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40화 (341/527)

제60장. 가능하다면, 꿈은(5)

르니에리.

새하얀 드레스를 이룬 겹겹의 치마자락이 바람에 팔락이는 듯한 모양을 가진 꽃. 일 년에 단 하루를 피고 지는 새하얀 꽃. 지고 난 뒤에도 쉬이 물러나지 않는 향기를 가진 꽃.

독하디 독한, 아름다운 꽃.

"형님이 태어나고 한 달 뒤에 아이샤 왕비가 병사했지."

"그리 들었습니다."

"사실은 독살이었고, 그 일을 저지른 것이 내 어머니라 했었는데. 맞나."

실리케가 죽은 이후 칼리안이 전해주었던 이야기. 그 말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서 재확인하듯 입에 담는 것은 아닐 터였다.

"네."

그래서 칼리안은 차라리 다른 표정 없이 짧은 대답만 했다.

그리고 플란츠가 잘 모를 수 있을 이야기를 알려줬다.

"어머니와 휘트린이 가족 관계에 있던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에게는 동생 한 명이 있고 휘트린은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집의 대문 위에 적힌 이름들이 정확히 누구의 것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프레이야와 휘트린이 자매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시오나 힐, 그 소드마스터와 어머니. 그리고 휘트린까지. 꽤 친한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 후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어머니께서 휘트린이라는 이름을 자신의 성으로 쓰면서 궁에 들어오셨고요."

엘프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성을 사용하지 않았고 프레이야 역시 성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프레이야는 친구의 이름을 자신의 성으로 썼다.

칼리안의 말에도 플란츠는 다른 표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을 가만히 있다 나지막한 소리를 냈다. 건조한 목소리가 먼지 가득한 방을 조금 울린다.

"아이샤 왕비가 사망한 그 해 겨울에 프레이야 왕비가 후궁이 되고, 얼마 뒤에 내 어머니가 왕비의 자리에 올랐었지."

"네."

"그럼. 히나······ 는."

서고에 쌓인 흔한 역사책의 연표를 읽듯 이어지던 말이 잠깐 멈췄다.

"6월입니다. 히나 태어났을 때가."

칼리안의 어려운 말을 플란츠가 뚝뚝 잘라내줬던 것처럼, 칼리안 역시 플란츠가 모든 말을 꺼내기 전에 대답을 전했다.

플란츠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 모습을 보며 다시 몇 번 책상을 두드려보던 칼리안이 똑같이 먼지 쌓인 목소리로 말했다.

"휘트린의 남편이 아이샤 왕비의 독살에 연관됐든 단순히 알게 됐든, 편지 내용을 보아서는 아이샤 왕비의 일에 대한 입막음을 위해 살해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만."

마지막 한 글자를 조금 더 힘주어 말한 칼리안이 하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아이샤에게 갈 독을 준비한 사람은 레넌이었고 레넌을 부린 것은 에반이었습니다."

"그래서."

"실리케가 독을 건넨 건 아이샤 왕비가 처음이었다 했었습니다. 정황 상 휘트린의 남편을 살해한 사람은 에반이었다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실리케가 아니고요."

"······ 내 아우님께서 어쩐 일로 내 어머니를 두둔해주시는지."

"세 명이 아니라 한 명 죽였다는 말이 두둔으로 들리십니까."

"아니라면, 다행이라 여기라는 소리인가."

"사실이 그렇다는 겁니다.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그 당시의 실리케라면, 뒷일까지 직접 관여했을 리 없다. 에반이 그렇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 에반은 실리케를 믿지 않았으니 아직 그런일에 '서툴렀을' 실리케에게 뒷처리를 맡겨두었을 리 없다. 에반이니까.

"물론 실리케는 많은 이들을 죽였습니다. 데블란만큼은 아니라 하나 그 숫자를 두고 저지른 죄의 경중을 비교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죠. 잘못을 한 것은 맞습니다."

플란츠의 눈이 다시 잠겨든다.

