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20화 (321/527)

제56장. 뱀의 무덤(6)

흔들림 없는 발소리가 조용히 다가왔다.

보이는 것이 없어지면 생각이 많아지기 십상이다. 때문에 그 발소리가 다가오는 짧은 순간에도 잡념이 든다. 어둠에 잠긴 채 몇 날 며칠을 보냈는데도 저렇게 가까운 곳에서 소리가 들려오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인간이란 어디에서든 쉬이 적응한다던 말이 꼭 옳기만 하지는 않았나보다 라고.

- 화륵!

그러다 어느 순간 소리가 멈췄을 때.

갑작스런 밝은 빛이 심연과도 같은 공간을 밝히며 생각이 끊겼다. 잡념에 잠겨있던 이는 멍하게 뜨고 있던 눈을 꽉 감았다. 때문에 자신의 앞에 다가온 이가 누구인지를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한 줄기 빛이라도 볼 수 있게 된다면 남은 생의 반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던 기분이었는데, 정작 빛을 마주하니 고통이 앞선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메이린 론즈."

말없이 다가와 어둠뿐이었던 곳을 대낮처럼 비춘 사람이 나지막한 소리를 냈다. 세크리티아의 마법사 협회장이었던, 칼리안과 플란츠를 습격한 제온의 전사들을 불러들이고 아리안느가 가지고 있던 루이즈의 자료를 빼앗으려 했던 이가 눈 대신 입을 열었다.

"누구······."

"당신이 참 반가워 할 사람."

가는 미성이 낯설다.

소년이라 할 만큼 어린 것 같지는 않았으나 청년이라 할 만큼의 나이로 느껴지는 것도 아닌 목소리. 가까이에서 들어본 적 없던 생소한 목소리. 궁금함에 눈을 떠보고 싶었으나 눈을 가리던 손만 간신히 치웠을 뿐. 눈이 멀 것 같은 밝은 빛 때문에 여전히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메이린은 체포되어 심문이 끝난 뒤 곧장 이곳으로 끌려왔다. 완벽하게 빛이 차단된 곳에서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을 시간을 홀로 보냈다.

"빛을,"

너무 오랜만에 말을 하게 되어 목이 메였다. 입을 열던 메이린이 목을 가다듬고 다시 소리를 냈다.

"빛을 줄여주시면 안 됩니까. 너무 밝습니다."

"이거 횃불이라 조절 안돼. 여기서는 마법 못 쓰는거 당신도 알잖아. 그리고 그런 것 부탁할 입장 아닌데. 당신은."

"그럼 누구신지를 말씀해주십시오."

"대답했고. 이미."

'당신이 참 반가워 할 사람'이라던 불친절한 설명을 떠올린 메이린이 말했다.

"반가워 하기에는 전혀 모르는 목소리입니다."

"꼭 알아야 반가울 수 있는 건 아니지."

메이린이 잠시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수수께끼같은 말이 오갔으나 짜증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 대화조차 반가웠던 탓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사실이었다. 이렇게 빛을 가져오고 대화를 나눠주고 있는데 사신 아니라 악신이 온다한들 반갑지 않을까.

시간이 더 지나면 익숙해질까, 한참을 기다렸다 눈을 떠보았으나 흐려진 시야를 가득 채우는 빛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나마 언뜻 보인 것은 새하얀 얼굴과 새카만 머리, 그리고 새빨간 눈.

"혹······ 카이리스의 3왕자님이십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사락사락 하고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잠시 들렸다. 오래된 짚이 깔린 바닥 위를 걸어오는 소리였다.

무언을 긍정으로 알아들은 메이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며칠만에 열렸는지 모를 입에서 모래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카이리스의 왕자님께서 이런 곳까지 무슨 일로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내 말 잊어버렸나보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아······ 난 두 번 말하는 것 안 좋아하는 사람인데."

기분을 가늠할 수 없을 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말이 이어졌다.

"반가워 할 거라고 했잖아, 내가. 반가운 만큼 할 말도 생길 줄 알았지. 나는."

"제가 왜 카이리스의 3왕자님을 반가워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당신 도와줄 수 있으니까."

"돕다니······."

"당신 혼자서는 죽어서도 못 나가, 여기서는. 절대로."

메이린의 목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칼리안의 목소리가 서늘해서인지 아니면 칼리안의 말로 인해 떠올린 것 때문인지는 구분하지 못했다.

"여기가 어딘지 알잖아. 당신도."

이곳이 어디인지.

숨막히는 얼굴이 된 메이린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래.

안다.

분명 가둬 둔 것이니 감옥 앞을 지키는 이가 있어야 할 텐데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조금 이상했다. 그러다 사람이 끼니를 가져오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천장 구석과 연결된 어딘가에서 도르륵 굴러내려온 음식이 툭 떨어진 것이다. 그 음식 냄새를 따라 더듬더듬 방을 훑다가 그렇게 문득, 깨닫게 되었다. 이 곳이 어디인지를.

