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31화 (332/527)

제59장. 의외로 서툴러서(1)

흔한 것을 좋아한다 했다.

"그럼 베른 자작님 눈에 저건 흔한 거야, 아니야?"

그래서 흔한 것은 질색하는 이가 물었다.

세상 모든 것을 흔한 것과 흔하지 않은 것으로 구분할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궁금한 마음이 들어서 물었다. 그리고 질문을 받은 이, 히나는 한참을 진지하게 고민하다 대답했다.

- 흔한 것, 같아요.

그럼 그렇지. 제아무리 바다 한 가운데에서 보는 모습이라 한들 매일같이 뜨는 해가 흔하지 않을 리 없지.

이런 생각을 한 에우리아가 고개를 주억거리려니 히나의 손이 다시 움직인다.

- 하지만, 그래도, 특별하잖아요.

에우리아가 기억나지 않는 단어를 알아보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을 눈치챈 히나가 수첩을 꺼내 '특별하다'는 말을 써서 보여주었다. 적힌 단어를 본 뒤에야 얼마 전에 익혔던 내용 중 하나를 떠올린 에우리아가 그 손모양을 서툴게 따라해보며 말했다.

"흔한데 특별할 수가 있나."

- 이렇게, 바다를 튼튼이 색으로, 만드는 해는, 처음이니까요.

그 말에는 공감한다. 에우리아 역시 배 위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놓아주기 싫다는 듯 태양의 끄트머리를 붙든 수평선에 둥그런 태양이 죽 늘어났다 다시 동그랗게 변해가는 모습도 본 적 없었다. 히나의 말마따나 떠오른 태양이 푸른 바닷물을 은빛인지 황금색인지 모를 신비로운 빛으로 물들이는 광경 역시 처음이기는 했다.

"하지만 매일 보는 거잖아."

하지만 그렇다 해서 태양이 특별한 것은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에 꺼낸 이야기였다.

- 그럼 협회장님께는, 흔한 것으로, 보여요?

"하루 이틀 걸러 뜨는 것도 아니고 매일 뜨는 것이니 흔하다고 생각했지."

- 똑같은 해가, 뜬다지만, 사실은 매일매일, 다른 해니까요.

"그것도 그런가. 흔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렵네."

지난 밤, 이런 것을 구경하는 데에 큰 취미와 감흥이 없을 에일라가 제일 먼저 자리를 떠났다. 아침이 오면 칼리안을 수행해야 하는 키리에도 휴식을 취하러 들어갔고 그 후에는 히나와 레이첼이 비슷한 시간에 자리를 떠났었다. 마지막까지 버티다 잠깐 눈만 좀 붙이고 오겠다던 아르센은 깊은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그 길로 그냥 죽어버렸는지 몰라도 아무튼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하나 둘 사라져 보이지 않고 에우리아 혼자 남았었다.

특별히 생각이 많은 것은 아니었는데 괜스레 잠이 오질 않았던 탓에, 에우리아는 눈을 붙이러 들어가지도 않고 그냥 먼 바다를 보며 밤을 보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는지 몰라도 바다 위의 어둠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할 즈음, 히나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래서 이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떠오르는 해를 함께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하긴. 바다 한가운데서 일출을 보는 건 처음이니 흔하지 않다 해도 되겠네. 내가 묻긴 했는데 어려운 질문이었어."

나란히 같은 곳을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해도 틈틈이 히나의 손을 보아야 했다. 그것이 일견 불편하고 번잡할 수 있었으나 에우리아는 기꺼이 히나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자고로 사람이 대화를 하려면 서로 쳐다봐야 하는 것 아니겠나. 앞에 멋지게 떠오르는 해가 있다 한들 그보다 중요할 것도 아니었으니.

에우리아가 자신 쪽에 시선을 두자 히나의 손이 다시 움직인다.

- 세상에, 5서클 마법사는, 흔할 수도 있지만. 사실 알고 보면, 모두, 특별한 것처럼요.

마법사들 억울할 말을 가볍게 꺼낸 히나가 생긋 웃었다. 발칸에서 일을 하는데다 주변이 온통 고서클 마법사들 뿐이니 저렇게 말을 하는 것이겠지만 기실 어디 5서클이 흔하던가.

