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26화 (327/527)

제58장. 완두콩이 또(1)

없는 줄 알지만 셋이나 있다.

이것은 플란츠의 인내심에 대한 이야기다.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와 소금 넣은 것 먹는 분홍 머리 마법사 정도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적어도 셋은 있다. 물론 이 횟수는 사람을 상대로만 깎인다. 툭 튀어나온 목젖을 꾹꾹 누르더니 냐옹냐옹 예쁘게 우는 안네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것처럼, 플란츠의 인내심이 몇 개인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짖어대는 동생 놈을 앞에 두고는 무한히 늘어나기도 한다.

대체로 잘 지니고 살지만 가끔 사라진다.

플란츠의 이성에 대한 설명이다. 가끔 이성적임의 도가 지나쳐 제 심장까지도 체스판의 말처럼 굴렸었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으나 아무튼 플란츠는 이성적인 편이었다. 다만 가끔 그 이성이 홀랑홀랑 사라질 때가 있는데, 몇 바퀴인지도 모를 만큼을 돌아있는 동생 놈을 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며 나도 같이 뱅글뱅글 도는 경우를 이름이다.

알고 보면 순하지만 순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물론 플란츠의 인성에 대한 평가다. 동생이 바뀐 것을 확인하려 얀에게 나이프를 던졌다가 칼리안 손바닥에 두꺼운 흉 하나를 만들어 준 뒤로 그 정도로 막돼먹은 인성을 내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해서 순한 인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살지도 않았다. 플란츠가 참 순하다 여기는 칼리안의 심정에 사람들이 선뜻 공감하지 못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인성 보여봐야 루시가 털 세우는 정도로만 여기는 동생 놈임을 알기 때문에 놈 앞에서는 대체로 접고 사는 것 뿐이니까.

"바쁘니까. 본론만 말하고."

어찌됐건 그런 플란츠라서.

란델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소리를 하는 세르제인을 별장에 데려온 이래로 칼리안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란델의 일을 돕기로 한 것이 플란츠이기도 했고, 그것이 진짜든 아니든 지금 세르제인은 텐실의 왕세자 신분이었으니 같은 위치의 플란츠가 대답을 하는 것이 나았다.

이 자리까지 따라온 세르제인은 변장 마법을 풀지 않았다. 호위기사 둘을 밖에 내놓고 카이리스의 두 왕족의 앞에 혼자 앉아 있음에도 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알리지도 않았다.

그런 의뭉스러운 세르제인을 대하는 플란츠라면, 자신을 대할 때와는 다르게 인내심도 줄이고 이성도 잠시 집어넣은 뒤 세간에 알려진 인성까지 잘 써먹을 똑똑한 완두콩임을 칼리안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가."

이렇게 말이다.

- 달칵.

잠시 들어온 레릭이 세 잔의 차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계피와 말린 귤 껍질이 어우러진 차에서 좋은 향이 올라왔다. 그 향을 맡은 세르제인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때마침 차가 나왔으니, 적당히 마시고 가지. 그나저나 카이리스인들은 꽃차를 좋아한다 들었는데 아닌가보군."

꽃차 참 안 좋아하는 왕세자가, 꽃차 끊은지 참 오래된 동생을 잠깐 보다 답했다.

"텐실인들 귀가 나쁜가본데. 머리 나쁜 만큼."

"먼저 예의 따지던 것 치고는 그쪽 말이 상당히 무례하고."

"싫으면 나가던가. 그쪽이."

"이거야 원. 알아서 간다는데 자꾸 가라고 하네."

"본론 꺼내라고 말한 것 같은데. 확실히 머리가 나쁜가."

칼리안 쪽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낯선 이와 원만한 대화를 하기엔 플란츠의 말이 너무 짧았고 텐실의 왕세자는 그 짧은 말도 귓등으로 안듣는 인물이었던 탓이다. 이러다가는 밤새도록 한 쪽은 본론 꺼내라는 말만 하고 한 쪽은 제 할 말만 하게 생겼다.

"자꾸 그렇게 나오면 좀 서운해질 것 같군."

"서운하면."

고양이 없는 틈에 열심히 하겠다는 듯, 플란츠가 무릎을 꼬고 그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세르제인 쪽으로 몸을 조금 숙이며 입을 열었다.

