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장. 완두콩이 또(4)
- 툭.
발 근처의 산호 하나를 살짝 찼다.
그 덕에 공기방울 밖으로 잠시 빠져나갔다 들어온 구두에 바닷물이 잔뜩 묻었다.
발에 힘을 준 것도 아니었던데다 산호가 꽤 단단했다. 때문에 산호는 멀쩡하고 아무 소득도 없이 멀쩡한 구두만 소금물에 푹 적신 셈이 됐다. 그것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번에는 모래 바닥을 탁 하고 조금 세게 굴렀다. 하얀 모래가 조금 흐트러진다.
"내가 또 무섭게 했어?"
그런데 아르나이젤이 이렇게 물었다.
큰 눈으로 아르나이젤을 물끄러미 보던 칼리안은 바닷속에 막 들어왔을 때 했던 말을 상기한 뒤에야 질문의 의미를 눈치챘다. 주변 광경이 탐탁지 않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는 '바다를 무서워했어서 그렇다' 답했던 것 때문에 혹시 지금도 무언가가 무서워서 그러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아니야."
"그럼 내가 싫어하는 말 했어?"
"그런 말 안 했어."
"아니면 화 났어?"
"화 안 났어."
"그런데 표정이 안 좋아."
"심술부린 거야. 시간의 축을 시스파니안이 만들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어서."
"나는 몰랐던 걸 알게 되면 기분이 좋은데."
"좋을 때가 더 많아, 나도. 지금은 아니고."
호기심 가득한 눈.
칼리안의 속을 걱정해서 묻는다 하기보다는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임을 알았다. 저들은 무엇이든 알고 이해하고자 하는 종족이니 말이다.
"그냥 그럴 때가 있어. 그냥."
시스파니안이 사실을 숨겼다는 것을 아르나이젤에게 미주알고주알 설명할 수 없던 칼리안이 대충 얼버무리며 대답을 했다.
시간의 축을 시스파니안이 만들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이제까지 이야기해주지 않은 일에 대한 얕은 심술이다. 죽은 이의 영혼이 엉뚱한 사람의 몸 속에 들어가는 일을 벌이고자 했을 시스파니안도 아닐 뿐더러, 남의 인생 하나를 없던 일로 만들었으면서 속 편히 자빠져 처주무시는 망할 세렌티 덕에 시간의 축을 만든 것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말하지 못한 것임을 너무 잘 알았다. 때문에 심술만 부렸다.
"어쨌든 알았어. 카이리스로 돌아가면 시스파니안에게 전해줄게."
"응. 도와줘서 고마워."
"대신."
"······ 대신?"
"하나만 물어볼게."
세상에 공짜 없다.
아르나이젤 덕에 평화로운 바다 구경을 망쳤으니 그 정도는 요구해도 되지 않겠나. 때문에 불변의 진리를 해룡의 부탁에 대해서까지 공평하게 적용한 칼리안의 입술이 슬쩍 올라갔다.
"양신전쟁에서 세크리티아 대왕이 시간의 축을 가지고 뭘 한건지 알아? 악신을 앞두고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서 사용하지는 않았을 테니 분명 다른 쓸모가 있었을 것 같은데."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으나 아르나이젤이 알 만한 질문은 이 정도였다. 저렇게 어린애처럼 굴고 있어도, 어쨌거나 아르나이젤은 양신전쟁 이전부터 살아왔다 했으니까.
아르나이젤이 입을 몇 번 벙긋거렸다. 그런데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제 저 모습만 봐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뻔히 알겠다.
세렌티가 또 막아선 것이다.
답을 알려주지 못하도록.
답답했는지, 아르나이젤이 손을 들어 파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다 온전히 영근 보석같이 곱기만 한 꼬리 지느러미로 곁에 있던 바위를 탁탁 때렸다. 방금 전에 칼리안이 심술부리는 것을 보고 고스란히 배운 모양새다. 누구 가르치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것 같다는 생각에 웃어야 할지 미간을 찌푸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어버린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됐어. 시간의 축을 언제 왜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악신 잡는데 쓰라고 대왕에게 건넸을 테니. 알아서 잘 썼겠지."
"아니야. 너. 오해를 했어."
억지로 말하기를 포기하고 잠시 가만히 있던 아르나이젤이 다른 말을 꺼냈다.
"시스파니안이 그걸 만든 건 악신 때문이야. 그치만 악신을 상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결국 악신을 잡는 일에도 쓰긴 했지만 원래 목적은 그게 아니야."
"그럼 뭘······."
"그때. 시스파니안이 처음으로 한 일이 뭐였는지 알아?"
정답을 알려주는 대신, 아르나이젤은 양신전쟁이 벌어졌을 당시 시스파니안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아느냐 물었다. 그것은 칼리안이 아주 잘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했으니 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양신전쟁에 대해서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웠으니까.
