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39화 (340/527)

제60장. 가능하다면, 꿈은(4)

조막만한 손이 움직였다.

유리병 안을 살살 뒤적이던 손가락이 노란색 사탕 하나를 찾아 집어들었다. 그 뒤 리리에는 손에 든 것을 곧바로 입에 넣는 대신 잔뜩 집중한 얼굴을 했다. 사탕의 냄새를 맡아보거나 투명한 사탕 속을 들여다보기도 해 가며 무슨 맛일지를 맞춰보려는 것이다.

"라벤더 맛일거야."

더할 나위 없을 진지한 목소리 때문에, 곁에 있던 시오나가 피식 웃었다. 그 소리를 들은 리리에가 사탕을 내밀어보이며 말했다.

"아닌 것 같아?"

"그래."

"그럼 무슨 맛 같아?"

"딸기인 것 같다."

"왜 딸기야?"

"엘프의 직감이다."

"시오나는 그런 능력 없댔잖아."

"그렇다면 검사의 직감이라 해 두지. 그러는 넌 왜 라벤더인가."

"그냥. 얼마전에 먹은 라벤더 맛 과자가 생각났어."

"그런데 그건 맛이 아니라 향이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야. 라벤더 향도 나고 맛도 났어."

"그렇다고 해 두지. 하지만 그 전에 먹었던 사탕들 중에 꽃 향기 맛이 없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이전에 없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없으리라고 장담하면 안돼, 시오나."

플란츠와 아르센의 나이 차이보다 곱절은 더 많이 벌어지는, 다시 말해 거의 서른 살 정도의 나이 차이를 거뜬히 뛰어넘은 이들의 대거리가 오갔다.

"이전에 없었으니 앞으로도 없을 가능성이 높은 것 아니겠나."

"아니야. 생기지 않은 일을 그렇게 쉽게 단정지으면 안 된다고 드미레아가 그랬어."

그러니까 지금, 공작 부부가 만들어다 준 사탕이 무슨 맛인지를 가늠해보던 대화가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중한 담론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 맞다.

"예전의 일만 가지고 부정적으로 판단하다 보면 한계가 생긴댔어.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는 시스파니안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어. 그러니까 이건 라벤더 맛일 수도 있는 거야."

시오나의 황금색 눈이 리리에를 응시했다.

십 년도 채 살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그런 말을 해 준 드미레아나, 그걸 또 제대로 알아듣고 사탕 맛 맞추는 것에 응용해보는 리리에나.

"그래. 내 생각이 짧았다."

브리센의 모든 이들이 잔혹했다 하여, 파도 앞에 서서 하염없이 바다를 보던 사람이나 유리병 속 사탕의 맛을 맞춰보려는 사람의 미래 역시 그러하리라 장담해선 안되니까.

브리센의 과거 행적들로 말미암아 자신도 그렇게 자랄 것이라는 선을 그어놓지 않도록 일러준 드미레아. 브리센의 혈육이라는 겉모습만 보고 자신의 속도 똑같을 것이라 체념하지 않도록 겉과 속이 다른 사탕을 선물해 준 슬레이만과 세리에.

"라벤더 맛이 나진 않을 것이라 확신했는데 그러지 않도록 하지."

그들이 리리에에게 애써 전해 둔 것을 말싸움에서 지기 싫다는 자존심 때문에 망칠 수는 없어서, 시오나는 선뜻 사과를 건넸다.

밝게 웃으며 사과를 받은 리리에가 사탕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온통 찌푸린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둘 다 틀렸어. 덜 익은 배같은 맛이 나, 시오나."

꽃 향기 맛의 사탕이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지만 다 익은 과일 맛만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나. 무엇 하나 함부로 예측하기 힘든 사탕의 떫은 맛을 본 리리에는 오늘도 한 가지를 배웠다. 물론 시오나도 피차일반이다.

곧 시오나가 어색하게나마 손을 들어 리리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후작저에서 발견됐고 이제는 코끼리 일가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한 리리에가, 다 익지도 않은 떫은 배를 언제 어떻게 먹어보았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았다.

- 달칵.

그렇게 한 명의 어린 인간과 한 명의 다 큰 엘프가 사탕 하나를 놓고 삶의 진리를 주고받다 잠시 투닥인 뒤 화해를 마쳤을 즈음 응접실 문이 열렸다. 그러더니 키가 큰 사람 한 명과 키가 더 큰 사람 한 명이 들어왔다.

"리리에."

덕분에 비교적 작아보이는 키 큰 사람이 리리에의 이름을 불렀다. 이 집의 소가주이자 리리에의 어엿한 보호자인 드미레아였다.

드미레아의 얼굴을 본 리리에가 벽에 걸린 시간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습 시간 됐어, 시오나."

