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장. 뱀의 무덤(3)
톡톡.
발 끝으로 바닥을 몇 번 두드렸다.
이 계절에 핀 꽃이 이렇게나 향이 짙었던가.
이제와 갑자기 이렇게나 짙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어느새 저 빨간 꽃의 향에 익숙해져 있었나보다. 그런데 아직도 저 꽃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 ······ 두근!
한 명만 더 잡아주고 가라 할 것을 그랬나 하고, 스쳐 지나가는 듯한 아쉬움을 밀어낸 플란츠가 시나스타를 들어올렸다.
졸음이 밀려온다.
아무래도 그 가느다란 바늘에는 마취액이 묻어있던 모양이다. 그것이 어느새 몸에 닿았나 보다. 평소 즐기지도 않던 잠이 이렇게나 쏟아지는 것을 보니.
- 두근!
들려오지 않으면 않는대로 많이 아쉽겠지만 들려오면 들려오는대로 또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소리가 온 머릿속을 윙윙 울린다. 축복의 힘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톡톡톡.
다시 한 번 바닥을 두드렸다.
"그리 걱정 많으신 내 아우님께서는······ 언제쯤 도착하시려는지."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낮은 목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검이 다시 바람을 담았다. 그 발자취를 따라 이어진 붉은 자국이 꽃향기보다 짙은 피비린내를 머금은 채 땅에 스몄다.
* * *
아주 조금 전.
상대하고 있던 두 명의 숨을 순식간에 끊어놓은 키리에가 히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히나의 손을 잡은 채 레이첼의 발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주저없이 달렸다.
'히나를 데리고 린 후작의 저택으로.'
플란츠가 요구한 그 한 가지를 온전히 실행시키기 위해서.
목표했던 이들 중 한 명이 자리를 빠져나가려 하는 것을 본 아홉 명의 기사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 타닷!
키리에는 놈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 받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만 그들 중 셋이 남아 플란츠를 둘러싸고 나머지 여섯 놈이 키리에를 따라 방향을 바꿔 달려오는 소리는 들었다. 그리고.
"나."
플란츠가 발을 움직였다.
서로 다른 색의 두 자루 검을 비스듬히 내려잡은 채로, 기사 아홉 명의 걸음을 가로막았다.
"······ 여기 있는데."
그 말과 함께 두 번째 싸움이 시작됐다.
어지럽게 움직이는 칼날의 바람소리, 서로 맞닿는 검에서 울리는 날선 소리, 쉴 틈 없이 방향을 바꾸는 발소리, 그리고 플란츠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외마디 비명 소리. 그것을 보고 들으며 잠시 발걸음이 늦춰졌을 때 히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 시간 버시는 거잖아. 우리가 빨리 가야지, 머뭇거리면 어떡해.
- 그래. 히나.
저도 모르게 입 대신 마음 속으로 답을 전한 키리에가 레이첼의 발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다시 달렸다. 레이첼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다른 곳에서 후원 쪽을 향해 달려오듯 돌아오고 있었다.
"왕궁 한 바퀴를 다 돌았는데 마법사는 없어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 말을 들은 키리에가 잠시 귀를 기울였다. 별관 쪽의 싸움 소리가 뚝 끊긴 듯 들리지 않았다. 사일런트 막이 여전히 작동 중이라는 뜻이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키리에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우선 린 후작저로, 가능한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세자 저하는 어디에 계세요? 그리고 린 후작저는 갑자기 왜?"
그에 대해 키리에가 무언가 대답하려 할 때, 히나가 다시 귀걸이를 빼 레이첼의 손에 쥐여줬다. 그리고 린 후작저가 있는 방향을 가리켜 보였다.
"가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속도를, 그레이스 경."
"······ 일단 알았어요."
키리에의 말에, 별관 쪽을 잠시 살피려던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력을 움직였다.
짙은 어둠의 그림자 속에 숨은 셋은 키리에의 청각에 의지한 채 왕궁 안의 수비대를 따돌리거나 조용히 기절시켜가며 왕궁 후문을 통해 빠져나왔다. 레이지안 린 후작의 사병을 경계하기 위해 대부분의 기사들이 정문 쪽에 몰려 있어 그나마 수월히 움직일 수 있었다.
카이리스와 달리 세크리티아의 수도 세크레타는 내성 안에 귀족들의 저택을 짓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내성 안에는 광장, 카페나 술집을 포함한 여러 상점들, 마법사 협회와 같은 각종 연합회의 건물들, 그리고 세렌티의 신전만 위치했다. 때문에 레이지안의 저택도 내성 밖에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성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레이지안의 저택이 내성에서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내성까지 나오는 동안 플란츠의 계획을 전해들은 레이첼이 움직이던 마력에 조금 더 힘을 쏟아넣었다. 그 덕에 두 발로 걷고 있으나 말을 달리는 정도의 속도가 났고 그리 오래지 않아 거대한 후작저가 보이는 곳에 발을 멈춰 서게 되었다.
