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장. 뱀의 무덤(2)
하늘이 맑았다.
밤은 고요했다.
얍 하면 어쩌구 하는 칼리안 식으로 말고, 마력을 확장시켜 다른 곳으로 보내는 방법을 어떻게 제대로 설명해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하기에 더없이 좋을 만큼 조용한 시간이었다.
"마력을 길게 늘리는 것과 비슷한데."
히나의 앞에서 마력을 응집시키고 범위를 넓히는 과정을 보여주며 설명하던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제대로 설명한다는 말인가.
애초에 히나가 다루는 것은 자연 그대로의 마나다. 마법사들이 마나를 자신만의 마력으로 바꾸어 서클 안에 쌓아두고 활용하는 것과 달리 자연에 흐르는 마나를 그대로 치유력으로 치환하여 사용한다 했다. 덕분에, 그동안 그렇게 많은 부상을 치료하였음에도 차라리 체력이 고갈될지언정 마나가 밑바닥을 보인 적은 없던 히나가 아니던가.
이렇듯 마나의 성격부터 달랐으니 호기롭게 알려주겠다 한 것이 무색하게 설명을 이어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마력을 보낼 위치를 계산하고, 그곳까지 이렇게."
그렇게 몇 번의 설명을 덧붙여 줄수록 조금씩 칼리안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처구니없었으나 동생 놈이 왜 그렇게 설명을 했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깊이 공감했다는 소리다.
그래.
놈은 최선을 다했다.
- 이해, 했어요.
그런데 말똥말똥하게 뜬 동그란 눈으로 플란츠를 보면서 무언가를 생각해보던 히나가 놀랍게도 이런 말을 했다.
제 몸의 반도 안 될 것 같은 크기의 화병 안에 루시가 완벽히 들어가는 것을 눈 앞에서 봤던 딱 그때처럼,
"······ 어떻게."
플란츠는 해답 없을 의문을 가졌다.
-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 마력을, 저 멀리로 보낼 때, 저와 연결되지 않은, 마력을, 어떻게 제어하는지, 그걸 몰랐던 거였어요.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플란츠를 두고서 히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 연습, 해볼게요. 해보고, 모르는 게 있으면, 다시 여쭤볼게요.
"그렇게 해."
- 자상한, 왕자님께는, 아직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제대로, 하게 되면, 말할게요.
"알았어."
이렇게 대답하던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칼리안이 이 일을 알면 우리 히나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았느냐며 호들갑을 피울지, 아니면 그걸 왜 형님이 알려주었느냐며 눈에 불을 피울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떠올랐다.
소원을 아직도 정하질 못했다.
여전히 시계도 없고 하늘을 보며 시간 가늠하는 법도 모르는 플란츠가 지금이 몇 시인지를 묻기 위해 입을 열고, 히나는 약속한대로 딸기 아이스크림을 가져다 주기 위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 절그럭.
갑옷을 이룬 사슬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조심하십시오."
인근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키리에의 목소리.
- 타앗!
- 쌔애액!
누군가가 발을 박차는 소리.
무언가가 날아드는 소리.
- 팅! 티디딩!
날아오던 작은 금속을 쳐내는 소리가 모두 동시에 들려왔다. 물론 그 많은 소리 중 왕궁 별관의 후원과 어울리는 소리는 단 하나도 없었다.
플란츠는 상황을 살피기 전에 우선 히나부터 잡아당겼다. 그리고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키리에와 자신의 사이에 히나를 끌어다 놓은 뒤 검을 뽑았다. 당황하거나 긴장한 기색은 없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을 마주한 사람처럼.
곧 플란츠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작은 바늘들이 키리에의 검에 막혀 떨어진 것이 보였다. 그 모양새를 확인한 플란츠의 눈이 가늘게 변했을 즈음, 시선에 대한 대답인 것처럼 키리에의 침착한 설명이 들려왔다.
"암기입니다. 마취액이나 독액이 묻어있을 테니 만지지는 마십시오."
"알았어."