"그래. 곧 내려가서 함께 봐주지."

"칼 들어도 돼? 배 다쳤잖아."

리리에의 작은 손가락이 시오나의 배를 가리켜 보였다.

시오나가 이 집에 있었고, 슬레이만이 카이리시스에 돌아왔다. 그리고 시오나는 지난 가을에 만났을 때와는 달리 상처가 모두 나아 완전히 건강해진 상태였다. 그랬으니 당연한 수순이 이어졌다. 소드마스터간의 대련이라는, 매우 호전적인 인사 말이다.

물론 시오나가 졌다.

꿰뚫리거나 장기가 손상된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꽤 큰 상처를 입은 채였다.

- 이 정도는 걱정 말게! 내가 지난 번에 카스트린 그 작자와 겨룬 뒤에 죽을 뻔했을 때에도 금방 낫게 해 준 사람이 왕궁에 있으니까.

솜씨 좋은 치유사를 염두에 두고 공격을 굳이 물리지 않았던 슬레이만이, 자신의 안배를 기특하게 여기듯 호탕하게 웃었었다.

- 없습니다만.

- 누가, 발칸의 그 치유사 말이냐?

- 네.

- 관뒀어?

- 세크리티아에 가 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만드신 겁니까. 피가 많이 나는데요.

- 아니, 없으면 없다고 말을 해 주지 그랬느냐.

- 모르셨으면 모르셨다고 말씀해주시지 그랬습니까. 아버지는 그런 소식도 안 듣고 뭘 하고 사셨습니까.

- 사탕 만들었지.

- 겨우내내 사탕만 붙들고 사셨습니까.

- 아니지. 세리에랑 같이 매일 얀 산책도 시켰다. 얀이 이번에 내 바이올린을 다 물어뜯어놔서 그것도 새로 맞췄고. 그 놈 물어뜯는 버릇이 도통 고쳐지질 않는데, 아무래도 이름을 잘못 지었나보다. 내새끼가 내새끼를 쏙 닮아서 그렇게 말을 안 듣나.

- 그러니까 개한테 왜 오라버니 이름을······.

거기까지.

피가 솟구쳐서인지 아니면 혈압이 솟구쳐서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시오나는 그 태평한 부녀의 대화를 더 듣지 못하고 졸도했다.

다쳤던 날의 기억을 떠올려보던 시오나가 욱신거리는 배의 통증을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리리에를 향해 침착하게 대답했다.

"칼 안 들어도 그 쯤은 봐줄 수 있다."

"그래. 좋아. 오늘은 처음으로 찌르기 연습할 거니까."

"찌르기를?"

저도 모르게 이렇게 묻던 시오나가 얼른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알겠다. 잘 배우고 있도록."

"응. 이따 봐."

지그프리드가 사용하는 검은 찌르기를 위한 용도가 아니었다. 부수거나 베어내기 위한 무거운 검이니까. 그래서 종종 잊곤 하는 것이다. 손을 흔들어보이며 나간 아이의 머리카락이 무슨 색인지, 아이가 누구의 검술을, 어떤 검을 배우게 될 지에 대해서.

"칼 조심하고."

"어차피 나무칼이잖아."

"그래."

시오나가 손을 들어 리리에의 인사에 화답했다.

그렇게 리리에가 드미레아와 함께 밖으로 나간 뒤, 시오나의 시선이 응접실에 들어섰던 다른 한 명을 향했다.

짙은 와인색의 머리, 갈색 눈.

드미레아의 곱슬머리와 많이 다른 짧은 생머리의 중년 여성. 창술의 대가라 알려진 비먼 킨즈 변경백의 둘째 딸이자 슬레이만의 아내이기도 한 사람.

바로 세리에였다.

"상처는."

딱 달라붙는 검은 블라우스와 바지 위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석류색의 긴 베스트를 걸친 세리에가 시오나를 향해 물었다. 그리고 약이 든 작은 잔과 카라멜이 담긴 접시를 내려놨다.

익숙하게 약을 먹고 카라멜 대신 말린 사과와 블루베리가 들어간 차 한 모금으로 입을 가신 시오나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덧나지 않고 잘 아무는 중이다."

"다행이군."

세리에 역시 창을 다루는 사람이었으니, 인사를 빙자한 싸움 중 부상을 입은 일에 대해 대신 사과를 전하거나 보상을 운운하지는 않았다. 대련 중 이기든, 다치든, 아니면 만에 하나 다시는 검을 못 쥐게 되거나 죽더라도 상대를 탓하지는 않을 것임을 잘 알았으니까.

다만 저택에 머무르던 손님이 다쳤으니 치료를 해주는 것이었다. 늘상 찔리고 베이고 부러지는 것이 일상이던 슬레이만, 그리고 첫째 아들을 살피다 어지간한 치료사만큼의 지식은 가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 나으면 오랜만에 창술을 한 번 보고 싶은데."

