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30화 (331/527)

제58장. 완두콩이 또(5)

민트차에 들어간 말린 딸기의 향이 이제는 마음에 든다.

특별한 기호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좋아한다 하는 말을 입 밖에 내고 나면 신기하리만치 정말로 좋아지게 마련이라. 괜스레 옛칼리안이 떠오른 칼리안이 잠시 웃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향 좋네. 마음에 들어."

이제 막 수확한 빨간 딸기와 까만 초콜릿이 어우러진 케이크도 먹고 블루베리가 기분 좋게 씹히는 보랏빛 마카롱도 먹었다. 사실 마음 쓸 일이 없는 이상 단 것을 즐겨하진 않는 터라 이렇게 단 것들을 먹을 땐 홍차가 생각난다. 그런데 두터운 모포로 칼리안을 돌돌 말아놓고 온갖 단 것을 가져다 입에 밀어넣어준 얀은 홍차를 마시면 잠이 안 온다며 다른 차를 내줬다.

그래도 칼리안은 큰 불만 없이 마음에 든다 대답을 했다.

뿐만 아니라 얀이 가져다주면 가져다주는대로 말아주면 말아주는대로 먹여주면 먹여주는대로 그냥 가만히 앉아서 얌전히 다 받았다. 바로 옆에서, 똑같은 꼬락서니를 한 채 레릭에게 똑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다른 한 명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불만이 쏙 들어갔다.

'잘 챙겨 드리게. 이 밤중에 저 시커먼 바닷물에 빠졌다 나오는 바람에 세자 저하도 왕자님도 많이 놀라셨을 터이니.'

물에 들어갔다 나온 뒤로 멀미는 더 심해졌는데 간식까지 잔뜩 먹는 바람에 바다에 들어갔을 때보다 지금이 더 죽을 맛이지만, 칼리안을 대할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걱정을 해주던 앨런이나 앨런의 말에 기절할듯이 놀란 레릭을 봐서 참고 있는 것이 빤한 얼굴이었으니까.

그래서 칼리안도 두말 않고 플란츠와 나란히 앉아 한참을 있었다. 그러다 결국은 안 되겠어서 딱 한 가지 불편한 점을 매우 조심스레 입에 담았다.

"얀······ 있잖아."

"네. 왕자님."

"나 더워."

선실에 이미 앨런의 보온 마법이 둘러진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철 모르고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를 보다가, 이러다간 아무래도 완두콩 이파리 누래지겠다 싶어서 용기를 냈다.

"고래 가까이 보려다 물에 빠지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요? 아무리 신기했어도 왕자님 발 밑부터 잘 살피셨어야죠. 더 큰일 안 난 것이 천만다행이니까 그냥 가만히 계세요."

"응. 가만히 있을게."

어김없이 혼났다.

"그리고 왕자님 추위 더위 안타시는 것도 다 알고 있으니까 거짓말도 마시고요."

내가 추위 더위 안타는 것 알면서 이렇게 돌돌 말아뒀느냐고. 그런데 그걸 아는 애가 여름 끝나자마자 얼음 든 것도 못 먹게 했느냐고 물어봐야 소득없이 혼만 더 난다. 때문에 나 말고 소금물로 간한 뒤에 노릇노릇 구워지고 계신 듯한 저기 저 세자 저하 한 번 보라고 말하려는데.

"칼리안."

"네."

"시끄러."

"네."

'고래 구경하려다 그만 발을 헛디뎌서 팔랑팔랑 바다에 떨어진 동생 주워오려고 같이 물에 빠진 왕세자'에게도 한 소리를 들었다.

내가 지금 누구 챙기려다 얀한테 혼나고 있는지 아시기는 하는지, 추위도 잘 타는데 더위까지 잘 타시는 형님 저하 너 진짜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었는지 난 정말로 도무지 모르겠다고. 시간의 축 문제보다 그게 더 궁금해질 판이라고.

하고 말했다가는 또 멱살 잡힌 채로 저 바닷물 속에 담궈졌다 꺼내졌다 할 것 같아서 곱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결국은 나도 모르겠다 완두콩이야 구워지든 말든 나는 그냥 내 인생을 즐겨야지 하는 마음으로 달콤상쾌한 차를 쭉 들이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일어나세요?"

"스승님이 부르셔서."

칼리안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가 빛나는 것을 보던 얀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가만히 있겠다고 하신지 1분도 안 지났어요."

"응. 그런데 스승님이 부르시잖아."

