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38화 (339/527)

제60장. 가능하다면, 꿈은(3)

키리에와 히나에게 있어 베른같은 것.

휘트린. 프레이야에게 있어서는 휘트린이 그러했을 터였다. 물론 히나는 그 성이 지닌 정확한 뜻을 모른다지만 그렇다 해서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그러니 프레이야에게 있어 휘트린이란, 어떤 사람일까.

- 휘이이잉······!

창 밖은 소란하고 집 안은 고요하다.

매서운 바람이 계속하여 창문을 두드리고 먹구름에 가려진 하늘 덕에 집 안은 완전히 어두웠다. 물론 그 소음과 어둠이 집을 살피는 것에 있어서는 별다른 방해가 되지 못했다.

다만 칼리안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하는 정도의 결과는 충분히 만들어냈다.

- 달칵.

짧은 숨을 내쉰 뒤 문을 닫은 칼리안이 주변을 둘러봤다.

엘프의 생활 방식은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큰 차이점은 평생을 가도 칼리안이 절대 이해하지 못할 식성 정도일까. 만약 지금 당장 플란츠를 아무 엘프 마을에나 떨구어둔다면, 플란츠는 조금의 불편함도 없이 매우 만족스러운 식생활을 영위하며 잘 살 수 있으리라 장담할 정도였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벽난로와 소파, 낮은 테이블과 책장, 먼 곳에 보이는 주방과 선반들. 베른이었을 적 왕궁을 벗어나 돌아다닌 시간 동안 참 많이 겪어봤던 여느 사람들의 집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 자박, 자박.

칼리안의 발이 움직인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임을 알면서도 발소리를 냈다. 이제는 다른 곳에 무사히 새로운 터를 잡았길 바라는 이 집의 주인들에 대한 나름의 예의였다.

칼리안의 시선이 움직인다.

마을 밖에서 일어난 갑작스러운 싸움 때문에 제대로 된 짐도 챙기지 못하고 몸만 피한 듯, 테이블 위에는 책 한 권이 펼쳐져 있고 그 옆에는 말라붙은 찻잔이 보인다.

지하는 없었고 1층에 특별한 것이 없음을 확인한 칼리안이 다시 천천히 발을 놀려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과 연결된 2층의 작은 빈 공간.

햇살이 가장 잘 들어올 창가에 흔들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곳을 지나가니 네 개의 문이 나온다. 칼리안은 가장 멀리 있는 문을 제일 먼저 열어보고 싶다는 마음을 물리고 가까운 방문부터 열어보기 시작했다.

두 개의 침실, 그리고 욕실.

무언가를 숨겨두었을 만한 공간은 없는지, 눈에 띄는 제목의 책이나 서류는 없는지, 혹여 피 냄새가 나지는 않는지. 밖에서 기다리는 이들을 생각해 빠르게 움직였으나 조금도 놓치지 않고 샅샅이 살펴나갔다.

- 자박.

그리고 마지막 방 앞에 섰다.

칼리안이 잠시 큰 숨을 들이쉬며 문을 열었다.

"여긴······ 다르네."

공기부터 다르다.

가장 먼저 들어오고 싶어 했던 것이 괜한 생각은 아니었다는 듯,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느껴지는 먼지 냄새가 달랐다.

오래도록 비워져 있던 방. 이 집의 주인들이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해야 했던 날보다 더 오래, 아주 오래 전부터 비워져 있던 방. 그런 장소에서나 생길 수 있을 법한 해묵은 먼지 냄새가 났다.

해가 들지 않도록 굳게 내려진 두터운 커튼을 걷을까 잠시 고민하던 칼리안이 그냥 그대로 주변을 둘러봤다.

낡은 침대가 하나, 낡은 피아노가 하나, 낡은 책상이 하나.

그 위에는.

- 자박.

작은 초상화가 담긴 낡은 액자가 하나.

칼리안의 발이 고요히 멈췄다.

초상화 속, 낡은 의자에 앉아 앞을 보고 있는 이의 머리카락이 붉었다.

