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19화 (320/527)

제56장. 뱀의 무덤(5)

'검은 나비의 모습이었습니다.'

언젠가 칼리안이 이런 말을 했었다.

'제가 생각한 것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 왜 그런 모습으로 나왔는지 정확한 뜻은 아직도 잘 모르겠어서 그냥 제 생각이 맞았다 여기기로 했습니다.'

손 끝에 내려앉더니 소란하다는 말을 머릿속으로 전해 온 검은 나비를 내려다봤다. 날카로운 두 눈이 오래지 않아 부드럽게 휘었다.

검은 나비.

검은 나비라.

멀리 서 있던 아델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린 뒤 같은 말을 몇 번인가 되뇌던 앨런이 속 모를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시선을 내렸다. 저 하늘의 한 귀퉁이를 베어다 곱게 세공하여 만든 듯한 신비로운 날개가 평화로이 팔락였다. 그 모습이 퍽 인상깊어 다시 한동안 바라보다가.

- 파사삭!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주먹 안으로 말아 쥐고 온 힘을 다해 짓눌렀다.

"아델리아."

검게 타버린 모래같이 변해버린 날개 부스러기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와 하염없이 떨어져내렸다.

"······나비잖아. 뭐야. 그게 다야?"

"고얀 것을 익혔구나. 아델리아."

결코 크지 않은 목소리가, 손가락보다 더 작게 보일 만큼 멀리 떨어진 아델리아의 귀에 똑똑히 들어갔다. 그렇게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앨런과 검은 나비를 제대로 지켜본 아델리아가 아쉽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사람이 지닌 두려움을 보여주는 마법.

그것은 자칫하면 평생을 악몽 속에 살게 하는 고약한 마법이었다. 마법사가 마법 익혀 쓰는 것에 무엇인들 문제가 되겠냐만은 그 마법이 흑마법의 한 종류라면 말이 달라진다. 그런 것을 아델리아가 배웠다. 온갖 속성이 뒤섞인 거대한 마법 하나를 앨런에게 보내는 척 하고서는 그 사이에 흑마법 하나를 더 구현하여 앨런에게 보냈다.

그리고 앨런은 검은 나비를 봤다.

"흑마법이 아니냐. 서클 늘리는 것이 요원해지니 익히지 말아야 할 것들에 욕심이 든 모양이구나."

"마법사한테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는 게 어딨어. 배우고 싶으면 다 배우고 하고 싶으면 다 하는거지."

"아무것이나 뱉으라고 뚫려있는 입이 아니지만 아무것이나 배우라고 달려있는 머리도 아니니라. 썩어 문드러지도록 살았으면서 그것 하나를 몰랐느냐."

"너무 오래 살아서 까먹었나보지. 뭐 어때. 그나저나 요즘 어린 놈들은 무얼 제일 무서워하나 궁금했는데 나비가 뭐야. 그렇게 대단하다 소문이 자자하더니 나비를 무서워하네. 앨런 마나실이."

"앨런 마나실에게 이걸 쓰면 시스파니안님이라도 만나게 될 줄 알았는가."

"응. 적어도 그런 분 정도는 나올 줄 알았지. 실망인데."

바로 그 시스파니안에 의해 대륙에서 흑마법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흑마법 중 하나인 '테이밍'을 변형하여 편지 나르는 새를 길러내는 것 외에는 모두를 없애버리라 하지 않았던가.

"배움이 쌓일수록 할 수 있는 일이 되려 줄어들어야 하는 것이 마법사니라. 그것 하나를 깨우치지 못하고서 세상 속으로 기어나온 것이냐."

"무섭게 말하지 마. 나도 처음 써봤어. 너무 빡빡하게 굴지도 마. 어차피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았잖아."

흑마법을 익히고. 심장에 돌을 박고.

마법사의 비틀린 호기심이 저지른 일을 목도한 앨런이 혀를 쯧 찼다.