생글거리며 말한 칼리안이, 돌돌 말려있던 모포를 풀어 얀에게 건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많은 얼굴이었으나 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얀이 자신을 따라 나서려는 기색은 아니었던 탓에 칼리안이 소리없이 웃었다.

아무튼 얀은 얀이다.

함께 가기 어려운 자리임을 말한 것도 아니었는데 칼리안의 생각 하나는 정말 신통방통하게 잘 알아보지 않나. 그러니 정말이지, 얀은 얀이다.

"너도 좀 쉬고 있어."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 나 물에 빠진 건 말하지 말고. 걱정하니까."

"걱정 마세요. 얘기 안 해요."

"키리에도 알면 안 돼. 키리에 귀 밝은 것 잊지 마."

"네. 조심할게요."

이 일을 키리에가 알면 분명히 낚싯대 들고 나갈 거다. 날개 달린 뱀장어인지 등푸른 생선인지 고래인지 모를 아무튼 건망증 심한 그 해룡 잡으러. 놈이 아직 천 살도 안 된 팔팔한 용이든 생선이든 아무것도 신경 안 쓸 키리에니까.

"스승님 잠시 뵙고 올 테니 쉬고 계십시오."

"알았어."

플란츠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칼리안이 선실 밖으로 나갔다.

더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도 레릭이 둘러 준 모포를 가만히 뒤집어쓰고 있는 플란츠를 안에 둔 채로.

* * *

칼도 쓰고 마법도 쓰고.

대륙 어디로 사라지든 단박에 찾아내 줄 아버지도 있건만.

"정말 괜찮은 것이냐."

하루종일 걱정을 받게 생겼다.

체이스의 머리에 묶인 빨간 레이스 끈을 보며 설핏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괜찮을 뻔했지만. 괜찮습니다."

그대로 바닷속에서 숨이 차올랐으면 밀려난 기억이 다시 파도처럼 몰아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참 세심하게도 동생 머리끄덩이 말고 멱살 붙들어 올려 준 어느 물미역 덕분에 잘 건져졌으니까.

생각지 못한 경험을 안겨 준 아르나이젤을 떠올려보던 칼리안이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그리고 이런 말을 또 들었다. 이번에는 앨런이었다.

"네. 재밌잖아요. 용들이 다 시스파니안같지는 않다는 게."

신이 나서 손인사를 하던 아르나이젤이 아니던가.

철두철미하게 살다가도 굵직한 것 한두 개씩은 꼭 빼먹는, 세심하지 못한 점이 어쩐지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었다.

"무사히 카이리스에 잘 돌아가서 시스파니안을 불러다 줘야 할 사람을 일부러 바닷속에 두고 가진 않았을 테니 분명 잊어버린 거겠죠. 그게 저를 좀 닮은 것도 같아서요."

"자랑이십니다, 아주."

곧 웃음을 멈춘 칼리안이 앨런과 체이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튼 제가 온 건 그것 때문이 아니라······ 형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얘기하거라. 무엇이든."

"시간의 축을 시스파니안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 네가 오기 전에 마나실 경에게 들었다."

"네. 그것 때문인데. 혹시 형님은 시간의 축을 어디에서 처음으로 보셨습니까. 저는 왕궁 보물창고에서 봤는데, 그 전부터도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아서요."

"내가 그것을 너에게 알리지 않았더냐."

"네. 안 하셨었습니다."

"내가 모르는 어느 날에 이야기를 한 줄로 알고 있었는데."

칼리안이 대답 없이 고개만 가로저었다.

체이스가 잠시동안 먼 곳을 바라봤다. 자신이 겪지 않았던 꿈 속의 일을 되짚을 때면 으레 이런 얼굴을 하곤 했다.

"······ 나락."

그리고 체이스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본래에는 그것이 나락에 나타났었지. 나락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진다고, 카스트린 경이 그리 알려주었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대신전이었다. 대신전을 찾았을 때 신관들이 말해준 터라 선왕 전하와 어머님을 모시고 함께 가서 처음으로 보았었다."

"신전에 숨겨져 있었지 않을까 했는데. 처음은 나락이었던 겁니까."

"나락 역시 세크리티아 대왕이 만들었다 하였으니, 그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체이스를 대신한 앨런의 대답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스파니안이 만들고 세크리티아 대왕께서 마지막으로 사용하셨고······ 그럼 그 뒤에 세크리티아 대왕께서 나락에 숨겼거나 보관했다는 말이 되겠네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럼 형님께서는 그것을 발견해서 바로 옮겨두셨던 겁니까."