붉은 빛. 체르밀 궁 정원에 핀 장미의 붉은 빛이 아니라, 오래도록 보고 있으면 눈이 아플 만큼 선명한 붉은 빛. 탄생을 축하하는 라프라니아 혹은 죽음을 위로하는 안네루시아와 같은 선홍색이었다.

칼리안이 잘 아는, 혹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한 사람. 이제껏 오로지 한 명에게서만 보았던 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 엘프였으나 길지 않은 귀를 가진 사람. 지금의 칼리안보다 조금 어린, 지금의 칼리안과 정말 많이 닮은 예쁜 사람.

바로 프레이야였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칼리안이 조용히 팔을 뻗었다.

그림 속의 얼굴에 손가락 끝을 가져다 댔다.

"예쁘셨네요, 어릴 때부터. 정말로."

속삭임이 흘러나온다.

아마도 그 얼굴을 마주하고는 처음 불러봤을 말.

옛 칼리안으로서도, 지금의 칼리안으로서도.

"······ 어머니."

칼리안이 손 끝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이마를, 눈을, 코를, 뺨을, 손가락 끝으로 어루만졌다.

흰 빛의 원피스를 입지 않았다면, 선홍빛의 긴 머리를 풀어내리지 않았다면, 혹시 거울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만큼 자신과 닮은 얼굴을 한참동안 어루만졌다.

왕궁에 남은 초상화와 달리 너무나 해맑게 웃고 있는 얼굴과, 남겨져 있을 리 없을 그림 속의 온기를 피부에 담고 싶어하는 것처럼. 머리 말고 마음 말고 지금 칼리안을 담아 두고 있는 이 몸에도 알려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곧 수그리고 있던 허리를 곧게 편 칼리안이 주변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했다.

"빈 집에 두고 싶진 않은데."

비어있는 집이었음을 상기한 것이다.

책을 보다 그대로 도망칠 만큼 급한 상황이었으니, 왕비의 어릴 적 모습이 담긴 유일한 그림을 그대로 두고 간 일을 탓할 마음은 없었다. 다만 이것을 놔두고 가야 할지, 가져가도 좋을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 혹여 돌아온다면 도둑질을 한 셈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잠깐 액자 앞에서 손가락을 머뭇거리며 고민을 하던 칼리안이 책상 서랍을 열었다. 만약 주인이 돌아오는 경우를 대비해 메모라도 남겨두고 초상화를 가져 갈 마음을 먹은 까닭이다.

- 끼기긱!

잘 쓰이지 않았던 서랍이 오랜만에 열리며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잠시 미간을 찌푸린 칼리안이 고개를 내렸다. 서랍 속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안에 든 것에 눈을 두었다.

"이게······ 무슨······."

눈의 깜빡임이 잠시 멈출 만큼. 잘 오고가던 숨이 잠시 멈출 만큼. 스스로 움직이던 심장이 쿵 내려앉을 것처럼 놀랐다.

하얀 손가락 끝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 뒤에는 서랍 안에 들어있던 것 중 더 큰 것, 책상 위에 놓인 초상화가 아닌 또 다른 한 장의 그림을 들어올렸다. 그 바람에 서랍 안에 함께 들어있던 무언가가 서랍 끝으로 데굴데굴 굴러나왔다.

팔락이는 종이 소리. 그리고.

- 딸랑.

하는.

방울 소리가 이어졌다.

* * *

커다란 유리구슬 안에 든 세상을 본 적 있다.

고운 도자기로 빚어낸 새하얀 세상.

손톱보다 작은 나무와 손가락 한 마디 만한 집들이 담긴 유리구슬을 뒤집었다 내려놓으면 새하얀 눈이 소복이 내렸다.

- 조롱이구나.

그 고요함이 마음에 들어 몇 번을 들여다 보던 중 들려왔던 목소리를, 마음 속 깊은 곳을 내려다보는 듯한 짙푸른 눈을 기억한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짧은 대화는 나누며 지냈던 때였으니까.

- 이것이 왜 조롱입니까.

- 손바닥 위에 올린 세상을 들여다보는 지금 네 모습이, 네 어미와 다를 것이 있더냐.

