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35화 (336/527)

제59장. 의외로 서툴러서(5)

때로는 고요하다.

때로는 소란하다.

언젠가는 지나치게 느긋한 것이 아닌가 싶다가도 또 언젠가는 유난스럽게도 조급하다 여겨지니, 그것을 두고 과연 고요하다 해야 할지 아니면 소란하다 해야 할지. 모두 아니라면 그저 흐른다 해야 할지.

- 틱, 톡, 틱, 톡.

초침이 지나치는 소리에 한 번 귀를 기울이면 좀처럼 멀어지질 않는다. 그것으로부터 귀를 멀리하려 할 수록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때문에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가던 책 위에서 눈길이 멈춘지도 오래 되었다.

시계 소리.

고요하다가도 소란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 탓에.

저도 모르게 어느새 집중이 흐트러진 탓에.

들고 있던 책을 소리없이 덮은 란델이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와 같이 굳게 닫힌 창 밖이 어둡다. 때문에 얼룩 하나 없는 창문은 바깥 풍경을 보여주기보단 오히려 밝은 거울처럼 방 안을 비췄다. 고풍스러우나 단조로운 방, 커다란 책상, 그 앞에 앉은 란델의 모습을.

- 달칵.

찻잔을 드는 작디작은 소리가 꾸밈없는 방을 잠시 울렸다. 차를 준비해 준 시종 덴이 나간 이후 처음 듣게 된 소음이었다.

그만큼 조용했다.

때로는 발걸음 소리가, 언젠가는 대화 소리가, 드물게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또 간혹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던 체르밀 궁은 더할 나위 없이 적막하다. 본디 적막했던 방이었으나 밖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사라지니 더더욱 삭막하다.

그러니 체르밀도 저 시계와 같았다.

때로는 소란하고 때로는 고요했으니.

- 달그락.

내려놓는 찻잔에서 두 번째 소음이 울렸다.

말린 자몽의 향이 소음을 벗어나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그 향기를 눈으로 짚어보려는 듯. 란델은 창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에서 눈을 떼 시계로, 책상으로, 덮어 둔 책으로, 찻잔으로, 찻잔을 놓은 손가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자몽 싫어합니다.'

이미 아는 사실을 구태여 입 밖으로 옮기던 붉은 두 눈이 떠오른 것은 그 향기 때문일지. 아니면 시간이 흐르는 소리 때문일지.

짙푸른 두 눈이 다시 움직였다.

새빨간 루비로 만든 한 송이 장미로 장식된 검은 자개 상자가 보였다. 들어온 선물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모두 다 버리라 이야기하던 중 눈에 띈 검은 상자. 누가 보낸 것인지 보란듯이 꾸며진 모양새의 그것은, 당연히 칼리안이 보내온 생일 선물이었다.

열어보든 말든 그냥 버리지는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했으므로, 란델은 그 상자 하나만은 놔두라 했다. 그 뒤 상자를 열지도 않고 책상 한 쪽에 올려 둔 채 두 달여를 보냈다. 버리지도 않겠지만 확인하지도 않은 채 내버려 두리라는 사실을 알면서 보낸 선물일 테니 제 때 꺼내지 않으면 못 쓰게 될 물건이 들어있지는 않을 터였다.

- 탁.

문득 듣게 된 시계소리 때문에, 그 소리를 듣고 집중이 흐트러진 까닭에. 자몽의 향에서 혈육의 새빨간 눈을 떠올리게 된 탓에.

상자를 집어 든 란델이 뚜껑의 잠금쇠를 비로소 풀었다.

선물 담은 상자만으로도 이미 값을 따지기 힘들 귀중품이었으나 이 왕궁에 칼리안만큼 돈 많은 사람도 없거니와 란델만큼 칼리안이 쓴 돈에 대해 관심없을 사람도 없었다. 그랬으니, 잠금쇠 푸는 손길은 비록 조용했으나 조심스럽지는 않았다.

- 딸깍.

굳게 닫혀있던 것이 열리는 소리가 방을 울린다.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덮어두었던 검은 실크를 걷어낸 란델이 한동안 안을 들여다봤다.

예상한대로 축하 메시지가 담긴 카드 따위는 없었다. 정성을 담든 형식을 담든 어차피 봉투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휴지통이나 벽난로에 들어가리라는 것을 란델만큼 잘 아는 칼리안이 아니던가.

대신, 서로 다른 크기와 기능의 원예용 가위들이 보였다.