하지만 에우리아는 그것을 대뜸 지적하는 대신 히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사단장님의 전기는, 누구보다, 빠르고, 부군단장님은, 정말 강한데, 사실은, 폭발을 더, 좋아하시고요. 그래서 저는, 한 분 한 분, 특별하다고, 생각해요. 특히나, 협회장님의 5서클은, 더더욱이요.

시전과 동시에 이미 상대의 피부 속을 헤집고 있는 니들렌의 빠른 전기 공격이나 아르센의 엉뚱한 강함을 이야기한 히나의 시선이 에우리아를 향했다.

어디 흔하지 않다 할 뿐일까.

보다 높은, 게다가 검은 돌의 힘까지 쓰고 있던 마법사를 그렇게 허무하리만치 상대해낸 것은 에우리아가 지닌 속성들의 힘 때문이었다. 그것을 두고 어떻게 흔하다 할까.

히나의 말을 대부분 알아들은 에우리아가 튼튼이 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를 또 조금 보았다. 그러다 다시 신기하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히나를 쳐다봤다.

"일출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대뜸 내 속내를 짚네. 우리 베른 자작님이. 내가 언제 주정이라도 부린 건 아니지?"

불쾌해하는 얼굴은 아니었던 터라 히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 아니에요. 그냥, 계속 고민하신 것, 같았어요. 그 날, 오빠 일, 때문에.

"사실 지금까지 살면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이 그거였거든.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 어차피 7서클 넘으면 속성이야 뭘 쌓아왔든 소용없어지는데. 아, 물론 마법 안 배운 놈들한테 들은 소리야. 마법 배운 놈들은 그냥 와, 멋지다 하고 말았으니까. 여하간 번개 하나 만들려고 그런 말 신경 안 쓰고 살아왔고 브리지트 숲에서 지나를 만났을 때까지도 괜찮았는데. 아델리아? 그 백발 성성한 노인네가 너무 강했잖아. 그래서 문득 생각이 나더라고. 내가 그냥 하나만 익혔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누구 죽이는 것은 참 많이 해왔지만 누구 지키는 것은 해본 적 적었던 까닭에 이제와 괜스레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만약 앨런이 오지 않았다면 키리에 뿐 아니라 히나를 포함한 다른 일행들도 무사하지 못했으리라 여기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번개 만들어보겠다 고집부리는 대신 그냥 하나만 했다면, 지금쯤 더 높은 서클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지금껏 소용 없는 일에 시간만 낭비한 것은 아닐까. 하고.

- 저도 비슷한 생각, 해본 적, 있어요.

"그랬어?"

- 네. 어렸을 때, 저는, 많이 눈에 띄었어요. 귀도 이만큼, 길었고, 말하는 법도, 몰라서, 눈에 많이 띄었어요. 그래서 오빠가, 저 대신 싸움도, 많이 하고,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런 일이 너무 많아서, 오빠가 저 때문에 다치면, 아직도 저는, 엉엉 울어요. 이제 괜찮은 줄, 알면서도, 그때 생각이 나서요.

에우리아가 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다 어느 날에, 오빠가 또 많이, 다쳤는데. 약값이 없었어요. 오빠는 괜찮다고 했고, 저는 그 날도, 많이 울었는데. 갑자기 신기한 일이, 생겼어요. 오빠 상처가, 아물었고, 그 날 이후로 조금씩, 제가 뭘 할 수 있는지, 알게 됐어요.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오빠랑, 엄마 얘기를 하다가, 제 힘을, 빨리 알았으면, 엄마도 고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말을, 하게 됐어요.

에우리아는 대답없이 히나의 말을 보고 있었다.

히나와 같은 고민을 할 필요없이 살아왔던 사람임을 스스로 잘 알았다. 그래서, 히나보다 더 오래 살았단 이유만으로 주제넘게 공감하거나 대견하다 말하지도 않았다. 히나가 살짝 웃으며 수어를 보였다.