짧게 답한 플란츠가, 셋을 포위하듯 둘러싸고 아주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는 기사들을 보며 검을 뽑았다.
저들이 입은 것이 아무리 가벼운 갑옷이라 하나 결국은 금속이다. 그만큼 무거워진 움직임의 기사 오십여 명은, 칼리안의 유일한 기사를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 플란츠도 잘 아는 사실이다. 거의 매일같이 발칸의 기사들 전원을 상대로 대련을 해오던 키리에니까.
"제온이 섞였군."
그러므로 그들 중 몇몇이 손에 든 검이 붉게 빛나고 있지 않았다면 플란츠는 검을 뽑아 들 생각도 하지 않고 느긋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 키잉······.
낮은 울림과 함께 플란츠의 검이 둘로 나뉘었다.
그와 함께 키리에가 히나를 가운데 둔 채 플란츠와 서로 등을 돌리고 섰다.
히나는 둘의 사이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변을 살폈다. 싸움을 못한다 뿐이지, 이런 일을 앞두고 귀걸이를 통해 키리에에게 섣부르게 말을 걸거나 키리에와 플란츠의 움직임에 방해를 줄 생각은 없었다. 때문에 키리에의 등 뒤에 서 있던 숱한 경험을 살려 최선을 다해 얌전히 있기로 한 터였다.
오래지 않아, 키리에가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저들이 대사막의 늑대입니까."
"아니. 조약돌 가진 일반 기사로 보이는데."
플란츠는 제온에 속한 대사막의 늑대를 보았으나 키리에는 아니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대사막 전사들의 특유의 기운으로 그들을 구분하는 칼리안과 달리 좋은 머리를 썼다. 대사막에서 태어난 이들의 사소한 외모 특징들을 적당히 외워두었다는 소리다. 이를테면 대륙의 사람들보다 속눈썹이 조금 더 두껍다던지, 모래 위를 걷는 버릇이 미처 다 지워지지 않은 특유의 걸음걸이라던지 하는 것들 말이다.
"마법사가 어딘가에서 사일런트 막을 펼치고 있습니다. 저들의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레이스 경에게 주변 경계를 부탁했으니 곧 찾아내어 없앨 겁니다."
"알았어."
히나와 플란츠가 보이는 곳에서 레이첼과 이야기중이던 키리에의 귀에 낯선 이들의 발소리가 들린 것은 조금 전이었다. 통신 팔찌로 히나에게 이야기를 전해 곧바로 자리를 피하도록 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자칫 이 쪽에서 저들의 접근을 눈치 챈 것을 들키면 대치 없이 달려들까 우려된 까닭이었다.
"소리가 나가지 않으면 체이스 세자 저하의 기사들도 눈치채지 못할 텐데 어떻게 할까요. 외부에 알리실 겁니까."
"아니. 알리지 마."
왕궁에 있는 체이스의 기사들은 중요한 병력이다. 마법사가 있다면, 만에 하나 이 일에 끼어들었다 개죽음 당하기 쉽상이다. 어차피 기사들이 있는 곳과 후원은 별관 건물로 막혀 보이지 않으니 차라리 모르는 채로 두는 것이 낫다 판단했다.
사실 판단이고 뭐고 다 핑계일지도 모른다. 무슨 이유를 덧붙이든 이곳에서 세크리티아의 기사들이 죽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체이스와 연결된 통신 팔찌를 쓰는 것은 잠시 미뤄뒀다.
"알겠습니다."
플란츠의 지시를 들을 필요는 없는 키리에였으니, 지금의 대답은 복종의 의미라 하기보다는 동의의 뜻이라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무튼 키리에는 외부에 소식을 알리지 않는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살기를 갈무리했다. 대강의 이유를 키리에 역시 짐작했으니까.
"저들은 죽여도 괜찮습니까."
"괜찮아."
별관의 후원으로 들어와 암기를 먼저 보낸 기사들.
그들을 죽인다 하여 문제 될 것은, 당연히 없다. 오늘 아침 칼리안의 손에 명을 달리한 문 손잡이처럼.