"그 잘난 텐실 왕세자, 죽였는지 죽었는지. 그것부터 물어볼까."

세르제인의 입이 다물렸다.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나는 말 돌리는 것 싫어하는데. 그쪽은 어때."

알아서 잘 싸우는 완두콩을 본 칼리안이 여유로운 얼굴로 찻잔을 들어올렸다. 꽃보다 향긋한 귤 냄새가 오늘따라 유난히 마음에 든다.

아, 정말. 우리 히나를 어떡하지.

어디 하나 대단하지 않은 곳 없다 알고는 있었지만 어쩜 이렇게 야무지기까지 한지 아무튼 몇 번이고 감탄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것이다. 저 왕세자 놈 속에 든 것을 이렇게나 빨리 알아낸 것은 무조건 히나 덕분이 아닌가.

"내가 말을 돌리는 중인 줄은 몰랐네."

"그쪽이 데블란에게 치유사 보내는 대신 받았을까. 아니면 그 전에 또 다른 것을 주는 조건으로 받았을까."

"······ 어제 내 정체를 의심하는 것 같기에 혹시나 했는데. 여전히 같은 생각을 하는군."

"란델 형님 일은 핑계고. 우리가 그쪽 정체를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하려고 왔나본데."

지금 말하고 있는 플란츠도 물론 그랬지만 칼리안 역시 히나의 말이 틀렸으리라고는 애초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다. 튼튼이가 백금색이라는 말에 백금색의 정의를 바꿀 방법부터 고민하고 제 키가 좀 자랐다는 히나의 말에도 고개를 끄덕여 보인 칼리안이 아니던가. 그러니 히나가 여자라 하면 여자인 것이지 세상에 어떻게 그것을 의심하겠나.

"핑계는 아니었지만 확인이라면 확인이겠지.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퍼뜨리지는 않을지 걱정이 됐으니까."

"너무하네. 이 정도로 말을 했으면 얘기해줘도 좋잖아. 나를 떠보려면 그쪽부터 들춰내 줘야 하는 것도 모르는 것 같고."

이제껏 가만히 있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시치미를 떼는 꼴을 더 참지 못해서 나섰다. 물론 계속 발을 뺄 만도 하다. 변장 도구로 바꾼 외모는 앨런조차 한 눈에 알아보지 못할 테니까. 다만, 상대가 칼리안과 플란츠였다.

"그런데 마법 도구 쓴 건 못 알아봐도······ 거짓말 하는 건 잘 알아보거든, 내가."

말 끝에 바람이 인다.

세르제인의 짧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리고 뒤를 이어 '툭' 하고, 세르제인의 귀에 걸려있던 파랗고 동그란 귀걸이가 끊어져 떨어졌다.

머리 색이 바뀐다. 머리 길이는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금색과는 완전히 다른 청회색으로 조금씩 물들어갔다. 금빛 눈도 바뀌었다. 푸른 빛이 짙게 감도는 은빛으로, 보다 날이 선 가느다란 눈매로. 목젖이 들어가고 목이 가늘어진다. 손가락이 길어진다.

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안 '세르제인'의 입꼬리가 가늘게 말려 올라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리안은 어깨만 으쓱여 보인 뒤 플란츠 쪽을 바라봤다. 말싸움 할 시간 줄여드렸으니 이제 알아서 계속 말씀 나누시라는 뜻이었다.

* * *

봄이 오는 곳. 카이리스.

카이리스에 봄이 왔다. 얼어있던 세뉴강이 다시 흐르고 노란 프레디아꽃의 향이 온 카이리스를 물들이기 시작한다.

구름을 뭉쳐놓은 듯 폭신폭신해보이는 보라색 설탕과자가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보라색에서는 포도맛이 날 줄 알았는데······ 포도맛 아니네."

달콤함 끝에 남겨진 향기를 맡은 아이의 실망감어린 말에, 곁에 있던 이가 물었다.

"라벤더맛은 싫어?"

"꽃이라서. 꽃은 별로 안 좋아해."

"왜 안 좋아하는지 물어도 될까?"

"꽃이 시드는게 속상하니까."

"피어났으면 시들어 사라지기도 해야지, 리리에. 꽃이 계속 피어있을 수는 없어."

