가면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딱 열 걸음만 앞으로 걸어가면 보일 것 같아서, 잠시 물렸던 발을 천천히 내밀었다.
그러다 그 발을 또다시 돌려놓고 말았다.
- 보이지도 않는 길에 뭐가 있는 줄 알고 그렇게 가십니까. 겁도 없이.
어느새 떠오른 목소리가 발길을 붙든 탓이다.
란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날에 건네졌던 말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으려니 쓸데없는 참견 말고 피망이나 먹으라며 그리 말했다.
"······ 겁이 없었던가."
아니다.
갈팡질팡 머뭇거리는 이유를 기억의 편린 속에서 찾아 꺼내들었지 않나. 고작 열 걸음을 나서지 못해서 가지 말라는 말을 핑계처럼 찾아 떠올리고 있는 것을 두고 어찌 겁이 없다 할 수 있을까. 그러니 겁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다.
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새끼였기에 그렇게 건방지게 잘 짖는지. 겁이 나는 와중에도 그것 하나가 궁금하여서. 아마도 이유는, 그뿐이라.
어차피 동생 놈 말은 안 듣겠다고 다짐한지 오래였지 않나. 때문에 겁이 나든, 앞길이 캄캄하든, 궁금한 것부터 확인해보아야 할지. 아니면 오랜만에 동생 놈 말을 잘 듣고 있어야 할지. 그것을 고민하고 있을 때.
- 저벅.
플란츠의 것이 아닌 또 다른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열 걸음 앞 말고 바로 뒤에서.
숨길 것 없는 사람. 바닥에 흩어진 청은빛 머리카락을 지녔던 이 말고 너무 가까워 느껴지지 않던 그 누군가. 그의 발걸음 소리였다.
- 저벅.
멈추지도 않겠으나 어차피 돌이키지도 못할 발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먼 곳을 향하던 시선을 다급히 바닥으로 내린 플란츠의 눈에 그 누군가의 구두 끝이 보였다. 알 수 없을 이들의 생명으로 얼룩진 망토의 끝자락이 보였다. 그것을 확인한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간신히 올라갔다.
"참극을 보여주겠노라 하더니."
그래서 참극이라 하였나.
고작 열 걸음 밖에서 저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고작 열 걸음 밖에서 제 마지막을 지켜보던 이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을 테니. 잊지 못하고 있을 테니.
"그래서."
이것을 두고 참극이라 하였나.
아니라면 이제부터 벌어질 일이 참극인건가. 도대체.얼마나.더. 참혹하기에. 그것을.이제와.이렇게.
그래서.
"······ 어쩌라고······."
이제와 나에게 무엇을······ 어찌하라고.
눈을 감았다.
그 얼룩진 망토의 주인이 누구였을지 확신하지 않기 위해서.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이 지닌 눈이 무슨 색이었을지 눈치채지 않기 위해서. 그 얼굴에 그려진 표정이 어땠을지 가늠해보지 않기 위해서. 그 눈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않기 위해서.
내딛을까 내내 고민하던 발을 온전히 땅에 댔다. 손을 들어 두 귀를 막았다. 더 이상 듣지 않으려 그리 하였다.
- 아무도 없는데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벌써 지켜야 할 줄은 생각지 못했던 약속 하나가 떠오른 탓에.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그 자리에 멈췄다. 그 어떤 것도 보고 듣지 않으려 애를 썼다. 잊어버리는 것 모르는 머릿속에 그 어떤 것도 담아두지 않으려 애를 썼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이가 플란츠를 지나쳐 저 멀리 앞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지 않았다. 외성 앞에 누운 이에게 다가간 그가 무엇을 할지, 그 걸음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 그 걸음 끝에서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그 이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그토록 애를 썼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 오라고. 빨리."
아직은 꿈꾸지 않기로 했으니.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하니까.
그것을 간신히 떠올린 까닭에.
오래도록 애를 썼다.
"네."
그러다 문득, 피 냄새가 났다. 느껴진 것이 아니라 정말로 피 냄새가 났다. 정말로 바람이 불었다. 정말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데서 쭈그리고 앉아 뭐 하십니까. 형님 간식 받아먹을 고양이도 없는데."
빛이 저물고 색이 들어섰던 곳에 그림자가 졌다.
비로소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창백하게 질린 동생 놈이 제 피 냄새를 또 풀풀 풍기면서.
"돌아가죠. 완두콩 농사 다 망하기 전에."
얼굴을 보자마자 짖고 있었다.
온 세상을 다 가리고 선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