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장. 부디(4)
없거나 한 번 있다.
물론 칼리안의 인내심에 대한 이야기다. 대체로 없고 간혹 한 번을 참지만, 질풍노도의 시기임을 감안해 완두콩에 한해서는 조금 더 참는다. 칼리안은 어른이니까.
대체로 없지만 가끔 생긴다.
칼리안의 이성에 대한 설명이다. 이건 시스파니안도 인정했으니 칼리안은 반박하기 어렵다. 다만 칼리안이 이성을 잃어버렸다가도 되찾는 적이 가끔 있는데,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완두콩이 안좋은 모습을 보고 배울까 우려한 까닭인 경우가 대다수다.
좋은 줄 아는데 알고 보면 아니다.
이건 칼리안의 인성에 대한 평가다. 다만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현저히 적다. 그 인성을 겪어본 이들 중 대부분이 이미 이 세상에 없는 탓이다. 복잡한 듯 결코 좋지 않은 그 인성을 알고 있으나 별 탈 없이 잘 살려둔 이유는 내 가족이거나 정혼자라서, 혹은 옛 정혼자라서, 또는 내 따까리라서. 그리고 또 하나, 질풍노도의 시기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완두콩이라서다.
"······ 하."
이렇게나 대단하신 동생 놈이라서.
그 동생께서 오늘도 어김없이 인내심을 안 쓰시는 바람에 그만 이성을 잃고 인성을 드러내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마주한 완두콩이 작은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쉬었다.
"사과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 같은데."
그리고 불타오르는 인성에 열심히 부채질을 시작했다.
얀과 레릭의 얼굴빛이 달라지고, 아르센의 눈이 매우 반짝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플란츠는 의자에 등을 기댄 뒤 비딱하게 고개를 들어 텐실의 왕세자를 보는 것으로 모두의 기대에 조금 더 부응했다.
"너그러운 아우님께서 이해하고 넘어가지. 저들에게 예의는 기대하지도 않았으니."
분명히 칼리안이 생각이란 것을 먼저 해보지 않았던가. 습관처럼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그러니 저렇게 갑자기 화를 내는 것에도 이유가 있으리라 여겼다.
텐실의 신관을 멋대로 주고 도로 빼가면서 카이리스가 무리하게 신관을 요구한 것처럼 굴었던 일. 카이리스 국왕의 탄신일 기념 축제에 선물을 보내지는 못할망정 왕궁 안에 신성기사들을 보낸 것을 아직도 사과하지 않은 일. 그런 것들에 의해 잘 쌓인 앙금이 안 풀렸음을 알리고 앞으로 벌어질 저들과의 대화의 장에서 우위를 선점하는 정도의 이유 말이다. 거기에 더해, 플란츠가 왕세자위에 오른 것이 눈속임임을 눈치채고 있다 알려오는 수작질도 막으면 더 좋고.
그랬더니 동생 놈이 또 잘 키운 자식새끼 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일부러 화내는 것에 장단 잘 맞춰줘서 저러는 것일 테니 놈이 나를 어떻게 보든 상관은 없는데 내가 형이다. 그래서 밀려오는 짜증을 숨기지 않고 얼굴에 잘 드러내줬다. 마치 텐실의 무례에 크게 화가 난 것처럼 보일테지만 아무튼 나는 쟤 말고 내 동생 때문에 짜증난 게 맞다.
"카이리스의 플란츠 왕세자에게 눈을 잘못 두면 칼리안 왕자의 검이 날아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왕자의 형님과 인사를 나누어도 좋을까, 허락을 받고자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염려해주는 것만큼 위 아래를 모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플란츠에 대한 완벽한 무시.
"허락이라······ 그래. 허락을 받아야지. 그런데."
아르센이 이번에는 텐실 땅을 구경해볼 수 있으려나 생각하는 사이, 세르제인을 향한 말이 계속 이어졌다.
"왕족 아닌 이가 감히 내 아우님에게 먼저 말을 걸었으니. 그런 자를 살려둘지, 살려두지 않을지. 그것을 먼저 허락받아야 할 것 같은데. 너 말고, 내 아우님이. 나에게."
칼리안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나서면 똑같이 플란츠를 무시하는 꼴밖에 안 되기 때문에 애써 입을 다물고 있는 중이었다. 대신, 이제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한 탓에 시기 적절하게 잘 펼쳐진 사일런트 막 안에서 마음껏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플란츠였다. 대화고 나발이고 일단 왕족을 사칭하고 있으니 말이다. 플란츠도 히나의 수어를 봤으니까.
플란츠가 여전히 자리에 앉은 그대로 고개를 좀 더 들었다. 그리고 앞에 서 있는 세르제인을 용케 내려다보는 눈을 한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뭐야. 너."
세르제인이 싱긋 웃었다.