"알겠습니다. 최대한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겠습니다."
저 많은 수의 기사들이 사방에서 짓쳐드는 공격을 둘이 함께 막으려면 둘의 실력이 비슷하거나 한 명이 그 누구보다 강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수많은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플란츠가 먼저 죽든 히나가 먼저 죽든 하게 될 뿐이니, 차라리 앞서나가 검을 먼저 휘둘러가며 이 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낫다.
"가능한 이곳에 계십시오."
"알았어."
히나를 혼자 두지 말라는 의미가 포함된 말에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렇듯 몇 마디 말이 오갔으나 기실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다. 고작해야 후원을 둘러싼 이들이 다섯 걸음 가량을 다가오는 정도였을 뿐이다.
- 타앗!
대화가 끝남과 동시에 키리에가 몸을 날렸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다시 한 번 가느다란 것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플란츠가 짧은 호흡을 내며 검을 뻗었다.
둘의 말을 적당히 들었다면 키리에가 굳이 암기에 대한 주의를 주지 않은 것도 알았을 텐데.
- 타다다당!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것을 모르고 왜 헛수고를 하는지.
교차한 두 개의 검을 빠르게 내뻗어 가느다란 암기를 쳐낸 플란츠가 잠시 뒤를 살폈다. 그리고 조금도 겁먹지 않은 얼굴로 언제든지 치유력을 쓸 준비를 하고 있는 히나를 확인하고 다시 앞을 봤다.
키리에가 발을 내딛었다.
묵빛의 검이 어둠을 머금는다.
똑같은 세크리티아의 기사라 하나 그들은 그들의 왕을 잘못 골랐다. 잘못 고른 왕의 길을 함께 걸었다.
- 촤악!
그것은 결국 그들 모두의 잘못이다.
달빛에 번뜩이던 기사의 검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빠르게 몸을 돌린 키리에가 자신을 향해 떨어져내리는 네 개의 검으로부터 몸을 뺐다. 그리고 지체없이 검을 내뻗었다. 심장을 가른다.
- 카아앙!
날붙이가 서로 맞닿는 소리가 울렸다. 키리에의 것은 아니었다. 키리에를 노리던 두 기사의 검이 서로 얽혔다. 그 사이로 스미듯 들어선 키리에의 검이 두 번을 움직였다. 두 명의 목숨이 바닥을 굴렀다.
키리에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유난히 큰 키의 키리에가 든 검이 다음 기사의 목을 가르는 동안, 플란츠는 키리에에게서 벗어나 자신에게 달려오던 기사의 검을 오른쪽 검으로 막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검을 들어 놈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 울컥!
여전히 생경하기 이를데 없는 감각에 뒤이어 앞에 선 이의 가슴팍에서 검붉은 핏줄기가 새어나왔다. 플란츠는 그것에 눈을 두지 않고 함께 달려온 또 한 명의 검을 막아냈다.
교차한 검으로 놈의 검을 힘주어 올려친 뒤 다리를 뻗어 놈을 걷어찼다. 그리고 그 사이 하나로 합친 검을 휘둘러 어깨부터 허리까지 깊고 긴 상처를 만들었다. 기사의 숨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것이 보인다.
흘러나온 핏물이 플란츠와 히나의 신발 바닥을 적셨다.
히나에게 눈이라도 감고 있으라 말해야 하나. 플란츠는 순간 떠오른 고민을 접었다.
남매가 어디에서 살다 왔는지 이제는 안다. 히나 역시 키리에와 같은 곳에서 생을 버텼다. 그러니 싸울 시간 낭비해 히나를 걱정하다간 히나에게 또 혼날 것이 뻔하다.
- 카가강! 카앙!
다시 한 놈, 플란츠 쪽으로 달려들던 놈이 서둘러 발을 멈추고 검을 들어올렸다. 어느새 날듯이 다가온 키리에의 검을 막아야 했던 탓이다.
