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장. 가능하다면, 꿈은(1)
아무리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게 일행이라지만.
"나는 동생 만나러 여기 왔어요. 아까전에 변경백 옆에 있던 사람이 동생이고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새로운 일행이 생길 줄은 몰랐다.
"사실 이 지역 변경백이 내 작은아버지인데 자식이 아무도 없어서 동생을 후계로 둘까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내가 전하랑 결혼하기로 해버려서,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는 나 말고 내 동생이 엄마 작위를 이어야 하니까. 후작이랑 변경백 둘 다 할 건지 아니면 둘 중 하나만 할 건지 동생에게 물어보려고 찾아왔어요."
거기에 더해 이렇게, 특별히······ 라고 하기보다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던 타인의 개인 사정까지 줄줄이 듣게 될 줄이야. 정말이지 세르제인은 지금 상황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세르제인이 아주 많이 혼란해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애초부터 상대방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을 사람, 아리안느의 말이 제멋대로 이어졌다.
"그런데 왕궁에서 날아온 비둘기가, 여기에 신성기사가 있으니 왕궁 감옥으로 인계해달라 하더라고요. 게다가 텐실의 왕세자가 혼자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니 찾게 되면 안전히 모시라는 말도 같이 써있기에 나도 따라왔어요. 텐실 왕세자 저하 얼굴 아는 사람이 나 말고는 없으니까요."
"그런 얘기를 왜, 나에게 합니까."
"내가 여기 있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요. 아니지. 경계하고 있다고 해야 하려나. 아무튼 다른 이유로 온 것 아니니까 긴장하지 말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세르제인의 시선이 찻잔을 든 자신의 손에 닿았다. 본래의 손은 이보다 조금 더 까맣고 굳은살도 많았다. 그러니 변신 마법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세르제인을 앞에 두고 더 긴장해야 할 쪽은 오히려 아리안느가 아닌가. 지금의 아리안느는 타국의 왕세자를 앞에 둔 일개 후작의 영애였으니 말이다.
"긴장 안했습니다."
"긴장했잖아요, 죽을까봐."
한 술을 더 떠 이런 말까지 덧붙자, 세르제인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내가 매우 우습게 보인 모양이군. 영애에게."
"봐요. 긴장했었네."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 아리안느가 살짝 미소지었다.
"사이 안 좋은 옆 나라 후작 영애한테 말 높이는 왕세자는, 어딘가 이상하잖아요? 그러니까 긴장하지 말아요. 나는 텐실 왕세자 저하를 해치려고 온 것 아니에요."
세르제인이 앞에 앉아있는 아리안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다 지금 아리안느가 무엇을 지적했는지를 깨달은 얼굴이 되었다. 아리안느의 말마따나 긴장을 한 것이 맞기는 한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날.
세르제인은 아델리아와 함께 숲을 찾았다. 어머니 나무의 뿌리가 뻗어있다던, 브리지트 숲 속에 숨겨진 엘프 마을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이유는 플란츠가 예상한대로. 카이리스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요원해진 탓에 어머니 나무의 힘을 빌어볼까 해서였다.
- 엘프 마을은 인간들이 찾을 수 없다 했는데, 위치를 아는 것이 맞나?
- 마을이라 하기엔 지금은 다 도망가고 아무도 없어. 그리고 앨런 마나실은 바로 찾아갔잖아. 설마 그걸 내가 못찾겠어?
호기롭게 말한 아델리아가 사방으로 마력을 넓혀가며 엘프 마을의 위치를 추적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다만 그 호기로움이 오래 가진 않았다.
- 이상하다. 기운이 확 바뀌는 걸 봐선 여기가 맞는데.
- 그냥 돌아가지. 이곳 국왕 전하와의 오찬에도 참석해야 하니까.
-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봐. 곧 찾을 수 있어.
그 말을 들은 것이 화근이었다.
아델리아는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사달이 났다. 거래 관계에 있던 아델리아가 자신의 뒷통수를 쳤는지 아닌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때를 보며 정체를 숨기고 있던 신성기사들이 검을 꺼낸 것이다.