"보호."
악신에 의해 죽은 용족. 그리고 다른 종족들. 시스파니안은 살아남은 개체를 숨겼다. 다만 시스파니안이 숨겨줄 수 있던 수는 극히 적었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살아남은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을 떠올리던 칼리안의 붉은 눈이 앞을 향했다.
시간을 다스리는 힘.
그러니까 시스파니안은.
"설마, 죽은 이들을 다 살려내려고."
"비슷하지만. 혹시라도 전부 다 죽어버릴까봐 만들었어."
악신과의 전쟁에서 시스파니안을 포함한 모두가 죽게 될 때를 대비한 최후의 보루로 삼고자 만들었다.
"그런데 결국은 안 썼어. 전쟁이 끝난 뒤에도 파괴하지는 못했지만 사용하지도 않기로 했어. 시간의 축을 받았던 인간도 악신을 잡는 데에만 썼지 시간을 되돌리는데에 사용하지는 않았어. 사라진 것이 많았어도 다 죽지는 않았으니까."
시스파니안은 사라진 종족을 다시 소생시키지 않았다.
시스파니안으로부터 시간의 축을 받은 세크리티아 대왕 역시 악신을 상대하는 것에만 힘을 썼을 뿐. 전쟁 중 죽은 인간들을, 영웅들을, 연인이었던 베른 네리아드를 살려내지는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흘렀다.
시스파니안은, 죽은 하츠아라의 시간을 되돌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안 되니까."
할 수 있었음에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서.
그 힘을 왜 사용하지 않았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저것이 다 모여 칼리안의 손에 들어온다 하더라도 차라리 부술지언정 시간을 헝클어버리는 데에 쓸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과거의 체이스가, 그리고 베른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그래. 알아들었어. 대충."
"이해했다면 다행이야. 시스파니안에게 얘기해주는 것 잊어버리면 안돼. 꼭 전해줘."
"알았어. 안 잊을게."
아르나이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걱정 하나를 덜었다는 듯 개운한 얼굴로 말했다.
"고마워."
아르나이젤이 한 손을 들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봐, 안녕."
칼리안을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리고 모습을 감췄다. 사라졌다. 칼리안을 다시 배 위로 옮겨 준 것이 아니라 아르나이젤이 사라졌다. 칼리안을 바닷속에 그냥 두고서.
아르나이젤은 몰랐다. 생선이라 부른 것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정말로 몰랐다. 칼리안이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으니 마음이 가벼워졌고, 홀가분해진 기분에 들떠버려서 까먹어버렸다.
그러니까 여기는 바다였고, 바닷속이었고, 인간에게는 아가미와 지느러미가 없다는 사실, 그리고 또 하나. 칼리안은 수영을 못 한다는 것도.
"······ 하."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깃든 얼굴이 된 칼리안이 헛웃음 소리를 냈다.
멈췄던 바닷물이 움직인다.
천천히 조금씩. 칼리안을 중심으로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발 끝의 물이, 그 후에는 발을 디디고 선 곳의 물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조금 떨어진 곳의 수초가 흔들리는 듯 검은 그림자가 일렁인다. 손이 닿을 곳에서 제자리에 박제된 것처럼 멈춰있던 물고기들이 하나 둘 다시 유영했다.
칼리안을 담아두던 거대한 공기방울이 작은 기포로 변해갔다. 커다란 유리구슬이 아래부터 조각나 사라지는 것처럼, 발 끝부터 시작해서 발목, 종아리, 오래지 않아 무릎 주변에서, 종내에는 목 주변에서 새하얀 기포가 일며 해수면을 향해 올라가 사라졌다.
발끝이 젖는다. 물이 밀려든다. 몸이 흔들린다. 물살에 휩쓸린다. 직전까지 머리 위에 있던 배가 어느새 저만치 앞쪽으로 멀어져간다.
"망할 생선."
잊어버리지 말라더니 정작 본인이 잊어버렸다.
공기방울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큰 숨을 들이키는 대신 아르나이젤을 향한 욕지거리 내뱉기를 선택한 칼리안이 위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발을 박찼다.
커피, 피망, 자몽.
그리고 등 푸른 생선.
- 스승님.
싫어하는 음식이 하나 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 스승님. 들리십니까.
앨런으로부터의 답이 없었다.
칼리안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배의 시간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숨이 막혀온다.
* * *
바람이 불지 않는다.
앨런의 움직임이 멈춘다. 아주 천천히 깜빡이던 눈꺼풀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을 알았다. 스스로가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심장 소리가 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도 답답하지 않았다.
분명 심장이 멈추는 감각을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때의 감각과 지금의 것은 확연히 다르다. 심장과 폐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몸은 멀쩡하다.