튕겨나온 검을 회수한 키리에가 몸을 틀며 공격을 이어나갔다. 바람을 가르는 듯한 빠른 검을 마주한 기사가 잠시 휘청였으나 곧 중심을 되찾고 다시 앞을 봤다.
없다.
사라졌다.
그리고.
- ······ 콰직!
순간적으로 눈 앞에서 사라진 키리에의 발소리를 대신한 섬뜩한 소리가 기사의 머릿속을 울렸다. 자신의 허리를 가로지르며 관통한 검을 잠시 바라보던 기사의 몸이 무너지듯 바닥을 뒹군다. 기사의 옆으로 빠져나간 뒤 허리를 깊숙이 꿰뚫은 키리에가 어두운 검을 다잡으며 다시 몸을 날렸다.
칼리안의 기사가 데블란의 기사 둘을 향해 쉼없이 달려든다. 붉은 기운 가득한 두 개의 검이 키리에의 앞을 막아섰다.
오러. 그래, 오러.
키리에가 웃었다.
그들의 것과 비슷하지만 완벽히 다른 붉은 오러를, 키리에만큼 많이 상대해 본 이가 있을까.
- 카아앙! 카가강!
- 촤아악!
오러가 담긴 검이라 하나 그 검을 손에 쥔 이는 단순한 기사인 탓에.
두어 번을 버티던 기사 한 명이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 기사의 시신을 밟고 또 한 명의 기사가 키리에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 손에는 방패를, 또 한 손에는 붉은 기운이 뭉클거리는 검을 든 채였다.
- 카앙!
묵빛의 검이 은빛의 방패에 부딪혀 튀어올랐다. 방패에서 비산한 불티에 검고 푸른 키리에의 두 눈이 잠시 비췄다 사라졌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빛으로 기사를 내려다본 키리에는 곧장 회수한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기사가 한 번 더 방패를 내밀었고, 날카로운 소리가 이어지며 키리에의 검이 한 번 더 튕겨나왔다.
키리에는 멈추지 않았다.
- 쌔애액!
지면을 박찬 키리에의 검이 기사를 향해 쇄도했다. 이번에도 역시 왼손에 든 방패로 키리에의 검을 막은 기사는 오른손의 검으로 심장을 겨눴다.
아니, 겨누려 했다.
- 콰직!
그 정도의 방패로는 키리에의 힘을, 별을 녹여 만든 검의 예리함을 세 번이나 막을 수는 없지 않나. 방패와 함께 심장이 꿰뚫린 기사의 몸이 허물어졌다.
- 카아앙! 카강!
- 카앙! 캉!
플란츠 쪽으로 달려가려는 기사들의 앞을 막아선 키리에의 검격이 오가는 사이, 또 한 명이 키리에의 범위를 빠져나가 플란츠를 향했다.
깜빡.
플란츠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올라왔다.
'그레이스 경이 늦는데.'
주변을 감싼 사일런트 막이 여전하다.
생각을 이어나가던 플란츠가 둘로 나뉘어진 시나스타의 손잡이 끝을 맞닿게 잡았다. 그리고 창과 비슷한 길이의 길다란 검의 형태가 된 시나스타를 한 바퀴 회전시키듯 휘둘렀다. 첫 검의 일격으로 상대의 검을 내리친 뒤 연이어 내리떨어지는 시나스타의 예리한 날이 상대의 목을 베어냈다.
남은 기사들은 이제 서른 명 남짓.
- 캉! 카앙! 카아앙!
- 카가강! 카앙!
키리에의 검이 끊임없이 기사의 수를 줄여나갔다.
시나스타의 청은빛과 묵빛이 달빛을 반사하고 머금어가며 또 하나의 심장을 꿰뚫었다.
레이첼은 돌아오지 않는다. 마법사의 공방이 오가는 소리도,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 해서 별관의 후원에 마법사의 공격이 오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기사들은 플란츠를 향해 적당히 공격을 보내오고 있으나 히나를 굳이 노리지는 않는다.
무슨 뜻일까.
