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장. 부디(1)
국왕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 본궁 밖으로 나왔다. 붉은 꽃이 드문드문 피어 있는 베고니아 정원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발을 돌렸다. 베고니아 정원을 지나치지도, 아름다운 분수와 정갈한 미로 정원, 회랑을 지나가지도 않았다. 그곳은 왕의 것이었으니 왕에게 걸음을 허락받지 못한 이가 그 길을 통해 왕궁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왕궁의 기사들이 이곳 저곳에 서 있었다.
그 곁으로 가까이 다가서자 모든 기사들이 일제히 데블란을 등지고 섰다. 서거 혹은 양위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새로운 왕이 들어서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이전의 주군을 바라보지 않음을 알리기 위한 기사들의 법도 중 하나였다.
본궁의 뒤, 첫 번째 별관의 앞을 지나갔다.
별관의 커튼이 모두 내려져 있었다. 커튼의 색이 전부 검은색임을 눈치챈 데블란의 입가에 긴 웃음이 걸렸다.
그렇게 말없이 왕궁의 후문을 벗어났을 때.
"선왕 전하."
모두가 등을 돌린 데블란을 보며 다가오는 단 한 사람이 있었다. 검은 가죽 수트를 입고 바다 빛의 머리를 틀어올린 사람. 에일라였다.
이름이 아니었으나 낯익지도 않은 호칭에 데블란이 고개를 돌렸다. 데블란이 잠겨든 눈을 잠시 바라보던 에일라가 고개조차 숙여 보이지 않은 채로 천천히 걸어왔다. 테일란은 에일라를 막지 않았다.
"나누지 못한 인사라도 건넬 생각이더냐."
"돌려드리지 못한 것을 건넬 생각입니다."
이렇게 말한 에일라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가만히 들어올려진 에일라의 손이 바다빛 머리카락 위에 가 닿았다. 틀어올린 긴 머리를 천천히 한 번 쓸어보던 에일라는 머리를 고정해 둔 아름다운 비녀에 손을 댔다.
테일란은 여전히 그 행동을 막지 않았고, 비녀를 뽑아 든 에일라가 데블란의 앞으로 한 걸음 나서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담담히 말한 에일라가 다시 한 발, 데블란의 앞으로 걸어가 맹독이 가득 든 그 비녀를 건넸다.
"나에게 주지 못한 것이 그것이더냐."
"그렇습니다."
"네 멋대로 나를 찾아와 이런 것을 건넸음을 알면, 너의 새 주인 마음이 편치 않을 터인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녀오라 하시어 왔습니다."
데블란은 사양 않고 그것을 받았다.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던 이의 입에서 잠에 취한 듯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너의 새 주인이 참으로 생각이 깊구나."
나락에서는 스스로를 상처입히지 못한다.
스스로의 목을 조르지도, 돌 벽을 긁어내고 갈아내어 만들어낸 무딘 칼날을 제 심장에 찔러넣지도 못한다. 물방울 맺힌 머리장식 속의 맹독을 집어 삼키지도 못한다.
내려보내지는 음식을 거부하고 메말라 죽거나, 조금씩 시간을 보내다 낡아져 죽거나. 그것만이 허락된 곳이다.
"칼리안."
그러니 이것은 네가 건네는 기회인지.
아니면 네가 건네는 지독한 저주인지.
데블란은 차마 이 자리에서 그것을 제 목에 찔러넣지 못했다. 가만히 손에 든 채 비녀를 내려다보다 재킷 주머니에 넣었을 뿐.
"저주로구나."
타인의 생은 그리 쉬이 꺾었던 이가 제 생은 그토록 아쉬워하였으니, 마지막 순간이 올 때까지 지금 이 순간을 되돌아보라는 저주. 지금껏 그 무엇 하나 후회하지 않던 이가 제 생을 스스로 마치지 못한 것 하나만은 아쉬워하고 후회하며, 그 지독한 모순에 잠겨 눈을 감으라는 저주.
기어코 데블란에게 마지막을 고하고 싶다 부탁하던 에일라의 손을 빈, 칼리안의 선물이었다.
기회도 저주도 아닌 선물을 전한 에일라가 더 이상 미련 없다는 듯 돌아섰다. 데블란으로부터 멀어졌다. 다른 어떤 이에게라도 상관 없이 구경시켜 줄 수 있을 새로운 비녀를 선물해 줄 진짜 주인이 있는 곳으로.