"그래도 불쌍해. 너무 빨리 사라지잖아."

이유는 다르다지만 같은 핏줄 가진 누군가도 꽃을 멀리하는 것을 알고는 있을지. 아이, 리리에의 곁에서 함께 걷던 드미레아가 작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네가 좋아하는 아몬드 나무에도 꽃이 피는데."

이렇게 입을 연 드미레아는 리리에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아몬드 나무의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향기는 어떤지, 꽃이 피고 진 뒤에 어떻게 아몬드가 열리는지를 이야기했다. 세상의 꽃들이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예쁘게만 피고 지는 것만은 아님을 알려줬다.

"라벤더맛이 싫으면 다른 맛을 다시 사 줄게."

그리고 이렇게도 덧붙였다. 꽃이 싫다는 아이에게 꽃이 왜 피고 져야 하는지는 설명했지만 꽃을 싫어하지 말도록 종용하진 않았다. 드미레아의 모친인 세리에는 한 번도 싫은 것을 강요한 적 없었으니까.

아직 많이 남은 설탕과자를 내려다보던 리리에가 하나를 더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만든거잖아. 버리기 싫어."

"억지로 먹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을 거야."

"억지로 먹는 것 아니야. 맛없지 않아. 대신 다음에는 빨간색 사줘."

"그래. 다음에는 빨간색 사 줄게."

"빨간색은 무슨 맛일까?"

"글쎄. 딸기맛이 아닐까."

"장미 향이 나는 거면 어떡하지."

"그럼 노란색을 사 줄게."

"노란색에서는 프레디아 향이 나면 어떡해, 드미레아."

"괜찮아. 꽃 향이 안 나는 것도 있을 거야."

"응. 다음에는 잘 보고 다른 맛을 고르자."

"그래. 그렇게 하자."

빨간색 설탕과자는 무슨 맛일까. 어쩌면 딸기맛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장미의 향이 날 수도 있고, 짐작하기 어려운 또 다른 맛이 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드미레아는 그것이 무슨 맛일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다음을 약속했다. 리리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미레아, 이제 집에 갈 거야?"

"그래야지. 옷은 다 맞췄으니까."

"혹시 저녁에 어디 가야 해?"

"아니야. 다른 일정은 없어."

리리에의 새 옷을 맞추러 나온 길이었다.

리리에에게 참 잘 어울릴 옅은 노란빛의 원피스를 맞추고 하늘색 재킷과 감청색의 바지 정장도 맞췄다. 이곳저곳을 돌아가니기에 좋을 긴 치마와 바지, 갖가지 종류와 색깔의 편한 옷들도 여러 벌 새로 맞췄다. 이맘때의 아이들은 정말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니까.

자신의 옷을 맞출 때 그러하듯 의상점의 사람을 불러와도 되는 일이었으나 드미레아는 일부러 밖에 나왔다.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되도록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리리에와 함께 나와 거리를 돌아다녔다. 마차도 말도 이용하지 않고 언제는 둘이서, 또 언제는 기사 유란이나 시오나만 포함한 조촐한 인원으로 걸어다녔다. 세리에와 슬레이만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얼마나 좋은 기억이 되는지 잘 알았으니까.

"리리에.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응. 강에 가고 싶어."

청록색의 머리와 눈.

에반의 머리 색과 레넌의 눈 색을 닮은 아이. 그레이의 날카로운 눈매와 부드러운 입매를, 실리케의 가느다란 턱선과 높은 콧날을 닮은 아이. 때문에 플란츠와도 아주 많은 곳이 닮은 아이.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누가 보아도 분명한, 브리센의 아이.

그런 아이여서, 처음에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에반과 레넌이 잊혀질 때까지 저택 안에 숨겨두고 키울까 생각을 했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첫째 오빠 생각이 났다. 아주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뒤 얀을 불러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르메인과도 대화를 나눴다. 물론 당연히 가장 먼저 리리에의 생각을 물었다. 다만 슬레이만에게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슬레이만은 리리에가 원하는대로 하라 대답할 터였다. 무슨 결과가 있든 어떤 소문이 생기든 그레이가 어떤 반응을 보이고 무슨 요구를 해 오든. 그 모든 것에서 작은 아이 하나 쯤은 충분히 보호해 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것이 바로 슬레이만의, 지그프리드의 방패니까. 지키는 것은 지그프리드가 가장 잘 하는 일이니까.

