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장. 뱀의 무덤(7)
비가 왔었는데. 그새 그쳤나 봅니다.
이 푸르른 겨울에 내리는 비가 그리 싫지 않았던 칼리안이 조금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그러다 못내 미련이 남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꽤 오랜만에 내리는 비가 반가웠는데 그쳐버렸네요. 아무튼 비라는 것이 저와는 참 많이도 안 맞나 봅니다."
건네지려다 말고 본래 주인의 손에 되돌아간, 그 신 것을 그렇게나 많이 처먹어보고도 여전히 애를 먹는 손 끝에서 얇고 단단한 껍질이 다 벗겨진 채 다시 건네진 귤을 입에 넣은 플란츠가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겨울.
그토록 추운 겨울에 비가 내리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플란츠가 창 밖을 봤다. 구름 하나 없는 하늘에는 먹구름 하나 머무르지 않는 채였다. 그러니 플란츠가 잠들었던 사이 저 창 밖에 정말로 비가 내렸을지 아니면 혼자 앉아 신 귤 까먹던 어느 놈 앞에서만 내렸을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왜 여기 있는데."
"저 여기 좋아하는데요."
"설명."
"어쩌다보니 왔습니다."
비가 왔었다는 하늘은 푸르다. 그 하늘과 구별되지 않을 듯한 빛의 바다가 하늘 아래 끝 모르게 펼쳐져 있는 것이 멀리 보였다.
그러니까 이곳은 세크리티아 왕궁의 별관이 아니었다. 왕비 디에나의, 그리고 지금은 후궁 루이즈의 별장이었다.
왕궁에서 잠이 들었고 눈을 떴더니 별장에 와 있었다.
"설명. 제대로."
별 것 아니라는 얼굴의 동생 놈이 이제는 환자용으로 놔둔 바나나를 까먹었다.
우물거리며 바나나를 씹어 삼킨 칼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비가 오다 그쳤다는 소식을 전해주던 딱 그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잠들었을 그 즈음에 헤르츠 경이 제멋대로 복직했습니다. 린 후작저 밖에 있던 데블란의 기사들을 카스트린 경이 반, 그리고 헤르츠 경이 반, 사이좋게 죽여놨습니다. 덕분에 카스트린 경이 일방적으로 기사들 죽인 것에 대해 여기 귀족들은 아무 말 못하게 됐는데 그 일에 더불어 제가 데블란 심장에 검을 집어던지는 일이 겹치는 바람에."
"······ 누구 심장에 뭘 던졌다고."
"안 죽였어요.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렇게, 통과하기만. 그냥 살짝 겁만 줬습니다."
협박 방법이 참 비범하기도 하다.
이토록 대단하신 내 동생새끼를 진짜 어떡해야 하나.
"하."
부르면 알아서 알아듣고 적당히 빠져나와 찾아올 줄 알았지, 알아서 잘 협박하고 올 것을 예상 못했다. 문제는 그거다. 쟤가 왜 그랬는지 내가 잘 알겠다는 거다. 눈앞으로 본 것처럼 지나치게 잘 알 것 같아서 한숨밖에 안나온다.
습관처럼 오른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려다 어깨가 아파와서, 저도 모르게 눈꼬리가 찌푸려졌다. 눈밖에만 나면 사고 치기 바쁜 원수같은 동생 놈이 온갖 싫은 티를 그렇게나 팍팍 내가면서도 얌전히 껍질 깐 귤을 건넨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됐다.
"어깨는 다른 곳과 달라서 낫는데 오래 걸립니다. 이럴 때 쓰라고 하나 더 있는 다른 쪽 팔 쓰십시오."
"······ 알았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답은 참 잘한다.
해결 방법을 알려주고 생글생글 웃은 칼리안이, 그놈의 목줄 잠깐 놓친 사이 짖다 못해 아주 제대로 물어뜯고 돌아온 동생에게 짧은 대답 말고 더 이상의 할 말을 못 찾고 있는 순한 사람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래서 더 이상 왕궁에 있기도 어려워졌습니다. 제가 화를 낸 건 히나와 형님 일 때문이었던 것에서 그쳐야 해서. 저희가 더 나서면 체이스 형님은 카이리스 등에 업고 왕좌에 오른 왕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데블란이 보낸 암살자 손에 좀 많이 다친 연약하신 왕세자 저하 요양 핑계로 전부 다 같이 여기 왔습니다."
어쩐지 아까부터 어디선가 꽥꽥거리는 소리가 나더라니. 알아서 복직했다는 파란 머리 미친 부군단장이 데려온 오리 소리였나보다.