또 잠겨든다. 르니에리에.

"하지만 그렇다 해서 명확하지 않은 사건까지 전부 실리케의 짓이라 둔갑시키고 뒤집어씌울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평생이 가도 르니에리 향기를 완전히 잊지는 못할 플란츠다. 머리가 너무 좋아서 못 까먹는다.

편지를 보는 순간 이미 그 지독한 향을 다시 맡기 시작한 완두콩한테 히나와 키리에가 부모를 잃은 것은 형님 네 탓이 아니다, 너랑 관련없다 말해봐야 아무 의미도 못 될 것을 안다. 애초에 그것은 칼리안이 판단할 수 있는 범위의 것도 아니었다.

"카이리시스로 가면 시오나를 만나게 될 테고 이 일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알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제가 생각한 것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내가. 얘기하지."

키리에와 히나에게.

그들의 부모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에 대해서.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책임은 질 수 있어. 사과는 못 해도."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일로 부모를 잃은 것은 키리에와 히나였다.

브리센이 지은 죄를 두고 플란츠에게 은원을 따질지 말지는 키리에와 히나가 결정할 몫이다. 그러니 플란츠는 브리센을 대신하겠다며 멋대로 사과할 수 없고 칼리안은 간섭할 수 없다.

휘트린이 남겼다는 편지는 어떻게 전달받았는지, 키리에가 아버지를 닮고 히나는 어머니를 닮았다던 그 말을 누구에게 들었는지, 에반의 도박장에 붙들리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두 남매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 프레이야 휘트린.

그 이름의 의미를, 히나는. 키리에는. 정말 몰랐는지.

묻지 않았기에 알지도 못하는 칼리안은 이 일의 당사자도 아니었으니까.

칼리안이 해야 할 일은 그저 키리에와 히나가 마음을 심하게 앓지는 않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실리케를 몰아내기 위해 플란츠와 손을 잡았을 때 그러했듯이 '형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쓰지 않음으로 당장의 플란츠를 배려해주는 것 정도일까.

"내 아우님께서 또 걱정이 크신 모양인데."

"네."

"됐어. 익숙해. 앞으로 뭐가 얼마나 더 드러난다 해도 상관 없어."

눈 내리는 작은 세상을 손 위에 두고 보는 것마저 브리센의 악행과 연결되었던 생을 살았다. 암살자의 비수에 해를 입으면 그것마저 브리센의 수단이 될까봐, 제 목숨 스스로 잘라낼 칼을 베개 밑에 두고 잠드는 생을 살았다. 그런 숨막히는 날에 익숙해져서 살았다.

플란츠의 얼굴을 잠시 지켜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뭐가 익숙하고 뭐가 상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뭐든."

칼리안은 입을 열지 않았다.

에반의 손가락 발가락 뼈 마디 하나하나를 다 끊어내어 죽이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는 소리가 입 밖으로도 새어나올 것 같아서.

그렇게 한참동안 애먼 편지만 들여다보던 칼리안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냈다.

"헤르츠 경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래층."

"내려가시죠. 우선 돌아가는 게 낫겠습니다."

"어머니 나무 만난다며."

"나중에요."

"왜 또 미루는데."

"지금은 형님 꿈 꾸시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급하다면 저 혼자 다시 와서 만나겠습니다."

대답없는 플란츠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가능하다면, 꿈은 나중에 꾸십시오. 또 혼자 멋대로 다 알아내버리지 마시고요."

"아우님께서 또 내 일에 참견을 하려 드시는군."

"······ 형님 일 아니라 저와 관련된 일입니다. 참견이 아니라 보호하는 겁니다."

"누가 누구를."

"내가, 형님 너를."

"너. 말버릇."

"없습니다."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에 들린 종이뭉치와 프레이야의 초상화, 셋 모두가 그려진 초상화를 모두 마법 주머니 속에 보관한 뒤 품에 넣었다.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칼리안은 다 익으려면 한참 먼 도토리열매 꼭지같은 그 정수리를 내려다보다 말했다.

