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장. 뱀의 무덤(1)
하늘이 맑았다.
밤이 짙었고 별은 밝았다.
레이지안 린 후작의 사병들을 확인하고 지시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아리안느가 건물 밖으로 나갔다. 아리안느의 호위로는 에일라가 함께 나섰다. 카이리스의 사람이면서 세크리티아의 일에 개입한 것이 알려지더라도 문제 될 것이 가장 적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세크리티아의 병력을 가장 잘 알고 제대로 다룰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바로 에일라였다는 이유가 더 컸다.
그리고 에우리아는 저택에서 가장 높은 지붕 위에 올라 사방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비상 시 저택 전체를 지켜내는 것에는 아르센보다 에우리아의 마법이 효과적이니까.
"불편하시면 참지 말고 말씀하십시오. 다른 마법사와 자리를 바꾸겠습니다."
덕분에 아리안느가 에일라와 함께 돌아올 때까지 혼자 둘 수 없는 루이즈의 개인 경호는 잠시동안 아르센의 몫이 되었다.
꿈 속의 아르센이 무엇을 했는지 모두 보았던 루이즈에게 있어 그것은 결코 달가울 리 없을 일이다. 한 입도 대지 않은 채 다 식어버린 차가 그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지 않나.
그것을 느낀 아르센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찻잔을 보고 있다 말을 건넸다. 혹여 갑작스러운 말로 놀라게 하거나 자신의 말을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고 조용한 목소리를 냈다. 기회가 된다면 완벽한 세트 구성을 부탁할 생각으로 칼리안의 앞에 있던 멀쩡한 스푼을 소중히 챙겨 둔 미친놈이지만 지금같은 자리에서도 거리낌이 없을 만큼 앞 뒤 안 가리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이제껏 아무 말 없이 창 밖의 먼 하늘을 바라보던 루이즈는 놀라지 않았다. 창 밖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그대로 둔 루이즈의 대답이 조용한 방을 울렸다.
"내가 불편할 것이 있겠습니까."
"불편함이 없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악몽 몇 번 꾼 것을 두고 필요없는 원망을 내보내 무엇할까요. 괜찮습니다."
칼리안이고 체이스고 남 탓을 안 하는 것은 루이즈를 닮아서인가.
"세자는 그 일에 마땅한 이유가 있으리라 했고 칼리안 왕자는 그 일을 반복하지 않으리라 했고. 플란츠 왕세자는 그 일을 책임지려 하고 그대는 그 일을 경계하니, 이제와 내가 그 일을 꺼리고 피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것이 한낱 꿈 속의 일이라 한들. 과연 나라면 두 아들의 목숨을 직접 끊어낸 이를 앞에 두고서 저런 말을 할 수 있을지. 그것을 대단히 이성적이다 해야할지 아니면 대단히 미련하다 해야할지.
미련한 사람 치고 제 상처 제대로 돌보는 사람 없다는 스승님 말씀을 잠시 떠올려보던 아르센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대신 루이즈의 평온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사실 전하께서는 좋은 국왕이기도 하지만 참 좋은 남편이기도 합니다. 물론 나에게는 아닙니다만."
"······ 진정으로 하시는 말씀인 줄 알고 놀랄 뻔했습니다."
"진정으로 하는 말은 맞습니다. 전하는 내가 후궁이라 하여 단 한 번도 낮춰 대하지 않았고, 왕비님께서 떠나신 뒤에는 왕비의 예우로 나를 대해주며 어디를 가든 나와 동행했습니다. 같은 사람들 앞에서 뿐 아니라 엘프들을, 그들의 대장로를 만날 때에도 변함이 없었어요. 그런 모습에 나조차도 속을 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다른 이들에게 있어 전하만큼 훌륭한 사람은 없다 여겨질 겁니다."
하마터면 기막힌 표정을 지을 뻔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 보여지는 데블란이 그렇다는 말임을 빠르게 알아들어 다행이었다.
"눈 앞에서 아내가 독을 마셔도 범인부터 만들어내는 이를 곁에 두고 이제껏 살아온 사람인데, 짓지 않은 죄까지 끌어안은 이들을 탓할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에 대해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아르센이 침묵을 지켰다.
밤하늘을 바라보던 루이즈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맑은 여름날의 하늘을 담은 듯한 빛의 눈으로 아르센을 응시했다.
"마법사의 신의는 변치 않는다 하던데. 맞습니까."
"누군가를 믿고 진심으로 따르겠노라 마음을 먹는 것이 어려울 뿐, 한 번 결정하면 좀처럼 변하질 않는 이들이 마법사입니다."