- 어쩐지 제가 잘못을, 한 것 같아서, 후회도 되고, 그게 너무 아쉽고, 그랬어요.

"그랬구나."

짧은 한숨을 내쉰 에우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날 린 후작의 저택에서 아델리아를 향해 내리꽂았던, 그러나 아델리아의 손길 한 번에 속절없이 사라졌던 번개를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걸 후회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고집을 덜 부렸으면 어땠을까. 그게 좀 궁금하더라고. 그렇게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게 한 순간에 흩어지니까 조금 이상하기도 하고. 그 정도로 강한 놈을 마주칠 거란 생각을 안한 건 아닌데, 그 정도로 답이 없는 상황을 상상한 적이 없었어서. 이제와서 이중 속성을 고집한 걸 후회한다 하기엔 너무 오래 지나지 않았나, 진작 이런 일을 생각해봤으면 그날 조금 나았을까 싶기도 하고. 뭐, 심각한 고민은 아니고 그냥 잡생각이지."

천천히 떠오르는 해만큼 느릿한 히나의 말이 이어졌다.

- 오빠가, 그랬어요. 지나간 것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요. 예전으로 돌아가서, 선택을 바꾸거나, 놓친 것을 찾는다 해서, 모든 일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요. 결국 또 잘못이, 생기고, 엉뚱한 일이, 일어나고, 또, 후회하는 것이, 생기고.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고, 그랬어요. 당연히, 생각을 안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되도록 예전의 일에 대해서, 후회하는 것에, 시간을 쓰지는 말자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요.

에우리아가 고개를 위 아래로 움직였다.

- 그날 생긴 일은, 오빠가 그 마법사보다, 약했던 거고, 제가 섣부르게, 관심을 끌었던 거고, 협회장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을 한 거예요. 잘못한 것은, 그 마법사지, 우리가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협회장님 번개가, 협회장님을 닮아서, 특별히 멋있다고, 생각해요.

"닮았어? 나를?"

- 네. 많이 닮았어요, 제 생각에는, 그래요.

"그래. 그건 좋네."

자신 닮은 힘을 쓰고 있다는데 지금껏 뭔 쓸데없는 생각을 했나 싶다.

"특별히 멋있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특별히 더 강해져야겠네. 더 멋있어 보이려면."

에우리아가 강해서 멋있다 생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히나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함께 찰랑거리는 자신의 은색 머리카락이 튼튼이 털 색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그것이 마음에 든 히나가 웃었다. 특별한 색이 없는 머리카락을 가진 덕에 이렇게나 머리카락이 반짝이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 * *

플란츠는 미간을 찌푸렸고 칼리안은 웃었다.

절인 올리브를 다져넣은 올리브 오일을 곁들인, 담백한 치즈가 콕콕 박힌 하얀 빵. 쫀득한 치즈가 올려진 토마토. 베이컨에 돌돌 말아 구운 아스파라거스와 줄콩. 두터운 소고기를 잘 구워낸 뒤 향 적은 버섯이 들어간 소스를 올린 스테이크.

거기까지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문제는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노란 오믈렛에 있었다. 샤프란 향이 감도는 몽글몽글한 오믈렛 옆에, 샤프란 없이 하얀 치즈만 넣은 오믈렛이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물론 플란츠를 위한 것이다.

처음부터 두 종류로 준비한 것이 아니라, 샤프란 넣은 오믈렛을 본 체이스가 주방장에게 말을 전한 것이 뻔하다. 치즈 오믈렛이 확연히 늦게 올라왔으니까.

그것을 안 플란츠가 자신을 쳐다보자, 체이스가 칼리안과 꼭 닮은 얼굴을 한 채 웃었다.

"지난 번에 보니 손도 대지 않기에, 혹여 싫어하나 싶었습니다. 플란츠 왕세자."

별장에서 지내는 동안은 동생 놈이 또 미주알 고주알 주방장에게 말을 전해버린 바람에 꽃은 물론 해산물이나 토끼 고기부터 향 강한 트러플까지 전부 다 식단에서 제외되었었다. 당연하겠지만 안 익은 양파라거나 피망과 자몽도 포함이었다. 대신 완두콩이 든 요리가 유난스러울만큼 자주 올라왔으나 그것은 그냥 못본 척했다.