그것을 잠시 바라보던 데블란이 다시 발을 옮겼다.
죄인의 걸음은 온전히 제 두 발로만 걸을 수 있던 탓에 마차는 물론이거니와 말에도 오르지 못한 데블란은 그저 걸었다. 기사들이 왜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렸는지, 별관의 커튼이 왜 검은색인지, 귀족들이 왜 토악질하듯 자신의 이름을 뱉었는지 생각하지 않는 채로.
- 흐트러져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당신의 세상이 끝나는 날인데.
한 걸음 한 걸음, 몇 번을 멈추면서. 이 모든 것이 데블란 스스로의 손으로 만들어 낸 무덤이라던 칼리안의 말을 떠올리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써 가며 그저 걸었다. 그 걸음 끝에 인 바람이 거세기 짝이 없어서, 그렇게나 거센 바람에 치이고 치여서. 걸음 끝이 조금씩 흐트러진다.
흐트러짐의 끝에 닿은 곳의 앞에서.
한 번을 더 멈춰 선 데블란이 웃었다. 아니. 웃지 않았다. 웃지 못했다.
발을 내딛었다.
끝내 아무런 인사도 하지 않는 테일란을 뒤로 한 채로, 그 누구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빈 땅을 뒤로 한 채로.
- ······ 철컹!
두 번 다시는 헤어나오지 못할 어둠 속으로.
나락으로.
* * *
새하얀 셔츠를 입었다.
하얀 실로 수놓인 감청색의 긴 재킷, 그리고 검은 바지를 입었다. 검은 실로 수를 놓고 검은 안감을 덧댄 두터운 하얀 망토는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둘렀다. 타이를 대신한 검은 크라바트는 옅은 빛의 자수정이 들어간 백금 장신구로 고정했다. 망토를 여민 체인의 끝에서도 두 개의 연보랏빛 자수정이 흔들거렸다. 잘라낸 후로 지나간 몇 달 사이 조금 더 길어진 머리를 단정히 빗었다.
검은 색 침구와 단조로운 가구가 놓인 황량한 방을 나섰다. 그러다 잠시, 발을 멈췄다.
"어머니."
서로 다른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누구를 떠올렸을까. 연보랏빛의 고운 드레스를 입고 서 있던 루이즈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많은 말을 대신했다.
그 언젠가의 여느 날처럼 체이스가 한쪽 팔을 내밀었다. 루이즈가 그 팔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함께 걸었다.
계단을 내려가 본궁 밖으로 나왔다. 백금으로 장식된 흰 빛의 작은 마차에 루이즈를 오르게 한 체이스는, 기억 속에서는 베른을 가장 잘 따랐으나 이제는 아닌 은회색의 말에 올랐다.
왕궁의 기사들이 이곳 저곳에 서 있었다.
본궁부터 왕궁의 정문까지 도열한 기사들이 체이스가 걸어갈 길을 향해 섰다. 뒷꿈치를 붙이고 서 있던 기사들이, 체이스의 말이 한 발을 내딛자 일제히 몸을 숙였다.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오른 손은 심장 위에 얹고 국왕을 향한 기사의 예를 올렸다.
그들의 사이를 지나갔다.
붉은 꽃이 드문드문 피어 있는 베고니아 정원을 지나 아름다운 분수와 정갈한 미로 정원, 회랑을 지나갔다.
왕궁의 정문을 나서 광장으로 향했다.
야트막한 단상 위에 올라가, 잠시 눈을 감는다.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 새의 울음소리, 살며시 옆으로 옮겨 서는 소리, 나뭇가지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 참던 재채기를 작게 뱉어내는 소리, 얇은 갑옷이 절그럭거리는 소리.
그 많은 이들이 살아있는 숨 소리를 들었다.
"선왕. 데블란은······ 이제 잊거라."
눈을 떴다.
그 많은 소리를 전해준 이 곳의 모든 이들을, 모든 것들을 눈에 담았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이 날의 광장을 머릿속에 눌러담았다.
모여있는 이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난 일을 되새기고 경계하는 것은 나의 몫으로 둘 것이니. 그리하여 오로지 나만은 잊지 않고 기억할 테니."
