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장. 완두콩이 또(2)
광막한 바다, 그리고 하늘.
그 사이에 선 사람이란 얼마나 작고 작은지.
그리 대단한 바다 위에 선 작은 사람 한 명의 머리가 이렇게 빙글빙글 도는 것마저도 자연의 신비함인지.
"바람 쐬는 게 별로면 창 밖이라도 봐요. 연두색 저하 계속 그렇게 고개 숙이고 있으면 더 심해지는데."
바다와 바다 사이.
대륙 인근의 바닷물과 대륙 너머의 바닷물이 맞닿는 곳. 소금이 섞인 만큼도 다르고 물이 흐르는 방향도, 물의 온도도, 모두 다 다르다는 두 바닷물이 서로 마주치는 곳에 잔잔한 파도가 인다.
바닷물은 다 똑같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멀미에 잘 듣는다는 차를 손수 가져다 준 아리안느가 선실의 창 밖을 보며 이야기해줬다.
"신기하죠? 대륙 인근의 바닷물은 투명한 사파이어같기도 하고 에메랄드같기도 하고 물도 정말 맑은데 저 하얀 선을 넘어서면 완전히 달라져요."
길게 이어진 하얀 파도의 경계선을 지나 마주하는 바닷물은 검푸른 빛을 낸다 했다. 저곳으로 나서면 바다의 깊이도 파도의 높이도 달라진다 했다.
"지금 저하 머리가 빙글빙글한 건 멀미 축에도 안 껴요. 예전에 겁도 없이 저 너머로 구경을 나섰던 날에는 정말로 아르나이젤을 보는 줄 알았거든."
졸음이 온다.
어린아이들의 모험담처럼 풀어놓는 나긋나긋한 설명을 듣고 있으려니 졸음이 왔다. 밤새 잠자리에 들지 않았으니 졸릴 만도 했으나 그것과는 또 조금 다른 기분이었다. 그 감각이 아무래도 석연치 않아서 아리안느를 향해 물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기회만 닿으면 수면제를 씁니까."
"이 나라 사람들 말고, 저는 써요. 우리 전하도 잠을 잘 못 자서. 그런데 약 엄청 잘 듣네요. 축복인가 뭔가 그런거 있다고 하지 않았나? 수면제는 독이 아니라서 그냥 두나? 신기하네."
······ 수면제 맞나보다.
이래서 아무거나 먹지 말라고, 칼리안이 그렇게 짖었었는데.
일국의 왕세자에게 수면제 든 차를 먹인 아리안느가 생긋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부작용 없는 그냥 가벼운 수면제니까 걱정 말고 잠깐 자요. 자고 나면 좀 나을 테니.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브리지트 경이 저 기절시켰던 일 가지고 저하한테 복수하는 것 아니니까 이상한 오해는 말고요."
오해 안했었다.
말을 듣고 보니 의심이 생긴다.
사실 조금 억울한 면이 없진 않다.
내 동생의 옛 형님의 정혼자가 타국의 왕세자에게 건넨 차에 수면제가 들었을 것이라고 누가 생각을 하겠나. 그러니 바로 곁에 있던 히나와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들어선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 * *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꽤 경쾌하다.
베른이었을 적 그 추운 날의 바다를 겪은 이후로 두 번째. 두 번을 살면서 딱 두 번째로 배에 올랐다. 그 언젠가 이렇게 큰 배를 타고 같은 자리에 서 있던 날이 떠올라서, 이미 모든것이 다 괜찮아진 것을 알았음에도 선뜻 발을 디디지 못했던 탓이다.
이맘때의 세크리티아는 대부분 쾌청했고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날은 맑고 파도는 높지 않았다. 당장 며칠 내로 비는 커녕 먹구름이 들어설 기미도 보이지 않았으니 배를 띄우기에 있어 이보다 좋은 때가 또 있을까.
그 덕에 무사히 배 위에 발을 디뎠다.
기억은 씻겨가고 이토록 날이 맑았으니.
"그래서, 플란츠 왕세자의 말에 그 자가 무어라 대답을 하더냐."
"그러게요. 뭐라고 했더라······."
조금씩 작아지는 항구, 가까워지지 않는 달빛과 수평선. 모든것이 멀기만 한 모습들을 차례로 바라보던 칼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바로 조금 전의 일인데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나아가는 거대한 배의 후미에 기대어 선 채 달빛에 번지는 새하얀 포말을 내려다봤다.
파릇파릇한 형이 멀미기운에 푹 삶아져 있던 것도, 이 나라 후작의 딸이 그 형에게 뭘 줬는지도, 그래서 지금 그 완두콩같은 형이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 채로.
"순순히 물러났을 것 같지는 않다만."