눈꺼풀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눈동자도 돌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바다를 비추던 달빛이 구름에 잠시 가려졌다 다시 밝아지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먼 하늘의 구름은 문제 없이 흐르고 있다는 소리다. 구름이 달을 가렸다 다시 지나가고 있다는 것은 곧, 지금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곳만 멈춰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것을 알아내고 나니 눈치채게 되었다.
누군가 이 주변의 시간을 묶어두었음을.
아르나이젤.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그가 벌인 짓이리라는 것을.
사고 치는 데에는 이제 완전히 도가 튼 동생 놈의 말마따나 시스파니안의 축복을 머리로 받은 것인지. 아니라면 이것 역시 단순히 축복의 영향인지,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았다.
꿈 속에서도 제대로 잠들지 않던 머리는.
- ······ 깜빡.
세상 속에 홀로 멈추는 시간의 괴리조차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 * *
오래도록 잠에 들지 않은 적 많았다.
죽기 직전까지 다쳐 본 적도 많았다.
하지만 멀쩡한 몸에 멀쩡한 정신으로 숨을 놓아 본 적은 없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오러의 힘으로 발을 박차고 바람의 힘을 부렸다. 덕분에 달빛이 보일 만큼은 올라왔다. 수면이 움직이고 그리 멀지 않게 가까워진 뱃전에 파도가 치는 것도 보았다. 그러니 곧 앨런이 있는 곳의 시간도 흐를 터였다.
그것까진 좋았다. 좋았는데······.
'그러고보니 그때도 이래서 가라앉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좀 가벼운 옷을 입을 걸 그랬다.
겹겹이 겹쳐 입은 왕자의 옷이란 어찌나 무겁고 또 거추장스러운지. 재킷에 달린 금단추 하나, 보석 달린 커프스 하나 하나가 전부 다 방해물이 되어 버렸다. 쉽게 말해 기껏 올라온 것이 무색하게 숨 한 번 터뜨리지 못하고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는 소리다.
칼리안이 다시 한 번 마력을 운용해 수면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 웃음이 터졌다.
오러도 못 쓰고 마력도 못 쓰고 앨런도 없었으면, 밤 바다나 좀 구경하러 나왔다가 웬 시퍼런 거대 생선의 건망증 때문에 '형님 고래 보신 셈 치면 되겠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죽었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이 났다.
누군가 이런 꼴을 보면 너 지금 물 속에서 웃음이 나오느냐 물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으나 어쨌거나 웃음이 나왔다. 아직은 버틸만 했고, 수면이 움직이는 것을 보아 이제 곧 앨런이 깰 것이었다. 그리 되면 별 탈 없이 다시 배 위로 올려질 테니 태평하게 웃기나 할 수밖에.
"웃음이 나오지. 지금."
그런데 누가 정말로 이렇게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다.
말하는 물미역이 보이네.
덜 자란 물미역같은데 사람 말을 하는 그 무언가가 우악스럽게 멱살을 틀어잡는다.
- 촤아악!
그리고 물밖으로 끌어올렸다.
머리끄덩이 말고 멱살 붙들어 끌어올려줘서 고맙다 해야 할지. 형님 저하 너 왜 여깄느냐고 물어야 할지. 나는 가라앉는데 형님 저하 너는 밧줄 하나 붙들고 떠있는 거냐고, 개구리밥 같다 생각은 했었는데 진짜였냐고 놀라야 할지.
그런 고민에 빠져드는 바람에 웃던 것도 잊어버렸다.
"숨. 칼리안."
그런 칼리안을 향한 낮은 목소리가, 지금 웃음보다 중요한게 뭔지를 알려줬다.
감겨들던 빨간 눈이 다시 떠졌다.
폐부 깊은 곳까지 공기를 끌어다 담듯이 숨을 쉬었다. 생전 처음으로 공기를 마주한 사람처럼 숨을 쉬었다.
그 뒤에는 다시 가라앉았다.
덕분에 멱살을 또 붙들려 물 위로 올려졌다.
완두콩이 입은 옷이 더 주렁주렁한데 계속 혼자 가라앉는 것에 억울함을 느끼다 다시 숨 쉬기를 두어 번 반복했을 즈음.
- 번쩍!
거대한 범선에서 새하얀 빛이 인다.
비로소 시간을 되찾은 대마법사가 둘을 불러왔다. 여전히 자신보다 작은 아들과, 동생 건지러 바다로 먼저 내려가버렸던 아들의 형을 한 팔에 하나씩 안고 등을 토닥였다.
칼리안이 앨런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완두콩이 또 왔다고.
어차피 어떻게든 스승님이 알아서 올 텐데 완두콩이 기어이 혼자 왔다고.
긴 말을 꺼내는 대신 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