"동생 품 속의 망나니는 아니었나."
"뭐냐고. 물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플란츠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기 직전에 보여주는 것과 비슷했다. 그래서 이제는 내 동생 말고 쟤 때문에 짜증난 플란츠가 눈꼬리를 가늘게 만드는 사이, 놈의 입이 열렸다.
"내일 11시. 차 한잔 하지. 당신들에게 할 말이 있으니까."
"싫은데."
플란츠가 마주 웃었다.
"대구 먹으러 가기로 해서. 내 동생이랑."
신나게 대구 먹을 예정이라 누군지 모르는 위험한 놈은 안 만날 거라고 대답했다. 그 대구 맛이 정말 기대된다는 듯 참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이제 반대로 내가 형님을 말려야 될 상황에 놓인 칼리안이 흥미진진한 얼굴이 됐다. 그래서 지금 저 분위기에 기름을 더 얹어볼지, 아니면 물을 끼얹을지 잠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국왕 전하 드십니다."
비로소 모든 의식을 마친 체이스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텐실의 왕세자와 칼리안 일행이 함께 있는 것을, 그리고 그 분위기가 가히 좋지 않은 것을 직감한 체이스의 눈길이 텐실의 왕세자쪽을 향했다. 부드러운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눈빛이 참 날카롭다.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듯 보이기도 했고 너는 뭔데 거기에 서있느냐는 의문을 담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국왕의 앞에서 계속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던 터라, 체이스를 향해 살짝 목을 숙여보인 세르제인이 플란츠와 칼리안을 쳐다봤다.
"얘기는 나중에 이어서 해야겠군."
그리고는 또 한 번 싱긋, 웃음을 짓더니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 * *
탁, 하고.
속 시원하다는 듯 내려놓은 술잔이 텅텅 비어 있었다. 에우리아가 바질리카 병을 들어 방금 비워낸 술잔을 채웠다. 물론 칼리안이 체이스에게 받은 그 귀한 바질리카가 아니라 상점에서 사온 다른 술이었다. 체이스의 즉위식을 축하하는 연회장에서는 마음껏 마시지 못해서, 별장으로 돌아온 뒤 다같이 모여 조촐한 술자리를 다시 벌이는 중이었다.
새 술을 가득 따른 에우리아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이야. 대구 먹으러 가기로 해서, 라니. 말이 참 짧더니 그래도 말싸움은 잘 하시네요."
"왕자님한테 말버릇이 옮았나봐. 우리 왕세자님이."
"왕세자님 말버릇이 왕자님한테 갔을 수도 있죠. 왕세자님 동생이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 아무튼 말버릇 금방 옮더라. 베로니카도 말 배우고 얼마 안 되니까 아버지 말버릇을 따라하더라고. 그 형에 그 동생이니 말하는 게 다를 리 없지."
히나의 수어를 칼리안도 보고 플란츠도 봤다.
당연하게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수어를 알았다. 심지어 에우리아와 레이첼조차 데블란의 일이 끝난 이후의 한가한 시간 동안 수어를 배웠으니까. 덕분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 말을 봤고, 그러니 칼리안도 사일런트 막의 범위에서 그들을 뺄 필요가 없었다.
어느새 다시 찰랑이게 된 에우리아의 술잔에 자신의 잔을 가져다 부딪힌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정체가 뭘까? 텐실 왕세자."
"글쎄요. 또 언제 오겠다 하지도 않고 그냥 빙글빙글 웃다가 알겠다며 가버렸으니."
"나였으면 그냥 궁금해서라도 만나보겠다 할 텐데 칼같이 거절하셨네, 우리 왕세자님은."
"그러니까요. 아무튼 카이리스에는 성격 멀쩡한 사람이 없어요."
그렇게 말하던 에우리아가, 테이블에 기대 잠든 사람의 은색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니지. 여기 한 분 빼고."
히몰리카만큼 독한 바질리카 한 잔을 쭉 들이키더니 오래지 않아 꾸벅꾸벅 졸다 잠이 든 것은 히나였다. 아마 우리 히나가 여기서 이렇게 술 먹고 뻗은 것을 알면 칼리안이 가만있지 않겠으나 그런 것을 신경 쓸 레이첼과 에우리아는 아니었으니까.
"저도 멀쩡합니다, 협회장님."
"주머니 안에 든 스푼이나 버리고 그런 말을 해. 꼬맹이."
"그 정도는 그냥 마법사의 참된 신의로 보면 안됩니까."
"어. 안돼. 좀 이상해."
레이첼이 웃음소리를 냈다.
내 마음 몰라주는 다른 마법사들의 반응에 잠시 쓴 입맛을 다시던 아르센이, 튀긴 바나나에 치즈를 뿌린 달콤 짭짤한 안주를 집으며 본래 나누던 이야기 주제를 꺼내왔다.
