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장. 나락으로, 당신을(6)
세크리티아에는 테일란이 있다.
에우리아가 있고 아르센도 있다. 무엇보다, 칼리안이 있다. 지금 당장 누군가로부터의 공격이 있다 해도 절대 쉽게 꺾이지는 않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그 말을 수십 번 쯤 되뇌며 곧바로 세크리티아로 되돌아가려는 발을 붙들었다. 똑같은 실수를 또 할 수는 없다고 마음을 다잡은 앨런이 입을 열었다.
"아니라면, 누구입니까."
"이번에 사라진 건 아델리아 경이네."
마찬가지로 걱정 가득한 눈빛을 애써 접어 넣은 엘린느가 말을 이었다.
"그대가 말한 지나라는 마법사는 작년에 이미 종적을 감췄던 사람이야. 이번에 내가 말한 이가 아니네. 아델리아, 본명은 아이젠 디나한. 7서클 마법사."
아델리아. 그리고 루벤.
그 두 명이 앨런이 알고 있던, 그리고 세상에 알려진 다른 두 대마법사의 이름이었다.
상황이 바삐 돌아갔으니 에우리아 역시 간단한 것만 설명을 했다. 리베른에서 알고 지낸 지나라는 이름의 여자 마법사. 검은 조약돌의 힘으로 이중 속성 마법을 사용했다고, 그렇게만 이야기를 했다. 사실 그것이 에우리아가 아는 전부이기도 했다.
그리고 앨런은 엘린느에게 도망친 이가 몇 서클의 마법사인지 묻지 않았다. 7서클의 마법사 두 명, 그리고 다른 고위 서클의 마법사들을 지켜봐달라는 말을 했었으니 당연히 지나가 이번에 리베른에서 도망친 이였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아델리아는 계속 동쪽 마탑에만 머물렀으니 아마 서로 본 적 없을 거야."
"다른 두 명 모두 마주친 적이 없었지요."
인간이지만 고작 3서클 정도만 넘어서도 인간 외적인 힘을 지니게 되는 이들이 바로 마법사다. 고 서클의 마법사는 한 명 한 명이 각국의 전력을 월등히 높여 줄 수단이 된다.
서클 수 자체를 늘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던 앨런같은 마법사는 어떻게든 자신을 불러오려는 각국의 손길을 크게 꺼려하지 않았다. 얼굴과 이름을 드러내고 바쁘게 살았다. 반대로 서클 수를 늘리고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9서클의 벽을 깨어보는 것이 목표인 이들은 그런 손길을 원치 않았다. 어떻게든 세상과 떨어져 마법을 연구하고 벽을 넘어서기를 갈망했다. 다른 두 명의 대마법사는 그런 성향의 이들이었다.
때문에 리베른에서는 자국에 거주하는 두 대마법사의 정체를 감췄다. 자신들을 추적할 수 있을 과거 행적을 가능한 없애주고, 새로운 이름을 주고, 본인이 만족할 때까지 머무를 수 있는 수련 공간을 제공했다. 그 덕에 앨런은 리베른에서 10년을 있었어도 그들과 안면을 트기는 커녕 정체를 가늠해 볼 만한 본명조차 알 수 없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뵈었는데 여유로운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어야 하겠습니다."
"혹 아델리아가, 그대가 말했던 제온이라는 세력과 연관이 된 것인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세크리티아의 그 뱀 같은 작자와 연관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기를······ 바랍니다."
앨런이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주물렀다.
"미안하네. 그대가 그렇게 경고를 해주었는데."
"마법사가 마음만 먹으면 누군들 못 속이겠습니까. 리베른이나 전하의 잘못이 아니니 그리 여기지 마시지요."
"······ 그래."
"경비를 강화하십시오. 그 마법사가 제온과 연관되어 있다면 리베른의 마법사들이 피해 없이 대처하기 어려울 터이니."
"그리하겠네."
이렇게 말한 뒤 짧은 시간동안 생각을 이어나가던 앨런이 입을 열었다.
"서쪽 마탑에 늘러붙은 다른 한 놈을 만나보고 싶은데 가능할는지요."
루벤.
그나마 알려진 내용대로라면 이제 70세를 바라보고 있다는 또 한 명의 대마법사를 말함이다.
앨런의 말이 의외였는지 엘린느가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
"곧바로 돌아가겠노라 할 줄 알았더니."
"걱정이 된다 하여 필요한 것을 또 놓치고 지나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급한 일이 생긴다면 연락이 올 터이니 우선 그 작자를 만나봐야 하겠습니다. 한 놈이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다른 한 놈 마음도 들썩거릴 것이 분명하니."
"지금 바로 보겠다는 말일 테지."
