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장. 의외로 서툴러서(4)
익숙하지 않은 것.
평소와 다른 것, 쉬이 상상하지 못하는 것, 대면한 적 없던 것.
익숙하지 않은 것을 대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이곤 한다. 호기심을 보이거나, 혹은 두려움을 느끼거나.
자신의 몸 속을 훑어보는 낯선 기운을 느꼈을 때 아델리아는 그 빛을 보냈던 하프엘프에게 분명한 호기심을 느꼈다. 감히 겁도 없이 대마법사의 속을 들여다본다는 생각도 했고 한 눈에 심장 속의 돌에 대한 것을 알아낸 듯한 반응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래서 아델리아는 그 하프엘프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관심을 숨김없이 드러냈었다.
그 반면.
- 카가강! 카아앙! 카강, 캉!
새빨간 궤적을 눈에 담을 때면 어느새 자신의 심장과 목을 향해 날아드는 단검들. 단언하건대 그것 역시 아델리아가 그 어느 곳에서도 본 적 없던 낯선 힘이었다.
- 쌔애액!
- 카드드득!
그 힘을 직접 맞닥뜨린 지금 심정은, 분명한 두려움이었다. 물론 시스파니안을 앞에 두었을 때 느낀 공포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스파니안은 인간 이상의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에 비해 앞에 선 이는 인간이다. 그것도 아델리아보다 훨씬 적은 세월을 살았고 마력 역시 크게 대단치 않은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을 앞두고 느껴지는 감정이 생소하다.
오래 마주하고 싶지 않은 힘,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쟨 대체 뭐야?"
어머니 나무의 뿌리를 상하게 하든 말든.
대노한 시스파니안의 공격을 받든 말든.
저 빠른 발을 디딜 틈이 없어지도록 이 숲의 바닥을 다시 부숴버릴까, 화염의 기둥이 치솟고 땅이 꺼지는 와중에도 저렇게 끝없이 달려들 수 있을까. 돌의 힘을 이용해서라도 이 숲의 중력을 다 망가뜨려버릴까. 땅에서 뽑아낸 물줄기로 후려치고 하늘에서 번개를 내리꽂을까.
일단 공격을 해 볼까. 그렇게 하면 두려운 마음이 가실 텐데.
"한가한가봐, 넌. 난 아닌데."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새빨간 눈동자에 즐거운 기색이 가득하다. 아델리아가 이 자리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서 저러는지, 그런 계산 없이 정말 이 싸움이 재밌는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양 팔에 돋았던 소름이 가시는 것을 느낀 아델리아가 재빨리 마력을 운용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단검으로부터 가까스로 몸을 뺐다. 워프 직전, 목 대신 잘려나간 셔츠 칼라에 눈을 둘 시간이 없었다.
- 우우우웅!
칼리안의 손에 들린 붉은 검이 잠시 빛을 발했다.
마치 세렌티 신전의 가장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사정없이 쪼개놓은 듯한 모양새로, 혹은 소드마스터의 오러를 버티지 못한 기사들의 철검처럼. 긴 검이 조각조각 나뉘었다.
수많은 날붙이로 변한 오러 조각들이 선득한 빛을 내며 공중에 떠오른다.
앨런에게 전해들은 바 있었으므로, 칼리안은 절대로 땅을 파헤치지 않았다. 땅 속의 그 무엇도 건드리지 않았다. 어딘가 묻혀 있을 어머니 나무의 뿌리를 건드리는 바람에 시스파니안이 끼어들기를 바라지는 않아서였다.
끼어든다면 싸움이 끝날 테고, 그렇게 된다면 오랜만에 제대로 날뛰는 재미도 끝날 테니까.
- 쉬이익!
- 쉬익!
대기가 진동한다.
회오리치며 주변의 나뭇가지와 잎을 모조리 끌어들이는 소용돌이 속으로 조각난 오러들이 함께 빨려들어갔다.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무섭게 회전하는 작은 날에 짓이겨지더니 이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모습이 되어 사라져갔다.
- 쿠구구궁······!
대지가 진동한다.
고작 4서클 마법일 뿐인 바람의 회오리가 인근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분쇄하는 것을 눈 앞에서 생생하게 보게 된 경험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내가 한가해 보여?"
"한가한 게 아니면, 두려운 건가."
아델리아의 눈빛을 이번에도 정확히 읽은 칼리안이 웃었다.
앞에 있는 이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어느 곳을 어떻게 찔러야 가장 아픈지.
사람이 어떤 때 큰 두려움을 느끼는지.
그래. 칼리안은 잘 알고 있었다.
"서클이 몇 개든······. 이렇게 느려서야."
참 많이 겪어봤던 탓에.
어쩌다보니, 이제는 없는 뱀 덕분에.