그들이 그대로 후작저 정문까지 달리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
"저게 무슨······."
성문 앞을 겹겹이 막아선 수많은 기사들 때문이다.
세크리티아 왕실 문장이 새겨진 경장 갑옷 차림의 기사들. 세크리티아 왕궁의 정예 기사단. 그리고 그 건너편, 저택을 등지고 선 또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이 보인다. 저택의 수비를 위해 레이지안이 남겨두고 간 사병이었다.
그들의 가장 앞에 아리안느가 서 있었다. 저택 밖에, 가벼운 갑옷도 걸치지 않은 평상복 차림으로.
"내부를 둘러보고 문제가 없다면 돌아갈테니 문을 여십시오."
"저택 문을 열어줄 수는 없다 하였다."
"이곳에서 카이리스의 세력과 결탁하여 왕실에 배반하는 행위가 있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배반이라니. 지금 이곳에는 세자 저하의 모친 되시는 루이즈 후궁님께서 계신다 하지 않았나. 설마 후궁님께서 반역이라도 모의했다는 말인가."
말싸움이 한창이었다.
플란츠가 예상한 그대로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하의 명입니다. 영애께서는 비키십시오."
"그 전하께서 후궁님께 독을 건네셨음을 안다. 그런데 무장을 한 기사들을 대동하고 후궁님의 앞에 나서겠다는 것을 내가 허락하리라 생각하는가."
"말을 삼가십시오. 근거 없는 주장으로 전하의 명예에 누가 되는 말을 하면······."
"입 다물거라. 후궁님을 보호하는 우리를 반역자로 매도하는 주제에 근거라니. 너희들의 그 말에는 과연 어떤 근거가 있는가."
"비켜 서십시오. 경고입니다."
아리안느를 향해 경고를 입에 담은 기사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왕궁의 기사들 전원이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들 듯한 자세를 취했다. 말 그대로, 경고였다.
키리에를 잠시 쳐다본 레이첼이 손을 움직였다.
- 촤아아악!
그와 동시에 아리안느와 레이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좌우로 밀려나며 길을 만들었다. 그들이 딛고 선 바닥이 양쪽으로 움직인 것이다.
카이리스 왕세자의 정혼자가 길을 돌아갈 이유가 없지 않나.
곧은 길이 없다면, 만들어야지.
"들어가세요."
썰물이 갈라지듯 만들어진 길을 가리켜보인 레이첼이 히나를 향해 살짝 웃었다. 주변에 가득한 왕실의 기사단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히나가 한 발을 움직였다.
왕실의 기사들이 검을 쥐었다. 그러자 칼리안의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결코 무시하지 못할 숨막히는 살기가 왕궁의 기사들을 덮쳤다.
내 동생 건드리면 전부 다 죽여버리겠다는, 말 뿐이 아닌 진짜 경고였다.
아리안느와 이야기를 나눴던 기사가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 고갯짓을 했다. 그와 함께 왕실의 기사들이 검에서 손을 뗐다. 어쨌거나 지금 앞에 있는 이를 섣불리 건드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곧 키리에와 레이첼을 대동한 히나가 함께 왕궁 기사들의 사이를 지나갔다. 그리고 아리안느의 곁에 섰다. 그러자, 아리안느의 뒤에 서 있던 누군가가 히나의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물러나지 않는다면."
- 딸깍.
"카이리스 왕실에 대한 공격으로 보고 대응합니다."
이 시간 부로 히나의 호위로 돌아온 에일라가 안전 장치 풀린 마력탄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기사가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뒤에 선 다른 기사들을 향해 검에서 손을 뗄 것을 지시했다. 카이리스의 왕족에 준하는 이가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결국 기사들은 저택으로부터 오십 보 떨어진 곳까지 물러났다. 완전히 왕궁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으나 데블란으로부터 다른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조용할 터였다.
그것을 확인한 아리안느가 히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반가워요. 제대로 된 인사는 들어가서 하죠, 우리."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잊었다는 듯한 태도에 히나가 생긋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저택의 주인인 아리안느가 안내하는대로 발을 옮겼다.
그렇게 아리안느와 히나, 키리에와 레이첼, 레이지안의 사병들이 모두 저택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근 바로 그때.
- 스릉······.
이제껏 조용히 있던 키리에가 검을 뽑았다.
마력탄의 안전장치를 다시 가동시키던 에일라가 손을 멈췄다. 레이첼의 양손에 잿빛의 기운이 뭉클거리며 모여들었다.