거창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약속을 했다.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을 지닌 이들에게는 벌을 내리겠노라 하였고, 빼앗긴 이들에게는 돌려주겠노라 했다. 돌이키지 못할 이들에게는 죄인을 대신하여 사죄하겠노라 했다. 새들을 다시 키우더라도 그들의 선택권을 강제하지 않겠다 했다.
그 누구도 죽은 것처럼 대하지 않겠다 했다. 그 누구도 지워내지 않겠다 했다.
"그대들은 모두 잊고 지내거라. 모두 잊고 다시 살아가거라. 여느 날, 여느 때처럼."
그러니 이제 모두 다시 삶으로 돌아가 여상한 하루를 살아가라, 그리 말했다.
잦아들던 숨 소리가 커진다.
꾹 다물려 있던 입이 열린다.
새로운 국왕을 맞이한 사람의 소리가 세크레타를 울린다.
체이스가 단상을 내려갈 때까지, 그 많은 사람들의 앞으로 저도 모르게 달려나온 이의 노을 빛 눈을 마주 볼 때까지, 얼마나 힘을 주고 있었는지 새파랗게 질려있는 그 작은 손을 가만히 감싸 잡을 때까지.
"왜 이렇게 걱정을 했어, 아리안느. 잘 돌아오겠다고 했잖아."
약속을 지킨 왕의 입가에 이제야 작은 미소가 어릴 때까지.
환호성이 울렸다.
* * *
그 겨울.
비가 그치고 찬 바람이 불던 날.
체이스 듀라한 세크리티아가 왕위를 돌려받았다.
선왕을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현왕의 몫이었으니 다른 이들은 착실하게 데블란의 흔적을 지워갔다. 그나마 남아있던 데블란의 사람들, 기사들과 시종들이 세크레타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데블란의 자취가 모두 사라진 집무실은 체이스의 것으로 채워졌다.
- 선왕의 침실은 그저 비워두거라. 본래 머무르던 곳을 당분간은 계속 쓸 테니.
칼리안은 체이스를 만나지 않았다.
만나지 못했다 해야 맞을 일이다. 카이리스의 이방인이 세크리티아의 왕궁에 다시 머물기에는 딱히 좋은 시점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칼리안은, 앨런 외의 사람들은 계속 세크리티아에 머물도록 했다. 혹시 모를 문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세크레타에 모여 데블란을 압박하던 귀족들은 다시 저마다의 영지로 돌아갔다. 물론 그들이 제몫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역시 앨런이 수고를 했다. 혹여 아델리아가 돌아오지는 않을까 하였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칼리안이 세크리티아 왕궁을 찾아왔던 날 데블란이 체이스를 오래도록 세워 두었던 정원도 바뀌었다. 정원을 없앤 것은 아니었으나, 체이스는 정원 한가운데에 커다란 가문비나무 한 그루를 심게 했다. 카이리스 왕궁 어딘가에 심겨 있던 것과 퍽 닮은 나무였다.
많은 것들이 제자리를 찾고 혹은 비워지고 새로운 것으로 바뀐 뒤, 체이스는 각국의 왕실에 왕좌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알렸다. 그리고 즉위식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 많은 일을 겪어가며 시간이 흘렀다.
가느다란 달이 가득 채워지다 다시 가늘어지고, 그 후로 또 며칠이 지난 어느 날.
- 아프다고. 당신 동생.
- 아프다니.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소슬하던 비를 맞고 돌아온지 그렇게나 오랜 날이 지난 날.
멀쩡하게 잘 웃고, 잘 먹고, 키리에와 훈련을 하고, 히나가 춥지 않을지 조심스레 살피고, 스푼 하나만 부러뜨려 달라는 아르센의 모가지를 부러뜨릴까 해가며 에우리아와 농담을 주고 받고. 이제는 물에서도 헤엄을 잘 치는 코코를 보며 루시와 안네를 떠올리고. 에일라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던 그런 평범했던 날에.
- 그 날, 비를 맞아서.
칼리안은 갑작스런 감기를 앓았다.
심한 열이 났다.
칼리안의 반지를 빼온 플란츠의 말에 체이스는 곧바로 대답을 전하지 않았다. 즉위식 치르기 전까지는 정식 국왕 아니니까 아직 말 안 높일 거라던 플란츠의 말버릇 때문이 아니라, 전해진 그 말 때문에.
- ······ 그렇습니까.
- 확인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대답이 이어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그리 길지 않았다.
- 알겠습니다.