겨자 씨앗보다 작은 크기의 벽돌들, 창문들. 나뭇잎 하나, 나무 줄기의 결 하나하나 정성스레 빚고 조심스레 구워낸 것이 분명한 작은 세상.

그것을 만든 이의 정성은 온데간데 없이 그것을 전한 이의 의도만 남았다. 한여름에도 눈이 내리는 유리 구슬의 아름다움은 온데간데 없이, 어미의 손에 눈이 가려진 왕자에 대한 조롱만 남았다.

"마법사."

"네. 부군단장이신,"

"실드. 치워."

실드 위에 쌓인 눈 때문에.

아르센이 만든 둥근 실드가 꼭 유리구슬 같아서.

"왜 그러십니까. 밖에 바람 많이 붑니다."

"······ 숨막혀서."

오늘따라 숨이 막혀와서.

그런 플란츠를 본 아르센이 마력을 움직였다. 평소와 같았다면 실드 안에 공기 잘 통한다는 한 마디를 분명히 했을 텐데 두말없이 실드를 걷었다. 다만 완전히 없애지는 않고 반만 걷어내어 눈보라가 불어오는 방향만 막았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프레이야와 관련된 곳이라면 지금 저 상태에서 들어가 보아야 하등 도움 될 것이 없지 않겠나.

겨울을 피해 세크리티아까지 와서는 기어코 저 혼자 겨울을 기억해 낸 왕세자를 보면서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아르센이 목소리를 냈다.

"처음 제 스승님 만났던 날에, 제가 인사를 안 했습니다. 무슨 억하심정이 들었는진 몰라도 그렇게 자존심을 부려봤습니다."

칼리안만큼이나 뜬금없이 꺼내놓는 소리에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추위에 질렸는지 기억에 질렸는지 모를 창백한 낯빛을 향한 아르센의 말이 이어졌다.

"그랬더니 스승님이 세 시간 동안 벽에 붙어서 손을 들고 서 있게 하셨습니다. 앞에 있는 게 어른이든 스승이든 개든 말이든. 만났으면 인사를 해야지 왜 인사를 안하느냐 하면서요. 그래서 벌을 받았고 딱 사흘 동안 팔을 제대로 못 썼습니다. 그 사달을 겪고 나니 처음 만나는 사람을 볼 때면 어렴풋이 팔이 쑤십니다. 벌써 이십 년이 더 지난 일인데 잊히지도 않습니다."

그 때가 생각났다는 듯, 아르센은 팔뚝을 몇 번 주물러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그냥 또 생각났구나, 하고 삽니다. 무슨 생각이 났는진 몰라도 털어내면 좋고 떨쳐내면 더 좋겠지만 못 하셔도 괜찮습니다. 왕세자님이 남들과 달라서 그런 게 아니라 남들과 똑같은 사람이라 그런 겁니다."

곧 아르센이 실드를 몇 번 툭툭 건드렸다. 불어오는 바람에 살포시 쌓였던 눈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아르센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던 플란츠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과거에는 그런 말 나한테 안 했었겠군."

"왜요. 그런 말 해주는 사람 있었으면 전쟁 안 내셨을 것 같습니까."

"아니."

플란츠의 고개가 비딱하게 틀어졌다. 그렇게 또 여지없이 사람 내려다보는 눈을 한 채 낮은 목소리를 냈다.

"나는. 어머니 손 안에서 평생을 썩어가도 정신까지 놓을 사람이 아니라서. 고작 미친 마법사 말 몇 마디에 멈출 수 있을 정도의 전쟁이었으면 시작할 생각도 안했을 텐데."

이 말에, 안 그래도 익숙지 않은 위로 꺼내느라 심신이 피곤해진 아르센이 적당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플란츠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도 전쟁은 안 났겠지."

아르센의 말 몇 마디에 전쟁 멈출 사람은 아니지만, 만약 아르센과 그런 말 몇 마디를 주고 받을 사이가 되었다면 전쟁이 나지는 않았으리라고. 플란츠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했다.

"누구랑 이런 대화를 나누는 법을 알았으면, 인성 안 좋은 왕제가 알아보고 이해할 만한 편지를 보냈을 테니."