"그러지."

입꼬리만 움직여 작게 웃은 세리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다 낫기도 전에 이런 말을 꺼내리라는 것 역시 예상했다는 듯, 더 이상 건강 상태를 걱정하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곧 세리에의 눈이 리리에의 사탕 병을 향했다.

그 시선을 따라간 시오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가주가 아니라 리리에가 걱정되서 왔나."

"두 아이 다 걱정이 되어 온 것이지. 오랜만에 둘째도 만나볼 수 있나 했는데 세크리티아에 갔다 하니 어쩔 수 없고."

"속단하기에는 이른 나이지만, 검은 잘 배우고 있으니 걱정 안해도 된다."

"그보다는 검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니까. 그건 내가 직접 천천히 살펴봐야 알 일이지."

세리에의 시선이 이번에는 시오나를 향했다.

"사실은 그보다 걱정되는 것이 있었는데. 경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리리에를 잘 대해주고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고 해야 되겠군."

이렇게 말한 세리에가 시오나의 눈을 깊이 응시했다.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시오나가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설마 내가 리리에에게 칼이라도 휘두를까 걱정했나."

"그래."

"아무리 내가 엘프라지만 그 정도로 매정하지는 않다."

"그건 모를 일이지."

"물론 고민이야 당연히 했지만.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가해자는 따로 있는데 엄한 사람 해칠 수는 없으니까. 그런 걱정을 했으면서도 내가 여기 머무는 것을 허락했던 건가."

"소가주가 있는데, 설마. 아무리 경이 검의 길에 올랐다 해도 지그프리드가 지키는 것을 뺏을 수는 없지."

소드마스터 한 명이 수십, 혹은 그 이상의 마법사를 도륙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한 가문의 기사단, 그것도 지그프리드의 기사단과 드미레아를 상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믿고 그냥 두었다는 소리였다.

모종의 이유로 리리에를 해칠 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르는 시오나를.

둘 사이에 침묵이 찾아들었다.

잠시 말없이 앉아있던 세리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변경백, 아니. 브리센 후작도 그냥 두었던데. 그건 의외였지."

"이곳에 온 첫날에 소가주가 그러더군. 리리에에게도 브리센의 검을 가르칠 생각이라고.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가르칠 계획인지 물어보니 약속 안지키는 정혼자가 가르쳐주기로 했다 하던데. 그 정혼자가 제 형을 가르치는 김에 함께 가르치든 따로 만나 가르치든 그건 알아서 할 거라면서."

"그것 때문에 브리센 후작을 그냥 살려뒀다는 소리인가."

"소가주의 정혼자가 칼리안 왕자 아니던가."

"맞지."

"칼리안 왕자가 일부러 살려서 후작으로 만들어 두었다는데 더 이상 내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형을 브리센 가주의 자리에 앉히려는 것 같다고도 들었으니, 때가 되면 칼리안 왕자가 알아서 나서겠지 싶었다. 프레이야의 아들이 나선다면 더는 내가 참견할 자리가 아니니까. 그리고······ 만나봤을 때 꽤 믿음직한 구석이 있기도 했고."

이곳에 온 시오나가 그레이 브리센을 죽이려는 생각을 했었으나, 칼리안이 다른 이유로 일단 살려두고 있음을 안 까닭에 그냥 두기로 마음을 바꿨다는 말이었다.

"둘째 왕자도 그렇고, 리리에도 그렇고, 내가 아는 브리센과는 많이 달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노란색 사탕이 무조건 노란색 과일 맛은 아닌 것 처럼.

로젤리타 기간 중 지그프리드 영지를 찾아왔던 사람, 플란츠를 떠올리던 세리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곧 시오나가 찻잔을 들어 차 한 모금을 더 마셨다. 그러다 문득 다친 상처가 움직였는지 팔을 살짝 움찔거렸다. 그 바람에 다리에 기대 세워두었던 검이 움직였다.

- 딸랑.

검 손잡이 끝의 방울이 영롱한 소리를 낸다.

잠시 소리를 좇아 방울을 바라 본 시오나가 찻잔을 내려놨다.

지금 이 시간, 먼 곳 어딘가의 집에 들어서게 된 칼리안이 그것과 똑같이 생긴 방울을 찾았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 채로.

* * *

- 성을 모릅니다.

늘 이름만 말했었던 까닭에 특별히 더 묻지 않았었다.

- 두 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사실 저희 남매의 이름도 어머니가 남겨 둔 편지를 찾게 된 덕분에 알게 됐습니다.

키리에.