"······ 나락."

"그래. 잘 아네."

세크레타의 외성 밖을 흐르는 헤룬드 강.

그 밑 어딘가에 세크리티아 대왕이 만들었다는 끝 모를 깊이의 지하 감옥. 그 곳을 사람들은 나락이라 불렀다.

지상에 탑이 있다면 지하에는 나락이 있다 했다.

카이리스의 중죄인들은 탑에 보내지고 세크리티아에서는 나락에 가둬졌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고 마법은 모두 차단되는, 그리하여 지금껏 단 한 명도 탈출하지 못한.

산 자를 위한 지옥이었다.

나락에서는 죄인들 모두가 서로 목소리 한 번 나누지 못하도록 완벽히 격리되어 홀로 가둬진다 하였다. 철창 앞을 지키는 기사조차 없다 하였다. 이곳이 그랬다.

"여기, 한 번 가두고 나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확인 안 해. 그래도 먹을 건 잘 내려보내. 늙어 죽어야지 굶어 죽으면 안 되니까. 그렇게 하루하루 몇 십 년 연명하다 죽는다 해도 여기서는 못 나가. 썩어 문드러져 사라지도록 그냥 내버려 두거든. 그래서 나락이야."

메이린이 귀를 틀어막았다.

칼리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가둬진 이들은 있다 하였으나 밖으로 나오는 이들은 없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곳임을 메이린도 알았다.

"카스트린 경은 못했어도 나는 할 수 있는데. 당신 여기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

손바닥 새로 들려온 말.

메이린이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밝은 빛을 앞에 둔 칼리안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그 그림자 때문에, 마치 뱀의 것처럼 보여지는 붉은 눈이 메이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섬뜩한 눈.

그것은 결코 누군가를 구출하러 온 이의 눈빛이 아니었다.

"죽은 채로······ 말씀이십니까."

"마법 쓰던 사람이라 그런가. 말은 잘 알아들으니 좋네."

작게 웃은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데블란이 당신 죽였다 했어. 심문하고 즉결처형했다고 그랬어. 그런데 여기 있네. 왜일까. 왜 죽이지도 않고 여기에 꼭꼭 숨겨뒀을까. 타국 왕자들 죽이려 사주하고 데블란 뒤통수 치려 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의미심장한 말 끝에 뱀의 서늘한 시선이 따라붙는다.

"저는."

마른침을 삼키고 싶었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나 시간 없어. 내 형님께서 잠이 좀 깊게 들어서, 언제 일어나실지 모르겠거든. 그래서 빨리 가봐야 해. 나 없는 동안 또 엉뚱한 일 벌이지 않게."

"······ 제온. 그들과 연락하는 법을 압니다. 전서구를 통해 연락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것을 말하지 않아서 데블란이 저를 이곳에 두었습니다. 아마 이곳에 두었다 물어보면 말을 하리라 여겨서, 그래서 가둬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생각하는 것 하고는.

어찌나 똑같은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블란 당신 만나러 못 와. 지금 당신 신경 쓸 때가 아니거든. 유령이 하나 붙어서."

이해하지 못한 메이린은 가만히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냥 말해. 나한테. 전부."

"알려드리면 저를······."

혹시나 살려 내보내줄까. 거래를 해보려는 마음에 뜸을 들이니 칼리안의 미소가 짙게 변했다.

- 자박.

미련없이 등을 돌린 칼리안이 걸음을 옮겼다. 떠보는 것이 아니었다. 돌아나가는 발이 멈추지 않았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데블란도 이곳에서 메이린을 꺼내줄 리 없었다.

한 줄기 빛이라도 볼 수 있게 된다면 남은 생의 반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던 기분이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지금 당장 벗어날 수 있다면 남은 생 전체를 포기하는 것쯤, 못할 것이 있을까.

"모두 얘기하겠습니다."

칼리안의 발이 멈췄다.

메이린의 말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역시 멈췄다.

잠시 뒤 은색의 작은 날붙이에 횃불의 붉은 빛이 어린다. 그 찰나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모든 것이 다시 어둠 속으로 깊이, 아주 깊이 가라앉았다.

* * *

어두운 하늘 끝에 아스라이 빛이 든다.

찬 바람에 웅크리다 이르게 눈을 뜬 새들이 깃 속에 부리를 부비는 그 시간이 오면, 이리 저리 잠을 설치던 이들도 결국은 늦은 잠에 들게 마련이었다.

고민일지 생각일지, 혹은 분노일지.

알 수 없는 것에 빠져 쉬이 잠들지 못했다. 평생의 반에 가까울 오랜 날동안 좋은 꿈을 꿀 수 있도록 도와주던 수면향이 사라진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덕분에 몰려오던 잠이 작은 소리에도 퍼뜩 밀려나기 일쑤였다.