텐실 국왕이 붙여 준 호위기사들과 그리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세르제인을 지키려다 죽은 이들이 생겼다. 세르제인 역시 그들과 상당히 오랫동안 싸움을 벌였고 결국은 도망을 쳤다. 그 뒤 아주 오랫동안 숲을 헤매며 그들을 피했으나 결국은 다시 발각되었다.
그렇게, 같은 편인 줄 알았던 이들에게 배신을 당해 죽을 뻔하다 같은 편이 아닌 줄 알았던 칼리안과 플란츠 덕에 목숨을 유지하게 됐다. 그러다 칼리안과 아델리아의 싸움이 벌어졌고 아델리아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듯했다. 그 후 밝은 빛에 휩싸인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숲의 밖.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고 아델리아가 어디로 갔는지도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머니 나무가 세르제인의 방문을 거절했다는 사실 뿐이다.
어머니 나무가 세르제인을 추방했다는 뜻이다.
그런 사실을 깨달은 세르제인은 곧장 자신의 말을 불러와 올라탔다. 숲에 오지 않은 또 다른 수행원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들 중 신성기사가 또 섞여 있는지도 확인을 해야 했으니까.
- 텐실 왕세자 저하? 맞으세요?
그런데.
- 맞는 것 같네요. 전하께서 보낸 전서구로 상황은 대충 전달받았어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건넸다. 그러더니 말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와서는 대뜸 오른손을 내밀어보이며 웃었다.
- 혹시 나 기억하세요? 우리 전하 옆에 계속 있었는데. 아무튼 따로 보는 건 처음이니까 다시 인사해요. 나는 아리안느 린이라고 해요. 법무 담당관 레이지안 린 후작의 딸이고 국왕 전하랑 나중에 언젠가 결혼하기로 한 사람이에요.
이 낯선 곳에서 경계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얼굴로.
그렇게 결국 안면을 텄다. 그리고 숲 속에 들어간 변경백이 카이리스 왕자의 일행에게서 신성기사들을 인계받아 오는 동안, 함께 숲 밖에 앉아 찻잔 하나씩을 쥔 채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아리안느가 일방적으로 말을 하고 세르제인은 거의 듣기만 하는 것도 대화라면 대화였으니 말이다.
"호위나 수행해 줄 남은 사람은 있어요?"
"아마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래요. 혹시 도와줄 것이 있으면 얘기해줘요."
"얘기를 하면 도움을 줄 것처럼 말하는군."
"돕지 못할 이유가 없죠."
"도울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생각해요?"
세르제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 나라가 텐실이니까."
"텐실의 치유사들 진짜 지긋지긋하고 신성기사들에게도 그렇게 좋은 감정은 안 생겨요. 텐실 왕가는 생각만 해도 잠이 깨고요. 그런데 곤경에 빠진 텐실 왕세자님을 내버려 둘 만큼 우리가 매정하진 않아요. 게다가 어차피 진짜도 아니라면서요, 당신."
마지막 말에, 세르제인은 하마터면 찻잔을 떨굴 뻔했다. 두터운 주석이 아니라 은으로 만들어진 잔이었다면 그대로 우그러뜨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애써 평정을 가장한 세르제인이 입을 열었다.
"······ 진짜가 아니라니."
"아, 맞다. 전하가 모르는 척 한다고 했었는데."
아리안느는 조금도 실수가 아니었다는 얼굴로 실수했다는 소리를 했다. 그리고는 제 귓볼에 채워 둔 연분홍색의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가리켜보였다. 세르제인의 파란 귀걸이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대충 들었어요. 대신 내가 아는 티 냈다는 건 전하한테 비밀로 해 줘요."
세르제인이 가짜인 것을 체이스가 모르는 척 하고 있다는 말을 아리안느가 세르제인에게 해버렸다는 걸 체이스에게 비밀로 해달란다.
"그게 무슨······."
그게 무슨 다누 뿌리에 모닥불 지피는 소리란 말인가.
어이없어하는 얼굴의 세르제인을 보기는 했는지 안 했는지. 아리안느의 말이 또 이어졌다.
