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33화 (334/527)

제59장. 의외로 서툴러서(3)

거짓말은 못해도 거짓말 하는 것은 잘 알아본다.

그 말 역시 거짓말이 아니었다. 칼리안은 정말로 잘 알아볼 수 있었다.

모르고 있던 사실을 방금 전 알았을 때.

아는 이야기에 대해 모르는 척을 할 때.

모르는 척 하던 것을 제대로 들켰을 때.

사람의 눈동자가 어떻게 움직이고 숨은 어떻게 쉬는지. 손은 어디에 두며 몸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발을 어느 쪽으로 물리고 목과 어깨의 근육은 어떻게 되는지. 각각의 상황에 사람이 어찌 반응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정확하게. 그랬으니 거짓을 알아보는 데에 어려울 일이 없었다.

"처음 듣는 이름을 접하는 얼굴이 아니지, 그건. 거짓말 많이 하고 사나본데 그렇다 해도 내 앞에서는 괜한 수고하지 마. 말했잖아. 거짓말은 잘 알아본다고."

그런 재주를 어떻게 익히게 되었는지를 누군가 묻는다면, 플란츠의 말버릇처럼 그냥 어쩌다보니 그리 되었다 대답해야 할 터였다. 온전히 경험에서 우러나온 재주였고 그 경험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칼리안이 묻어 둔 기억들 속을 뒤져보아야 알 일이니까.

어쨌거나 이번에도 세르제인은 거짓말을 했다.

다누의 이름을 처음 듣는 이의 반응이 아니었다. 스스로 말 실수를 한 것을 느끼고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누의 이름을 듣는 그 순간 드러난 세르제인의 면면에서 이미 모두 알 수 있었다.

"한낱 텐실 왕세자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까 했는데. 지금까지 어머니 나무의 이름을 알던 이는 두 명이었거든. 근데 그 이름을 나한테 직접 전해 줬던 퍼런 놈은 나 혼자 만났어. 또 다른 한 명은 내 스승님께서 다른 사람이랑 신나게 싸우다 말고 만나셨어. 그럼 뻔하잖아. 그 이름 주워듣고 너한테 알려 준 게 누구인지."

"눈치가 꽤 빠르군."

"그건 저기, 우리 영민하신 형님 저하 얘기고. 나는 그냥 눈썰미가 좋은 거야. 넘겨 짚고 묻는 말에 넘어간 건 너고."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멀리, 칼리안의 단도가 부딪혀 소리가 났던 곳은 여전히 잠잠했다. 칼리안의 검을 막아 낸 아델리아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나와야지. 아델리아. 나와서 나랑도 놀아야지."

해가 저물고 숲은 푸른 잿빛으로 물들어가던 밤.

"······ 재밌게."

자신의 검이 아델리아에게 무슨 일을 당했는지 잘 전해들었던 소드마스터, 칼리안의 스산한 목소리가 어둠 속을 울렸다.

* * *

분홍색, 연보라색, 연두색, 하늘색, 주황색, 흰색.

색색의 투명한 보석같은 것. 곱게 곱게 간 금가루를 넣고 만든 탓에 이리저리 돌려보면 예쁘게 반짝이는 그것은, 동글동글한 모양의 과일 사탕이었다.

르메인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사탕통을 꺼내놓은 이가, 흉도 많고 굳은살도 많고 햇볕에 잔뜩 그을리기까지 한 굵직한 손가락을 놀렸다. 그리고 분홍색의 사탕 하나를 조심스럽게 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게 무슨 맛일 것 같나, 르메인?"

"그걸 물으려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왔는지."

"그렇게 내 알 바 아니라는 얼굴 하지 말게.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라네."

"그 사탕이 무슨 맛인지를 맞춰보라 말하려 나를 찾은 것이 맞다는 소리인가."

"그렇지. 그런 일이 아니면 내가 이 삭막한 왕궁에 굳이 왜 오겠나?"