그것을 고민하고 있을 때, 칼리안이 체이스와 함께 별관을 나서기 전에 플란츠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제가 계속 있을 것을 생각하고 인원을 나눠 둔 터라. 제가 빠지면 이곳이 위험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왕궁보다 공격에 노출되기 더 쉬운 린 후작의 저택에 에우리아와 아르센, 에일라를 보냈다. 이곳에서 칼리안이 빠지더라도 키리에와 레이첼이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무력이 약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칼리안이 없는 곳에 남게 될 이들 중 히나와 플란츠는 데블란이 참 좋아할 인질 후보가 아니던가.
'금방 돌아올 테니 설마 그 사이를 노릴까, 데블란이 그 정도로 밑바닥을 보일까 싶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불안하네요. 그래서 같이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을 했는데.'
'그냥 가.'
'······ 잠시라면,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알겠습니다.'
찰나의 순간, 생각이 물꼬를 튼다.
이곳의 위험을 분명 사전에 대비했다. 대비라 하기보다는 각오에 가까웠으나 어찌됐건 예상을 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바로 그대로 데블란이 기사를 보냈다.
- 카아앙!
- 카앙!
두 자루의 검이 동시에 양쪽으로 뻗어나가, 양쪽에서 달려드는 두 기사의 공격을 동시에 막았다.
"고개. 히나."
짧은 말을 들은 히나가 곧장 몸을 숙였다. 플란츠가 빠르게 몸을 회전시키며 두 검을 휘둘렀다. 피가 튀고, 기사 한 명의 시신이 바닥을 뒹굴었다. 뒤이어 두 번째 기사 역시 같은 모습으로 쓰러졌다.
- 너무, 조용해요. 마법사.
그렇게 두 기사가 쓰러진 잠시간의 틈을 타, 이제야 플란츠와 눈을 마주치게 된 히나가 빠르게 수어를 보냈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칼리안은 이곳에 없다.
마법사가 있으나 마법사의 공격이 없다. 그런데 이곳에 소란이 생기면, 칼리안이 온다.
'급한 일이 생긴다면 체이스 형님을 통해 부르십시오. 바로 오겠습니다.'
'알았으니까.'
'네.'
사일런트 막을 뚫고 통신용품을 이용해 연락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데블란이 모를까. 데블란은 이미 그보다 더한 것을 플란츠가 지녔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란츠가 당장 칼리안을 부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을 수 있다.
지금 왕궁 앞에서 칼리안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플란츠도 안다. 체이스가 가지치기의 희생자들을 불러들였으니 지금쯤이면 데블란을 한참 구석으로 몰아세우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칼리안이 그 자리를 벗어나면, 두 번 반복되지 못할 그 중요한 순간을 증명해 줄 객관적이고 지체높은 명확한 증인이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생기든 플란츠는 일단 칼리안을 부르지 않으리라고, 데블란이 계산을 했을 수 있다. 둘의 사이가 생각만큼 나쁘지 않다는 걸 드디어 눈치챘다면 가능하다.
"그래. 소란이 생기면 내 아우님이 오겠지."
이곳은, 조용하다.
소란하지 않은 곳으로는 칼리안이 가지 않는다.
"······ 하."
무언가를 깨달은 듯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와 함께 시선을 빠르게 옮겨가며 남은 기사의 수를 세었다. 열 여섯. 붉은 오러를 쓰는 기사의 수는 셋.
버틸 수 있나.
계산을 해보던 플란츠가 손을 움직여 체이스와 연결된 팔찌를 뺐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를 냈다.
"키리에. 히나 데리고 그레이스 경 찾아. 가능한 빠르게 린 후작 저택으로 갔으면 하는데."
말을 마친 플란츠가 히나 쪽으로 짧게 고개를 돌렸다.
- 마법사, 공격.
귀 밝은 칼리안의 기사는 혼잣말같은 작은 소리도 참 잘 듣는 까닭에, 플란츠의 말을 들은 키리에가 히나와 연결된 통신용품으로 대답을 전해왔다.
