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37화 (338/527)

제60장. 가능하다면, 꿈은(2)

레이븐도 잡초를 먹긴 먹는다.

다만 그 잡초가 '카이리스의 3왕자가 직접 손으로 건네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아무튼 먹긴 먹는다.

스스로 돌아다니며 알아서 배를 채우는 에스티나만큼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칼리안의 손이 닿으면 거부하지는 않았다. 작년에 엘프들의 도시까지 다녀오는 동안 그 정도는 타협을 했다. 물론 레이븐이 타협을 해줬다는 소리다.

"잘 먹네, 레이븐. 착하다."

그래서 칼리안은, 건네주는 풀에 더해 얀이 마련해줬던 '우리 왕자님의 건강을 위해 신선한 채소를 가득 담은 정성 가득 샐러드'까지 대신 싹싹 먹어 준 아주 기특한 레이븐을 슥슥 쓰다듬었다.

그 날 아침 아르센이 분주하게 네 번이나 구워다 나른 돼지고기 덕분에 뱃속에 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는 변명 반, 레이븐도 좋은 것 먹어야 한다는 핑계가 반씩 섞인 그럴싸한 이유로 얀의 샐러드를 제 말에게 넘긴 칼리안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는 커다랗고 새까만 레이븐의 머리를 양팔로 꼭 끌어안아준 뒤 안장에 올랐다.

똑같은 것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한 파릇파릇한 완두콩이 미묘한 얼굴로 칼리안과 레이븐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은 아마 모를 것이다. 아마도.

"이제 가죠."

졸지에 말과 같은 것으로 식사를 마친 셈이 된 플란츠, 그런 플란츠를 보며 어떻게든 웃음을 참다 실패해 기괴한 소리를 낸 아르센도 나란히 말에 올라탔다. 그 뒤 브리지트 숲의 북서쪽에 있다 앨런이 알려줬던 엘프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레이븐. 아까 먹은 건 산딸기고 저기 저건 다른 거야. 배탈나니까 먹으면 안돼.'

하는 동생의 말을 들어버린 플란츠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내 동생 저 분이 아무래도 제 말이랑 나를 같은 종류로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의심을 애써 떨쳐내보기 위해서였다.

"형님."

"왜."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계속 표정이 안좋으신데요."

"아니야."

"거짓말."

늘 한결같은 플란츠의 얼굴을 참 잘도 알아본다. 원인까지 알아보면 더 좋을텐데 그걸 알 만큼은 못 되는 모양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형이 돼가지고 동생 앞에서 속 좁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 칼리안의 샐러드 때문에 아직까지도 큭큭거리는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를 노려보며 꾹꾹 참는 수밖에.

"······ 하."

실로 평화로운 아침이다.

"혹여 형님이 꾸셨던 꿈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아니라고.

꿈 때문이 아니라 네 놈 새끼가 대단히 멋진 저 말한테 집어다 먹인 밥, 내꺼랑 똑같은 그 밥 때문이라고.

도무지 그렇게 말할 수가 없어서.

"······ 무슨 꿈을 꾸셨는지 말씀을 해주세요."

"싫어."

그냥 싫다는 대답만 했다.

체이스의 머리 색 때문에 혼자 상상을 했을지, 시나스타의 색 때문에 혼자 환상을 봤을지, 어머니 나무 덕분에 궁금해하던 것의 답을 보게 된 것일지.

검은색 말고 빨간색 말고 또 다른 색을 봤던 일에 대해서 칼리안에게 말하고 직접 물어보면 정말 제대로 된 꿈이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을 일이었지만 얘기하지 않았다.

"아니었어. 안 좋은 꿈."

"그럼 다행이고요. 대신 이상한 일이 있으면 꼭 얘기해주십시오."

"알았으니까."

"네."

도무지 그렇게 물어볼 수가 없어서.

* * *

엘프의 마을.

앨런은 들어서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아델리아와 세르제인은 초대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추방까지 당했다.

"엘프들도 시간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엘프 중에서도 예지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을 하는 것이 조금 특별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저도 조금쯤은 어머니 영향을 받는 것 같고요. 예지력이라 거창하게 말하기보다는 직감이라 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해서는 막연한 예감이 들어맞는 경우가 확실히 늘었습니다."