물론 체이스도 몰랐다.
칼리안을 보던 체이스가 자신의 이름을 끝내 밝히지 않은 세르제인의 대리인을 다시 입에 담았다. 그들이 나눈 대화의 끝이 정말 궁금해서라 하기보다는 깊은 바닷물을 향해 몸을 기울인 칼리안의 행동에 내심 걱정이 되었던 까닭이리라.
체이스의 노력 덕분인지 아니면 마음이 정말 편안해진 덕분인지 몰라도 칼리안은 꽤 괜찮았다. 이제야 간신히 배 위에 발을 올려놓던 발에 각오했던 만큼의 머뭇거림조차 없어서 스스로도 조금쯤 대견하다 생각도 하지 않았던가. 배가 지나간 자리에 일어나는 새하얀 물거품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렸던 날의 기억이 거품과 함께 멀리 밀려나다 다시 고요해지는 것도 느꼈다.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칼리안은, 애써 모르는 척 자신을 걱정해주는 체이스에게 이제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말을 굳이 전하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다시 항구를, 달빛을, 그리고 수평선을 보다 체이스에게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사실 플란츠 형님이 너무 단호하게 대답하는 바람에요. 란델 형님의 의사도 묻지 않고 그냥 싫다고 해버려서. 세크리티아에서 나가기 전에 다시 찾아오겠다 하고는 일단 돌아갔습니다."
"범상치는 않은 인물인 것 같구나. 의연하게 물러났다 하니."
"네. 왕세자의 위치에 어느새 익숙해진 것인지 아니면 성격이 그러한 것인지. 아무리 타국 사람이라지만 한 나라의 왕세자와 왕자의 앞에서 거짓 행세를 한 것을 들켜놓고도 크게 동요하지도 않고 주눅들지도 않고. 어떤 자인지 궁금하기는 합니다."
체이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열었다.
"헌데 란델 왕자를 챙기는 듯 하니. 나는 그것도 조금 놀랍다."
"플란츠 형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상당히 아낌없이 여긴다 생각을 했었는데."
"그렇게 보셨습니까."
"히나의 치유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아이는 못 보내줘도 란델 왕자는 얼마든지 보낼 수 있다 했었거든."
데블란이 차라리 란델의 능력을 눈치채고 란델을 초대했다면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젠가의 플란츠가 체이스에게 이야기를 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칼리안이 말했다.
"란델 형님을 텐실에 홀로 보내는 것이 싫었을까, 플란츠 형님이 의외로 란델 형님과의 관계를 신경쓰고 있는걸까 생각을 해봤는데······ 글쎄요."
란델이 텐실의 왕좌에 오르게 되면 평생을 두고 란델을 만날 때마다 고개를 숙여야 하니, 그것이 싫어서 란델의 텐실 행을 반대한다 하면 차라리 고개라도 끄덕이겠다. 플란츠가 란델을 걱정하고 둘의 관계를 신경써서 그런 대답을 했다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랬다.
란델을 르니에리만큼 꺼려하는 플란츠가 아니던가.
"제 생각입니다만, 믿지 못했다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플란츠 형님이 란델 형님을요."
"란델 왕자가 텐실의 왕세자위를 얻고 왕이 되었을 때 카이리스나 너에게 해를 입힐까 걱정했으리라는 말이더냐."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형님과 저처럼 사이가 좋았던 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기는 하죠. 왕위 계승 후보자 사이에서, 물에 빠진 동생을 구하러 뛰어드는 1왕자라니. 아마 다들 이해하기 어려워 했을 겁니다."
체이스가 부드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사실 체이스와 베른처럼 사이가 좋은 것이 이상할 일이기는 하다. 란델과 칼리안 혹은 란델과 플란츠처럼 서로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것이 왕위 계승 후보자 사이의 일반적인 관계가 아니던가.
아니. 형제의 방에 들어가 차를 마시고 멀쩡히 나올 수 있다는 그 정도 만으로도 이미 좋은 관계라 평가받을 수도 있을 일이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체르밀 궁에서 무기를 소지하거나 개인 호위 기사를 두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자의 제안을 듣고 대답하기까지 걸린 시간동안 플란츠 형님이 어디까지 생각하고 판단했을지, 제가 다시 눈뜨기 전에 형님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저도 몰라서. 틀릴 수도 있겠지만요."
"차차 알게 될 일이지. 서로 묻어두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
"네.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어찌 할 계획이더냐."
"텐실 왕세자 행세하는 놈을 한 번 더 만나보고, 브리지트 숲도 잠시 가볼까 하고요. 어머니와 관련된 곳이니. 엘프들의 대장로와 어머니의 가족들도 만나볼 생각입니다. 형님과 어머님께서 기억을 찾게 된 이유를 알게 되면 더 좋고요. 아, 물론 란델 형님 문제도 확인해보면서요."