- 따악!
소름이 돋는다.
등줄기를 훑고 지나간 서늘한 시선 때문에, 사방으로 갈라져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저 회오리 때문에.
그래서 아델리아는 자칫 잊을 뻔했다.
앞에 선 이가 고작해야 네 개의 서클을 가진 마법사라는 것도 잊을 뻔했고 자신의 서클이 그보다 많음을 잊을 뻔했다. 8서클의 대마법사를 상대로도 이렇게까지 동요하지 않았음을 생각하지 못할 뻔했다.
- 화르륵!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던 칼리안의 회오리 속에 아델리아의 불이 스몄다. 네 갈래로 갈라진 회오리 안에서 칼리안의 오러 조각만큼 빨간 불길이 휘몰아친다.
칼리안의 마법 속에 자신의 것이 깃들었음을 확인한 아델리아가 손을 놀렸다. 곧바로 짙고 짙은 마력이 칼리안의 힘을 잠식했다. 불길을 만들어낸 마력의 속성을 다른 것으로, 칼리안이 보낸 것과 똑같은 바람의 기운으로 바꿔버렸다.
- 우우우웅!
칼리안이 만든 것에 자신의 힘을 집어넣은 아델리아가 손을 놀렸다. 아델리아를 향해 날아들던 바람의 회오리를 숙주 삼은 새로운 힘이 이제 칼리안을 향해 다시 날아갔다.
손 한 번을 휘저을 것도 없이 회오리 속에 든 오러 조각을 흩어버린 칼리안이 발을 박찼다.
- 쿠아앙!
- 콰앙! 콰아아앙!
방금 전까지 칼리안이 있던 자리에 회오리가 꽂힌다. 대지가 깊이 파이고 흙과 돌이 사방으로 날아간다. 물론 칼리안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 휘이익!
또 다른 바람이 일었다. 그것을 느끼기가 무섭게 아델리아가 워프했다. 방금 전까지 회오리가 몰아치던 곳을 내버려 둔 채로 멀찍이 떨어진 바위 위로 올라갔다.
"여기."
여지없이 목덜미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재빨리 몸을 돌려 뒤를 살펴본들 아무도 보이지 않을 것이 뻔하다. 그래서 아델리아는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마력을 운용했다.
앞.
앞이다.
- 화르륵!
칼리안의 위치를 확인한 순간 아델리아 쪽에서 거대한 화염구가 쏘아지듯 날아갔다.
앨런 역시 같은 수를 썼었다. 때문에 말을 마치자마자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한 칼리안이 붉은 검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지체없이 몸을 날렸다.
마치 환영이 일듯, 먼 곳에 나타난 아델리아의 그림자가 일순 사라지더니 사방에서 나타났다. 동시에 만들어진 아델리아의 환영들이 일제히 칼리안을 향해 바람의 칼날을 날려 보냈다.
- 쉬이익! 쉬익!
오러의 힘이 담긴 붉은 실드가 칼리안을 감쌌고, 그 직후 바람의 칼날들이 실드에 막혀 사라져갔다.
- 카가가강!
- 카강, 카아앙!
수많은 마법사들의 손에 이번에는 타오르는 화염의 기운이 어렸다. 비록 환영이라 하나 방금 전 칼리안을 향했던 칼날들과 같이 불덩이 하나하나에 강한 힘이 담겨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짧게 숨을 몰아 쉰 칼리안이 마력을 운용하며 발을 박찼다.
- 우우웅!
십수 개의 붉은 칼날 파편이 허공에 둥실 떠올라 한 방향을 향해 날아간다. 칼리안에게 화염구를 날려보낼 준비를 마친 환영들, 백발과 흑적색의 눈을 지닌 마법사들. 그들 사이에 섞여 있는 단 한 명의 진짜 마법사를 향해서.
- 쌔애애액!
환영과 진짜 모습을 곧바로 구분해 낸 칼리안을 본 아델리아가 표정을 굳히며 워프했다. 그 즉시 방향을 바꾸어 다시 날아드는 파편들을, 실드를 펼쳐 재차 막아낸 아델리아가 말했다.
"이래서 칼 잘 쓰는 사람들은 별로라니까."
수많은 환영들이 일제히 흩어지듯 사라진다.
한 번 더 숨을 몰아쉰 칼리안의 손에서 짙은 붉은 빛이 쭉 늘어났다. 대꾸하는 대신 계속 싸우겠다는 뜻이었다.
아델리아의 고개가 세르제인 쪽으로 돌아갔다.
정확히는 세르제인을 마주보고 있던 플란츠와 아르센을 향해서였다. 둘을 향해 시선을 두었던 아델리아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마력을 움직였다.