"걱정 말아요. 지금 우리 얘기 듣는 사람 없으니까. 아무튼 그래서, 세크리티아까진 무슨 일로 왔어요? 어머니 나무 만나러? 듣기로는 연두색 저하, 아니. 카이리스 왕세자 일행에게 관심이 많았다던데. 카이리스 사람들이랑 어머니 나무 보려고 우리 전하 즉위식 축하해주는 척 한거예요?"
그야말로 질문의 홍수다.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는 듯, 아리안느는 그냥 생긋 웃어보였다.
"왕족으로 변장하고 온 것도 괘씸한데 그런 꿍꿍이는 좀 나빴다. 그쵸."
"······ 오찬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질책이라면. 영애가 아니라 세크리티아의 국왕 전하께서 해야 할 말 아닌가."
"아. 우리 전하 그런 사람 아닌데. 모르는구나."
아리안느가 호로록 하고 손에 들린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질책이라니. 전하는 그런 말 안 해요. 해명 들을 것도 없이 그냥 '텐실의 왕세자'를 만나서 좋은 말 가득한 오찬 한 번 다시 가지고 나면 끝. 더 이상 당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거예요. 텐실과의 관계를 애써 참작해서 내 땅에 변장하고 들어온 것도 못 본 척 해주려 했더니 제멋대로 엘프들의 숲까지 찾아가는 사람을 어떻게 더 믿겠어요. 안 그래요? 그러니까 당신 정체는 전하께 먼저 얘기하고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똑바로 요청해요. 사과도 꼭 하시고요. 그리고 조용히, 지내다 가세요."
멀리 변경백과 그의 기사들. 그리고 붙들린 네 명의 신성기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관심 없다는 듯, 찻잔 쪽으로 고개를 숙인 채 시선만 올려 세르제인을 쳐다 본 아리안느가 가는 목소리를 냈다.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 죽을까봐."
당장의 일을 위해 이곳이 누구의 땅인지를 잊고 있었던 세르제인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가벼운 말투로 경고를 전한 아리안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변경백 편에 신성기사들을 돌려보낸 뒤 멧돼지가 왔다.
하도 몸집이 커서 그 멧돼지 질질 끌고 온 한 명의 왕자와 그 곁에서 걸어오고 있던 왕세자 쯤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거대한 멧돼지 한 마리, 야생 닭 한 마리.
그리고 새빨갛게 잘 익은 산딸기가 한가득.
"왕자님은 돼지 드시고 저는 닭 먹고 부군단장이신 왕세자님은 산딸기 드십니까?"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냥 다같이 돼지 먹고 닭도 먹고 후식으로 딸기 먹는구나 할 터였다. 때문에 아르센도 그냥 반 농담 삼아 한 말이었다. 그런데 칼리안과 플란츠가 진심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봤다.
할 말 잃어버린 아르센이 입을 다물었다.
그 뒤 아르센은 칼리안이 기껏 끌고 온 멧돼지와 닭을 둥실둥실 마력으로 띄워올려 한 구석으로 가서는 열심히 손질도 하고 에우리아에게 배운대로 노릇노릇 잘 구워냈다. 남은 고기는 잘 얼려서 주머니에 넣어뒀다.
명색이 백작에다 한 군단의 부군단장이지만 남은 둘이 왕자에 왕세자였으니 별 수 있나. 아르센이 해야지.
그렇게 얌전히 점심인지 저녁인지 이른 새벽의 아침인지 모를 것을 가지고 돌아오니, 모닥불 앞에 가만히 앉아있는 플란츠가 보였다. 그리고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 나무에 기대 앉아 잠든 칼리안이 보였다.
양 손에 큼지막한 접시들을 든 채 멍하니 서 있는 아르센을 향해,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둬."
"깨울 생각 없습니다."
아르센은 조용히 답하며 플란츠의 곁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잘 씻은 산딸기를 건네주며 말했다.
"왕자님 저렇게 깊이 주무시는 것을 처음 봅니다."
"몇 번 봤는데."
"······ 그건 기절하셨을 때고요."
"다른가."
"다르죠."
"하긴. 그 쪽이 더 낫겠군."