술도 좋아하고 성격도 나쁜데 제 목숨 하나 제대로 건사 못하는 삶은 완두콩이 결국 눈을 꾹 감았다. 이 먼 나라까지 와서는 대외 홍보용 인격에 더해 실력까지 잘 포장됐으니 이제 더는 헤어나갈 방법도 없겠다 싶어서였다. 크게 신경 안 썼었는데 아무래도 억울해해야 할 일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체이스 형님이 시작하신 일이었고 형님과 저는 잘 거들었으니 이제부터는 다시 체이스 형님이 마무리하셔야 하는 일인 것도 맞고요."
"그걸 그리 잘 아시는 내 아우님께서는 왜······ 굳이 나가서 비를 맞고 오셨는지."
처음엔 몰랐는데 조금 전부터 줄곧 느끼고 있었다.
시고 단 냄새 사이사이로 미련한 비 냄새, 그리고 더 미련한 피 냄새가 나고 있었다.
"악몽 꿀 사람은 이제 우리가 아니니까."
어느새 네 번째 바나나를 슥슥 까던 칼리안의 손이 잠시 멈췄다. 신 냄새 단 냄새 풍기느라 참 부지런히 부질없이 움직이던 손 대신 말이 이어졌다.
"이제는 그만 꿨으면 해서. 저도, 형님도."
참 오랜만에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잠에 빠졌던 플란츠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른쪽 어깨 언저리가 욱신거리는 것을 빼고 다른 곳은 다 멀쩡했으니 움직이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나가."
"나갈 준비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마뜩치 않다는 얼굴을 하며 다시 물었다.
"벌써 움직이셔도 괜찮겠습니까. 나가서 뭐 하시려고요."
"대련."
"저랑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저 아니고도 기사들 많은데요."
"됐어."
"동생 모르는 사이에 정혼자 만드신 우리 연약하신 형님 저하 지금 저랑 대련하시면 후회하실텐데."
"이제 반말로 짖는 게 버릇됐지."
"많이, 후회하실텐데."
"너."
"텐데요."
"됐으니까. 그만 짖고."
새 잘 키우더니 제대로 써먹기 시작한 다른 나라 왕세자가 이제부터 한참을 앞서 나갈 텐데, 뭐 하나라도 더 잘하는 걸 만들어 놓을 겸. 아무것도 모르고 잠든 지금의 형제 곁에서 신 귤이나 까먹던 짓을 간신히 끝내고 나니 이제는 옛 형제가 벌이기 시작한 내전 때문에 다시 온 신경을 쓰고 있을 놈도 좀 챙길 겸. 그동안 계속 못 해온 대련이나 하자는 말을 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기도 했고, 또 누군가에게는 혼자 고생 많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네."
그것을 다 알아듣는 바람에 결국은 이렇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대련은 커녕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이 별장의 가장 높은 곳에 나란히 서서 저 먼 곳의 세크레타를 지켜보기만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 * *
- 펄럭!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맑게 개인 하늘 아래 청명한만큼 찬 바람이 불다 지나갔다.
그 바람을 타고, 세크레타 곳곳에 퍼져나가야 할 것들이 며칠째 사라지고 없었다. 커피를 볶고 빵을 굽는 냄새, 고기와 조개를 손질하고 야채를 써는 소리, 책을 나르고 꽃을 진열하는 이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없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마차도, 하루 일과를 시작해야 할 곳을 향해 부지런히 발을 놀리는 이들도 없었다. 특별히 모두가 쉬어야 할 축제일이 아니었음에도 아침을 맞이해야 할 모든 것들이 일제히 멈춰선 채였다.
대신 그 바람을 타고, 세크리티아 곳곳에서 모여든 이들이 속속들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 펄럭!
깃발이 나부낀다.
어떤 것은 흰 바탕에 푸른 꽃이 그려져 있었다. 어떤 것은 회색 바탕에 검은 방패와 검이, 또 어떤 것에는 붉은 바탕에 흰 지팡이가 있었다. 작은 성의 모습이나 황금색의 사자가 그려진 것도 있었다. 갑옷이, 혹은 금화가, 노래하는 인어와 낚싯배의 모습이 그려진 것도 있었다. 오고가는 사람 하나 없던 황량한 광장에 그렇게나 많은 그림이 그려진 제각각의 깃발이 나부꼈다.
그러니 그것은 곧, 무인 가문이든 상인 가문이든 혹은 어업을 하는 가문이든 상관 없이 참 많은 가문의 귀족들. 체이스의 주도 하에 마음을 바꾸고 앨런의 도움 아래 모여든 뒤 레이지안과 아리안느의 앞에 모여든 수많은 귀족들과 그들의 사병이었다. 그 많은 이들의 깃발이 비 개인 하늘 아래 일제히 펼쳐져 있었다.