"히나, 조심······!"
- 우우우웅!
히나를 주의시키려던 키리에의 말을 막고, 대기가 진동하는 소리가 모두의 귀를 울렸다. 마력을 다루든 기세를 다루든 할 것 없이 모두가 같은 소리를 들었다. 발 밑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었으나 저택 전체가 진동했다.
이건.
위험하다.
- 체이스 세자 저하. 키리에입니다.
약속대로 저택에 도착했으니 키리에가 서둘러 체이스를 불렀다. 그리고 내용을 전했다.
- 쿠구구궁······.
- 쿠궁······ 쿠구궁······!
하늘이 울기 시작한다.
저택의 이상을 감지한 에우리아의 마력에 천둥이 인다. 보랏빛의 번개가 모여들었다. 저택 안 어딘가에서 싸늘한 냉기 가득한 기운이 뭉클거린다. 아르센의 것이었다.
그리고, 모래 바람이 일었다.
그 모래 바람은 에우리아의 것도, 아르센이나 레이첼의 것도 아니었다.
"······ 그 마법사."
그 마법사.
세크리티아 왕궁의 별관에 사일런트 막을 쳐 두었던 마법사.
"아니. 우리 그래도 초면인데 그렇게 경계하면."
레이첼의 감지 범위 밖, 정확히는 내성 밖에 선 채 왕궁의 별관까지 마법을 보낼 수 있는 마법사.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닌 마법사.
"인사는 언제 해."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하얀 단발의 여자 마법사가 후작저의 거대한 대문 위에 살포시 내려앉듯 모습을 드러냈다.
- ······ 키리에.
체이스를 대신한 칼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나 여유롭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급박했다. 다급했다.
- 키리에. 7서클 마법사가 갈 거야. 절대로, 아무도 나서선 안돼. 잠시만 시간을 끌어. 곧······!
"이상한 장난감은 치우고."
플란츠에게 건네받았던 팔찌가 마른 모래처럼 바스라져 바람결에 흩어졌다. 그 팔찌는 키리에의 검만큼이나 단단한 미스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을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었다.
"심심하면 나랑 놀지. 하프엘프."
칼리안의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두운 검붉은 눈이 키리에를 향했다. 그때 히나의 수어가 키리에의 눈에 들어왔다.
- 저 마법사, 심장, 돌.
그에 대해 키리에가 무어라 대답을 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키리에 주변의 공기가 흐름을 멈췄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 콰르르릉!
그 순간, 하늘에서 보랏빛 번개가 떨어져 내렸다.
그 어느 때보다 더 환하게 빛나는 번개가 마법사의 머리 꼭대기를 향해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내려왔다.
- 휘이잉!
바람이 일었다.
폭음은 울리지 않았다. 대지에 떨어져내린 번개의 매캐한 탄내도 없었고 번개에 직격당한 마법사도 없었다. 한 차례의 바람이 저택을 다시 한 번 휘감아 돌고 사라지자 엄청난 속도로 내리떨어지던 번개가 지워진 듯이 사라졌다.
고작 바람 한 번.
실드조차 펼치지 않은 마법사의 눈길 한 번에 에우리아의 번개가 스러져 없어졌다.
- 쌔애애액!
창문 너머에서 아르센의 얼음창이 날아든다. 번개같은 속도로 뻗어나온 날카로운 창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리고 방향을 바꾸어 그것을 던진 쪽으로 다시 날아갔다.
- 콰앙!
얼음창에 꿰뚫린 견고한 벽이 그대로 부서져나갔다. 벽에 생긴 거대한 균열 사이로 서둘러 펼친 두터운 막에 얼음창이 꽂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전히 키리에의 주변에서는 공기가 흐르지 않았다. 숨이 막힌 키리에의 검고 푸른 두 눈에서 실핏줄이 터졌다. 키리에가 입술을 악물고 숨을 버텼다. 검을 쥐고 있던 손에 부러 힘을 주어가며 참았다.
상황을 눈치 챈 히나가 키리에 쪽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마치 레이첼의 마법이 그러하듯이, 밟고 선 바닥이 저절로 움직이며 히나를 도로 뒤로 밀어냈다.
키리에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지 않는다.
"잠깐 여기서 놀아달란 말을 들었는데. 조금 재미가 없네."
아델리아.
아이젠 디나한. 리베른에서 사라진 7서클의 마법사.
키리에를 잠시 쳐다보던 아델리아가 느긋한 말을 꺼냈다. 그리고 조금씩 시선을 움직여 다른 대상자가 될 만한 이를 찾기 시작했다.