오로지 나이와 이름만 아는 채로 검을 가르쳤다. 키리에는 무엇이든 잘 배웠고 늘 열심이었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은 키리에에 대해 다른 것을 몰라도 괜찮았다. 그러다 기사 작위를 내리게 되었던 까닭에 질문을 했다. 이름 말고, 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랬더니 키리에는 그것을 모른다 했다. 그리고 술을 사달라 말했다.

- 아버지는 동생이 태어나고 그리 오래지 않아 돌아가셨다 적혀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세뉴강변에서 발견되었다고 말입니다. 아마도 술을 많이 드셨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잘 안 됩니다.

세크레타 안, 어느 작은 술집을 찾아갔었다.

3층의 창 밖 먼 곳으로 세렌티 신전 지붕의 붉은 새 조각상이 보이는 그런 곳이었다. 특별히 주변을 물린 것은 아니었으나 베른이 들어가자 모두가 자리를 비켰다. 그래서 조용히 둘이서 술을 마셨다.

- 그리고 어머니는 그 후에 갑작스런 병으로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편지에 적힌 내용이 그랬습니다.

이렇게 말한 키리에가 술을 마셨었다.

베른은 두 번 다시 키리에에 대한 것을 묻지 않았다.

그리고 키리에를 세크리티아에서 최초로 성 없이 작위를 받은 기사로 만들었다. 키리에를 다시 만났을 무렵의 칼리안과 달리 그 때의 베른은 그정도는 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과거의 키리에는 그냥 키리에였다.

'휘트린.'

초상화 속의 이 사람을 두고 어떻게 히나의 모친이 아니리라 생각할 수 있을까. 마치 칼리안이 프레이야를, 얀과 드미레아가 슬레이만을, 플란츠가 실리케를, 그리고 베른과 체이스가 데블란을 닮듯이 닮았는데.

- 톡, 톡, 톡.

저도 모르게 어느새 책상 앞에 앉은 칼리안의 손가락이 책상 위를 두드렸다.

그 사이 두 번째와 세 번째 서랍을 더 열어보았다.

서랍 안에서 나온 많은 것들이 칼리안의 손가락 앞에 나열되어 있었다. 칼리안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짙은 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질 낮은 종이 위의 글자들을 훑어내려갔다.

그것들을 살펴보다가 잠시 잊고 말았다.

밖의 날씨를, 그리고 그 사이에 서 있을 두 사람을. 잠시만 다녀오겠으니 기다리라 했던 말도.

- 저벅, 저벅.

그것들을 살펴보다가 눈치채지 못하고 말았다.

실드를 반만 쳐 둔 까닭에 눈보라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왕세자를 보다못한 아르센이, 차라리 안으로 들어가기를 권유했다는 것을.

- 탁!

지나치게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동생 놈을 찾아 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온 플란츠가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칼리안이 있는 곳을 찾아오리라는 것을. 놀란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이 된 동생 놈이 책상을 두드려가며 골똘히 바라보던 그 자료를 곧장 뺏어가리라는 것을.

"······ 뭐야."

더 이상 경계하지 않는 발자국 소리를 놓쳐버린 칼리안이 하릴없이 자료를 빼앗기리라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먼지 풀풀 나는 침대 위에 털썩 앉은 플란츠가 칼리안이 보던 것을 쳐다봤다.

"그냥 주십시오. 보지 마시고요."

베른과 키리에가 나눴던 대화들, 히나와 칼리안이 나눴던 대화들, 키리에, 프레이야에 대한 기억이 모조리 한꺼번에 튀어나온 탓에 자료를 놓친 칼리안이 얼른 손을 내밀었다.

- 팔락, 팔락, 팔락.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그냥 넘겨가듯 지나쳐 본 플란츠가 칼리안에게 자료를 넘겼다. 그것을 받아 갈무리하는 칼리안의 귀에 플란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긴, 휘트린이라는 엘프의 방인가."

"네."

"저건 프레이야 왕비의 초상화같은데."

"네. 맞습니다."

"그리고 그건."

잠시 말을 멈춘 플란츠의 손가락이 칼리안이 든 자료를 가리켰다.

"휘트린이라는 엘프가 보낸 편지인가. 프레이야 왕비에게."

"네. 그렇습니다."

"휘트린의 남편이 에반의 집에서 일하던 중에 죽은 채로 발견됐고, 그것을 알아보려던 휘트린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다고. 써 있었는데. 맞나."

머릿속에 대충 담아 둔 자료들의 글자를 다시 떠올려가며 읽어낸 플란츠의 말에,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형님 조금만 덜 똑똑하시면 안 됩니까."

"싫어."

짧은 한숨을 내쉰 칼리안의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 휘트린의 남편이 죽기 얼마 전에 아이샤 왕비가 병사했다 써있던 것 같았는데. 그것도 맞나."

칼리안이 대답하지 않았다.

칼리안은 거짓말을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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