르메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피곤하다는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르메인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옆에 내려놨다. 그리고 근 반년 만에 자신을 찾아와서는 분홍색 사탕이 무슨 맛인지 맞춰보라 얘기하고 있는 공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공작의 근신 기간이 너무 길었나보군. 무료함이 지나쳤던 듯 한데."

그 동안 영지에만 머무느라 심심했던 나머지 이제 정말로 미쳐버렸느냐는 소리다.

작년, 제온에 의해 칼리안이 크게 다쳐 드미레아를 찾아갔던 날. 드미레아는 칼리안을 숨기고 플란츠를 인질로 삼은 뒤 에반과 대치했었다. 제온의 잔당이 어디 있는지 그 위치를 찾기 위해서였다.

일이 마무리 된 이후, 왕자를 인질로 삼고 후작과 전면전을 벌일 뻔했던 소공작을 대신해 슬레이만이 벌을 받았었다. 그 해가 갈 때까지 수도에서 추방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 해가 저물고 봄맞이 행사가 끝났다. 그러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 슬레이만이 돌아왔다.

"오자마자 한다는 일이 사탕 자랑이라니."

"그리 말하지 말게. 내가 우리 세리에랑 이것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나?"

큼지막한 웃음을 지어 보인 슬레이만이 손에 들고 있던 사탕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주저없이 그것을 아드득 씹어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진저리를 쳤다.

"으, 이건 아주 아주 신 레몬 맛이었군."

입에 넣어 먹기 전에는 무슨 과일 맛이 나는지 알 수 없는 사탕. 직접 만들었다고는 하나 사탕들이 전부 다 섞여버려서, 슬레이만 역시 방금 집은 것이 무슨 맛인지는 제 입으로 먹어 보아야 알았다. 그리고 지금 먹은 분홍색 사탕에서는 시디 신 레몬 맛이 난다.

도무지 의중을 알 수 없는 행동을 보던 르메인이 다시 말했다.

"내 집무실이 아니라 그대 저택으로 보냈어야 할 것 같은데."

"저택에는 이미 보냈고, 이건 자네 주는 것 아니네. 내 꺼거든. 존경하고 사랑하는 세리에에게 받았지."

자잘한 흠집이 난 불량 사탕들을 모아서 그냥 슬레이만 먹으라며 건네준 것이라는 말은 안 했다.

슬레이만이 이번에는 연두색 사탕을 꺼내 입에 넣었다. 달콤한 망고 향이 입 안에 확 퍼진다.

"내가 그 아이에게 주라며 겨우내내 아몬드 쿠키만 저택으로 보냈다가, 계속 같은 것만 보내느냐며 세리에한테 혼쭐이 났지 뭔가. 그래서 세리에와 고민하다 그 아이가 좋아하며 먹을 수 있을 만한 걸 직접 만들었지. 재밌지 않나? 입에 넣어보지 않고는 도무지 무슨 맛인지 가늠이 안 되는 사탕이라니 말일세."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준 르메인이 대꾸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는지 말 안 할 텐가."

"말했잖은가. 사탕 보여주러 왔다고. 내가 처음 만든 사탕이라 아주 귀한 것이네."

르메인의 입에서 길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곧 르메인이 다시 안경을 집어 썼다. 그리고 서류를 들어올렸다.

슬레이만이 저 고급스럽기 짝이 없는 주석 상자 속의 사탕을 다 처먹고 가든 말든 그냥 무시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르메인. 마나실 후작은 어디에 있나?"

"집무실에."

앨런의 집무실이라면 르메인 집무실의 코앞이다.

"공작이 왔는데 후작 나부랭이가 코빼기도 안비치는군."

"그대가 할 말인가."

국왕 이름 멋대로 부르는 공작 나부랭이를 향한 대꾸에, 슬레이만이 시원한 웃음소리를 냈다.

"온 김에 서클 늘린 것이나 좀 축하해줄까 했더니만."

"그대의 축하만은 필요치 않다 여길 것 같군."