"그리하였다. 발견된 것을 왕실의 보물창고로 옮겨두었지. 왕실 서고의 자료로만 전해져오던 이야기였으니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을 사람은 왕족 뿐이겠다만. 혹여 멋모르고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라서. 그렇게 옮겨 두었던 것을 네가 본 모양이구나."

톡, 톡, 톡.

어느새 칼리안의 손가락이 무릎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르나이젤이 시간을 멈추었을 때. 시간의 축을, 축의 파편을 썼다 했습니다."

"그래. 시간이 멈추었었다지."

"네. 그래서 조금 의아한 점이 생겼습니다."

이제부터 꺼낼 이야기 때문에 함께 물에 빠졌던 플란츠를 두고 체이스와 앨런을 만나러 왔다. 지나치게 똑똑한 플란츠였으니 이미 칼리안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알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이 자리에 부르지 않았다.

"시간의 축은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 했었습니다. 그런데 조각났다 하지만 어찌됐건 이곳에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르나이젤이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기도 했고요. 그것까지는 그래도 그러려니 하겠습니다만."

천체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여러 개의 둥근 고리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위치한 모래시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

제 손으로 그것을 만든 시스파니안이 '재앙'이라 일컬었던 것.

시간의 축을 잠시 떠올려보던 칼리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 플란츠 형님께서 시간이 멈춘 사이에 움직이셨던 것, 시간의 축이 만들어 낸 영향력의 범위를 벗어났던 것이 어쩌면 '과거'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저는 계속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 했던 말의 의미가 만약 '파괴'되는 것을 뜻함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어쩌면······."

뒷말이 쉬이 이어지질 않는다.

한동안 칼리안을 바라보던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단 한 번 시간을 되돌린다 하였던 것의 의미가 시간의 축의 파괴가 아닌 사용자에 대한 영향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소리로구나."

"네."

"그렇다면. 과거에 시간의 축을 직접 사용한 것이 플란츠 왕세자가 맞다 하였을 때, 이미 한 번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번 일에서 벗어났을 수도 있으리라는 의미더냐."

"물론 가정입니다. 어디까지나. 만에 하나 그것이 맞다면. 아니기를 바랍니다만. 다만 사실이라면, 가정이 아니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이야기가 다시 멈췄다.

이번에는 체이스의 손가락 끝이 들고 있던 찻잔 위에서 몇 번의 소리를 냈고 앨런의 입에서 짧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맞지 않기를, 반드시 틀리기를 바라며 '가정'이라 이르는 소리임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플란츠가 시간의 축을 사용하지 않았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플란츠의 손에 의해 칼리안이 시간을 거슬렀을까 걱정하거나 믿기 싫어서가 아니라.

이제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가정이 아니라면. 시간의 축을 제가 반드시 가져야 할 명확한 이유가 생길 것 같습니다. 최악의 경우······."

칼리안의 생각이 모두 맞다면.

다시 나타나고 있는 시간의 축이 칼리안이 아닌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간다면. 파괴하지 못한다면. 세렌티든 시스파니안이든 혹은 또 다른 이든 상관없을 그 누군가가 그것을 사용한다면. 그것을 막지 못한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최악의 상황이 생겨버렸을 때.

"······ 완두콩이 또 혼자 돌아다니게 될 지도 모르니."

가느다란 혼잣말이 속삭임처럼 새어나왔다.

* * *

- 탁, 탁.

잠시 발을 멈추고 몇 번인가 약하게 발을 굴렀다.

- 저벅, 저벅.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기자, 그제야 구두 굽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체이스와 앨런이 있던 선실 문을 닫고 나와 한 층을 내려 올 때까지 발 소리를 내지 않았다. 얀처럼 뒤꿈치를 들고 걷는 것은 아니었으나 신경을 쓰지 않으면 버릇처럼 소리를 없애고 걷는 까닭이었다.

늘 신경을 써오던 발소리 하나조차 챙기지 못할 만큼 휘저어지고 있던 머릿속이 일정한 구두 굽 소리에 조금씩 정리되어갔다.

그렇게 천천히 발을 옮긴 칼리안이 선실 한 곳 앞에서 멈추어 섰다.

- 똑똑.

그리고 참 오랜만에 손을 올려 노크라는 것을 했다.

시중을 들어 줄 얀도, 뒤를 지키던 키리에도 없었고, 문을 대신 두드려 줄 다른 시종들도 없었으니까.

"왜."

익숙하지 않은 노크 소리의 주인이 누구일지는 지나치게 뻔했던 탓에.