앨런이 일러주었던 좌표.

엘프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어머니 나무는 그 어떤 제지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어머니 나무도 같은 능력을 가졌습니다. 더 광범위하고 더 정확하게, 시간 너머의 것을 인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어머니 나무가 스승님을 마을에 들여보냈을 때 두 대마법사 사이에서 어떤 싸움이 생길지 몰랐을까요."

"알았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미래를 내다보지 않더라도, 흉흉한 기운 뿜어내는 마법사 둘이 텅텅 빈 마을에 들어섰다면 누구나 그런 예측은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도 어머니 나무는 스승님이 그 안에 들어서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전날. 아르센을 찾아왔던 변경백은 세르제인의 신원을 확보했음을 알렸다. 아무래도 세르제인이 숲에서 추방된 것 같다는 이야기도 함께였다.

그런데 어머니 나무는, 마을을 부숴버릴 것을 알았을 텐데도 앨런을 추방하지 않았었다.

"마나실 군단장님을 추방할 정도의 능력은 없는 것 아닐까요? 싸움을 말린 것도 어머니 나무 스스로가 한 것이 아니라 시스파니안님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 않았습니까."

"카이리스에 지진 피해가 아직까지도 없는데."

"네. 헤르츠 경 생각에도 동의하고 형님 말씀도 맞는 것 같습니다. 카이리스의 땅에 아직까지 지진이 일어난 적이 없었으니 어머니 나무가 스승님의 방문을 막지 못할 정도로 힘이 없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어머니 나무가 앨런보다 약한 것은 아니다. 다만.

"스승님을 막을 이유가 없었던 것일까, 했는데······ 시스파니안이 시간까지 돌려가며 싸움을 말려야 했으니 막을 이유가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고요. 그렇다면······."

"세크리티아라서."

"네. 세크리티아라서 스승님의 방문을 직접 막지 못했고, 시스파니안의 힘을 빌려 싸움을 말리고 복구를 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세렌티의 영향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왕자님?"

"세렌티와 시스파니안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하였고, 시스파니안은 지금도 세렌티의 몫을 감당하고 있습니다만. 양신전쟁 어느 곳에서도 다누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누 역시 시스파니안과 마찬가지로 세렌티가 직접 만든 생명이었는데도요."

아르센의 말에 대답한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땅은, 물론 이제 저는 믿지 않고 있습니다만 세렌티의 가호가 내려진다 알려진 곳입니다."

푸른 빛이 눈처럼 내리던 세렌티의 시간을 떠올린 아르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합니다. 세크리티아 전역에 생기는 현상이고, 텐실이 세크리티아에서 독립한 이후에 텐실 땅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도 들었습니다."

"맞아요. 그런 것으로 볼 때, 아무리 잠들어 있다고는 해도 세렌티의 힘이 닿기는 한 곳이니······ 만약 세렌티와 다누의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면 세크리티아에서는 다누가 제 힘을 못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이곳의 엘프들에게 길을 내주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라는 소리인가."

플란츠의 질문이었고, 칼리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데블란이 이 숲에 위협을 가하고 있을 때, 다누는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엘프들이 숲의 길을 통해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했습니다. 그 때문에 결국은 제가 엘프들의 장로까지 만났고요."

"그 뒤에는 열렸지."

"네. 세이렌 경과 그레이스 경이 이 숲에서 싸움을 벌였을 즈음 열었겠죠. 그렇게 해주겠다 저와 약속을 했었으니까요."

"그래."

"그 때도 말씀 드렸지만, 저는 어쩐지 다누가 저를 이곳으로 오게 하려고 길을 열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곳의 일이 발단이 되어 제가 여기로 직접 찾아오게 된 것이니까요. 그보다는 차라리 숲의 길을 여는 것이 힘들어서 못 열었다는 쪽이 더 말이 되는데, 지금도 저는 다누가 저를 부르려 했기 때문에 엘프들의 길을 막았었다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

스스로도 설명하기 힘든 막연한 기분.