레이첼은 마법사의 공격을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마법사는 여기 공격 안 해. 데블란은 린 후작 저택을 공격할 셈이고. 우리쪽 마법사와 후궁님이 있으니까."
루이즈와 아리안느를 인질로 삼아 린 후작을 휘두르려 한 카이리스. 그것이 지금 데블란이 새로 완성하려는 그림이다.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이곳을 계속 조용하게만 유지하는 이유는 칼리안을 포함한 다른 이들의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함일 터였다. 플란츠가 통신용품으로 칼리안에게 사실을 알리든 말든 타인의 눈에 이 별관은 아무 일 없이 평온한 곳이어야 했다.
그렇게 별관을 조용히 둔 채로, 데블란은 누구를 움직이든 린 후작저를 공격할 계획인 것이다. 카이리스 혹은 앨런의 선제공격이 있든 말든 이제 상관 없다. 린 후작저로 자리를 옮긴 루이즈 그리고 루이즈와 함께 있는 마법사들을 확인한 데블란은 새 계획을 세웠으니까. 루이즈와 함께 있는 카이리스 마법사들이라는 사실 자체가 선제공격이 되게 만들 테니까.
칼리안이 말하길 데블란에게 분명 숨겨둔 마지막 패가 있으리라 했으니 제온 전원을 린 후작저로 보내든 숨겨둔 또 다른 무언가를 쓰든, 어떻게든 후작저를 카이리스의 손에서 '탈환'하려는 속셈이다. 그것이 겉으로는 탈환이겠으나 사실상 루이즈를 인질로 삼아 체이스와 칼리안을 무릎 꿇릴 생각일 터였다.
그렇게 린 후작저에 불꽃이 피어오르면 칼리안과 앨런은 그쪽으로 움직인다. 후작저를 점령한 배후에 칼리안이, 카이리스가 있다 몰아갈 분명한 명분을 준다. 그리고 칼리안을 부르지 않은 플란츠와 히나는 결국 데블란에게 붙들린다.
그렇게 히나는 데블란을 살리고, 플란츠의 목숨은 카이리스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좋은 값을 치르게 될 테니 데블란에게는 이득이다. 굳이 전쟁을 치르지 않더라도 귀족들과 체이스를 휘어잡을 명분 하나를 새로이 잡는 것이니까.
"길게 설명 못해."
어이없고 무모한 방법이지만 지금 데블란의 입장에서 그보다 더 효율적인 해결책은 없다. 말그대로 데블란은 지금 궁지에 몰린 뱀이 아닌가. 그것이 카이리스든 누구든 물어뜯을 준비는 충분한 것이다.
그러니 히나를 보내야 한다.
히나는 플란츠의 정혼자다. 데블란의 주장대로 무력이 오고갈 것이 분명한 곳에 왕세자의 정혼자를 둘 리가 없지 않은가. 데블란의 억지 주장을 막으려면 히나가 가야 했다. 안전하고 빠르게.
그리고 칼리안은 별관으로 와야 한다. 당장 말고, 지금 하고 있는 '증인' 역할을 모두 마친 이후에.
- 기사들은 제가 막겠습니다. 레이첼 경의 발소리는 이곳에서······.
- 말고.
히나가 귀걸이를 빼 플란츠의 손목에 댔다. 덕분에 키리에의 목소리가 플란츠의 머릿속을 울렸다. 양손에 검을 쥐고 있으니 그렇게 했다.
- 히나만 데리고. 레이첼 경이랑 같이 가라고. 팔찌 줄 테니까 도착하고 나서 체이스 왕세자에게 내용 전해. 가는 길에 하면 아우님 튀어나가니까 도착해서 해.
- 그것을 주시면 세자 저하는.
- 때 되면 내가 아우님 부를 테니까. 알아서.
이제 열 하나.
남은 열한 명의 기사를 본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쭉 끌어올렸다.
- 내 아우님 부르는 법은 내가 제일 잘 알아.
두 자루의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