"마법사가 밤낮을 가리겠습니까."
잠시 생각해보던 엘린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내하지."
곧 엘린느가 먼저 뒤로 돌아서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통이 넓은 하얀 바지자락 끝에 풀잎이 스치는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로닐의 이름을 눈으로 쓸어내리듯 담은 앨런이 그 뒤를 따랐다.
* * *
편히 쉬라 했으니까.
"므에옹! 애오옹!"
"니아오옹!"
편히 쉬었다.
과거 그 날의 플란츠는 절대로 들어오지 않았을 곳. 그러니 그 때와 지금 모두를 더해보아도 무조건 처음 오게 되었음이 분명할 곳. 별관의 후원이었다.
"루시. 안네."
둘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하얗고 어두운 두 마리 고양이가 번갈아가며 대답을 했다.
루시는 하얀 털이 달린 빨간 망토같은 옷을 입었고, 안네는 분홍색 솜털이 보송보송한 작은 목도리를 둘렀다. 발칸의 마법사들이 챙겨 준 모양이다.
"애옹."
"냐옹, 니아옹."
다행한 것은 이 번에는 플란츠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고 눈을 깜빡여가며 대답을 해준다는 것. 다행이긴 한데 많이 아쉬운 것은 안네가 그 새 정말 많이 자랐다는 것.
그 사이 벌써 주먹 하나 정도의 크기는 커진 것 같은 안네가 더 커지고 더 밝아진 호박색 눈으로 플란츠를 살폈다. 그런 안네를 지나쳐 수정판 쪽으로 조금 더 다가오던 루시가 앞발 하나를 뻗었다. 그리고 수정판에 가져다 댔다.
분홍색 발바닥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모습에, 결국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안 보여. 루시."
"애옹, 애오옹."
"······ 알았어. 갈 테니까."
곧 루시가 발을 뗐다. 정확히는 똑같이 다가온 안네에게 자리를 비켜줬다. 이번에는 화면을 한가득 채우는 잿빛의 커다란 얼굴 때문에 플란츠가 다시 한 번을 웃었다.
얼른 돌아가 따뜻하고 보들보들한 배에 무릎을 내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한참동안 다른 말 없이 수정판 안의 고양이들을 지켜봤다.
- 자박, 자박.
그러다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체이스와 함께 왕궁의 정문 쪽으로 간 칼리안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고 화면 안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레릭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고 또 조금 시간이 지나갔을 때.
쑥, 하고 갑자기 크고 둥그런 청회색 눈이 루시와 안네 뒤에서 나타났다. 두 고양이로부터 수정판을 뺏는 대신 바닥에 무릎을 붙이고 얼굴을 내민 사람.
"플란츠, 왕세자, 저하."
얀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건지 욕을 하고 싶은 건지.
어쨌거나 평생을 가도 얀이 플란츠를 살갑게 대해 줄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칼리안 만큼이나 플란츠도 잘 알고 있었다.
"왜."
그래서 플란츠도 저런 반응에 대해 별다른 감정 없이 입을 열었다.
"우리 왕자님 살아계세요?"
그랬더니 얀이 참 불경한 질문을 했다.
화났나보다.
"살아 계시면 이렇게 저를 까먹고 안 찾으실 리가 없는데요. 아무리 기다려도 도무지 연락이 없으셔서요. 그래서 말인데 우리 왕자님 살아계시는 건 맞죠?"
아무튼 섬세하질 못해서 왕궁 쪽으로 연락 한 번을 안 했다.
하기사. 동생 놈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 전에 연락을 했다면 지금쯤 아마 저 새끼 코끼리가 여기에 찾아와 있었겠지만.
"숨은 쉬고 있어."
꽤 담담하게 꺼낸 대답에 칼리안이 살아있느냐 묻던 새끼 코끼리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숨만 쉬세요? 또 다치셨어요?"
오해를 준 것 같다.
오해는 아닌가.
"얼마나 다치셨는데요? 어떤 새······ 누가 우리 꽃같······,"
"다 나았어."
"괜찮으신 거예요?"
"괜찮아."
그 말도 안되는 수식어를 자른 플란츠가 시종 얀인지 공작 아들 시로이안인지 구분하기를 때려친 듯한 놈을 향해 빠르게 대답했다. 오랜만에 여유롭게 고양이들 보려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 네. 괜찮으신 것 알았으면 됐어요. 우리 왕자님한테 저 까먹으시면 안된다고 꼭 전해주세요."
"알았어."
칼리안이 오늘 얀을 얼마나 찾았는지 모를 두 사람이, 3년 쯤 지나 말라 부스러진 쿠키 조각처럼 퍼석하고 뻑뻑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주고 받으며 대화를 마쳤다.