그 많은 이들이 모여있음에도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의 가장 앞에서 외성 수비대의 기사단장과 나란히 서 있던 아리안느, 그리고 둘의 뒤에 도열해 있던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하. 너무 늦잖아."
"저하의 기사들은 강합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을 합치더라도 지금 저 내성 안에 있는 저하의 병력보다 강하지 않습니다."
굳게 닫힌 내성문을 초조하게 바라보던 아리안느가 작은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이가 바로 답을 전했다. 이 수도에서 가장 먼저 체이스의 손을 들기로 한 사람. 외성 수비대의 기사단장인 그는 아리안느도 참 오래 알고 지냈던 이였다.
아리안느가 법무 담당관인 레이지안의 일을 함께 돕던 까닭이기도 했고, 수도에서 만난 기사들과 격없는 술자리를 곧잘 가지던 아리안느의 성격 덕분이기도 했다. 그렇게 잘 알고 지내던 이가 아리안느를 안심시킬 말을 전해왔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저 방어막도 곧 사라질 겁니다."
"알아요. 알고 있는데."
낯설었다.
난생 처음으로 입어본 갑옷의 촉감이 아니라, 자신의 뒤에 빼곡히 서 있는 사병들의 병장기 소리가 아니라, 굳게 닫힌 성문을 마주보고 있는 이 날에 귀족들의 가장 앞에서 서 있는 것이 아리안느는 낯설었다. 겁이 났다.
물론 알고 있다. 이 자리에서 아리안느가 불안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데 내성 안에 레이지안이 있다. 체이스가 있다. 그러니 불안한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성문은 열리지 않았다. 싸우는 소리라도 들려온다면 나을텐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불안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멀리 선 다른 귀족들과 병사들이 아리안느의 불안함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저 귀족들 지금은 모두 영애가 이곳에 있기 때문에 모여있는 겁니다. 영애께서 다잡지 않았다면 내성 문이 닫히고 저 방어막이 구동되는 그 때 이미 모두 되돌아갔을 겁니다. 더 이상은 마나실 남작의 도움도 받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데블란이 내성을 닫았다.
자신을 따르는 마지막 기사들을 앞세운 데블란은 마지막까지 꺾이지 않았다. 내성을 닫고, 앨런이 더 이상 내성 안으로 병력을 직접 들여놓지 못하도록 대마법 방어벽을 구동했다. 그것은 오랜 옛날 시스파니안이 세크리티아의 대왕에게 건넨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기도 했다.
이미 카이리스에서 유사한 마법진을 일시적으로나마 멈추게 하였던 앨런이 아니던가. 데블란 역시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구동했다. 앨런이 그것을 결코 깨뜨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앨런은 그 거대한 마법진을 잠시나마라도 중단시키지 못했다.
세크리티아 왕궁을 보호할 마지막 방어선을 카이리스에 적을 둔 마법사가 건드릴 수 있음을 알릴 수는 없었으니까. 고작 데블란 하나를 잡자고 그것을 제 손으로 깨뜨릴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니 앨런은 더 이상 나서지 않을 것이다.
"알아요. 마나실 경은 이제까지 도와 준 일만으로도 이미 세크리티아의 남작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참견을 했다는 것, 알고 있어요. 이 이상 나서면 더는 세크리티아의 남작으로만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도, 이 이상 참견을 했다가는 앞으로의 저하에게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도 잘 알아요."
"그렇습니다. 영애."
- 펄럭!
수많은 깃발이 다시 흔들렸다.
'걱정하지 마, 아리안느. 아무 일 없이 잘 돌아올게.'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낯선 기분의 앞에서 아리안느가 주변을 둘러봤다. 내성 안의 왕세자가 어떤 상황인지를 조금도 모르는 상태에서 지금 이 순간만은 오로지 린 후작가의 비호만을 믿고 모여든 이들이 뒤에 있었다.
왕세자의 정혼자를 둔 가문이기 이전에 이 나라에서 가장 굳건하게 데블란과 맞서 온 가문임을 알기 때문에 믿고 기다려주는 이들이 뒤에 있었다.
그러니 이 순간 아리안느가 해야 할 일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저들을 대신해 검을 드는 것도 아니었고, 기사단장을 대신해 저들을 지휘하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를 이 자리에 모아 두었으니 그들이 다시 흩어지지 않도록 붙들어놓고 있는 것. 그것이 지금 아리안느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알겠어요. 정신 차릴게요."
이제까지 많은 일을 했지 않나.