아무튼 그것은 대충 넘어가겠는데 이 배에 함께 온 주방장은 별장이 아닌 왕궁의 사람이었다. 세크리티아 왕궁 주방에까지 카이리스 왕세자의 짧디짧은 입맛이 소문나버리게 생긴 것이다.

"굳이 참을 필요 있겠습니까. 플란츠 왕세자."

"이렇게까지 신경써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플란츠 왕세자. 손님을 대접하는 사람의 성의라 보아주면 좋겠습니다. 플란츠 왕세자."

"네."

이렇게 말한 플란츠가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애써 폈다. 그리고 싱긋 웃는 얼굴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보라색 눈의 국왕을 향해 한 마디를 덧붙였다.

"······ 전하."

체이스와 플란츠의 사이에 앉아있던 칼리안이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이러다간 저 파릇하신 분께서 그냥 이대로 왕위에 오르겠노라 선언할 것 같은 말투라서 그랬다.

그 꼴을 보며 아무튼 이 넓은 배에 내 편 하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플란츠의 귀에,

"스테이크 맛있네요."

새벽이든 아침이든 상관없이 일단 고기를 입에 넣어야 하루를 살 여력을 얻는 듯한 동생 놈이 말했다. 나름의 편을 들어주려는 생각이겠으나 크게 도움이 되진 않을 듯 하다.

"그래. 오랜만에 함께 하는 식사 자리라 걱정을 하였는데,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구나."

체이스의 대답이 이어졌다.

아이스크림 먹는 히나 쳐다보는 칼리안과 똑같은 눈을 한 채였다.

자기 동생이 갓잡은 멧돼지를 대충대충 구워먹은 뒤에도 똑같은 말을 하리라는 걸 알고는 있을는지.

애써 펴두었던 미간을 다시 찌푸린 플란츠가 샤프란 향 안 나는 오믈렛을 가져다 먹었다. 단 것에 완전히 절여진 입 때문에 고기에는 아예 손도 대지 않고 시금치와 귀리를 넣은 스프와 빵, 치즈가 든 오믈렛으로만 적당히 배를 채웠다. 적어도 플란츠는 칼리안과 달랐으니까.

그리고 체이스는 플란츠와 비슷한 것을 비슷하게 먹고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동안 체이스가 함께 자리했던 식탁의 풍경을 떠올려 본 플란츠가 칼리안 쪽에 시선을 뒀다.

"왕가의 특징이 아니었군."

"네. 그냥 제가 많이 먹습니다. 원래 이렇게 많이 먹지도 않았지만요."

스테이크 한 접시를 야무지게 입 속에 넣고 으깬 감자 요리까지 뚝딱뚝딱 해치운 칼리안이 생글거렸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먹는 식성이 세크리티아 왕가의 유전은 아님을 알렸다.

"아무튼 한창 자랄 때니까요, 저도."

라고 하기에는, 물론 왜소한 건 아니었으나 여전히 플란츠와 비슷했고 체이스보다 손가락 하나 쯤이 작았다.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몸에 무리가 크지 않겠습니까. 십 년 뒤의 체력과 힘을 끌어와 쓰고 있었으니."

"아, 그건······."

순간 난처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 칼리안이 체이스를 쳐다봤다. 그러나 이미 흘러나온 말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래.

고작 십 년이었다 이거지.

플란츠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십 년이라니."

동생 놈의 연세를 대충 알게 되었다. 십 년을 거슬러와서 이제 삼 년쯤이 지났고, 체이스보다는 어리다. 그래놓고 플란츠를 보며 아직 어리다는 둥 더 커야 한다는 둥, 그런 말을 했다.

"그래놓고 잘도 그런 말을 하셨었군, 내 아우님께서는."

"제가 무슨 말을 했다는 말씀이신지."

"어쩌면 '과거'의 나보다 어리셨을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아닙니다."

"그럼. 한 두 살 많았겠군. 그렇다면 스물 여섯, 아니면 스물 일곱."