그 뒤 설명처럼 따라붙은 말을 듣고 나서야 플란츠의 말을 이해한 아르센이 실소했다.

"네, 뭐. 어련하시겠습니까."

"신경써줘서 고맙다는 말인데."

네에, 그러시겠죠. 하고 답하려던 아르센이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저 왕세자 입에서 고맙다는 말 나온 것을 처음 들은 탓이다.

히나의 딸기와 니들렌의 소라껍질에도 직접 입을 열어 고맙다 말한 적 없었음을, 고맙다 미안하다 하는 말 안하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끝낸 칼리안에게도 당연히 하지 않았던 말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게 어떻게 그런 뜻이 됩니까."

"잘."

큰 감흥 못 느낀 아르센은 여지없이 툴툴거리는 소리를 냈고 플란츠는 여지없이 짧은 대꾸를 건넸다.

실드 걷어낸 덕에, 몰아치는 겨울을 고스란히 받아내면서.

* * *

칼리안이 힘주어 눈을 감았다 떴다.

순간적으로 아득해지던 머리가 간신히 맑아진다.

한 손에는 방금 들어올린 새로운 그림 한 장을 들고, 또 한 손에는 딸랑이는 방울을 든 칼리안이 애써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로 숨이 막힐 것 같아서.

- 딸랑.

손을 내리니 여지없이 소리가 울린다.

그럴 수밖에.

소리를 내라 만들어진 물건이니, 소리를 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방울이니, 움직이면 소리가 날 수밖에.

다만 칼리안이 놀란 것은 그것이 그 흔한 방울 때문이 아니었다.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던 생김새였던 까닭이었다.

"왜. 같은 것이······ 여기에."

두서없는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칼리안의 부재를 대신해 수도에 머물겠다 했던, 제온의 뒤를 캐고 있다 했던 소드마스터. 시오나의 검 끝에 달려있던 방울. 그 방울과 같은 것이었다.

세상에 방울이 어디 이것만 있겠냐만은, 틀림없었다.

칼리안이 한 번을 끊었던 끈. 새 끈을 구할 생각도 없이 굳이 끊어진 것을 이어 다시 묶어둔 그 끈. 그것과 이 방울에 달린 끈의 모양도 같았고, 방울의 생김도, 소리도, 크기도. 모두가 다 같았다. 완전히 똑같은 물건이었다.

물론 방울만 있었다면 크게 이상할 것이 없었다.

시오나가 이미 먼저 프레이야와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다 말했으니까. 친분의 뜻으로 장난감같은 방울 정도야, 똑같이 나눠가질 수 있다. 프레이야가 아니라 이 집에 머물렀던 이와 친분이 있던 사이라 해도 마찬가지. 얼마든지 나눠가질 수 있다. 그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하지만.

- 팔락.

종이 팔락이는 소리가 빈 방을 다시 울렸다.

묵은 먼지 냄새 말고 피가 식는 냄새가 흘러내리는 듯한 기분이 다시 들었다.

또 한 장의 초상화.

책상 위 초상화의 모습과 똑같이 흰 원피스를 입은 프레이야가 여전한 얼굴로 밝게 웃고 있었다. 그 옆에는 옅은 분홍빛 머리와 금색 눈을 한, 지금보다 훨씬 어린 모습의 시오나가 보였다.

그리고 시오나의 곁에 서 있는 또 한 명.

그의 모습에서 칼리안의 눈이 쉬이 떨어지질 않았다.

백은발.

검은 눈.

칼리안이 아는 모습보다 귀가 더 길고 머리가 훨씬 짧다. 아마도 그림 속 이의 키가 더 큰 것도 같다. 하지만 닮았다. 분명히 닮았다.

프레이야만큼이나 해맑은 웃음.

세상을 다 밝힐 것 같은 미소.

"······ 히나."

히나와 완전히 꼭 닮은, 하지만 분명 다른 사람.

- 프레이야, 시오나, 휘트린.

그런 사람이 그려진 초상화 아래 적힌 이름들 때문에.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숨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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