"기절한 쪽이 더 낫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살다살다 기절한 게 낫다는 말은 처음 듣는 아르센이 혀를 쯧 찼다. 저기 잠드신 분이나 옆에서 잠 못드시는 분이나 사람 참 답답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본인들이 제일 답답할 테니 입에 올리지는 않겠으나 아무튼 답답증이 쌓인다.
깨작거리며 산딸기 먹고 있는 왕세자를 보던 아르센이 멧돼지 고기를 내밀었다.
"남겠습니다. 왕자님 주무셔서요."
"안 먹어."
제 손으로 잡은 동물 먹을 만큼은 못 될 왕세자가 곧바로 거절을 했다. 그 이유를 이제 얼추 가늠할 깜냥은 될 아르센이 툴툴대듯 말했다.
"부군단장이신 왕세자님 이런 성격이라고 말하면 아마 다들 저를 욕할 겁니다."
"왜."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면서요."
"확실히 주인을 닮아가나본데."
칼리안 따라 아르센도 잘 짖는다는 뜻이다.
씩 웃기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은 아르센이,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플란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군단장이셨는데 지금은 부군단장이신 것으로 모자라 언제 다시 왕자님 될지 모를 왕세자님."
"······ 왜."
마지막 인내심을 쓸까 말까 고민하던 플란츠가 한참 뒤에 대답을 했다. 아르센이 플란츠의 옷자락 끝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옷에 핏물 묻어서 그럽니다. 지워드릴까요?"
"둬."
"제가 핏물 지우다 다른 장난 칠까봐 그러십니까."
"핏물 아니야."
옷자락 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핏물이었으면, 저기 잠든 어떤 놈이 이미 지웠을 터였다. 그러니 핏물은 아니었다.
산딸기를 따다 물이 든 모양이다. 풀밭에 있어도 풀물 안든다던 놈 때문에 딸기 물이 들었다. 뭔 생각인지 어쩐 일로 클린을 안 걸어 준 동생 놈은 곁에서 쿨쿨 잠들어 있었다.
산딸기 들어있던 접시도 내려놓고 한참동안 모닥불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다른 말 없이 식사 잘 마친 아르센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낭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곧 해가 뜰 것 같긴 합니다만 어제도 못 주무셨다 하니 좀 주무십시오. 제가 망 보겠습니다."
"알았어."
밤에 혼자 깨 있어봐야 큰 도움 안 될 플란츠는 얌전히 침낭 속에 들어가 누웠다. 그리고 아르센은 칼리안과 가까운 나무로 가 기대앉았다.
잠들어 깨지 않은 칼리안은 그냥 두었다.
건드리면 분명 깰 테니까.
- 타닥, 타닥······.
모닥불 소리는 언제나 듣기 좋다.
그 소리가 지나치게 평화로워서 잠이 오지 않을 만큼.
침낭 밖으로 삐져나온 얼굴에서 눈이 깜빡거리는 것을 한참 쳐다보던 아르센이 작은 목소리를 냈다.
"직접 잡은 멧돼지 고기에 손도 못 대시고. 그래서야, 어떻게 버티시겠습니까."
"뭘."
"그러다 정말로 '과거'를 꿈꾸게 되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플란츠의 눈이 잠시 아르센을 쳐다봤다.
연두색 눈동자에 붉은 불빛이 아른거리는 모습이 조금 낯설다.
"너보단 나을 텐데."
"저는 괜찮습니다."
"섣부른 장담 아닌가."
"사실 궁금하기도 해서요. 꿈이 아니면 제가 언제 왕자님께 얼음창 꽂아보겠습니까."
비범하게 미친 마법사의 사고방식은 플란츠로서도 감당이 안 된다. 잔뜩 눈살을 찌푸린 플란츠를 보며 싱긋 웃은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당연히 신경 쓰이기야 하겠습니다만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신경 쓰겠지만. 괜찮아. 나도."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영향 받으실 분 아닙니까. 왕세자님은."
"상관없어."
아르센의 옆에 내려놓은 작은 볼 속에 여전히 많이 남은 산딸기가 보인다. 망 보면서 입 심심하면 먹겠다며 가져간 것이었다.