더 이상은 할 말도 없다는 듯, 아델리아가 보낸 마법을 진작에 치워냈던 앨런이 다시 한 번 기운을 모았다.

- 쿠우우웅······.

사방의 공기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울었다. 갈라지다 도로 붙기를 반복하던 땅이, 물기 잃은 강의 바닥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대사막 언저리에 있다던 소금의 땅을 직접 본다면 아마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사방에 잔금이 생긴듯한 땅의 부스러기가 하나 둘 떠오르는가 싶더니, 작은 자갈이 떠오르고 주먹만한 돌멩이가 떠올랐다. 돌 덩어리가 떠오르고 바위가 떠올랐다. 바닥 전체를 한꺼풀 드러내어 공중에 띄운 앨런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 따악!

- 화르륵!

앨런과 아델리아 사이를 가득 메우고 떠오른 것들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빛을 지나 푸른 빛으로, 종내에는 검은 빛으로 타올랐다. 머릿속으로 가늠하기조차 힘든 온도의 불을 담은 채 허공에서 뱅글뱅글 돌던 대지의 잔해들이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 따악!

앨런이 그 불꽃들을 향해 목표를 알렸다.

- 팟!

아델리아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앨런의 뒤에서 나타났다.

검게 타오른 불은 멈추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앨런을 지나쳐 오로지 아델리아를 향해서 계속하여 방향을 바꿔 날아들었다. 아델리아의 로브자락 끝이 그대로 녹아 사라졌다.

- 쌔애액!

- 휘이이익!

한 번 정해진 목표는 절대 바꾸지 않겠다는 듯, 아델리아가 어디에서 모습을 드러내든 검은 불덩이가 집요하게 달려든다.

기어코 그 불덩이 몇 개가 아델리아의 실드를 맞췄다. 회색빛의 그레이트 실드 위에 얼음을 덧씌워 둔 그것이, 앨런의 불에 닿자마자 녹아 사라졌다. 암흑을 태워내는 듯한 검은 불이 아델리아의 어깨를 스쳤다.

고작 스쳤을 뿐, 가까이 닿지도 않았으나 피부가 타오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이를 악문 아델리아가 마력을 끌어모았다.

주변의 중력을 다시 움직여 불덩이들을 멈춰 세웠다. 형체를 잃고 갈라진 바닥 사이사이에서 뭉클거리는 물의 덩어리를 끌어올렸다. 거대한 장막처럼 펼쳐낸 물의 덩어리가 앨런과 아델리아 머리 위의 하늘을 뒤덮었다. 그리고 쏟아져내렸다.

- 치이이익!

쉬이 꺼질 리 없을 불에 닿은 물이 일순간에 거대한 구름을 만들어내고 그것은 다시 폭우가 되었다. 아델리아가 그 폭우를 얼렸다. 검게 타오르던 불길이 푸른 빛으로, 그리고 다시 붉은 빛으로 변하다 사라질 때까지 계속하여 마력을 쏟아부었다.

불길이 잦아들자, 뾰족하게 얼어버린 빗줄기가 앨런을 향해 쇄도했다. 그것을 본 앨런의 몸에 무형의 실드가 둘러졌다. 하나하나 날카롭게 벼려진 얼음이 앨런에게로 날아들었고 실드를 강타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실드에 막힌 얼음의 소리도, 그것을 피하는 앨런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마법사의 주머니 하나를 열어 둔 것처럼. 실드는 아델리아가 공격한 얼음의 날을 모조리 흡수했다.

- 지이익.

잠시 뒤.

아델리아의 바로 뒤에서 일직선의 금이 하나 생겼다. 그리고 그 사이로, 저 멀리 앞에 있는 앨런의 뒷모습이 비춰지는가 싶더니.

- 쉬이이익! 쉬익!

방금 전까지 앨런을 향해 날아들다 사라진 얼음의 날이 그 틈으로 쏟아지듯 새어나왔다. 앨런이 굳이 큰 힘을 들여 아델리아의 공격을 막는 대신 자신의 주변과 아델리아의 뒤 공간을 이어버린 것이다.