그것이 무슨 기분인지를 온전히 입으로 옮기지 못한 칼리안이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이상한 일이죠."

"별로."

"안 이상합니다."

그보다 더 이상한 일을 겪은 사람이 이상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탓에, 플란츠와 아르센은 가볍게 부정하는 말을 했다.

어찌됐건 어머니 나무가 세크리티아에서는 제 힘을 내지 못할 가능성, 그리고 어머니 나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칼리안을 이곳까지 이끌어내기 위해서 숲의 길을 열지 않았을 가능성.

칼리안은 둘 모두를 염두에 두며 작은 목소리를 냈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들어가 보면 알겠죠."

"그래."

긴장 하나 하지 않은 얼굴의 플란츠와 그 어느 날보다 태평한 표정의 아르센을 보던 칼리안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 나무를 정말 만나게 될지, 만난다 해서 기억을 찾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만에 하나의 경우도 있으니까요. 다누와 시스파니안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들의 배려와 이해는 인간의 기준과 다릅니다. 그러니 어쩌면······."

"못볼 것 보고 충격받을 지도 모른다는 소리야."

칼리안의 얘기를 뚝 잘라먹은 플란츠가 아르센을 향해 말했다.

"그만 말해도 이미 다 알아."

"그······ 저는 처음 듣습니다만, 부군단장이신 왕세자님."

"괜찮다며."

"네. 안 괜찮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됐어. 그럼."

경고만 백 번을 들어보아야 직접 겪는 순간 모두 허사가 됨을 안다. 그러니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라는 듯 플란츠가 칼리안을 향해 텃짓을 해보였다.

"가."

"네."

칼리안이 한숨 가득한 대답을 했다.

곧 레이븐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그리고, 세상이 변했다.

* * *

황량한 언덕.

시간을 아울러 바라보고, 공간을 멋대로 비틀어 놓는 다누의 영역.

한 발자국을 안으로 디디니 완벽히 바뀐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종전까지는 울창한 숲 속에 있었으나 어느새 완벽히 다른 곳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시스파니안의 손길 덕에 완벽히 제 모습을 찾았다던 작은 마을이 있었다. 저 멀리 깎아지른듯한 절벽과, 높은 절벽을 타고 오르지 못해 중간에 걸린 듯 멈춘 구름들이 보였다.

- 휘이이잉!

날 선 바람을 느낀 칼리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뒤로 돌았다. 칼리안의 뒤를 따라 마을로 들어 온 플란츠가 순간적으로 어깨를 굳혔다.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아르센이 놀란 눈이 되었다.

"여긴······."

"헤르츠 경. 망토 있습니까."

상황을 파악한 뒤 이미 주머니 속을 뒤지기 시작한 아르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검푸른 색의 망토 하나를 꺼내 플란츠에게 건넸다. 칼리안이 쓰려고 찾은 것은 분명 아닐 테니까.

"걸치십시오. 보온 마법 걸려있습니다."

순식간에 손끝이 새파랗게 변한 플란츠가 망토를 둘렀다. 플란츠로부터 시선을 뗀 칼리안이 곧바로 안장에서 뛰어내렸다.

"레이븐. 밖에 가 있어."

그리고는 마을의 경계 밖, 브리지트 숲으로 레이븐을 내보냈다.

그 모습을 본 플란츠와 아르센 역시 똑같은 행동을 했다. 아르센은 스스로 보온 마법을 걸 수 있었고 플란츠는 아르센이 건넨 보온 망토를 둘렀으며 칼리안은 추위를 타지 않았으나 말들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이런 추위 속에서는 10분도 버티기 힘들 테니까.

플란츠와 아르센이 괜찮은지를 한 번씩 살핀 칼리안이 다시 고개를 돌려 조금 더 주의 깊게 마을을 살폈다.

"들어오기 전까지는 분명 맑았는데, 한 발 안으로 들어오니 눈보라가 친다니······ 보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아르센의 말대로였다.

들어서기 전까지는 분명 맑았다.

한 발을 내딛으니 눈이 온다. 눈보라가 몰아친다.