이미 다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숨가쁘게 이어질 다음 일정이 기다렸다는 듯 흘러나왔다.
"바삐 움직이겠구나. 다시."
"오래 쉬었으니까요. 다시 나서야죠."
바다 너머 먼 곳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가벼운 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텐실의 왕세자는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글쎄. 어찌해야 할까. 시기 좋게 찾아왔으니 잘 만나볼까 했다만 가짜인 것을 알았으니 추방을 해야 하나······."
그 목소리에 진심이 하나도 안 담겨 있는 것을 안 칼리안이 씩 웃었다.
"가짜인 것을 모르는 척 하실 겁니까."
"이런. 내 속내가 그리 티가 나느냐."
"네. 훤하네요."
"그래. 텐실에 간 새들 역시 세크리티아로 다 불러다 놨으니 안정기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텐실과도 사이좋게 지내야 하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는 중이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만에 하나 대사막의 늑대들과 손을 잡은 텐실이 세크리티아에 눈독을 들이면 안 되니까요.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우선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낫습니다."
물론 카이리스와 칼리안의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에 앞서 체이스는 이제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아닌가. 칼리안과 텐실의 왕세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일단은 세크리티아를 먼저 챙겨야 할 위치에 오른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으니 이번 일에 칼리안을 거들어 왕세자 대리인을 추방하거나 압박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서운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칼리안의 편을 들려 했다면 칼리안이 나서서 막았을 테니까.
- 펄럭!
- 차르륵, 차륵!
어느새 도착한 것인지, 가히 스무 개는 넘을 듯한 크고 작은 돛이 하나하나 걷혔다. 배가 멈춰서고 닻을 내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도착했나 보네요."
이지러지는 달빛은 여전하다.
다만 이제는 사방이 출렁이는 물 뿐이다. 아마도 체이스의 눈에는 더 이상 항구가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만큼 먼 곳까지 왔다.
사실 칼리안은 아침에 배를 타고 나와 적당히 몇 시간 쯤을 있다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리안느가 다른 의견을 냈다. 칼리안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일이니 이 참에 다같이 배 위에서 해 뜨는 것을 한 번 보고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체이스는 좋다 했고 칼리안은 고민했다. 유령에게서 벗어난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확인하고 싶은 마음, 혹은 욕심 때문에 먼저 제안하기는 했으나 한밤의 항해가 위험하지는 않을까 우려된 탓이다. 혼자 오르는 배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예정대로 아침에 나와 점심 즈음에 돌아가자 말하려 입을 열었고, 보게 되었다.
아리안느의 말을 듣고 잔뜩 들뜬 히나의 얼굴을.
'일출 좋지. 배 위에서 보는 일출은 더 좋겠지. 당연히 좋아야지. 무조건 봐야지.'
무조건 간다. 일단 간다. 밤의 항해 아니라 폭풍우가 치고 용오름이 수십 개씩 생긴다 하더라도 아무튼 간다. 우리 히나가 보고싶어 하니까.
그래서 이렇게 나왔다.
'세르제인'이 돌아간 직후 열심히 채비를 해서 한밤에 배를 탔다. 물론 남모르게.
정식으로 즉위한지 이제 막 하루가 지난 세크리티아의 국왕을 포함한 두 나라의 왕족을 잔뜩 태운 아름다운 범선에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찾아왔던 경호 담당자 앨런 마나실이 바삐 움직였다.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카이리스의 일행들을,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침실로 돌아간 체이스를, 자신의 방에 들어가 불을 끈 아리안느를 소리없이 모두 배로 옮겼다. 그리고 이렇게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야기를 적당히 마친 칼리안이 배 안쪽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돌아가면 바로 일정이 있을텐데 잠시 쉬십시오. 아직 해가 뜨려면 몇 시간은 더 지나야 하니."
"안 그래도 그럴까 생각중이다만. 너도 좀 쉬어야지."
"그냥, 저는 잠시."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수평선이 있는 방향 쪽으로 손을 뻗었다. 조금 더 바람을 쐬고 구경을 하고 싶다는 의미임을 알아들은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먼저 들어가마."
그리고 칼리안을 남겨둔 채 선실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그리고 어느새 잠잠해진 바다를 조용히 다시 한 번 바라봤다.
* * *
칼리안이 웃었다.
뱃전을 두드리는 물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오랫동안 웃음소리를 냈다. 덕분에 한 시간여를 잘 자고 나온 플란츠가 한결 나아진 기분도 잊고 눈꼬리를 찌푸렸다.
"그만."
"네."