짧은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에 안네는 잠이 들었고 루시가 안네 옆으로 가 몸을 말았다. 그 예쁜 모습을 다시 어느만큼 지켜보다 레릭에게 인사를 건넨 플란츠가 수정판을 껐다.
어느새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하늘이 새까맣다.
- 자박, 자박.
그 하늘에 무수한 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또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렸다.
수정판은 꺼져있었다.
그리고 왕세자가 있는 곳에 말 없이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꼽아본다면 왕세자의 형제, 혹은 같은 왕세자, 혹은.
"히나."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든 왕세자의 정혼자 정도일까.
히나를 혼자 두지는 않을 테니 분명 어디에선가 키리에가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플란츠는 꺼려하지 않고 옆의 빈 자리를 가리켜 보였다. 이게 얼마나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동인지, 히나는 절대로 모를 거다.
- 춥지 않으세요?
그 자리에 앉는 대신 아이스크림을 먼저 내려놓은 히나가 수어로 물었다.
"안 추워."
앨런이 주었던 파란 망토를 오늘도 걸쳐 입었다. 그 밤에 누군가의 피에 잔뜩 젖었던 망토였으나 다른 생각 없이 입었다. 피는 칼리안이 지워주었고, 지금은 추웠으니까.
똑같은 보온 마법이 걸린 하늘색 코트를 입은 히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조금 옆으로 옮긴 뒤 플란츠의 옆에 앉았다.
- 고양이 소리가, 들려서, 왔어요.
"······ 보고 싶으면."
- 괜찮아요. 잘 있는 것 알았으니, 됐어요.
곧 히나가 아이스크림을 가리켜보인 뒤 말했다.
- 먹던 거라서. 새로 하나, 가져다 드릴까요?
딸기 아이스크림.
루시와 안네를 봤을 때처럼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칼리안의 생일 때 감기에 걸렸다 했더니 아이스크림을 주던 히나가, 오늘은 추운지를 묻고는 아이스크림을 먹겠냐 묻는다. 아마 아이스크림을 따뜻한 홍차 쯤으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좋아한다고 말해줬던 그 딸기 아이스크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지금 당장 일어나 아이스크림 가지러 다녀오려는 히나를 말렸다.
"말고. 이따가."
- 네. 이따, 가져다 드릴게요. 같이, 먹어요.
"알았어."
이곳의 시종을 시키면 될 일임을 히나든 플란츠든 모르지 않았으나 히나는 그렇게 말했고 플란츠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건 값이 없나."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세상에 공짜 없는 것을 배웠으니까.
눈을 깜빡이며 플란츠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생각해보던 히나가 봄바람 같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으려다, 마음을 바꿨는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대신 저, 뭐 하나만, 가르쳐주세요.
"알았어."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알았다는 대답을 한다.
나중에 시간이 많이 생긴다면 그런 것은 꼭 꼼꼼하게 따져보라 알려줘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히나가 말했다.
- 멀리까지, 마력, 보내는 방법, 알고 싶어요.
"마력은 왜."
- 몸 속의 돌, 안 좋은 거죠? 협회장님이, 비슷한 얘기를, 하시는 걸, 들었어요.
니들렌이 이런저런 말 실수를 했던 것과 더불어 칼리안에게 숨겨야 할 이야기가 늘었다. 에우리아로 인해 히나가 그 조약돌에 대한 것을 알았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동생 놈은 그리 이성적이지 않을 테니까.
애써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를 보며 히나가 말을 이었다.
- 자상한 왕자님은, 제가, 위험한 곳에 가게, 두지 않으실, 테니까. 멀리서 보고, 돌을 없앨 수 있을지, 연습해 보려고요. 멀리서도, 치료를 할 수 있으면, 더 좋으니까요.
"마법 쓰는 걸 응용해서 원거리에서 치료를 하겠다는 소리인가."
- 네. 맞아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도 치료를 하고 돌을 없앨 수 있다는 것. 그게 얼마나 엄청난 소리인지, 히나는 알까.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히나의 생각이 실현될 가능성을 따져보려다 포기한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을 쓰는 것까지 알려 줄 수는 없지만 마력을 운용하고 확장시키는 방법이라면 플란츠도 알고 있었다.
쉽게 말해······.
'얍 하면, 슉 하고.'
아니.
이거 말고.
"알았어."
- 고맙습니다. 좋은, 왕세자님.
"······ 너는. 왜."
왜 나를 그렇게 부르는지 물어볼까.
마력 다루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이스크림 가져다 주는 값에 비해서는 조금 불평등한 거래인 것 같으니까.
그러니 그것 하나를 더 물어볼까, 하다가.
이번에도 그냥 집어넣은 플란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집어넣은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히나는 그냥 생긋, 웃기만 했다.