그 많은 대화의 끝에서 드미레아는 리리에의 손을 잡고 함께 저택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번 르메인이 물고기 먹이를 주는 행사에도 당연히 함께 참석을 했다. 아직까지 조용한 그레이는 섣부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귀족들은 지그프리드의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했다. 덕분에 조용히 행사를 마쳤다.

"세뉴강은 어제도 봤잖아."

"알아. 그런데 다시 가고 싶어."

"저녁 강가는 추워, 리리에."

"그래도. 어제 사람이 많아서 모두 구경하지 못했어."

평소와 달리 리리에가 고집을 부렸다. 왕족을 만나기 위해 몰려든 사람이 많아 마음껏 구경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그럼······."

말을 멈춘 드미레아가 잠시 주머니 속의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저택으로 돌아가 씻고 저녁을 먹은 뒤 미뤄 둔 일을 하다 리리에를 재우고, 검술 수련을 하거나 책을 좀 읽다 잠자리에 들면 딱 좋을 때였다.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저무는 하늘을 한 번 본 드미레아가 몸을 숙였다. 그리고 리리에의 목에 둘러 두었던 새하얀 털 목도리를 다시 한 번 단단히 여며주며 말했다.

"그럼 잠시만 들렀다 가자. 대신 오래는 안돼."

"응. 좋아."

리리에의 얼굴에 꽃이 핀다. 작게라도 마주 웃어준 드미레아가 고개를 돌려 유란에게 말을 전했다. 예정보다 늦어질 것 같으니 자신이 들기를 기다리지 말고 모두 먼저 식사를 하도록 일렀다.

함께 길을 나섰던 유란이 저택으로 먼저 떠난 뒤, 드미레아는 마차를 탈까 조금 걸을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리리에가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곤 그냥 발을 옮겼다.

이미 여러 번 보았던 상점들과 진열된 물건들이 여전히 신기한지, 오늘도 하나하나 눈에 담듯 바라보며 천천히 걷던 리리에의 발이 멈췄다. 설탕과자집 앞에서 말고는 두 번째로 멈춰선 것이니 그 의미가 분명하다. 사고 싶은 것이 있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드미레아는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꽃이 가지고 싶어, 리리에?"

"강에 가면······."

평소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말.

꽃은 별로라 했으면서도 강에 가는 길에 꽃집 앞에서 멈춰선 발.

그런 리리에를 잠깐 내려다보던 드미레아가 팔을 뻗었다. 그리고 아이를 번쩍 안아들었다. 리리에는 처음 지그프리드 저택에 왔을 때보다도 많이 자랐지만, 시오나도 오러를 둘러야 맞댈 수 있을 무거운 검을 휘두르는 드미레아에게는 변함없이 가벼웠으니까.

"사 줄게. 안네루시아."

르메인은 세뉴강에 물고기 먹이를 주는 것으로 봄의 시작을 알렸다. 그것은 곧 또 하나의 꽃이 세뉴강 위에 다시 피어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르메인이 자리를 떠난 뒤 겨우내 띄우지 못한 수많은 안네루시아가 강물 위에 올랐었다. 그 모습을 본 리리에가 건넨 질문에 드미레아가 대답을 했었다. 그 꽃이 안네루시아라는 것을, 그리고 왜 그 꽃을 강물에 띄우는지를.

누구를 위한 꽃일지 묻지 않은 채로, 드미레아는 꽤 많은 송이의 안네루시아를 샀다. 꽃 한 송이에 말 한 마디를 전해야 할 테니 누구에게 향한 말이든 아낌없이 할 수 있도록.

"엄마한테 보낼 거야."

자신을 안아들지 않은 반대편 손에 들린 꽃바구니를 보던 리리에가 속삭이는 목소리를 냈다. 비밀을 알려주듯 건네진 작은 말에, 드미레아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리리에는 똑똑했다.

플란츠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아이답지 않게 똑똑한 것은 맞았다. 저를 낳은 이가 어찌 되었는지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으나 이미 잘 알고 있을 만큼.