"왕세자 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 아니겠습니까."
레이첼의 시선이 여전히 잠든 히나에게 가 닿았다. 에일라의 변장 마법 도구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던 것을 생각한 까닭이다.
"그렇겠지. 외모 똑같이 만드는 거야 우리도 해봤듯이 별 것 아니긴 하지만, 왕세자 본인이 맞으면 뭐하러 성별을 속이겠어. 그럴 이유가 없지."
"변장 마법 도구를 건넨 것은 그럼. 역시 데블란일 것 같습니다. 텐실 신관들을 다시 불러오는 조건이었을 수도 있고, 그 전에 다른 이유로 보냈을 수도 있고 말입니다."
레이첼의 말에 대답한 아르센이 빈잔에 맥주를 따르려 했다.
- 파지직!
그러자 맥주잔에 맺힌 물방울에서 아주 작은 보라색 스파크가 일었다.
"세 잔 마신 것 다 알아. 꼬맹이."
"그걸 다 보고 계셨습니까?"
"어. 다 봤으니까 저기 있는 탄산수나 마셔. 가서 코코 보던가."
"코코 잡니다. 탄산수 마시겠습니다."
아르센의 툴툴거림에 에우리아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언 감자만큼은 아니었지만 얼린 바나나 튀김도 맛없기는 마찬가지니까.
"이제 어떻게 하시려나."
"글쎄요. 지켜보면 알겠죠. 싸움이 나도 좋고, 아니어도 좋고. 뭐든 재밌으니까요."
칼리안이 그 텐실의 왕세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에우리아가 기대감 가득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투명한 잔에 든 바질리카를 한입 쭉 마셨다.
* * *
세상은 넓고 플란츠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
"혹시 이것도 처음 보셨습니까."
칼리안의 질문에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 봤다 하기보다는 그보다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였다. 그래서 그것을 어디서부터 설명해줘야 저 놈이 또 안 짖고 넘어가는지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알았어. 이제."
그러니까 지금 플란츠는 나무로도 접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물론 싫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 없이 그냥 정말로 처음 알았다는 뜻이다. 그랬으니 당연히 처음 봤다.
무늬 하나 없는 투박한 나무 접시와 나무 컵을 보면서 대답한 플란츠는, 포크와 나이프도 나무로 만든 것일까 아주 잠시 기대했다. 그리고 곧 아주 조금 실망한 얼굴이 됐다. 왕궁이나 슬레이만의 영지에서 보았던 것처럼 멋진 세공과 보석으로 장식된 은제가 아니었을 뿐, 투박한 회색의 그것들은 나무가 아닌 금속제였다.
후드 밑에 감춰진 표정을 어떻게 봤는지 몰라도, 똑같은 로브의 커다란 후드를 깊숙이 눌러 쓴 칼리안의 붉은 입술이 양 옆으로 둥글게 올라갔다.
"식기까지 나무로 쓸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
"아무튼 내 형님께서는 어찌나 곱게 자라셨는지."
"식사는 사람이랑 하고 싶은데."
"루시랑 안네는 같이 앉혀놓고 드시잖아요. 저도 그냥 봐주시면 안됩니까."
"······ 애초에."
애초에 지금 너무 자연스럽게 본인을 사람 미만의 무언가로 인정해버린 것 아니신지.
이런 말을 꺼내려는데 식당의 주인이 다가왔다. 그리고 꽤 괜찮은 냄새가 나는 큰 접시 두 개를 더 내려놓고 돌아갔다. 실례하겠다는 말도, 이것을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냥 툭 내려놓고 갔다.
그것도 처음이었다. 야영 중에 구운 멧돼지 고기를 먹을 때에도 최소한 그것이 무슨 고기인지 정도는 곁에서 알려줬으니까. 물론 이 역시 불쾌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생소했을 뿐이지.
"대구를 손질해서 올리브 오일에 겉을 익히고, 낮은 온도의 숯불에 속까지 익힙니다. 그리고 다시 올리브 오일에 구워서 내오는 겁니다."
식당 주인을 대신해서 칼리안이 설명을 했다.
생선 하나 굽는 것에 그 정도 시간을 들이는 만큼, 여기 꽤 유명하고 비싼 곳이라고. 도자기 접시를 쓰면 술 마신 손님들 손에 잘 깨지기도 하고 혹은 잘 없어지기도 해서, 어떤 식당이든 식당에서는 일반적으로 도자기 접시를 잘 안쓴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물론 카이리시스나 세크레타 안의 식당들은 그렇지 않겠지만요."
"싫어하는 것 아니야."
"압니다. 그냥 알아두시라고요. 이런 것도."
"알았어."
짧게 대답한 플란츠가 다른 소스 없이 오로지 소금만 뿌려진 대구 구이를 쳐다봤다. 허브 버터를 올리고 레몬 소스가 멋들어지게 뿌려진 왕궁의 것과는 많이 달랐으나 싫지 않았다.