안그래도 값비싼 은색 미스릴의 열 배는 호가하는 황금빛의 희귀 미스릴. 진귀한 보검을 만들어도 아깝다 여겨질 그 재료를 가져다 장미 가지 잘라낼 가위로 만들었다. 화려한 문양이 보기 좋게 세공된 금색 손잡이에 짙고 짙은 빛의 사파이어 장식. 누가 보아도 란델 하나를 염두에 두고 제작한 물건이다. 그렇게 멋들어지게 만들었음에도 혹시나 알아보지 못할까봐 란델의 이름까지 잘 새겨 놨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값어치를 가졌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물론 어떤 대가를 바라고 건넨 뇌물은 아니다. 뇌물이라 하기엔 칼리안이 바라고 란델이 이뤄줄만한 것이 없었으니까. 그러므로, 지나칠 만큼 많은 돈을 들였다 하나 명백한 선물이었다.

다만 그것이 과연 정성과 마음을 대신해 돈만 쏟아부은 형식적인 선물일지. 아니면 그 정도의 돈을 쏟아부을 만큼 정성과 마음을 들인 선물일지.

"참으로······."

무료해하지 말고 둘 중 어느 쪽의 선물일지에 대해 고민이나 해보며 지내라는 의미임을 알아들었다.

- R. S. Cyries

그리 좋아하는 장미 잘 다듬으면서.

그 이름 사이에 '루' 한 글자 더 넣을 생각 말고, 그 한 글자 가져갈 생각 잊어버리다 혹여 긴 이름의 끝자락까지 잊어버리는 바람에 다른 나라 갈 생각도 말고.

카이리스에서, 앞으로도 계속.

"너다운 짓을 하는구나."

자신의 눈을 꼭 닮은 다크사파이어를 내려다보다 조용히 중얼거린 란델이 가위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실크 덮개를 다시 올려둔 뒤 상자 뚜껑을 닫았다. 그 후에는 본래 있던 책상의 한 구석에 도로 밀어두었다.

다만 잠금쇠는 다시 채우지 않은 채였다.

* * *

아르센은 함께 나서지 않았다.

기세좋게 활을 집어들고 동생 먹을 고기 잡아다 주겠다며 나선 왕세자의 옆에서 얼음창이나 슉슉거리며 사냥감 새치기를 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곱게 놔줬다.

어쩌다보니 아델리아와 함께 세르제인이 사라져버리게 된 바람에, 기절시켜 두었던 텐실의 신성기사들이 수중에 들어온 까닭이다. 귀찮으니까 그냥 어디 조용히 묻어버리고 플란츠의 사냥이나 방해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이곳이 세크리티아라서 그리 하지 못했다.

그래서 체이스에게 연락을 했고, 곧 인근의 변경백이 찾아와 그들을 인계해 가기로 했다. 이후 벌어질 일은 세크리티아와 텐실 사이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었으니 기사들을 넘기고 대략의 상황을 전해준 뒤에는 굳이 칼리안 일행이 신경 쓸 필요는 없을 터였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멀찍이 한 묶음으로 칭칭 감아놓은 신성기사 넷과 아르센을 내버려 둔 칼리안과 플란츠가 숲 속으로 들어갔다.

"세르제인을 카이리스로 들이는 것에 대해 전하께 말씀드릴 겁니까."

"왜."

"아델리아에게 주기로 한 것이 뭔지 알아내려 하셨던 것 같은데요. 거래 조건을 알려주면 카이리스 입국을 재고하겠다고요."

"맞아."

"그런데 왜 아직 결정을 못하셨습니까."

"어쩌다보니."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으니 마음을 정해두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은."

"네. 생각해보세요."

"알았어."

지난 겨울에 떨어져 여전히 쌓인 마른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한창 돋아난 새 잎의 풋내가 가득하다. 겨울과 봄을 한꺼번에 느끼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의 기사만 귀가 밝은 줄 알았더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미 들은 거잖아. 세르제인이 한 말."

"아······ 티 납니까."

"티 나."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리에만큼은 아니지만요. 오러를 다루게 되면 이런 저런 것들이 좋아지게 마련이라서."

물론 키리에만큼은 아니었으나, 오러를 다루는 이들의 청력은 꽤 좋았다. 절벽 위에 선 채 바닷속의 고래 울음을 듣고 먼 곳에서 오가는 두 왕세자의 대화를 들을 수 있을 만큼은 되었다.

"네. 적당히 들었습니다. 아델리아가 세르제인에게 어머니 나무의 위치를 알려 주면, 세르제인은 무엇을 해 줄 지에 대해서요."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대답. 세르제인.