"그대는 그렇다면 칼리안 왕자를 믿고 따르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좀 많이 무서워해서 그렇지 믿고 따르고 있기는 하다. 믿고 따르다 못해 아예 자처해서 칼리안 따까리 노릇을 하고 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으려니, 아르센을 가만히 지켜보던 루이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하께서 지금 저리 아픈 것은 나의 소행입니다."
"······ 그렇습니까."
"하마터면 중간에 그만 둘 뻔 하였지만."
칼리안이나 플란츠 모두 그에 대해서까지 아르센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굳이 그것이 루이즈의 독 때문이라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꿈을 꾸기 전, 그리고 전하께서 나와 세자에 대한 의심을 굳히기 조금 전. 나는 나 하나의 복수심에 전하의 수면향에 독을 넣어오다 나 역시 중독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여 내가 전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지는 않을까, 그리하여 결국 전하의 곁에 세자 홀로 남겨두고 생을 마치게 되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에 내가 해오던 일을 문득 주저하게 되었던 무렵에 엘프들의 대장로를 만났습니다. 브리지트 숲에 거주하는 엘프들에 대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요."
"네. 전해들어 알고 있습니다."
아르센이 다른 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고 루이즈의 말이 이어졌다.
"그 날, 꿈에서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악몽이었어요. 내가 경험한 적 없는 나의 마지막을,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눈으로 들여다보듯이······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저 보였을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그보다 더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일을 나는 겪어본 적 없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듯 말을 멈춘 루이즈가 말을 이었다.
"그 이후로 시작된 또 다른 꿈 속에서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들과 지워져 사라진 과거의 일들을 마주하게 되었고, 그래서 나는 수면향에 계속하여 독을 넣었습니다. 그 날의 악몽을 막으려면 이 나라의 왕은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루이즈가 다시 먼 하늘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리고 오래된 기억을 되돌려보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잘못을 저지른 죄인은 저 왕궁 안에 있는 한 명, 데블란 뿐입니다. 죽어야 할 이도, 벌을 받을 이도 단 한 명, 데블란 뿐입니다. 그대가 아니라. 신경을 쓰는 듯 보여 그 말을 해주려 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아닙니다. 감사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대와 따로이 이야기를 할 일이 다시 있을까 하여. 혹여 한 가지만 부탁을 해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다 식은 차에서 풍겨오는 단 향이 짙었다.
그와 반대로 루이즈는 쓴 향이 맴도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아르센을 쳐다봤다.
"그곳에 홀로 머물게 된 내 아이를, 꼭 지켜줬으면 좋겠습니다. 이 생의 나는 할 수 없는 일이라서."
그 말을 들은 아르센이 싱긋 웃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곧 아르센의 손 끝에 푸른 냉기가 모여들었다.
그와 함께 루이즈의 주변에 두터운 실드가 단단히 만들어졌다.
"게다가 이번에는, 제 왕이 되실 분의 모친도 제가 잘 지켜드릴 생각입니다."
마치 그 대답의 끝을 잇는 것처럼, 밤이 짙은 만큼 밝아진 빛이 방 안을 밝게 비추다 사라졌다.
어두운 밤을 가르는 보라색 빛줄기.
에우리아의 번개였다.
* * *
칼리안의 말은 데블란과 체이스만 들었다.
주변에 있던 그 누구도 칼리안의 말을 듣지 못했다. 물론 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는 없었을 테지만.
데블란은 살아남은 아이라는 짧은 설명만으로도 상황을 이해했다.
"슬픈 일이구나."
그리고 칼리안은 무엇이 슬프다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굳이 그 뜻을 물어보고 궤변을 들어 줄 이유는 이제 없었다.
가지치기의 흔적이 남은 것이 슬프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하나 뿐인 아들이 진심으로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내치려 하는 것이 슬프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 아이를 동정해서 한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를 두고 '살아남았다' 하는 것이 아이의 가족이 모두 죽고 없다는 의미임을 알아들었을 텐데도.
"이 마법은 거두고, 아이를 재워주려무나."
데블란을 흘끗 바라본 체이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일런트 막이 사라졌다. 그리고 테일란은, 칼리안의 마법으로 잠에 빠져든 아이를 안아들고 데블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외면하신다 하여 있던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전하께서 제 손을 빌어 무수히 쳐낸 그 많은 목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곧 테일란의 입에서 수많은 가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저 사라진 가문을 조용히 읊어내려갈 뿐이었으나 테일란의 말은 한참동안, 정말 한참동안 이어졌다.