"그럼, 내 예비사위는. 아직 안 오셨나?"

당연하겠지만 칼리안이 이름이다.

잠깐 잊고 있던 사위 타령에 르메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지그프리드 공작가 이름 덕 좀 보겠다 들었다가 아주 뼛속까지 우려지게 생겼다.

"아직 세크리티아에."

"너무 오래 있는 것 아닌가. 셋 중에 둘이나 나가서는."

둘째 아들이 겨울 여행 하겠다며 막내 끌고 다른 나라 가더니, 왕세자 자리 가져간 것도 모자라 정혼까지 했다. 그 뒤에는 그 나라 왕도 바뀌고 해도 바뀌었는데 도무지 집에 들어 올 생각을 않는다.

"빨리 돌아오라는 말은 했나?"

르메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플란츠에게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중간에 니들렌을 통해 몸 조심히 다니라 이야기 한 것이 전부였다. 왕세자위를 받는 것에 대해, 정혼한 것에 대해, 들어올 생각 없이 계속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겨울 나기가 힘들다 하기에."

"겨울 지난지 오래됐네, 르메인."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그렇게 다니겠나 싶기도 하고."

"르메인."

주황색 사탕을 입에 넣고 체리맛을 음미한 슬레이만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 사탕 만들다가 실수한 것이 얼마나 될 것 같나?"

"적지 않겠지."

"내가 스프는 몇 번 만들어봤어도 사탕은 처음이네. 세리에는 더 하지. 긴 창 휘둘러가며 나랑 대련할 줄이나 아는 우리 고운 세리에가 어디 그런 것을 만들어 본 적이 있어야지. 주방장이 우리를 얼마나 많이 혼냈는지 자네는 모를 걸세. 평생 혼날 것을 지난 겨울에 다 혼났네. 그래도 이렇게 만들었지."

첫째 아들을 위해서 쓰디 쓴 약초를 직접 말리고 즙을 내는 일은 그래도 많이 해봤었다. 그런데 과일 즙을 내고 색을 내고 설탕을 넣어가며 단 것을 만들기는 처음이었다.

슬레이만도, 세리에도.

그 슬레이만과 세리에 부부가 누군가에게 혼이 나는 것을 떠올린 르메인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씨익 하고 마주 웃어보인 슬레이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얼굴을 못 보니 그렇게라도 보여줘야지. 우리가 그 애를 얼마나 궁금해하고 생각하면서 겨울을 보냈는지. 애들은 그래야 알아. 말해주고 보여주지 않으면, 저 사람이 나한테 관심을 가진 건지 아닌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네. 모르고, 서운해하고, 겁을 집어먹지. 아이들은 원래 다 그래. 어리니까."

르메인이 서류에서 눈을 뗐다.

"란델 왕자는 이미 다 자라버렸네. 너무 늦었지. 그러니 란델 왕자에게 섣부르게 관심을 두는 것이 독이라던 마나실 후작 말에는 나도 공감하네. 칼리안 왕자에 대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고. 다만 플란츠 왕세자는 아니지 않나. 이미 다 자라서 곧 있으면 아비를 내려다보게 생겼다 한들 자네보다는 어린 아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 아닌가? 꽃향기에도 겁을 내던데 제 아비 냄새라 해서 다를까."

슬레이만이 사탕 통을 몇 번 흔들었다.

주석에 사탕들이 부딪히며 구르는 소리가 꽤 경쾌하다.

"이렇게 시끌시끌하게 티를 내야 전해지는 것도 있네. 걱정하고 있으니 빨리 돌아와라 말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나."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겨듣지."

"그래."

그 사이 입에서 다 녹아 사라진 사탕 대신 하나를 더 먹을까 하는 생각에, 슬레이만이 닫았던 뚜껑을 도로 열었다. 그리고 하늘색 사탕을 꺼내 먹으려다 말고 르메인에게 내밀었다.

"먹을 텐가?"