- 모르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는 걸 알 나이는 될 텐데.

- 내가 긴 말 싫어하는 것도 알 때가 되었을 텐데.

- 그쪽 치유사가 그 돌을 알아봤다던데. 그쪽도 알고 있나.

- 검은 돌. 알아.

- 그 돌을 만드는 재료. 그것을 궁금해 하기에 알려주겠다 했다.

- 넌 그걸 어떻게 아는데.

- 세자 저하. 나 말고 진짜 세르제인 세자 저하께서 알고 계셨으니까.

- 뭔데, 그게.

- 시간. 남은 시간.

조금 전 오간 대화가 고스란히 머릿속에 떠올랐다.

- 설명.

- 혹시 알고 있나. 참 이상하게도 세크리티아에는 큰 불이 많이 났었다던데, 생존자는 항상 없었고. 그런데 이번에 세크리티아의 새로운 국왕 전하께서 그 동안 무고하게 죽은 이들에 대해 알렸지. 선왕의 눈 밖으로 벗어난 이들이 어떻게 됐었는지에 대해서.

- ······ 그게 왜.

- 기사들은 피 냄새를 맡는 방법을 배우지. 더 살아있을 수 있는 생명이 다른 이유로 죽을 때 남기는 그 특유의 피 냄새. 그것과 비슷하다. 더 살아있을 수 있는 생명이 죽을 때 남긴 것을 모아서 만든 가짜 신물이 그 돌이라고 하셨다. 거기까지 알아낸 뒤에 세자 저하께서 습격을 당하셨던 거고, 모아두셨던 자료는 전부 사라졌다.

기억 속 대화가 칼리안에게 들릴 리 없는데도, 플란츠는 생각을 미뤄내보려 애썼다. 아르센에게 이야기 한대로 오늘 알려주고 싶은 내용은 아니었으니까.

- 처음에는 제온의 전사들을 밑에 두기 위해서 이런 저런 선물을 보냈다던데. 지금 내가 잘 쓰고 있는 변장 용품을 포함해서.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텐실의 치유사를 요구했다 하더군. 제온 쪽에서 이곳 선왕의 건강 상태를 눈치 챈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테지. 그 뒤에 제온에서는 그 '재료'를 넘기도록 거래 조건을 바꿨던 것 같다. 어차피 하고 있던 숙청이었으니 선왕 입장에서 밑질 것이 없지 않았겠나.

- 죽은 이들의 시신에서 나온 것을 팔고 대가로 텐실의 치유사를 받으려 했다는 말인가.

- 그렇다.

'과거'의 베른 혹은 '지금'의 테일란이 가지치기를 한 뒤 남겨진 시신들에서 검은 돌의 재료를 모아다 제온에게 건넸다는 소리다. 데블란이.

생각을 미루려 해도 좋은 머리는 착실하게 몇 시간 전의 대화를 되짚어주고 있었다. 말 안 듣는 동생 놈이 어느새 멋대로 들어버리고 말았다지만. 아델리아가 그런 식으로 장난만 치지 않았다면 이미 이야기를 했을 테지만. 그래도.

하루 정도는 몰라도 되지 않았을까 했다.

"사실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의심 많은 데블란이 카스트린 경을 체이스 형님에게 바로 넘긴 이유에 대해서요.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데블란이 제온과 어떻게 연락을 해왔는지는 알아냈어도 제온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었는지는 몰랐지 않습니까. 이제라도 알게 됐으니 궁금증은 해결됐습니다."

그런 플란츠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꺼냈다.

"제가 있었을 때에는 저와 카스트린 경이 체이스 형님 편에 함께 설까 걱정되는 마음이 더 컸을 테니 카스트린 경을 그냥 옆에 두었던 거겠죠. 그런데 이번에는 제온의 전사들을 곁에 둘 수 있었고 저도 없었으니 그걸 믿고 카스트린 경을 체이스 형님에게 선물처럼 보냈던 거고요."

"그래."

"곁에 두기에는 불안하고, 멀리 두기에는 믿을 수가 없었나본데······. 새삼 우습네요, 데블란이 가졌던 믿음의 기준이."

"제온과는 서로 지켜야 할 비밀로 얽힌 신뢰관계가 있고. 카스트린 경과는 그런 것이 없고."

"네."

칼리안이 조소를 머금었다.

"처음에는 증거가 남는 것을 없애려고 불을 질렀고. 나중에는 사라진 것을 감추려고 불을 질렀나 봅니다. 제가, 그리고 카스트린 경이 만든 죽음의 잔재 위에."

가만히 발을 옮기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너랑 상관없어."