체이스와 짧은 대화를 마친 플란츠가 한숨을 쉬었다.
얼마 동안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으려니 체이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확인했습니다.
- 어떤데.
- 수습하라······ 일러두었습니다.
망할 동생 놈이 세심한 건 다 어디 가져다 팔아먹고서는. 제 발목 붙들던 그림자가 세상 떠난 것은 어찌 알았는지. 열이 올랐다. 기어코 앓았다.
- 전해줘서 고맙습니다. 플란츠 왕세자.
- 나 아니야.
- 누가 되었든. 전해준 것은 맞으니.
- 됐어.
적어도 지금 체이스나 칼리안이 어떤 기분일지는, 플란츠도 잘 알았다. 지금 둘은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조용히 속을 비워낼 시간이 지나가고 있을 뿐임을 안다.
그래서 플란츠는 체이스에게 더 이상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반지의 마력을 끊은 뒤에는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있던 칼리안의 방에 아무도 들어가지 말라고, 그렇게만 이야기를 했다.
"그냥 둬야 나아."
히나에게도.
그 뒤 플란츠는 칼리안의 방문에 기대 선 채 날을 보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나오지 못한다던 나락에서 꺼내진 이의 잔재가 불티가 되어 사라지는 그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잠시 마음 놓고 앓을 수 있도록.
플란츠가 그러했을 때 칼리안이 그러했듯이.
- 틱, 톡, 틱, 톡.
이런 시간에 더 크게 들려오는 시계 소리에 익숙해져갈 때.
"왜 여기 계십니까. 안 주무시고."
하룻밤을 꼬박 앓은 칼리안이 눈을 떴다.
"어쩌다보니."
"걱정 그만하셔도 됩니다."
"안했어."
"네."
방문 앞에 서서 멀뚱멀뚱 서 있는 희멀건한 왕세자를 향해 이제 다 앓았다는 말을 하더니,
"에일라를,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이런 부탁을 했다.
가만히 고개만 끄덕여 보인 플란츠가 밖으로 나갔다.
오래지 않아 찾아온 에일라를, 칼리안은 한참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다행이다. 에일라."
그리고 다시 웃었다.
* * *
넓은 정원의 베고니아가 모두 졌다.
때로는 비가 왔고 아주 드물게 눈이 왔다. 벽난로 앞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날이 이어졌다.
다친 어깨가 모두 아물고도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앓던 속을 모두 비워내고도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애옹."
"미오옹."
다리 꼬는 것을 다시 강제로 금지당한지 오래 된 플란츠가 익숙한 손길로 두 고양이를 어루만졌다.
- 안네가 더 크면 싸움나겠습니다.
루시의 성격을 그대로 빼닮고 자라버린 안네도 플란츠의 무릎 위를 좋아했다.
아직은 안네가 루시보다 작았던 터라 플란츠의 무릎 위에 둘 모두를 올려두는 것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더 크면 아무래도 싸움이 나지 않겠느냐고, 칼리안이 그런 말을 했었다.
싸움이 날 일이 뭐가 있나.
두 마리 다 올려두면 되지.
- 고양이들이 형님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왕궁 밖 사람들이 이런 것을 알면 참 재밌을 텐데요.
제대로 된 망나니로 소문나게 하는 것에 가장 큰 몫을 한 놈이 그날도 짖었다. 똑똑한 머리는 동생이 짖는 말도 도무지 잊질 않아서, 평화롭게 고양이들과 시간을 보내다 조금 전에 칼리안이 남기고 간 말이 생각나버린 플란츠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 어찌나 잘 짖으시는지. 내 아우님께서는."
혼잣말인 것이 분명한 불평을 들은 두 고양이가 동그래진 눈으로 플란츠를 보다 다시 몸을 뉘였다. 벽난로보다 따끈따끈한 고양이들의 체온에 무릎을 맡긴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창 밖, 어둠이 내려앉은 먼 바다 위에 무수한 별이 보였다.
그러니까 아직은 세크리티아에 있었다.
겨울이 다 지나가고 봄이 오도록 세크리티아에 머물 예정이었던 탓에, 플란츠의 목소리만 들으면 풀이 죽어있는 두 고양이를 앨런이 그냥 데려다줬다. 그래서 플란츠는 한 겨울을 다 보내도록 안네가 쑥쑥 크는 것을 무사히 잘 봤다.