공작 부부의 손길이 가득 담긴 사탕을 보던 르메인이 손을 내밀었다. 유쾌한 얼굴로 웃은 슬레이만이 직접 책상까지 걸어가 사탕 한 알을 건넸다.

하늘색 사탕에서는 좋아하는 자몽 맛이 났다.

* * *

카이리스 왕궁 북쪽의 숲을 본 적 있다.

전부 다 타버려서 망가진 숲. 그 모습도 플란츠는 잊지 않았다. 그곳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않았다.

- 콰아아앙!

그리고 브리지트 숲 역시 곧 그렇게 되리라는 것도 잘 알았다.

기껏 다시 심어 놓은 나무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 뒤의 나무는 이미 오래 전에 두동강났다. 플란츠가 있는대로 손을 뻗어보아야 둘레를 다 끌어안을 수 없을 두 그루가 그렇게 사라졌다.

- 숲 재건비 청구하십시오. 텐실로.

- 그보다. 마나실 경은 불렀습니까.

- 팔찌 망가졌습니다.

이번에도 아델리아는 칼리안의 팔찌를 제일 먼저 없앴다.

애초에 아델리아를 앞에 두고 앨런을 부를 생각도 없었던 칼리안은 팔찌가 부서지든 말든 신경쓰지 않았다.

- 그럼 카스트린 경을 보내겠습니다.

- 숲이 시끄럽게 될 것 같아서 미리 알려드린 것이지 도와달라 한 것이 아닙니다.

- 압니다, 플란츠 왕세자. 하지만 팔찌가 망가졌다면 마나실 경을 부를 수도 없다는 것 아닙니까.

체이스의 말을 듣던 플란츠가 앞을 봤다.

어디로 향하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든 여섯 개의 붉은 날붙이가 긴 잔상을 남긴다.

순식간에 뻗어나간 단검들이 사방에서 아델리아를 향해 짓쳐들었다. 아델리아는 다른 곳으로 워프하여 그것을 피하는 대신 두터운 그레이트 실드를 펼쳐 공격을 막았다.

- 카강! 카가가강!

마치 금속끼리 마찰하는 것과도 같은 붉은 불티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그 안에 선 아델리아가 짧게 손을 놀리자 붉은 화염이 긴 뱀과 같이 또아리를 틀며 칼리안을 공격했다.

- 따악!

앨런에게 배운 손버릇이 칼리안에게서 나왔다.

손가락이 내는 큰 소리와 함께 거센 바람이 인다.

바닥의 나뭇잎을 사방으로 흩어내며 일어난 바람의 회오리가 넓게 퍼졌다. 그리고 아델리아의 화염을 감싸안듯 휘감으며 하늘로 뻗어 올라갔다. 숲을 모조리 집어삼킬듯 밀어닥치던 화염이 먼 하늘로 솟아올라 허무하게 사라졌다.

- 할만 하니까 먼저 덤빈 겁니다. 내 동생이.

플란츠가 체이스에게 건네던 대답을 마무리했다.

그 사이 칼리안의 신형이 다시 사라졌다.

거의 동시에 칼리안이 밟고 지나간 흙이 움푹 패였다. 중력을 움직인 것이었으나 이미 자리를 벗어난 칼리안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 카아아앙!

곧이어 아델리아의 실드가 휘청인다.

왕궁의 숲에서 앨런과 맞닥뜨렸던 날의 칼리안과 지금의 칼리안은 달랐다. 체력도, 마력도, 힘도, 속도도, 모든 것이 달랐다.

물론 그렇다 하여 앨런과 나름대로 호각을 이루던 아델리아를 이길 만큼 강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앨런과 함께 브리지트 숲 속의 엘프 마을을 초토화시킨 아델리아가 갑작스레 약해진 것도 아니었다.

- 카아앙!

칼리안은 아델리아의 마력 범위에서 계속 벗어나도록 속도를 높여가며 싸우고 있었다.