"조나단 케이혼."
아이의 아버지, 케이혼 백작의 이름이 가장 마지막에 불렸다.
작은 언덕 하나를 넘으면 나오는 친척의 집.
아이는 그 날 그 집으로 가 하룻밤을 보냈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집에 있는 또래 남매와 밤새도록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고 베개 싸움을 하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날 밤, 아이의 집에 큰 불이 났다.
모든 것이 타올랐다. 집도 재산도 사람들도 모두 다 불에 타 사라졌다. 아무도 도망치지 못했다.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르겠으나 오로지 아이 하나만 살아남았다.
아이의 친척은 큰 불의 원인을 알았다. 저택에서 도망친 이들이 없던 것이 아니라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까닭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내치지 않았다. 아이를 맡아주려던 하룻밤은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고, 그렇게 어느새 여섯 주가 지나갔다.
큰 불 속에서 작은 아이 한 명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음을, 그들의 친척 집에 아이 한 명이 늘었음을 인근의 모두가 알았다. 아는 것은 소문이 되고 다시 퍼져나가 수도 세크레타의 왕궁에 가 닿았다.
그 여섯 주가 지나간 어느 날에, 아이가 사라졌다.
아이의 친척은 그 원인이 무엇인지도 잘 알았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것을 퍼뜨리지 못했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케이혼 백작가를 잘 이끌어나가는 것의 대가는 그 스스로의 목숨이었다.
"제 누이를 죽이고 제 누이의 남편을 죽이고, 제 누이의 다른 아이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백작위를 주었습니다. 그것이 전하께서 이 아이, 제 조카에게 저지른 일입니다."
절반의 용기와 절반의 두려움.
절반의 분노와 절반의 죄책감.
아이를 내치지는 않았으나 데블란의 잘못을 입 밖에 내지도 못했던 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것이 얼마나 큰 용기인지 모를 리 없을 이들이 움직였다.
"저는 작년에 의문사한 리버티 남작의 친우입니다."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전하의 잘못입니다. 저는 램스 백작님의 하인이었던 사람입니다."
"저는 인다르 지방의 남작입니다. 저 역시 전하께서 한 일을 알고 있습니다."
지워져 사라진 이들을 기억하고, 앨런과 함께 찾아온 테일란의 부탁에 결국 고개를 끄덕인 이들이 하나 둘 앞으로 나섰다.
"전하께서 13년 전에······."
"전하께서,"
다른 한 명이, 그리고 또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모두가 똑같은 용기와 똑같은 죄책감을 가지고 앞으로 나서 데블란을 바라봤다.
"어찌 전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모른다 하십니까. 제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 다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자와 후작 영애의 보호 아래 아이가 잘 지내고 있다 전해주며 자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부탁을 전해오던 대륙 최고의 검사를 뒤로 한 채로, 아이의 친척은 피를 토하듯 울분을 터뜨렸다.
"전하."
담담한 목소리의 레이지안 린 후작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데블란이 레이지안을 바라봤고 레이지안은 여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 레이지안 린은, 세자 저하와 저들의 말을 믿겠습니다. 공정한 조사를 할 테니 전하께서는 부디 왕궁에 머무르며 기다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데블란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처음으로, 그 얼굴에 노기가 들어앉았다.
"몇 마디 말에 흔들리는 사람을 이제껏 후작위에 올려두었구나. 이것 역시 체이스, 네 짓이더냐. 그렇게까지 하여 나의 왕관을 가지고자 욕심을 내었느냐."
"전하!"
주변은 여전히 조용했고 데블란의 짧은 말은 모두에게 들렸다. 그것 역시 만들어진 노기임을 알아 본 테일란이 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높였다.
그때, 먼 곳의 어두운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고 그것을 본 데블란이 입을 열었다.
"······ 그래서."
만들어진 분노, 그리고 잘 지어낸 슬픔을 눈에 담고 있던 데블란이 긴 한숨을 쉬었다.
"다른 나라의 왕자까지 끌어들여 나를 내치려 하였느냐. 타국의 세력이 내 나라에서 무력을 사용하려 한 정황을 확인하였다. 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가 하였는데, 세자. 너의 짓이었구나."
칼리안의 시선이 그곳에 가 닿았을 때.
폐부 한 곳을 깊숙이 찌르는 듯한 날 선 살기가 왕궁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그저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았더냐."
플란츠의 살기.
칼리안이 웃음소리를 냈다.
"데블란······ 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