- 이 정도 색으로 익은 것을 드시면 됩니다. 덜 익은 것은 셔서 형님 못 드십니다. 그리고 비슷하지만 저렇게 생긴 것은 산딸기 아니니까 드시면 안 되고요. 산딸기는 벌레가 많이 꼬이니까 잘 보고 드세요. 물론 형님이 저런 것 손수 따다 드시느니 그냥 굶을 분인 건 알지만요.
산딸기 볼 옆쪽으로 눈을 조금 더 돌리니, 여전히 미동도 않고 잠든 칼리안이 보인다.
"······ 그 때가 있어서 지금이 있는 것도 알아."
제 손이 얽힌 일 때문에 아직도 숨이 차오르는 놈.
그런 놈한테 무슨 말을 해줄까 하다 그냥 지금의 일과 너는 상관없다는 말만 해줬었다.
그러고 보니 칼리안은 플란츠를 보면서 '그래봐야 완두콩은 완두콩 색'이라 했었는데. 놈이 한 것처럼 빨간 눈을 두고 말하자니 오래전에 했던 짓이 있어 차마 눈을 가지고는 더 말을 못했다.
그래봐야 넌 시커먼 색이다 하기에는 어감이 아무래도 영 좋지 않은 것 같아서 그렇게도 말을 못했다. 그래서 그냥 상관없다는 말만 해줬다.
그러다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궁금한 것도 있고."
빨간색 말고 까만색도 말고.
놈은 원래 무슨 색이었을지.
그래. 그것이 궁금해졌다.
놈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았고 놈이 언제 죽었는지도 알았는데 놈이 왜 죽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놈의 이름도 몰랐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놈이 뭔 색이었는지도 몰랐다.
칼리안이 기억하는 플란츠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보다도 이젠 그 쪽이 더 궁금해져서, 이제는 진짜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뭐가 궁금하십니까."
"잘 거야."
"네. 주무십시오."
플란츠에 대한 호기심은 참 빨리 접은 아르센이 산딸기 몇 개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 사이 플란츠는 정말로 잠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어느새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아무것도 없는 세상 속에 오로지 빛이 가득한 꿈을 꾸었다.
"······ 님."
그 누구도 없는 곳에 밝은 빛만 가득한 꿈을 꿨다.
그 속에 홀로 남아 세상에 온통 가득한 빛을 손에 쥐어도 보고 발로 쓸어도 보고 말도 걸어 보고 눈으로 들여다보기도 하는 꿈을 꾸었다.
"형님."
그런 꿈을 꾸었다.
"형님. 일어나십시오."
깜빡, 하고.
도무지 떠질 줄 모르고 감겨있던 눈꺼풀이 비로소 올라갔다. 어느새 밝아진 하늘을 위에 둔 채로, 새빨간 두 눈이 플란츠를 불러내고 있었다.
플란츠가 칼리안을 올려다보다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깊이 주무시네요. 혹시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말고."
늦도록 일어나지 않는 플란츠를 깨운 칼리안이 다른 말 없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한참동안 눈만 깜빡이던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별빛이 가득해서."
대우받기 좋아하는 어느 국왕의 것과 꼭 닮은.
그리고 시나스타를 꼭 닮은.
그런 빛이 한가득이라.
"그런 곳에 혼자 있다가. 깼는데."
"······ 일어나지 않을 일을 꿈꾸셨습니까."
이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그것을 보던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랬군."
"네."
곧 플란츠의 곁에 따스한 마력이 불다 사라졌다.
밤새 불어온 바람에 붙은 흙먼지도, 흐트러진 머리도, 구겨진 옷도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만 이미 물이 완전히 배어버린 산딸기 자국만 빼고.
"일어나셨으니 식사하십시오. 고기 맛있습니다. 형님께서 잘 잡아주신 덕분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잠깐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꿈 속의 빛을 떠올려보다 피식 웃었다.
"그래."
그나저나 별빛이라니.
완두콩 색이라 놀림받은 것을 갚아 줄 수도 없겠네.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