어느 정도의 높이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눈이 쌓였고 언덕 위의 마을은 모두 새하얗게 얼었다. 얼어붙을 수 있는 모든 것이 얼었다. 나무도, 마른 풀도, 투명한 얼음 속에 파묻힌 꽃들까지도.

"왕자님. 세크리티아 북부에 이런 곳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세크리티아, 세크리티아보다 더 남쪽에 위치한 리베른은 물론이거니와, 어느새 봄이 찾아와 꽃이 피었다던 카이리스, 카이리스보다 북쪽으로 올라가지 않은 텐실 역시 이런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 곳은.

"······ 대사막."

대사막이다.

온 사방이 모래 뿐이라던, 늑대들이 살고 있는 남쪽 대사막이 아니라 그보다 더 위. 일년 내내 눈이 내리고 단 한 순간도 쉼없이 살을 저미는 추위가 든다는 북쪽 대사막. 바로 그곳이었다.

카이리스의 남부에 주인 없는 바다를 연결해 두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세크리티아의 숲 가운데에 대사막을 연결해 둔 것이다.

"스승님은 이런 말씀 없으셨는데 말이죠."

아르센의 망토 덕에 피부가 시린 것은 아니었으나 날 선 바람은 고스란히 느껴진다. 때문에 눈을 살짝 찌푸린 플란츠가 발밑을 보며 대답했다.

"지형을 옮겼군."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발을 디디고 선 두터운 얼음 밑, 보랏빛의 꽃 한 송이가 제 빛을 잃지도 않은 채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었다. 언젠가 빌헬름 관의 부군단장실을 좋은 향기로 가득 채웠던 보랏빛 꽃, 미네시아스였다. 세크리티아의 북부와 카이리스의 중부에서 자라는 꽃이기도 했다.

아르센이 바람을 막아 줄 거대한 실드를 두르는 사이, 불어오는 바람 만큼이나 날카롭게 벼려진 눈을 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바람소리에 가리지 않도록 평소보다 목소리가 조금 더 커져 있었다.

"더는 엘프들이 살지 않기 때문에 세렌티의 힘이 닿지 않는 곳으로 마을을 옮긴 것일까요."

"가 보면 알겠지."

조용히 답하는 플란츠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어차피 칼리안은 잘 들을 테고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는 굳이 안 들어도 괜찮았으니까.

곧 한 명의 검사와 한 명의 마법사, 그리고 직업도 인성만큼 복잡한 나머지 한 사람이 발을 옮겼다. 사방 가득히 허리 높이까지 쌓여있던 눈을 아르센이 아예 전부 꽁꽁 얼려버린 덕에 움직임이 그나마 수월했다는 것, 그리고 마을이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여기서 어머니 나무를 어떻게 찾으실 겁니까?"

아르센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한 뼘은 족히 넘을 얼음의 구체 속에서 말하는 탓이었다.

"잠시만."

주변을 잠시 둘러보던 칼리안이 어느 한 곳을 향해 발을 옮겼다. 아르센의 질문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은 채였다.

그 뒤를 따라 걸어가던 아르센의 눈이 벌어졌다. 그리고 플란츠는 잠시 발을 멈췄다. 칼리안이 무엇을 보고 발을 옮겼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짙은 녹빛의 지붕. 돌벽.

- 테룬, 오르세이아, 레테스

두터운 나무 문.

문 위의 커다랗고 하얀 돌에 새겨진 낯선 이름들.

- 휘트린

그리고 그 마지막에 붙은, 낯익은 단어.

왕비 프레이야 휘트린의 성이 그곳에 적혀 있었다.

엘프들은 본디 성을 쓰지 않는다 하였으니 저것은 누군가의 이름일 터였다. 카이리스 왕궁에 들어 온 프레이야가 자신의 성으로 삼았을 만큼 중요한 누군가의 이름일 것이었다.

"······ 잠시 계십시오. 다녀오겠습니다."

플란츠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 앞으로 뚜벅뚜벅, 칼리안이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었다.

끼익, 하고.

함께 적힌 낯선 이름들만큼이나 낯선 소음이 잠시 울렸다.

깊은 어둠이 든다.

그 속으로 칼리안이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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