칼리안의 발이 잠시 멈췄다 소리없이 다시 움직였다.

베른과는 상관없었을지 모른다.

과거의 데블란은 이번처럼 오랫동안 체이스와 마주 서지 않았다. 그러니 과거에는 정말 단순히 증거 인멸을 위해 불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만약 아니었다 한들 베른과는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베른은 몰랐으니까. 그러나 그렇다 하여 지금까지도 정말 연관이 없나. 베른이 사라짐으로 인해 생긴 이번 시간대의 일은, 베른과 관련이 없나.

그 역시 상관이 없나.

검은 돌과 베른은 정말 상관이 없나.

베른이 없어졌으니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사냥감을 하나도 못 찾았다. 숲이 텅텅 빈 것 같아서. 두려움을 보여주는 곳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것마저 텅텅 빈 것 같아서.

"상관없다고."

"······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거짓말을 그리 잘 알아본다는 내 동생은 왜 늘 같은 것을 되물어 보는지."

"의외로 서툴러서요. 안도하는 것에."

- 툭.

쓸데없는 생각임을 알면서도 데블란과는 다른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이 또 미련한 생각을 하고 있던 칼리안의 등에 무언가가 닿았다. 한 발을 앞서 나가던 칼리안이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멈춰 선 플란츠가 긴 화살을 손에 들고는 칼리안의 등을 툭 건드리고 있었다.

"당신이 없어져서 상관없다고 안심시켜주는게 아니라 상관없는 일이라서 상관없다는 건데."

미련한 동생 놈이 혼자 무슨 생각을 했을지 뻔하다는 듯, 낮은 목소리를 낸 플란츠가 손에 들린 화살 끝을 사선으로 쭉 내렸다. 칼리안의 뽀얀 등짝에 난 흉터를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있어야 될 게 없어진 대신 없어야 될 게 생기기도 하는 것 아닌가. 살다 보면."

애써 숨긴 것이 괜한 짓이었음을 깨달은 칼리안이 헛웃음 소리를 냈다. 저 망할 형님의 쓸데없이 좋은 기억력은 죽을둥살둥 싸우다 스쳐 본 상처도 고스란히 기억을 하는 모양이다.

하긴 그렇겠지.

시간 멈춘 것도 알아내는 머리인데 그걸 까먹을리가 없지. 그나저나 상처는 상처고 흉 생긴 것을 알려준 가벼운 입은 대체 누구 입인지부터 좀 알아내야 되겠다고.

아무튼 그것부터 알아내서 확 그냥.

"히나가. 흉터 생겼을 거라고."

아무튼 우리 히나는 어쩜 그렇게 진단도 잘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 히나가 언제 내 뽀얀 등짝까지 걱정했나보다. 이렇게 똑똑하고 마음씨도 어여쁜 우리 히나가 대체 어디에서 뚝 떨어졌나 그것도 도통 모르겠다.

이십대 후반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연식의 얼굴이 되어서는 헤실헤실 웃고 있는 동생 놈을 보며 깊디 깊은 한숨을 내쉰 플란츠가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팽팽하게 잡아당긴 시위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소리를 냈다. 한동안 그것을 잡은 채 앞을 보던 플란츠가 손의 힘을 풀었다.

- 피잉······!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소리, 그리고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들린다. 달빛 하나에 의존한 채 수풀 속의 야생 닭을 잘도 찾아내 맞춰냈다. 완두콩이.

- 사박.

칼리안이 소리 난 쪽을 향해 걸어갔다.

겨울 내내 잔뜩 마른 나뭇잎이 발에 밟혀 사박사박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칼리안의 발 밑에서. 그리고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났다.

"저는 활 안 들고 왔으니까 사냥 내기에서 지금 잡으시는 것들은 빼주셔야 됩니다. 은근슬쩍 더하시면 안 됩니다."

"······ 알았어."

"토끼도 맛있는데. 잡아주시면 안 됩니까."

"싫어."

"그럼 멧돼지라도요."

"닭은."

"한 마리로 모자랍니다. 배 많이 고파요. 열심히 싸우고 오느라."

"반말."

"저 배고파요, 형님."

긴 한숨 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저벅거리는 발소리, 사박거리는 발소리가 났다.

변경백에게 신성기사들 다 인계하고 난 아르센의 앞에서는 타닥타닥 모닥불 소리가 났다.

"도대체 멧돼지를 잡아오시는지 길러오시는지 모르겠군."

뭐. 같이 온 일행이 있다가도 없어지곤 하는 법이니까.

살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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