누구인지 묻지도 않았을 뿐더러 들어오라는 허락인지 용건만 말하고 가라는 것인지도 구분하기 힘들 법한 대꾸가 선실 안에서 들려왔다. 그래서 칼리안은 더 이상의 말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테라스 타고 덥썩덥썩 들어올 땐 언제고 왜 이제와서 허락받고 들어오는 시늉인지를 묻는 말임을 알았으니까.

문을 열고 보인 광경을 잠시 보던 칼리안이 웃음소리를 냈다. 얀과 레릭은 어느새 내보냈는지 없고 모포 속에 푹 쌓인 채 여전히 잘 구워지고 있는 완두콩이 눈만 감고 있었던 탓이다.

플란츠의 맞은편, 칼리안이 앉아있던 자리에 새 찻잔이 놓여 있었다. 곧 돌아오겠다 했으니 얀이 새것을 마련해두고 나간 모양이었다.

그곳에 앉아 잠시동안 닫힌 문을 보던 칼리안이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여전히 따뜻한 차를 호록호록 마시다가,

"형님 인어 보신 적 없죠."

"없어."

"저는 봤습니다."

자랑을 했다.

변신한 용이었든 아니었든 알 게 뭐람. 봤으면 본 거지.

그리고 밖에 나가서 저 놈을 다시 물에 담궈보면 멀미가 가실 것 같다는 기색이 역력한 플란츠를 향해 방긋방긋 웃어보였다. 희귀한 경험을 하고 온 스스로가 매우 자랑스럽다는 듯이.

이젠 얼굴로도 짖느냐 대꾸할 기운도 없어진 플란츠가 그냥 등받이에 몸과 머리를 기댔다.

"그런데 저는 형님도 수영 못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언제 배우셨습니까."

수영을 한다기보단 물에 뜰 수 있다 해야겠으나 칼리안에게 있어서는 가라앉지 않는 사람과 생선이 크게 다를 바 없었으니까.

"얼마 전에."

"배우신단 얘기 못 들었는데요."

"책."

"······ 책."

기사 나오는 소설을 보다가 그만 기마술에 통달하고 말았다던 3왕자가 책 보면서 수영 익혔다는 왕세자를 멍하니 쳐다봤다.

"책이요."

"그래."

그래. 물에 뜨는 법을 책에서 읽었으면 몸이 고스란히 따라주는 대단하신 분임을 안다. 검 두 자루를 따로따로 휘두르는 것이 별반 어려울 것도 없다는 듯 금세 익숙해졌던 이유도 태반이 저 머리 덕임을 안다. 알기는 알지만.

"그럼 형님."

"왜."

"어떻게 오신 겁니까."

"뭐를."

"바다에 스승님보다 먼저 오셨잖아요. 어떻게 하신 건지 얘기해주시면 안 됩니까."

"어쩌다보니."

성의없는 대꾸에 되돌아오는 짖음이 없다. 한참동안 칼리안이 조용하자, 눈꺼풀을 살짝 들어올린 플란츠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눈동자만 움직여 칼리안을 쳐다봤다.

"밧줄 들고 내려갔잖아. 바다로."

"그걸 묻는 게 아닌 것 아실텐데요."

"그냥 알았고. 알고 나니까 움직여지던데."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모르십니까."

"몰라."

"그럼······ 시간이 멈춘 것은 어떻게 아셨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모포 밖으로 희멀건 손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 손 끝으로 제 머리를 가리켜 보인 플란츠가 말했다.

"시간은 멈췄는데 이건 안 멈춰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채로, 뼈가 툭툭 불거진 플란츠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보던 칼리안이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지난 번에 형님 어깨 다치셨을 때. 심한 악몽을 꾸시는 것 같았습니다. 곧 괜찮아지는 것 같긴 했는데 혹시 그것도 같은 이유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형님 평소에도 항상 그러시는 건 아니죠."

"······ 안 그래."

"또 거짓말."

"또 반말."

내 생일 지난지가 언젠데 도대체 왜 자꾸 말꼬리를 야금야금 잘라먹느냐는 눈이 된 플란츠를 보면서도, 칼리안은 '요' 한 글자를 이어주지 않았다.

"그럼 원래부터, 그러니까 제가 카이리스에서······."

"말고."

칼리안이 바뀌기 전부터 그랬는지.

입 밖에 내어놓기 어려워하는 말을 그냥 뚝 잘라버린 플란츠가 대답을 이었다.

"원래도 그랬고. 심해진 건 에반. 그때부터."