레이지안을 설득시키고 법을 강화하고 병사들을 움직이는 그 모든 것을 아리안느가 했다. 그러니 이제와 걱정이 앞서 불안해하는 일은 더 하지 않겠노라고, 입술을 한 번 꽉 깨문 아리안느가 주변을 둘러보며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 펄럭!
깃발이 휘날렸다.
광장 가장 마지막에 보이던 푸른 깃발이, 하얀 깃발이 흔들렸다.
바람이 불었고 병사들이 손에 든 창 끝의 붉은 술이 함께 흔들렸다. 바람이 불었고 그들의 앞에 선 이가 든 가문의 깃발이 펄력인다. 다시 그 앞에 서 있는 연합의 깃발이 펄럭인다. 바람이 불어왔다.
- 펄럭!
내성 위.
둥근 방패를 움켜잡은, 왕관 쓴 독수리의 깃발이 세워졌다. 펄럭였다.
세크리티아 왕실의 깃발.
체이스의 신호였다.
말 고삐를 잡고 있던 아리안느가 주먹 쥔 손에 온 힘을 주었다.
- 쿠구구궁······!
그토록 기다리던 소리가 들린다.
'왕이 되어서. 돌아올게.'
내성문이, 비로소 열린다.
* * *
왕궁 앞에 선 체이스가 왕궁을 향해 발을 옮겼다.
멀리 내성이 닫히고 방어막이 구동되었을 때.
노란 울새 서베인은 모든 새들, 이제는 기사가 된 이들의 통솔권을 테일란에게 넘겼다. 그들을 돌려받은 테일란의 발걸음에 신념이 담겼다.
데블란의 무모한 계획에 카이리스의 왕자마저 등을 돌린 것을 보았다. 데블란이 불러온 대마법사를 앨런이 막은 것을 보았다. 내성 밖에 바다를 이루며 모여들던 다른 귀족들의 깃발을 보았다.
밖에 모인 귀족들의 마음을 일순간에 모두 다 붙들어 맨 왕세자를 보았다. 데블란의 앞에 선 채 데블란의 잘못을 논하던 왕세자를 보았다. 데블란의 손아귀에서 살아 남은 어린아이를 재워달라 먼저 말하던 왕세자를 보았다. 데블란을 향해 오열을 토해낸 수많은 사람들을, 데블란이 지운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들의 손을 잡은 왕세자를 모두가 보았다.
"길을 내어 드리거라."
그 모든 것을 본 이들을 향해 체이스가 걸었다.
되돌려놓기 위해, 되찾기 위해 걸었다. 왕궁을 향해 다시 돌아갔다. 체이스의 기사와 기사단을 이끌고, 체이스의 왕궁을 향해서.
막아서는 이들은, 없었다.
참으로 당연하게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천천히 발을 옮겼다. 막는 이 없는 왕궁 정문을 지나 붉은 베고니아 꽃이 가득한 정원을 지나 본궁의 입구에 이르도록 멈추지 않았다.
- 펄럭!
검은색 안감이 더해진 새하얀 긴 망토가 바람에 휘날린다.
그 어떤 것도 순백일 수는 없는 이가, 순백을 가장하려다 몰락해가는 이를 향해 걸었다.
그렇게 군중들을 지나치고 기사들을 지나쳐 비로소.
"먼 걸음을 했구나. 네가."
국왕의 정복.
그런 것을 입고 있을 줄 알았더니.
조용히 자리에 앉아 차 한 잔을 손에 든 데블란이 먼저 말을 건넸다. 며칠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해 창백해진 얼굴에 침착함을 띄우면서 웃음을 보였다.
"지금 네 기분을 내가 잘 알지."
갈색의 두 눈이 보랏빛의 눈을 응시했다.
체이스는 거절 않고 데블란을 마주 봤다.
"처절하고, 끔찍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다 가진 그런 기분. 그것을 내가 안다."
"애석하게도."
체이스가 눈을 떴다. 입을 열었다.
"내가 걸어야 할 멀고 먼 길의 첫 발을 내딛은 기분. 그 뿐입니다."
평온함을 가장하지 않은, 실로 평온하고 고요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선왕 전하."
달칵, 하고 찻잔을 내려놓은 데블란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동안을 웃었다. 그 웃음이 예전같지 않음을, 그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새벽의 칼리안 뿐만 아니라 체이스 역시 보았다.
체이스는 그 역시 외면하지 않았다.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찻잔에 짙고 짙은 독을 직접 넣을 용기조차 남지 않은 데블란을, 유령을, 악마를.
"나락으로. 모시거라."
지옥으로 보내라 명했다.
지난한 싸움의 종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