칼리안을 옆에 두고 칼리안의 일행들을 건드릴 생각을 할 줄은 몰랐던 세르제인의 표정이 굳는다. 아르센의 실드 위에 한 겹이 더 둘러진다.
칼리안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뭉클!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세 명을 감싸안은 실드 앞에, 실드 밖에, 칼리안이 서 있었다. 칼리안이 앞을 막아선 것은 이미 여러차례 본 것이었으니 크게 이상하거나 불쾌할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쾌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칼리안에게 마력의 창이 꽂힌 것도 아니었고 잔 상처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바람이 휘몰아치지도 않았고 중력이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하다.
"······ 흑마법."
그 불쾌함의 이유를 알아낸 플란츠가 작게 혼잣말을 했다. 방금 전 아델리아가 자신과 아르센을 향해 무엇을 쓰려 했는지를 눈치챈 탓에, 찌푸려진 플란츠의 얼굴이 되돌아오지 않았다.
분명 칼리안이 아델리아의 흑마법을 맞았다.
플란츠와 아르센을 가로막고 대신 맞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하."
앨런 마나실의 앞에 검은 나비를 만들어냈다던 흑마법을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칼리안의 곁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플란츠와 아르센 쪽을 향해 선 채 잠시 눈을 감았던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서서히 눈을 떴다. 그 얼굴에 긴 웃음이 그려진다. 그것을 본 세르제인이 서둘러 말했다.
"돌아가, 아델리아."
아델리아의 입이 다물린다.
세르제인의 말을 들었을 텐데도 세르제인의 얼굴과 칼리안의 등, 그리고 다른 두 명을 바라볼 뿐.
아델리아가 움직이지 않자 세르제인이 다시 말했다.
"돌아가."
말도 안 되는 것을 보았다는 듯한 얼굴이 된 아델리아가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
- 화아아악!
분명 등을 돌리고 있던 칼리안의 검이 아델리아의 목을 향해 치달았다.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아델리아를 향해 돌아선 칼리안이 검을 날렸다.
지금껏 갈무리해두었던 살기를 고스란히 맞은 대마법사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다.
칼리안의 눈과 시선이 맞닿았다. 실드를 쳐야 한다는 생각을 잊었다. 워프하여 몸을 피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목을 향해 날아드는 검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만 보였다.
그러다 종내에는.
- ······ 서걱!
하고.
아델리아의 목을 지나 옆에 있던 나무를 통째로 베어낸 붉은 검이 흩어져 사라졌다.
긴 검이 아델리아의 목을 베어냈다.
정적이 흘렀다.
- 깜빡.
따끔한 감각이 든다.
붉은 빛이 감도는 검은 눈 위로 눈꺼풀이 한 번 깜빡였다. 깔끔하게 잘려나가 바닥을 뒹굴 것이라 생각했던 머리가 여전히 목 위에 얹혀 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델리아의 손이 움직였다. 플란츠 쪽을 향해 뻗었던 팔을 움직여 자신의 목 언저리를 더듬었다. 다소 깊이 베인 상처에서 진득한 피가 묻어나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 뿐. 아델리아의 목은 잘려나가지도 않았고 바닥을 뒹굴지도 않았다.
"······ 두려움이라는 건 그런거지. 겁을 주려면 이렇게 해야지. 아델리아."
언젠가 데블란의 심장을 관통했던 것처럼 아델리아의 목을 거짓으로 벤 이의 가는 미성이 아델리아의 귓전을 울렸다.
"그런 장난 말고."
죽지 않았다.
서늘한 검이 목을 지나치는 감각은 분명히 남아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한 번 목이 베일 것 같은 기분에, 칼리안을 보던 아델리아가 비로소 웃었다.
이제서야 호기심을 느꼈다.
진짜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저 건방진 왕자에게.
세상 어떤 것에도 거칠 것 없던 아델리아가 자신의 목 대신 바닥을 뒹구는 나무 줄기를 쳐다봤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은 칼리안의 주변을 바라봤다.
그에 대한 짧은 감상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연 그 때.
- 파아앗!
눈이 멀 듯한 빛이 터져나왔다.
수많은 빛줄기가 발 밑에서 하늘을 향해 뻗어올라갔다. 다른 일행들은 물론 아델리아와 칼리안마저 잠시 눈을 감아야 했을 만큼 밝은 빛이었다.
찰나와 같은 시간이 지난 뒤, 숲 전체를 잠식하던 빛이 사라지고 서둘러 눈을 뜬 칼리안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방금 전까지 앞에 있던 세르제인, 그리고 아델리아의 모습이 어느새 사라져 보이지 않고 있었다.
* * *
- 타닥, 타닥······.
나무가 타는 냄새에는 이제 익숙해졌다.