본래도 똑똑하고 눈치 빠르고 늘 생각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생각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은 에반의 일 이후. 맹세의 인을 어기지 않기 위해 다른 생각을 끝없이 이어나갔던 때부터라고. 그때부터 버릇이 됐다고 알려줬다. 이제서야.

칼리안이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물끄러미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또 머릿속으로 짖고 있지."

"안 짖습니다."

"불편한 적 없어."

"사람 머리가 쉬질 않는데 그게 어떻게,"

"그래도 될 만큼 똑똑해서."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아우님 탓 아닌데 왜 자꾸 자책을 하시는지."

칼리안의 대답이 또 이어지지 않았다.

에반 잡을 시기를 보기 위해 플란츠의 생각을 막은 칼리안의 탓이 아니란다. 멈춤 없이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을 버릇삼을 수 있을 만큼 똑똑한 머리를 내려 준 세렌티든 그 일의 원흉이었던 에반이든.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 것이다.

"내 탓도 아니고."

맹세의 인을 맺고 온 플란츠 본인을 포함해서.

"그건 다행이네요. 쓸데없이 형님 탓으로 돌리진 않는다 하시니."

"그 정도는 알아. 나도."

스스로를 체스 말로 써먹을 때도 참 객관적이고 누구의 잘잘못을 가릴 때에도 참 객관적이다. 저 미련한 일관성을 두고 잘했다 해야 할지 잘못했다 해야 할지.

"악몽은, 나아지고 있어."

"정말입니까."

"줄어들었어. 얼마 전부터."

고개를 끄덕이곤 한동안 가만히 앉아있던 플란츠가 손에 들린 찻잔을 봤다. 그 속에 든 딸기 조각과 민트잎을 말없이 내려다보다 말했다.

"생각만 하는 것 말고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늘어난 뒤로.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 이어지는 생각이 만들어 낸 악몽은 줄어들고 있다고, 거짓 섞이지 않은 대답을 했다.

"아우님께서 마력 낭비하는 버릇을 없애면 내 생각이 이어지는 버릇도 없어질 것 같은데."

"제 탓 안하겠다 하시더니."

"원망은 안 해도 따져 볼 줄은 알아. 나도."

똑똑해서. 너보다.

이렇게 덧붙인 플란츠를 보던 칼리안이 내심 진지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실드는······ 형님이 워낙 연약하셔서, 어련히 알아서 살려드리려 하다보니 저도 어쩔 수 없이 치는 건데요."

"맥락없이 짖는 건 언제쯤 그만하시려는지."

"버릇 치워 보겠습니다. 형님 버릇 없애드려야 하니."

"알았어."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이던 칼리안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켜보였다. 플란츠가 조금 전에 했던 것을 따라하듯이.

"그럼, 시간 멈춘 것 알고 나서 바로 움직이신 겁니까."

"거의."

"놀라셨겠네요."

"왜."

"당신 동생 없어졌을까봐."

······ 또.

플란츠가 대답 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그것을 짐짓 못본 척 칼리안이 이런저런 말을 했다.

"시간이 멈췄기에, 안심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다 왔습니다. 잡담도 하고 농담도 하면서 얘기를 했었는데. 형님 똑똑하신 걸 잊고 있었네요. 그러고 계시는 줄 알았으면 그냥 빨리 올라올 걸 그랬습니다."

"안 놀랐어."

"네."

"걱정은 했어."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또. 바다라서."

"바다에 또 빠지긴 했어도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만큼 어리지도 않았고 배 타는 것에도 괜찮아진 뒤였고. 누가 제 때 잘 건져주셔서."

"······ 그래."

"아무튼 다음에는 밍기적거리지 않고 오겠습니다. 그러니까 다음에는 그냥 멈추면 멈추는대로 계세요."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건 줄 아느냐고.

그런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어차피 둘 다 그것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었으니까.

"아무도 없는데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알았어."

"그렇게 또 갑자기 없어지는 일 없게 할 테지만."

"말."

반말을 지적하는 기준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이번에는 칼리안도 순순히 말을 고쳤다.

"없게 할게요."

이왕 고치는 김에 조금 더 바꿔서.

잠시 가만히 있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아무튼 말 잘 들어주시는 건 참 좋네요."

"안 짖어 주시면 더 좋을 텐데."

"나중에요. 그건."

당장 못 지킬 약속은 때려친 칼리안이 다시 찻잔을 들었다.

곧 짙고 푸른 하늘에 붉은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바다 위에서 마주하는 첫 일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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