"형님이 속앓이를 하든 헤르츠 경이 또 술처먹고 빌헬름 관 대신 세렌티 신전 앞에 대자로 누워있든 다 감안하고 내막이나 빨리 알아서 뭐가 문제였는지 제대로 알아내는 게 낫겠다 싶었는데 지금은 안되겠습니다."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불만 가득한 그 얼굴을, 칼리안은 신경 안 썼다. 플란츠가 또 르니에리 속으로 또 혼자 또 기어들어가 있는데 얼굴 찌푸린 게 뭔 대수인가.

"다누 뿌리를 캐든, 캐다가 반쯤 죽어서 그냥 아예 세렌티를 만나고 오든. 어떻게든 제가 혼자 알아내면 되겠죠. 형님 지금 형님이 몇 살인지 그 좋은 머리로도 홀랑 까먹으신 것 같은데 어르고 달래고 간신히 파릇파릇하게 만들어 놓은 완두콩 또 시들다 삶아지고 절여지는 꼬락서니 보느니 그냥 제가 혼자 올 겁니다. 형님이 혼자 익숙했던 것 다 까먹을 때까지 저도 저 혼자 다 해먹을 겁니다."

저 동생 새끼가 이제 대놓고 콩을 찾는다.

폭언 아닌 폭언에 칼리안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긴 한숨을 쉬었다.

칼리안이 그렇게 숨기려던 것을 기어코 들춰내고, 화내라 원망해라 그렇게 다그쳤으면서 정작 플란츠는 그러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말임을 안다. 화를 내든 억울해하든 아픈 것을 밖으로 꺼내놔야 새살이 찰 자리가 생길 텐데, 그동안 그나마 조금씩 꺼내놓던 것도 이번 일을 마주하자마자 다 잊어버리고 다시 꽁꽁 감춰두려 하니 저러는 것이다.

익숙했던 기억에 다시 치여서, 저도 모르게 그 때로 돌아가버린 바람에. 겉으로 꺼내놓는 대신 체념이라는 것으로 잘 포장해서 꾹꾹 되삼키려 하는 바람에.

"알았어. 돌아가."

"네."

"다시 와. 같이."

"싫은데요."

"아직은 아닌데. 나중에. 괜찮아지면."

칼리안이 대답 대신 플란츠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알아들었으니까."

"거짓말."

"반말. 말버릇. 좀."

짜증섞인 목소리에도 큰 신경 안 쓸 칼리안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보다 방 밖으로 걸어나갔다.

플란츠도 몇 걸음을 뗐다.

그리고 방금 전 칼리안이 걸어나간 길을 따라 문을 나섰다.

그런데.

- 파아아아앗!

눈부신 빛이 일었다.

전날 세르제인과 아델리아를 홀연히 데리고 사라졌던 그 때처럼 사방에서 섬광이 뻗어나왔다.

도무지 눈을 뜰 수 없을 밝은 빛에 버티지 못한 플란츠가 결국 눈을 감았다. 저절로 감겨드는 눈꺼풀 사이로 칼리안이 뒤로 돌아서는 것이 보였으나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감긴 눈 너머에서 쏟아지던 빛이 잠잠해진 것을 느낀 플란츠가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꿈.

그날 아침에 꾸었던 꿈. 아무것도 없이 그저 빛 뿐인 곳을 홀로 떠돌던 꿈.

그 꿈속에서 마주했던 것을 다시 보게 되었다.

잠시 손을 뻗어보던 플란츠가 앞으로 한 발을 내딛으려 하다 멈췄다.

- 너의 생이 빚어낸.

귓가를 맴돌던 바람이 말을 전했다.

플란츠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 꿈처럼.

아무도 없이 그저 빛 뿐인 공간. 그런 곳에.

- 참극을 보라.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음을 안 까닭에.

"······ 칼리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꿈처럼.