"······ 짜증나게."

재빨리 다시 한 번 실드를 만들어 자신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한 아델리아가 욕지거리같은 말을 내뱉었다.

심장에 박힌 돌.

7서클 마스터 이상의 힘을 지니게 해주는 돌.

아직 그 힘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 물론 앨런이라 하여 제대로 된 힘을 모두 쏟아부은 것은 아니겠으나 아델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을 향해 손을 내린 아델리아가 잠시 눈을 감았다. 심장 속의 서클이 미친듯이 회전을 시작하고 그 사이에 박힌 검은 조약돌의 붉은 기운을 내보냈다. 그것을 본 앨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을 그 때.

- 소란하다 하였거늘.

환청처럼 들려왔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앨런의 귓가를 울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델리아의 귀에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아델리아의 흑마법에 의지를 실어 한 번의 경고를 전했던, 그러나 앨런의 손에서 무심히 바스라져 사라졌던 검은 나비 한 마리가 다시 날아든다.

가짜가 아니었다.

앨런의 마음 속 공포심을 꺼낸 환영이 아니었다. 처음은 분명 앨런의 공포가 맞았으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 팔랑, 팔랑.

한 번의 날갯짓에 타오르던 불길이 멈췄다.

두 번의 날갯짓에 불어오던 바람이 멈췄다.

세 번의 날갯짓에 흘러가던 시간이 멈췄다.

고작, 나비 한 마리.

그 작은 나비의 날갯짓에 온 세상이 멈췄다. 그것을 두고 어찌 감히 환영이라 생각하겠는가.

"지극히 위대한."

모든 것이 멈춘 세상 속에서, 태고의 고룡 앞에 작디 작은 피조물일 뿐인 두 대마법사가 싸움을 멈췄다.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올렸다.

"······ 시스파니안을 뵙습니다."

칼리안에게는 더할 나위 없을 이해자다.

예기치 못한 때에 불쑥불쑥 나타나서 어느 날에는 위로를 주고 어느 날에는 원망도 받아주는 감사한 존재였다.

플란츠에게는 살아 숨쉬는 조상님이다.

왕실 보물창고에 놓인 새하얀 보검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나의 파니' 따위의 어처구니 없는 이름이 새겨지게 된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자, 로젤리타를 위해 찾아간 그 공동에서 생기없는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이제 되었다' 라는 말만 내려놓고 불티처럼 사라졌던 막연한 존재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낡은 동화책이나 빛바랜 초상화같은 정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에게 있어서는 세렌티와 같았다. 오히려 세렌티보다 더 절대적인 존재였다. 잠든 신을 대신해 시스테라를 지탱하는 고룡은 그 자체로 모든 마법사의 신이 아니던가. 그런 존재를 눈앞에서 마주했으니, 비록 본신이 아닌 의지만으로 이곳을 찾은 것임을 알았음에도 긴장된 마음을 제대로 추스르기 힘들 지경이었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아마도 칼리안이었다면 카이리스 왕궁의 석실도 아니고 시스파니안의 둥지도 아닌 이런 엉뚱한 곳에 대체 무슨 일로 오셨느냐 물어볼 만한 깜냥이 되었겠으나 애석하게도 둘은 진짜 마법사였다. 시스파니안의 첫 말을 기억해내고 사과의 말을 꺼내든 것이 기적이다.

그나저나 소란했다니. 시스파니안이 인간 마법사 둘의 싸움이나 말리러 두 번이나 온 것은 아닐 텐데.

팔락, 팔락.

또 한 번 앨런의 손 끝에 내려앉은 검은 나비가 몇 번인가 날개를 팔락였다.

- 다누의 뿌리를 잘라낼까 우려되어.

그리고 싸움 말리러 온 것이 맞다는 대답을 했다.