그 새벽도 그랬다.

일순간도 내려놓지 못한 마음에 미처 잠들지 못했다. 그러다 하늘이 어렴풋이 밝아져 오는 것을 느끼고 그제야 조금 안도하게 되어 설핏 눈을 감았다.

- 뚝, 뚝, 뚝.

그렇게 잠을 청한지 이제 막 오 분이 흘렀을까. 아니면 십 분이 지났을까. 무언가가 얼굴을 두드리다 흘러내리는 것을 느낀 이가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여전한 온기가 느껴지는 진득한 무언가.

그것에서 어렴풋이 풍겨오는 불쾌한 향기.

살짝 뜨인 눈에 얼핏 무언가의 그림자가 비추는 것 같아서 이제 막 잠에 빠져들려던 눈이 번쩍 뜨였다.

"일어나지는 마요. 며칠 보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환영해 줄 필요는 없으니까."

게다가 일어나면 아마, 죽을걸.

속삭이는 목소리가 사뭇 다정하다. 지금껏 알고 있던 단어들에 다른 뜻이 있었던가 잠시동안 혼돈을 겪을 만큼.

미간을 향해 내려잡은 짧은 단도, 그리고 그 끝을 따라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혼돈했을지도 모른다. 아비를 향한 아들의 애정어린 말이 바로 이것이었나 하고.

"매일 찾아온다 하더니. 정말 매일 올 줄은 몰랐구나."

"내가 거짓말에 소질 없는 건 이제 알아챘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믿고 기다릴 줄 알았더니 자고 있기에 실망할 뻔 했습니다."

"기다렸지. 아무래도 오늘은 오지 않는 것 같아서 이제 막 누웠다."

"설쳤구나. 오늘도 나 올까봐 무서워서."

"그리 말해도 틀리지는 않겠구나."

창가에 묻은 빗줄기가 또르륵 흘러내리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데블란은 문득 궁금해졌다. 저 선득한 칼 끝에 묻은 피의 주인이 누구인지라거나 그 칼에 이제는 나의 피를 묻힐 것인지라거나 그런 뻔한 것 말고.

"왜 웃는 것이냐."

무엇이 재미있는지를.

"아침 잠이 많습니다, 내가. 그런데 이제는 반대로 된 것이 꽤 재밌어서요. 날이 밝아서야 마음 놓고 잠드는 마음을 이제는 당신이 겪고 있는데 어떻게 재미가 없겠습니까."

그렇게 말을 하고 있는데도 칼 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는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이 없었으나 눈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타인의 온기 때문에 차마 머릿속을 식히기가 어려웠다. 그 덕에, 멀쩡한 척 말을 하는 것과 반대로 손끝이 차게 식어가고 있었다.

데블란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정말로, 두려움 속에 잠들지 못했다. 매일 매일 찾아오겠다는 칼리안의 속삭임이 유령이 되어 눈을 감지 못했다. 정말 찾아오더라도 유령이었고 찾아오지 않는다 하여도, 결국 유령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겁에 질린 세크리티아 국왕 얼굴도 보게 되었으니. 참 오랜만에."

"듣는 귀가 있을 것은 걱정하지 않는 것이냐. 카이리스의 왕자가 이런 말이나 하는 것이 알려지면 썩 좋은 말이 나오지는 않을 텐데."

"이곳에 내 말 듣고 다른 데 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법을 부린 것도 아니면서 장담이 지나치구나. 방심 한 번에 이렇게나 무너진 나를 보면서도."

"내 검이 가진 귀를 믿는 겁니다. 방심이 아니라."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턱짓을 했다.

고운 선 끝이 가리키는 곳에 무표정한 얼굴의 기사가 곧게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몰랐으나 결국 데블란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칼리안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으니 지금 이곳에 아무도 없다는 말 역시 진실임을 알았으니까.

"그리고 아직도 모르는 척 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오늘 이 일은 당신의 방심 한 번에 무너진 탑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당신 손으로 착실히 만들어 낸 무덤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차피 마지막 순간이 와도 반성하지 않을 사람.

다른 누구의 탓도 하지 않겠으나 자신의 탓 역시 하지 않을 사람. 그것이 데블란이었다.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칼리안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데블란이 웃었다.

그 웃음의 끝이, 이 왕궁에 도착했던 첫날에 들었던 것과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키리에가 알아들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칼리안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칼리안은 이미 같은 것을 알아들은 얼굴이었다.

"오늘 찾아올 사람 많을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흐트러져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당신의 세상이 끝나는 날인데."

처음 만난 그 날부터 오로지 데블란의 마지막을 고하기만 했던 다정하기 이를데 없는 속삭임이 비로소 멈췄다.

뚝, 하고.

마지막 핏방울이 데블란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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