불필요할 만큼 빠른 계산 덕에 지난 나이를 제대로 들켜버린 칼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그와 함께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플란츠 왕세자에게 아직 그런 것도 말하지 않았더냐."

"나중에,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이런. 내가 실수를 했구나. 또."

칼리안이 재미삼아 지켜오던 비밀을 대신 잘 들켜 준 체이스가 짐짓 실수라는 듯 대답했다.

그것이 과연 실수였을지, 아니면 칼리안이 저렇게 많이 먹고도 해결이 되지 않을 만큼 무리하는 이유를 제대로 알려주기 위함이었을지.

칼리안의 진짜 나이 뿐 아니라, 시간이 되돌아간 그 일이 일어나기까지 길어야 7년이 남은 것임을 능구렁이처럼 슬며시 알려 준 체이스가 창 밖을 봤다. 나름의 긴 항해를 마친 범선이 항구에 한껏 가까워져 있었다.

"오늘 텐실의 왕세자와 오찬을 함께 하기로 하였는데. 왕궁에 들르겠느냐."

체이스에게 비밀을 들켜 한숨을 푹 내쉬던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브리지트 숲에 먼저 들르겠습니다. 텐실의 왕세자는 그 후에 만나면 되니까요."

"그래."

"네. 그 후에 다시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언제든지 그리 하거라."

이렇게 말한 체이스가 살짝 웃었다.

브리지트 숲에 들르고 텐실의 왕세자를 만난 뒤 왕궁에 가게 될 즈음이라면, 카이리스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함일 테니까.

비록 수정판을 넘겨줬다 하지만 그것과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나, 앨런을 통해 아무리 자주 온다 하더라도 같은 땅에 머무르며 이렇게 언제든 식사를 함께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리라는 것 정도는 플란츠조차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럼 먼저 일어나마."

"네. 조심히 가세요."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티내지 않은 체이스는,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칼리안은 체이스보다도 더 짧은 대답만 전했다.

* * *

레이븐의 안장에 긴 화살통을 다 맸다.

그러고 나서도 얀은 화살통을 맨 가죽끈을 괜히 한 번 풀었다 다시 묶었다. 옆을 보니 에스티나의 안장에 같은 것을 묶은 레릭의 얼굴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상에 누가 밤바다에 빠졌다 올라온 뒤에 단 한 숨도 제대로 자지 않고 사냥을 나가느냔 말이다. 그것도 그 먼 브리지트 숲까지!

그 얼굴을 본 플란츠는 특별한 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칼리안은 그냥 웃기만 했다. 가볍게 몸만 좀 풀고 오겠다는 말은 이미 너무 많이 한 터라 더 이상 할 말도 없었다.

"다른 것 아니고 그냥 사냥 내기잖아. 걱정하지 마."

"지금 활 쏠 기분이 든다는 게 신기하네요."

"왜, 천천히 가면서 쉬면 되는데."

결국 그 고집 못 꺾을 것을 아는 얀이 동그란 눈꼬리를 아래로 축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데없는 사냥 내기.

- 형님께서 아무리 그러셔도 활 솜씨가 저만 하겠습니까. 저 칼만 잘 다루는 것이 아닌데요.

- 내 아우님께서는 과연 제대로 보기는 하고 그런 자만을 부리시는지.

- 자만이라니,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 칼을 잘 부린다 해서 활까지 앞선다는 생각이 그럼 자만이 아니면 무엇일지 모르겠군.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칼리안과 플란츠가 서로 누구의 활쏘기가 더 나은지를 두고 가벼운 말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은 그것이 내기가 되었고, 체이스는 얼마 전 수많은 병사들이 죽은 이후 누구도 찾지 않게 된 브리지트 숲에 가서 사냥을 해보는 것이 어떨지를 제안했다.

시신의 수습도 끝난지 오래였고 망가진 곳에 새로운 나무를 심는 일도 마무리됐다. 그러니 지난 일은 이제 묻어두고 다시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만들고자 한다는 의도였다. 그 날의 일을 카이리스 마법사들의 탓으로 돌리지 않겠다는 분명한 뜻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 브리지트 숲이라. 좋네요. 이 참에 형님께서 그렇게 말로만 자랑하시던 활 솜씨도 좀 보고요.