끝을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깊숙이 갈라져나간 대지, 완전히 소각되어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게 된 마을, 별 조각과 충돌하여 만들어진 거대한 크레이터들까지. 짧은 시간에 완벽히 폐허가 된 옛 엘프 마을을 잠시 둘러본 아델리아가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어머니 나무의 근원이 이곳까지 닿아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호기심 앞에 흑마법이고 제온의 조약돌이고 가릴 것이 없다던 그 문제 많은 마법사가 비로소 제대로 된 말을 했다.

저것들 대부분이 내가 아니라 저기 저 머리색 특이한 어린 놈이 했다 변명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거리낌이 없이 굴지는 못했다. 그런 아델리아가 이제껏 보이지 않던 진중한 얼굴이 되어 있어서, 그것을 본 앨런이 시스파니안을 손 위에 올려 둔 것도 잊고 헛웃음 소리를 냈다.

- 이해하고 있다.

고개를 끄덕이듯 다시 한 번 날개를 팔랑인 나비의 몸에서 검은 빛무리가 쏟아지듯 흘러나왔다. 반짝거리는 별무리가 하늘을 한 번, 땅을 한 번, 쓸어내리는 것처럼 흘러흘러 먼 곳으로 사라졌다.

- 사아아아······.

그러자 놀랍게도, 상처입고 불에 탄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잿더미가 되었던 대지에 풀이 돋아나고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 별이 드러났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흘려보내는 것처럼.

- 다만 이곳은 온전히 두거라. 다누의 부탁이니.

둘 모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틈이 없었다 해야 맞을 일이다. 두 마법사에게 할 말을 전한 검은 나비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먼 하늘로 날아가 사라져갔으니까.

앨런이 웃음소리를 냈다.

그 검은 조약돌을 심장에 넣는다면 시스파니안에게 검을 겨눠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아직 어린 제자는 그런 말을 했었다. 지금 이들을 찾아온 시스파니안의 의지가 아닌 본신까지도 만나본 칼리안이 그런 말을 했었다.

세상에 칼리안 말고 또 어떤 놈이 저런 이를 앞에 두고 칼을 꺼낼 생각을 하겠나.

"······ 어여쁜 내새끼는 참으로 비범하구나."

제대로 미친 소리를 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비의 날갯짓을 따라 이어지는 별무리의 끝을 바라보던 앨런이 고개를 내렸을 땐, 아델리아가 어느새 어디론가 떠나고 보이지 않았다.

* * *

긴 밤은 계속 흘러갔다.

"칼리안 왕자님께서 개입하기로 했습니다."

"체이스 왕세자 저하를 돕는 것인가?"

"아닙니다. 플란츠 왕세자 저하, 그리고 히나를 위협한 것에 대한 보복입니다."

"딱 좋군."

테일란의 손에 죽어 사라져가는 세크리티아 왕실 기사단을 보고 기함하던 아르센에게 키리에가 상황을 전했다. 호위 역할을 잠시 키리에에게 맡긴 아르센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도와드려야지. 구경만 해서야 되겠나."

데블란은 학살자다. 학살을 했다.

그 뒤에 테일란이 있다는 것을 누군들 모를까. 지금 그 테일란이 왕실의 기사단을 도륙하고 있는데 그것이 과연 반성과 사죄로 보일 것인가, 사라지지 않는 위협으로 보일 것인가.

"베른 경. 세상의 그 어떤 귀족도 군주의 무력이 홀로 강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였네."

하필이면 그 플란츠의 말을 이 순간 떠올린 것이 그리 마뜩치는 않았으나 어쩌겠는가. 맞는 말은 맞는 말이니.

"카이리스가 개입하기로 했고 그 개입이 이번에는 정당하다면 우리가 좀 나서줘도 되겠지. 카스트린 경이 저리 온 것이 아마도 우리 왕자님 때문인 듯 하니."

체이스가 섣부르게 테일란을 이곳에 보냈을 리 없다.