어둠을 잠시 밝히다 사그라지는 불티를 눈으로 좇아보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왕자님께서 베어 낸 나무가 워낙 많아서 장작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눈치가 없는 것인지 화가 난 또 다른 부군단장에게 농담을 건네보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의 말을 흘려 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말을 걸어오는 통에, 아무 말없이 모닥불을 들여다보던 플란츠가 결국 낮은 목소리를 냈다.
"다누인지. 아델리아인지."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사라진 것."
"세르제인과 아델리아가 사라진 것이 다누의 간섭인지 아니면 아델리아의 힘인지 말씀이십니까."
모닥불에 비춰 붉은 기운이 도는 황금색이 된 머리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조약돌을 심장에 품은 것이 지난 번 협회장님과 맞붙었던 지나라는 마법사처럼 여러 속성의 마법을 쓰는 것에만 영향을 주는지, 아니면 제 서클 이상의 힘을 발휘하도록 해주는지 자세히 모릅니다만. 만약 후자라면 세르제인을 끌고 다른 곳으로 워프했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다만 그 정도의 빛이 바닥에서 올라왔던 것을 생각해보면, 어쩐지 제 생각에는 다누가 불러갔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던 플란츠가 주변을 둘러봤다. 애써 복구한 것이 무색하게 다시 초토화된 숲의 모습이 스산하다.
얀과 레릭이 바리바리 준비해 넣어 준 여러 음식들이 이미 아르센의 주머니 속에 차곡차곡 들어가 있었다. 그럼에도 칼리안은 굳이 갓잡은 고기가 먹고 싶어졌다며 둘을 남겨두고 사라졌다. 그리고는 한참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왕자님 늦으시네요. 뭘 잡으러 어디까지 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둬."
짧게 대답한 플란츠가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댔다.
하늘을 가려야 할 나뭇가지들이 사라진 덕에 하늘이 참 잘도 보인다. 별똥별 하나가 뚝 떨어지는 것을 보던 플란츠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실드 치지 말라 했고 실드는 안 쳤다.
몸으로 막지 말라고는 안 했으니 별 말은 못 하겠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나는 것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맨 몸으로 아델리아의 마법을 막아섰는지.
"그 마법, 아마 제가 맞았으면 왕세자이신 부군단장님 앞에서 제 반성문 읽으시는 왕자님 모습 나왔을 겁니다."
그게 아니면 하늘 끝까지 자란 거대 코코라거나, 파란 얼음 꽃 말고 웬 놈이 준 식상한 꽃 들고 있는 에우리아라거나.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들을 떠올린 아르센이 잠깐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마나실 군단장님의 마법을 저도 한 번은 막았었습니다. 왕자님도 그걸 이미 잘 아시는 분이고 말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은 아델리아가 쓴 것이 무슨 마법인지 알고 막아섰을 겁니다. 아니었다면 그냥 두었거나 실드를 더 치셨을 겁니다."
마치 플란츠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아르센이 참견을 했다. 일반적인 공격 마법이었다면 아르센이 그렇게 열심히 쳐 두었던 실드에 막혔을 테지만, 사람의 마음을 밖으로 꺼내놓게 하는 흑마법은 실드에 막힐 리 없으니 칼리안이 대신 맞았다는 소리다.
"아무 말도 안 했어."
"네. 제가 혼잣말 했습니다. 그런데 세르제인이 한 말은 왕자님께 전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고."
"알겠습니다."
다시 침묵이 찾아들었다.
모닥불을 살피던 아르센의 입이 또 열렸다.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안 나오다니. 역시 왕자님은 참 대단하시지 않습니까."
오늘따라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말이 많다.
대답 대신 플란츠의 입에서 긴 한숨이 다시 흘러나왔다.
칼리안이 싸우던 중 세르제인으로부터 듣게 된 말도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정리를 못했다. 그런데 속 복잡해질 일까지 보게 되었다.
"나온 거야. 그게."
사라진 뱀 말고, 이제 상관없게 된 배 말고.
칼리안이 진짜 무서워하는 유일한 것. 그것이 보여진 것임을 플란츠는 안다. 물론 칼리안도 안다. 그러니 그깟 야생 닭이든 멧돼지든 잡질 못하고.
"숲이 텅텅 비었네요, 형님. 그냥 얀이 준비해 준 것 먹어야 되겠습니다."
저렇게 터덜터덜 돌아온 거겠지.
그런 칼리안을 잠깐 쳐다보던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에스티나의 안장에 매여 있던 활과 화살통을 챙겼다.
"뭐 하십니까."
"사냥."
"텅텅 비었다니까요."
"잡아 줄 테니까. 고기 먹자고."
플란츠가 저벅저벅 발을 옮겼다.
잠깐 플란츠를 보던 칼리안이 헤실헤실 웃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