- 진다면, 내 앞에서 두 번 다시 큰 소리 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진다면, 당연히 그리 해드리겠습니다. 다만 이긴다면, 아주 큰 부탁 하나를 들어주십사 말씀드릴 것이니 그렇게 아세요.

- 얼마든지. 좋을대로.

플란츠의 말이 이렇게나 길어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 아니던가.

당연하겠지만 말싸움을 주고 받는 척 좋은 핑곗거리 하나를 만든 터였다. 브리지트 숲을 가긴 가야 했으나 에우리아와 레이첼이 엮여 많은 사망자를 냈던 숲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멋대로 다시 찾아갈 수는 없었으니까.

물론 그것이 핑계임을 아는 사람은 곧 칼리안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얀과 레릭의 걱정만 키우는 꼴이 되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있어. 루시랑 안네랑 코코랑 잘 보고."

"저는 코코만 봐요. 고양이들은 레릭이 보기로 했어요."

"그래."

"아무튼 왕자님 흉터 또 늘려오시면······."

"얀."

어차피 플란츠는 아직 오지도 않았건만 굳이 입단속을 시킨다. 그러니 분명 꽃같은 왕자님 그 등짝에 난 시뻘건 흉터는 플란츠 때문에 난 것이 분명하다고, 사건의 전말을 적당히 눈치 챈 얀이 마뜩치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알았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얀의 뒤로, 여지없이 밝은 색 차림의 플란츠가 느릿느릿 걸어나왔다. 곧 플란츠가 말 위에 오르는 것을 본 칼리안이 생긋 웃으며 얀에게 손인사를 했다.

칼리안이 숲에 가는 이유를 정확히 알면 안 될 에우리아와 레이첼, 히나, 그리고 얀과 레릭은 별장에 남았다. 배에서 일행을 다시 옮겨 준 앨런은 카이리스로 돌아갔다. 그 말인즉슨.

"잠깐 군단장이었다 다시 부군단장 되신 왕세자 저하께서 활 다루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아르센이 함께 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정확히는 칼리안과 플란츠, 그리고 아르센만 함께 가게 됐다. 그렇게 조촐한듯 시끄러운 인원으로 길을 나섰다.

"가는 길이야 레이븐이 알아서 잘 가겠지만, 가서 꼭 조심하시고요. 왕자님보다 레이븐이 더 믿음직스러울 지경이니까요."

"알았다니까."

이렇게 얀과 인사도 잘 했다.

칼리안은 약속 잘 지키는 사람이니 약속한대로 별 탈 없이 잘 다녀오리라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얼마 후.

- 쌔애애애액!

강한 파공음을 낸 화살의 날선 촉이 지나간 자리에 긴 혈흔이 남았다.

정확히 두 명. 화살이 지나가는 궤적에 서 있던 딱 두 명의 목에 같은 모양의 상처를 낸 화살이 멀리 서 있던 나무기둥에 깊숙이 박혀들어갔다.

"형님 허튼 말은 정말 못하시네요."

"아우님만 할까."

자신할만한 실력이었음을 증명하듯, 혹은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으나 솜씨 좋게 살려뒀다는 것을 말하듯 두 사람의 목을 스치고 지나간 화살 끝을 본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 누구 상처내는 것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사람인 줄 몰랐어."

"사냥감 치고는 좀 크지 않습니까."

"큰 사냥감인 줄 알았는데."

브리지트 숲.

저 멀리, 다 죽어 널브러진 사람들 사이로 살아있는 한 명을 위협하던 기사들을 보면서 하는 말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태평한 말이 오고갔다.

큰 사냥감처럼 보인 바람에 목이 길게 베인 두 기사를 포함한 이들이 일제히 칼리안쪽을 바라봤다. 그 중 유난히 익숙한 얼굴을 본 칼리안이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왜 여기 계십니까. '사냥감'들 사이에서."

누군지 모를 기사들에게 죽을뻔한, 분명 체이스와 오찬을 함께하기로 했다던 '세르제인'이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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