그 눈길이, 양 손에 황금빛을 머금기 시작하는 한 명에게 닿았다. 작게 웃은 아델리아가 히나를 향해 작은 윙크를 보냈다.
"다음은 네가,"
"다음은 내가."
대기가 움직인다.
저택 안에 휘몰아치던 바람이 잦아들고 공기가 흐른다. 키리에의 숨을 막던 무형의 힘이 사라졌다.
키리에가 큰 기침을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히나가 달려와 서둘러 치유의 힘을 보냈고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보인 키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다음은 내가 어떻겠느냐. 나도 마침 적적하던 터이니."
낯선 목소리를 들은 아델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비로소 화풀이를 허락받은 적은발의 마법사가 아델리아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기, 어린 놈들은 그냥 두거라."
앨런 마나실이 왔다.
* * *
큰 불빛이 깜빡이는 느낌이 들었다.
눈 앞이 캄캄해지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너무 사려깊다고, 아우님이 그렇게 성화를 부렸는데.
짖기는 잘 해도 틀린 말을 한 적은 없는 동생 놈의 말에 공감이 갔다. 시스파니안은 조금만 덜 사려깊었어야 했다.
- 카아앙!
고작 마취액 하나를 막지 못해서 이렇게.
"하······."
플란츠가 한 발을 뒤로 물렸다. 두 개로 나누어 들었던 시나스타는 다시 하나로 합쳤다. 오른쪽 어깨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서였다.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니 양손 다 똑같이 쓰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하더니. 어찌됐건 칼리안은, 짖기는 잘 해도 틀린 말을 한 적이 없다.
조금 전에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은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플란츠가 붉은 빛이 어른거리는 검날을 바라보다 팔을 들어올렸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잠들지 않을 수 있을지, 계산하기를 포기한지 오래됐다. 생각 없이 검을 들고 찌르고 베었다.
- 뚝, 뚝.
키리에가 이곳을 벗어났을 때 아홉 명.
하늘에 천둥이 쳤을 때 일곱 명.
그리고 이제 다섯 명.
마치 플란츠의 무릎이 꺾이기를 기다리겠다는 듯 적당히 거리를 두고 상대해오는 덕에 좀처럼 놈들의 수가 줄어들질 않는다. 먼 곳에서 보랏빛 번개가 한 번을 내리치고 난 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지도 알지 못했다.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플란츠가 기사들에게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똑같이 거리를 벌리고 버텨도 되겠으나, 그렇게 하다가는 아무래도 졸음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아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나갔다.
- 카앙!
상대 기사가 빠르게 검을 들어 시나스타를 막았다. 그리고 올려쳤다.
저도 모르게 힘을 준 오른쪽 어깨에서 통증이 인다.
다시 한 발을 뒤로 물린 플란츠가 긴 숨을 내쉬었다. 감겨드는 눈을 뜨고 앞을 봤다.
발을 박차고 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놈들은 플란츠에게 큰 해를 입히지 못하지만 플란츠는 아니었으니까.
- 카아앙! 카앙!
날카롭게 벼려진 연두색 눈에 살기가 가득 담긴 것을 본 기사가 공격을 막았다. 튕겨나온 검을 되잡은 플란츠가 기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현저히 느려진 움직임이었으나 예리함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저 기사의 목을 베어내든 아니면 허리를 갈라놓든. 한 명이라도 더 줄여놓을 심산으로 손에 힘을 줬다.
- 타악!
그러나 플란츠의 검은 허공에서 멈췄다.
기사의 목을 베지도, 허리를 갈라놓지도 못한 채 멈췄다.
"왔습니다."
오러 두른 손으로 플란츠의 검을 잡아낸 칼리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기사를 등 뒤에 둔 채로, 플란츠를 마주 본 채로.
- 쌔애애액!
칼리안의 등 뒤로 붉은 기운 가득한 다섯 개의 단도가 뻗어나간다. 제각각의 경로로 날아간 단도의 끝이 다섯 기사의 목을 정확히 꿰뚫었다.
이곳 저곳에서 육중한 것이 바닥으로 기울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정확히 다섯 번. 다섯 명의 기사들이 한순간에 숨을 잃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지 않아도 안다.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안 늦게 잘 오셨군."
"네."
짧게 대답한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바닥에 기대듯 앉았다. 붉은 꽃 향이 확 밀려들었다. 그 향이 너무 짙어서 졸음이 몰려왔다.
"대구. 먹고."
칼리안의 붉은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돌아갈거야. 잘."
플란츠의 연두색 눈이 완전히 감겼다.
앉은 채 잠든 삶은 완두콩을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실소했다.
하루 지났다.
"사드릴게요. 제가."
그놈의 대구, 세렌티 말고 내가 사주겠다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