이제껏 마탑 속에서 제대로 된 검사 하나 마주하지 못한 채 살아온 아델리아의 눈에, 언제 어디에서 뻗어나오는지 알 수도 없는 칼리안의 검이 보일리 만무했다. 게다가 아델리아는 제 힘을 다 쓰지 못하는 채였다. 이곳을 또 망가뜨렸다가는 검은 나비가 다시 올 것임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거기에 더해 플란츠 잘 봐 줄 아르센까지 뒤에 두었으니, 다른 걱정 없이 저렇게 마음놓고 싸움을 건 것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재미삼아 키리에의 목을 조른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마법의 범위에 휘말리지 않도록 떨어진 자리에서, 이번에는 동생 놈 말고 아르센이 몇 겹을 둘러 쳐 둔 실드의 안에 서 있던 플란츠가 세르제인의 검을 멀찍이로 차 떨어뜨렸다.

"하던 얘기 계속 하지."

먼 곳에서 벌어지는 싸움에는 이미 관심 없다는 듯한 느릿한 말에, 세르제인이 실소하며 되물었다.

"동생 걱정 안 되나보군."

"걱정 끼칠 동생 아닌데."

"믿음이 대단하고."

고개만 적당히 끄덕여 보인 플란츠가, 세르제인의 말에 대한 대꾸 대신 본래의 주제를 꺼냈다.

"어머니 나무 만나서 뭘 했는데."

"왜 내가 그쪽에게 추궁을 받고 있는지 모르겠군."

"그쪽 구한 건 저기 내 동생이랑 싸우고 있는 대단한 마법사가 아니라 나라는 걸 잊었나본데. 내가 안 나섰으면 저 마법사가 그쪽 구해줬을까. 그럴 생각이었으면 네 기사들 다 죽도록 그냥 구경만 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세르제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플란츠의 긴 말이 다시 이어졌다.

"예정대로면 제 때 왕궁에 도착했을 것이라 했지. 그렇다는 건 여기 먼저 들렀다 왕궁으로 갈 생각이었다는 소린데. 지금 이 시간에 여기 있다는 건 어머니 나무를 만나다가 시간이 늦어졌거나, 만나려고 찾아다니다 못 만나고 실패했거나."

"그래. 이미 말한대로 어머니 나무를 만나려고 왔다. 못 봤지만."

"어머니 나무 만나서 숲의 길이라도 열어달라 하려 했나. 카이리스로."

"그건,"

"저 마법사는 그쪽한테 어머니 나무 위치를 알려주고, 그쪽은 어머니 나무 만나서 카이리스로 몰래 들어올 방법 찾고. 내 형님 만나는 게 꽤 절실한가 본데. 일단 그렇다 치고. 그럼 저 마법사는 여길 알려주고 그쪽한테 뭘 받기로 했지."

세르제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알려주면. 재고해보지. 텐실의 왕세자를 카이리스에 들여보내도 되겠는지에 대해서. 대신 이쪽 부탁 하나 더 들어주는 조건으로.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플란츠의 한 쪽 입꼬리가 쭉 말려 올라갔다.

- 카가가각!

아델리아의 실드가 찢어지는 비명같은 소리를 냈다.

살짝 눈을 돌려 확인하니, 두터운 실드에 살얼음이 잔뜩이다.

양국의 왕세자가 도란도란 대화하는 것을 듣다 무료함을 이기지 못한 파란 머리 얼음 마법사가 아델리아의 실드를 살짝 얼렸다.

- 콰아아앙!

얼어붙은 실드 위로, 새빨간 오러가 가득 담긴 검이 그대로 내리꽂혔다.

- 쩌저적! 쩌적!

견고하기 이를 데 없이 칼리안의 검을 잘 막아내던 실드에 금이 갔다. 그것을 본 아델리아가 재빨리 모습을 숨긴 뒤 저만치 먼 곳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곳에는,

- 쌔애애액!

사냥감 맞이할 준비가 끝났다는 듯한 붉은 단검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대답. 세르제인."

나른한 얼굴의 플란츠가 세르제인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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