* * *

칼리안이 조용히 눈을 내리떴다.

미네시아스.

얼음 속에 갇힌 보랏빛의 꽃이 눈에 들어온다.

"······ 다누."

빛이 저문 뒤 눈을 뜨니 익숙한 곳에 서 있었다.

처음 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밟고 서 있던 곳. 다누가 그곳으로 칼리안을 옮겼다.

누군가 황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플란츠의 발소리와는 다르다. 아르센일 것이다. 그렇다면 플란츠는.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처음 칼리안과 만났을 때의 다누는 이렇게 굴지 않았다. 대장로 나르잔을 통해 칼리안과 만나기를 먼저 청했고 칼리안이 찾아갔다. 그리고 만났다.

이번에도 다누를 만나러 찾아온 것은 맞다.

하지만 만나지 않고 돌아가겠노라, 아직은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으니 다시 오겠노라. 그런 말을 나눴다.

찾아온 이유를 모르지 않을 다누일 테니 방금 주고받은 그 대화를 듣지 못했을 리도 없다.

- 알아야 할 것이 있으니.

칼리안의 생각을 증명하듯.

다누가 대답을 전해왔다. 신기하게도.

- 그리하여 불렀다.

곁으로 다가온 아르센이 무어라 말을 건넸으나 제대로 듣지 못했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숨을 들이쉰 칼리안이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켜보였다.

엘프 마을의 밖.

그곳으로 나가 있으라고. 그리 전했다.

실수로 아르센을 죽여버리면 안 되니까.

칼리안의 얼굴을 본 아르센이 몇 번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이제 마을 안에 그 누구도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한 칼리안이 다시 물었다.

"무엇을 알려주려 그냥 돌아가려던 사람을 강제로 붙들었습니까."

"결과."

어딘지 모를 곳에서 답이 들려왔다.

"무슨 결과요."

"선택의."

"선택이라니, 그게 무슨."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 한 켠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나지막이 물었다.

"······ 시간의 축을 사용한 것이 플란츠 형님입니까."

"그가 선택했지."

칼리안은 그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더는 궁금하지 않았던 문제니까.

이제 궁금했던 것은 이유였을 뿐, 누구였는지는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시간의 축을 사용하겠다 선택한 것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까. 내 형님에게."

"그렇다."

"그 결과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 망가지고 뒤틀려 멈추어버린 곳."

"시간의 축이 돌아간 뒤. 지금 내가 사는 이 곳이 아니라, 베른이 죽고 난 뒤. 시간의 축이 움직이고 난 뒤의 세상을 말하는 겁니까."

"그래."

붉은 눈동자가 다시 아래를 향한다.

다누의 말이 이어졌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벌어졌다. 시간이 되돌아갔다. 죽음을 거스르고 모두가 다시 살아났다. 그 날은 그대로 남겨지고 모든 것이 멈췄다. 뒤틀렸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

"우리가 알고자 했던 것은 결과가 아니라 원인입니다."

"보여주고자 하는 이유는 경계를 위함이다. 벌어진 일의 결과를 똑바로 보고 제대로 서도록."

다누가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이해했다.

칼리안이 플란츠를 이해한 것과 같이 다누가 벌인 일을 납득하고 받아들였다는 소리가 아니다. 다누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들었다는 정도의 의미를 가진 '이해'다.

지금 다누는 시간의 축이 돌아간 이후의 세계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 일로 어그러진 모든 것을.

플란츠가 왜 시간을 거스르려 했는지 말고, 시간을 거스른 뒤의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그 날의 형님이 선택했던 일의 결과를 지금의 형님에게요. 같은 일을 벌일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요.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애한테요."

"결국 같은 사람이니."

"탓하시는 겁니까."

"경고와 조언일 뿐. 방황이 오래가지 않도록. 제대로 서도록."