데블란이 칼리안을 또 건드리려 한 것에 체이스도 더 이상 참지 않은 것일 터였다. 그것을 어찌 그냥 두고 보겠나.

테일란이 혼자 저 기사들을 다 쓸어버리고 체이스에게 '역시 그 데블란의 아들'이라는 이름줄을 채워놓게 하느니 지금 잠깐 멋대로 나서고 말지.

창문에서 후작저 밖으로, 그리고 이미 절반은 줄어든 데블란의 기사들 한가운데로 텔레포트한 아르센이 씩 웃었다.

"반갑네. 카이리스 발칸의 부군단장인 아르센 헤르츠라 하네."

홀로 강한 군주는 그 어떤 귀족도 원치 않겠으나, 더 강한 무력을 지닌 옆 나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강한 군주는 더할 나위 없이 환영할 이들 역시 바로 그 귀족들 아니겠나.

- 쌔애애액!

이번에는 이 땅에 전쟁을 일으키고자 함이 아니라, 이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나선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의 곁에서 모습을 드러낸 수많은 얼음창이 대기를 갈랐다.

기사들의 검이 모조리 부서져 사라져갔다.

* * *

해가 떠올랐다.

어둡고 긴 밤이 지나갔다.

플란츠는 길고 긴 잠을 잤다. 다시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뜨고 지고, 또 다시 해가 뜨고 질 동안 잠을 잤다.

- 어차피 네가 걷게 될 길이란다. 너도 알고 있지 않니?

- 무의미한 반항들은 이제 그만하렴.

잊고 지내고자 했던 목소리가 계속 떠올라서.

- ······ 콰직!

누군가의 심장을 찌르던 손 끝의 감각이 계속 떠올라서.

그것을 잊지 못하는 똑똑한 머리는 꿈 속에서조차 온전히 잠들지 않아서.

꿈 속에서조차 결국 잊지 못한 피비린내에 허우적거리다 눈을 뜨곤 하는 날이 많아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지 오래 되었다.

그 때문에 더 길고 긴 잠을 잤다.

마취액에 닿아 잠에 든 까닭인지.

피 비린내보다 더 짙은 꽃 향기를 맡고 잠에 든 까닭인지.

이번만은 자는 내내 달고, 신 냄새가 났다. 시디 신 냄새에 취해 오래도록 깊은 잠을 잤다. 피 비린내 말고 그 생소한 냄새에 취해 오래도록 잠을 잤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드시겠습니까."

일어났느냐 묻는 대신, 그리고 소원인듯 다짐인듯 꼭 먹겠노라 했던 대구 대신 노랗고 길쭉한 바나나 하나를 내민 동생 놈이 이런 말을 했다.

잘 잤느냐 묻지도 않고 아픈 곳이 더 있느냐 묻지도 않고, 도와주어 고맙다 하지도 않고. 바나나를 내밀었다.

쌓여있는 것은 바나나인데 방 안에 온통 신 귤 냄새가 가득하다. 껍질만 남은 연두색 귤이 한가득인 것이 그제야 보인다. 꿈 속이 온통 달고 신 냄새 뿐이었던 이유를 이제야 안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말고."

내가 너인 줄 아느냐고.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한 플란츠가 손가락을 들어 테이블 위를 가리켜 보였다. 모두 먹고 남은 마지막 신 귤 하나가 놓여있었다.

"신 것 못 드시는 거 아는데요."

"다를 것 없는데."

며칠을 잤는지 몰라도 뱃속이 텅텅 비었는데 바나나나 신 귤이나.

플란츠가 잠든 사이 잔뜩 쌓인 신 귤을 혼자 다 까먹은 칼리안이 한참동안 말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이제 다 잡았습니다. 덕분에."

뱀.

그 말과 함께 내밀어진 신 귤 하나를 플란츠가 받아들었다.

악몽 깨워준 동생이 건넨 시디 신 귤에서 단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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