그리고.
"우리 왕자님 또 어디 가셨어요?"
"밖."
"밖 어디요?"
"바다."
"혼자 가셨어요?"
"내일 즉위식 치르는 사람도."
새끼 코끼리가 고양이를 따라왔다.
왕궁만 벗어나면 시종의 도리를 잊는 까닭에, 얀은 요즘 플란츠를 그냥 칼리안 위치 추적기 정도로 쓰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을 망나니 왕세자를 잠시 보던 얀이 입을 열었다.
"지금 다들 밖에 있는데, 나오시겠습니까?"
"왜."
"구경한다고 하던데요. 다 같이."
그 말에, 다시 한 번 창 밖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추워서 싫다'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보다 짧은 말을 꺼냈다.
"알았어."
이 대답에 조금 의외라는 얼굴이 잠시 되었던 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차 한 잔 더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래."
인사인지 목운동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을 보여준 얀이 먼저 나간 뒤 플란츠가 조심스레 안네를 안아들었다. 이제 안네마저도 허리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을 잊지 않았으므로 엉덩이도 살짝 받쳐들고 소파 옆에 뉘였다. 그 후 똑같은 손길로 루시를 옮겼다.
그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앨런이 새로 보내준 짙은 자주색의 망토를 걸쳤다.
몸을 일으키니 저도 모르게 시선이 창 밖을 향한다.
먼 바다 위를 가득 채운 하얀 별이 그 어느 날보다 더 반짝인다고, 그런 생각을 잠시 해보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하늘을 보던 또 다른 사람.
- 쏴아아아······.
칼리안이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생각보다 빨리 온 걸까 싶기도 하고, 너무 늦게 왔나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짠 내음을 잔뜩 머금은 목소리에 체이스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하지."
"네. 여전하네요."
새하얀 모래가 가득한 곳.
기억속의 모습보다 조금 더 커진 나무집이 하나. 작은 바위가 하나 있는 곳.
그 바다를 찾아왔다. 이제서야.
"형님 오늘은 일찍 쉬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일 피곤하실텐데요."
"아직 젊어서."
가벼운 대답을 들은 칼리안이 잠시 웃었다.
"내일 스승님도 오고 싶어 하셨는데, 아무래도 번잡해질 것 같다 하셔서, 그냥 카이리스에 계시라 했습니다. 혹시나 서운해 하실까봐서."
"카이리스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겠다 하는데. 서운할 것이 있겠느냐."
"그래도요."
"그래도 예전보다는 북적하겠구나. 그럼 되었지."
"네. 그건 그렇겠네요."
체이스의 즉위식.
즉위식을 하루 앞두고 나서야 이곳을 찾았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서로에게 관심을 두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 날 이 곳을 찾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주머니 속의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해보던 체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구나. 오늘이 아니던가."
"글쎄요. 저도. 하도 드문드문 오는 날이다 보니 기억이 잘 안 나네요."
"혹여 오늘이 아니어도 축하는 하자꾸나."
여전히 웃는 얼굴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두 형제의 대화가 이어지던 때.
- 사락······.
푸른 빛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빛이 하나 더, 그리고 다시 또, 하나.
깃털보다 가벼운 푸른 빛이 사락사락.
눈송이처럼 내려왔다.
그것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쏟아지듯 떨어져내리는 푸른 빛을 그렇게 가만히 바라보다 잠시 눈을 감았다.
"생일 축하한다."
푸른 빛이 하염없이 내려오는 밤.
세렌티의 시간.
"······ 내 동생."
그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 고민하다 그 무엇이 달라져도 바뀌지 않을 호칭으로 축하를 건네는 형을 보면서, 베른이 웃었다.
"감사합니다."
조용히 눈을 뜬 베른이 체이스를 쳐다봤다.
"내일도 말씀 드리겠지만, 즉위식 축하드립니다. 형님."
"그래."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체이스를 한 번, 파도치는 바다를 한 번, 내려오는 푸른 빛을 다시 한 번. 바라보던 베른이 체이스를 마주보고 섰다.
허리를 숙였다.
깊숙이, 더할 나위 없이 깊숙이 담아 둔 것을 꺼내 보여주듯이.
"부디. 오래도록 좋은 왕으로 남으시기를."
그 언젠가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건넸다.
푸른 빛이 내리던 밤에.
체이스에게. 베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