"말 장난 잘하시네요. 탓하지 않는다면 경고할 필요도 없고 조언할 일도 없는 것 아닙니까. 결국 탓하고 있기 때문에 그럴싸한 핑계 대고 엉뚱한 어린애 불러다 혼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보여줘가면서. 네가 잘못했으니 이번에는 하지 말라고. 같은 짓 벌이지 않아야 하니 방황하지 말고 정신 빨리 차리라고. 그게, 탓하는 것이 정말 아닙니까."

다누는 미래를 본다. 과거를 안다. 현재를 산다.

그러니 우려하고 염려할 수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안 좋은 미래를 막고자 할 수 있다.

"그 일이 있었을 때 당신은 관조했지만 나에게는 순응하지 않아도 된다 말하고. 그저 관조했던 당신은 내 형님에게 경고를 전하고. 그런 겁니까."

칼리안이 더 머뭇거리지 않도록, '과거'에 이별을 고하고 마음을 다잡아 쓸데없이 더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어차피 다 지난 일이었으니 이제는 잊고 살도록.

그리하여 앞날을 제대로 대비할 수 있게끔.

플란츠가 더 손놓고 있지 않도록, '과거'의 일을 기억하고 제대로 된 이유가 있는 책임감을 가지도록. 다시 나타난 시간의 축에 이제는 두 번 다시 손을 대지 않도록.

그리하여 같은 일을 다시 반복하지 않게끔.

그래서 칼리안에게 했던 일을 플란츠에게도 한 것이다.

그래. 할 수 있다.

그래. 인간이 아니니까.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이 다누의 방식일 뿐이니까.

"······ 왜요."

* * *

그래서.

어쩌라고.

* * *

그래서. 어쩌라고.

그것이 다누의 방식이라 해서. 뭘. 어쩌라고.

"당신이. 왜요."

키리에와 히나의 부모를 죽인 에반 말고.

카이리스 3왕자의 모친을 죽인 실리케 말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된 옛칼리안의 둘째 형 말고.

어머니 나무가 탓하고 있는 그 사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죄를 저지른 그 사람. 미친 왕 플란츠.

그리고.

그 사람이 저질렀으나 저지르지 않은 죄의 피해자.

"······ 나."

그의 죄를 기억하는, 잊지않은, 살아있는, 숨 쉬고 있는.

단 한 사람.

유일한 피해자. 그 사람을 탓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나."

그래. 나.

"내가."

그런 내가.

다누든 시스파니안이든 세렌티든 다 꺼지고, 내가.

"상관없다고 했잖아······ 내가."

칼리안의 앞에 붉은 검이 떠올랐다.

그 옆에도, 또 그 옆에도.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진 검이 떠올랐다. 끝을 모르는 것처럼 떠오른 붉은 검이 한계를 모르는 것처럼 수를 불려나갔다.

수십, 수백의 붉은 검이 허공에 머물렀다.

버거울만큼 붉은 검이 온 사방에 가득했다.

주제넘게 끼어든 태고의 존재.

- 하지만 너는. 이번에는. 네가 무엇을 알게 되더라도. 순응할 필요 없으니.

- 그건.

원치 않은 배려 때문에, 심장 한 조각 남기지 않아도 좋을 만큼 화가 차올라서. 치미는 핏덩이에 아랑곳않고 화를 냈다.

- 그건 제가 알아서 결정하겠습니다.

과거 다누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화를 냈다.

"······ 그냥 살겠다고 했잖아. 내 형님 그 새끼가 그때 그 새끼랑 같은 새끼든 다른 새끼든 같은 짓을 또 하려고 들든 말든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잖아. 상관없다고 했잖아. 내가. 내가 상관없다고. 했잖아."

원치 않은 배려에 대한 분노가 살의를 머금는다.

붉은 빛의 비가 쏟아져내렸다.

땅을 향해 내리꽂혔다.

"상관없다잖아! 내가!"

죽음을 건너와 삶을 살고 있는 이의 붉음이 검은 밤을 가른다.

- 콰아아아아앙!

대지가 울렸다.

대지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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