처음으로 이런 곳을 구경하게 되는 것인데 겉모습 바꾸는 마법을 쓸 필요가 있겠느냐는 칼리안의 말에 둘 다 후드 깊은 로브만 걸쳤다. 레이븐과 에스티나도 숨기지 않고 그냥 데려왔다. 덕분에 이렇게나 생소한 곳에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찾아오게 된 것 역시, 싫지 않았다.
"드십시오. 여기 대구 맛있습니다."
"자주 왔었나보지."
"······ 네."
기대감이 가득 어린, 생글거리는 웃음 끝이 잠시 멈췄다.
카이리스에서 세크리티아까지 머나먼 길을 와서 칼도 쓰고 다치기도 하고 잠들기도 해가며 이 나라 왕좌의 주인이 바뀌는 것에 꽤 많은 공헌을 했다. 그렇게 하고 나서도 곧바로 오질 않고 결국 이 나라의 왕이 온전히 서는 것을 본 뒤에야 이곳에 왔다.
왜 그렇게 미루고 미뤄왔는지를 이제야 말한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올 수 있는 곳이었음을 이곳에 와서야 알려준다.
"별장에 올 때마다 들렀던 곳입니다. 가끔은 체이스 형님과 오기도 하고. 아리안느와 오기도 하고. 키리에와 오기도 하고. 혼자 온 적이 제일 많았습니다만, 아무튼 자주 왔었습니다. 한 3년쯤 뒤부터요. 아, 그러고보니 지금은 그때만큼 맛있어지기 전이었을 수도 있겠네요."
3년 쯤 뒤부터 자주 왔었다는 말이 참 이상하다. 현재인지 미래인지 알 수 없는 시기의 말을 과거사처럼 꺼내놓고 있으니.
3년쯤 뒤의 대구 구이는 맛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그냥 듣기만 한 플란츠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리고 다른 말 없이 겉이 노릇하고 속이 새하얀 생선을 작게 잘라 입에 넣었다.
"그러고보니 그 생각을 못했네요, 제가. 그래도 오랫동안 운영했던 식당이니 3년 전이라 해도······."
"맛있어."
창 밖, 어디부터가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바다인지 알 수 없는 드넓은 모습을 잠시 보던 칼리안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다행입니다. 입에 맞으신다 하니."
"먹어. 너도."
"네."
똑같은 바다를 한 번 쳐다본 플란츠가 생전 처음 본 나무 접시와 그 위의 대구에 포크를 가져다댔다. 그제야 칼리안도 맛 좋은 대구 구이를 입에 넣었다.
"맛있네요. 다행히."
"그래."
대구 구이를 먹었다.
아마도 꽤 오랫동안, 둘 모두 남김없이 맛있게.
그렇게 간신히 그 언젠가의 대구를 먹고 난 뒤 약속한대로 칼리안이 계산을 하고, 성미 사나운 레이븐과 순하기 짝이 없는 에스티나에 나란히 올랐다. 말에서 내리지는 않았으나 주변에 즐비한 상점들이나 사람들을 향한 플란츠의 눈이 쉬이 떨어지질 않았던 탓에 거의 걷는 것과 다름없는 속도로 거리를 되돌아 나왔다.
"지금쯤 별장에 스승님께서 도착하셨겠네요."
"그렇겠지."
"내일 배 타러 가는 것에 체이스 형님과 아리안느도 동행하게 되었는데, 들으셨습니까."
"들었어."
"네."
멀미가 심하면 그냥 주무시면 된다.
재워드리는 건 나보단 스승님이 잘하시더라.
그런 시시한 말이 몇 번을 오갔다.
- 다각.
그리고 레이븐의 발이 멈췄다.
칼리안의 시선은 이미 앞을 향해 있었다. 시나스타를 꺼내들려던 플란츠는 참 세심하게 에스티나까지 범위에 넣고 펼쳐진 실드를 보곤 그냥 손을 뗐다.
"텐실 왕세자께서 발이 이렇게 가벼우셔서야."
내가 꼭 말해야지.
언젠가 꼭 말해야지.
나도 칼 쓸 줄 안다고, 진짜 꼭 말해야지.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까지."
완두콩의 불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적대감 가득 든 칼리안의 목소리가 검은 로브 아래에서 가늘게 흘러나왔다.
"대구 드셨으면 이제 차 한잔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데."
어쩐지 자몽 냄새 나는 왕세자가 이렇게 말을 했다.
레이븐의 발이 움직였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려는 것이었다. 이런 날 이런 곳에서 낯선 사람과 대화할 만큼 어리숙하지는 않았으니까.
"당신들 큰 형님에 대해 할 말도 좀 있고."
- 다각.
레이븐의 발이 다시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