선실의 가장 아래층,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내려와 난간에 기대 서있던 칼리안이 웃음을 멈췄다. 다만 웃음 참는 얼굴만은 숨기지 않았다.
모두가 잠든 배에서 혼자 조용히 바람이나 쐬고 있으려니 잔뜩 삶아진 완두콩이 타박타박 걸어나왔다. 잘 잤느냐 물으니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멀미는 좀 가라앉았는지 묻는 말에도 고개만 끄덕였다.
아르센으로부터, 그리고 아리안느 본인으로부터 이미 플란츠에게 건넨 차에 뭐가 들었는지를 전해들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플란츠는 그런 말을 안한다. 그러니 어떻게 웃지 않겠나.
"짖지 마."
"아직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짖을 거잖아."
"글쎄요."
말을 잇는 대신 웃어보이는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의 눈꼬리가 다시 한 번 찌푸려졌다. 아무리 잔잔해도 파도는 치고, 나아졌다 하나 멀미 기운이 온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으니까.
곧 플란츠가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와중에도 수면제를 몰래 먹인 아리안느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다. 먼 곳을 보면 조금 낫다는 이야기 말이다.
"세르제인을 다시 만나볼까 합니다."
멀미 쫓는 것에는 다른 생각 하게 하는 것도 썩 좋은 방법이라서. 칼리안이 이렇게 운을 뗐다.
"왜."
"아는 것이 더 있는지 물어봐야죠. 제온에 대해서도 그렇고, 진짜 세르제인에 대한 일도 그렇고요."
"행보 확인도."
"네. 텐실 왕세자의 행보가 제가 기억하는 바와 달랐던 것이 사람이 바뀐 까닭인지 아니면 다른 것이 더 바뀌었는지도 확인해보고요."
"알았어."
"그런데 형님 말 길게 잘 하시던데요. 조금 반성했습니다. 이렇게 잘 자라신 것을 제가 미처 몰랐습니다."
"틈만 생기면 짖으시는데."
사실 말은 원래도 잘 했다.
도통 안 하는 게 문제였지.
아무튼 그러니까 뭐만 나타나면 실드치는 것 좀 그만하라고, 플란츠가 그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아. 형님."
말 못했다.
칼리안의 손가락이 난간 밖, 배에 부딪히는 파도 쪽을 가리켜보였다.
어두운 바닷물이 배를 두드리다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그 하얀 포말 사이사이로 보이는 것을 가리켜보이는 칼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끔 저것들이 바닷가까지도 밀려올 때도 있지만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많은데. 이렇게 보는 건 저도 처음이네요."
플란츠가 대답하지 않았다.
밝은 녹빛.
에메랄드를 조각낸 것 같은 빛. 스스로 빛을 내는 그 녹빛들이 어두운 바다를 밝히듯 반짝이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느라 대답하는 것을 잊었다.
무엇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처음 보게 되어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신비로운 광경이라.
멀미도 잊고 동생 놈의 과보호도 잊고, 세르제인과 란델에 대한 고민도 잊은 채로 그렇게 가만히 난간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저 빛나는 생물을 먹고 산다는 거대한 짐승이 생각난 탓에.
"저기."
그리고 칼리안이 플란츠를 다시 불렀다.
밝은 달이 바다 위에 부서진다.
그 달빛 끝에 수없이 많은 물방울이 튀었다.
거대한, 정말 거대한 짐승의 꼬리가 물밖으로 나왔다가 수면 위에 내려앉았다. 물보라를 만들어냈다.
한 번 더, 그리고 또 한 번 더. 고요한 짐승이 유유히 움직였다. 긴 몸집이 더 긴 파문을 만들어내고, 물과 몸이 부딪힌 자리에 녹빛이 반짝였다. 투명한 은빛의 꼬리가 달빛에 반짝였다.
그래.
투명한 은빛 꼬리가.
"어쩐지. 굳이 배를 타보고 싶더라고요."
장난기 가득한 칼리안의 목소리가 들린다.
"신기하게도."
데블란의 죽음을 예감했던 동생 놈이 말했다.
그런 놈의 뒤로, 한겨울 세뉴강의 한 조각을 떼어낸 것 같은 빛의 몸을 가진 고래 한 마리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치지 말라고 꼭 말해야겠다 여기던 실드가 플란츠의 앞에 펼쳐졌다. 그것을 본 플란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불만을 가지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불만을 보일 수가 없었다.
다만 그것이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은 했다.
"형님 고래 보신 셈 쳐도 되겠는데요."
"······ 이젠 정말 아무때나 짖으시는군."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조금씩 다가오는 투명한 은빛의 고래. 그런 모습을 한, 해룡 아르나이젤을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