"꽃을 더 살 걸."

품에 안은 아이에게 한숨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드미레아가 이렇게 혼잣말같은 이야기를 했다.

"아니야. 충분해. 잘 지내고 있으니까 이제 걱정 안해도 된다는 말만 할 거야."

"그래."

"고마워, 드미레아."

"이런 건 고맙다고 안해도 괜찮아."

"고마워."

"······ 그래."

한 팔에 리리에를 안고 다른 쪽 손에는 꽃바구니를 든 드미레아가 계속 발을 옮겼다. 리리에가 설탕과자 하나를 드미레아의 입에 넣어줬다. 그리고 드미레아의 목에 팔을 두른 뒤 제 입에도 하나를 넣었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설탕과자를 모두 먹고 나서는, 드미레아를 꼭 껴안았다.

찬 공기, 설탕과자, 라벤더 향기.

안네루시아, 그리고 드미레아의 단단하고 따뜻한 품.

리리에가 기억하는 첫 봄나들이였다.

* * *

지난 가을.

정확히 9월 경의 일이라 했다.

"습격이 있었다. 세자 저하를 모시고 탈출했으나 도중에 사고가 있었다."

제 본 모습을 정말 알고 있는지를 떠보려다 실패한 놈이 잔뜩 가라앉은 말을 이었다.

"세자께서는 살아계신다. 다만 살아있다 하기 어려운 상태로."

텐실의 왕세자, 그러니까 앞에서 왕세자 행세를 하고 있는 전직 호위기사 말고 진짜 왕세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습격이 있었고 탈출하던 중 왕세자가 벼랑 밑으로 떨어졌으며, 구조하기는 했으나 제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라 했다. 왕세자의 측근이라고는 같은 날 전부 죽어버렸다고도 했다.

"그쪽 국왕은. 뭐 했는데."

"귀족들 몰래 신관을 보내려 했으나 실패했지. 습격자를 보낸 것이 전하의 측근이었으니까."

"······ 귀족들인가. 대체 왜."

"란델 왕자가 카이리스 왕이 되지 못할 것이라면, 차라리 란델 왕자를 불러다 왕위를 잇게 하는 것이 나으니까. 아마 란델 왕자와 다른 계약을 한 것 같던데."

맹세의 인을 말함이었다.

"카이리스 때문인가."

"카이리스에도 란델 왕자의 세력이 있지 않나. 그것을 기반으로 땅 부풀리기를 하려는 심산이지. 늑대들과도 손을 잡은 김에."

"늑대들과 손잡은 것이 귀족들인 줄은 몰랐는데."

실소한 플란츠가 잠깐 생각을 해보다 말했다.

"변장은 어떻게 하고 있는 거지."

"치료 시기를 놓친 것을 안 전하께서 데블란과 거래를 하셨다. 귀족들 몰래 나를 왕세자로 만들기 위해서. 세자 저하의 행동을 전부 따라할 수 있으면서 습격에도 대비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었으니까."

돌아오는 가을, 마차 사고로 죽는 것이 지금 앞에 앉은 저 놈일지 아니면 진짜 왕세자일지는 칼리안도 알 수 없었다. 외모를 바꾸는 마법은 시신이 되었다 해서 풀리지 않으니까.

"그래서. 뭘 바라는데."

"돌아오는 카이리스 국왕 탄신일 축하연에 참석하겠다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래서, 란델 왕자와 내가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을지 부탁하려 이곳에 왔다."

"왜."

'세르제인'이 잠시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칼리안을 쳐다보다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란델 왕자가 텐실의 왕위에 오르되, 귀족들이 아닌 전하의 손을 잡아줄 수 있을지를 묻기 위해서. 난 왕이 되긴 싫거든. 칼 쓰는 사람이라."

칼리안의 눈길이 플란츠를 향했다.

란델을 텐실로 보내는 것에 플란츠는 분명 동의할 테고 그것에 칼리안은 끼어들 수 없으니까.

"싫은데."

그리고 플란츠는 거절했다.

"너희 나라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지. 왜 내 형님이 거기까지 가서 왕이 되어줘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정말 놀랍게도, 생각지도 못하게.

란델을 보낼 생각이 없다 말했다.

란델의 의사는 조금도 묻지 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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