* * *
- 7서클 마법사 말씀이십니까.
- 그렇다고 합니다.
- 알겠습니다. 경계할게요.
- 조심하십시오. 노인네 하나만 만나보고 제가 곧 갈 터이니.
- 네. 스승님도 조심하시고요.
- 걱정 마시지요.
앨런과의 대화를 마친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굳은 표정을 가리기 위해서라 하기보다는 기대감에 웃었다.
'그래. 당신이 이대로 물러날 위인은 아니지.'
앨런은 그 사라진 마법사와 데블란의 연관성을 확답하기 어렵다 했으나 칼리안은 알 수 있었다. 늘 그렇듯이 그냥, 연관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엘프여서 그런가.
엘프들은 간혹 시간을 내다본다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인지 몰라도 언젠가부터 그런 확신이 들 때가 종종 있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형님."
곁에 있던 체이스가 물어왔고 칼리안은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아무 일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나중에 이야기 하겠다는 뜻이었다. 지금 체이스는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을 테니까.
"······ 그러니 후작. 모든 오해를 풀고 이만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레이지안 린이 있는 왕궁 앞에 데블란이 나왔다. 그 귀하신 몸을 이끌고 몸소 왕궁 밖으로 나왔다. 제 손으로 '보호'하고 있던 귀족들을 직접 이끌고서.
"그대들이 나의 보호를 원치 않는다 하여, 내가 이리 직접 배웅을 나왔으니."
계획이 어그러졌다.
그날 밤, 체이스는 데블란이 억류해 두었던 귀족들을 구출해 왕궁 밖으로 빼낼 생각이었다. 체이스가 귀족들을 먼저 돕는 형세를 취해 귀족들의 힘으로 옹립된 왕이라는 인식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체이스의 새들보다 데블란이 먼저 움직였다. 어둠을 틈탄 새들이 왕궁에 침투하기 직전에, 데블란은 자신이 본궁에 억류해두었던 귀족들을 꺼냈다. 그리고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던 레이지안 린 후작의 앞에 나타나더니 체이스를 불렀다.
지금 이곳에서 체이스를 완벽히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칼리안 뿐이었다. 무력만 필요했다면 레이지안 쪽에 테일란이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겠으나 '완벽히 객관적인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는' 입장으로서의 보호가 필요했다. 그래서 칼리안이 함께 나섰다. 데블란은 칼리안의 동석을 막지 않았다.
완벽히 객관적인 입장이어야 할 칼리안은 체이스가 궁지에 몰리더라도 직접 나서지 못할 테니까.
"헌데, 못 보던 얼굴들이 많이 있군. 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탓에 내가 세자를 불렀지. 직접 보고 묻고 싶은 것이 생겼기에."
이렇게 말한 데블란이 주변을 둘러봤다.
레이지안이나 그 사병들 말고, 이 일과 관련이 없으나 지금의 대단한 광경을 보기 위해 용기를 내어 나와있는 다른 여러 사람들 말고, 새들을 보고 있었다.
체이스가 담담한 눈으로 데블란을 쳐다봤다.
"말씀하십시오."
"저들은, 세자가 몰래 키워낸 병력인가. 아니면 후작의 또 다른 사병인가."
그들은 데블란이 만든 새들이었다.
데블란의 손에 붙들려 새장에 갇혀, 이제는 체이스를 따르기로 한 새들이었다.
그들을, 데블란은 외면했다.
"사병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수가 많으니. 허용되지 않은 또 다른 사병이라 한다면 후작의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고, 아니라면 세자의 설명이 있어야 할 텐데. 어느 쪽이더냐. 체이스."
노란 울새. 서베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여있던 세작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칼리안의 손 끝이 아주 천천히 움직여 길고 긴 호선을 그려냈다.
아.
아버지.
이 얼마나 당신다운 모습인지.
"저들은."
수 많은 새들을 제 품에 끌어안은 숲의 한 가운데. 그 고요한 정적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하께서 키워내고 부리던 세작들입니다."
체이스는 그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정체를 다른 것으로 포장하지 않았다.
"세작이라니. 그것이 무슨 말이더냐."
"그리고 세크리티아 왕실의 기사로 돌아올 사람들입니다."
"······ 병력을 키워낸 것이로구나. 네가."
그 누구도 웅성거리지 않았다.
데블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고 체이스의 목소리는 잠겨들지 않았다. 그것을 모두 듣기 위해서, 온 세크레타의 사람들이 모두 모인 듯한 이 많은 이들이 전부 침묵을 지켰다.
데블란의 마지막 말로 인해, 저들이 세작이었다는 말은 그 누구의 머릿속에도 남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칼리안은 끼어들지 않고 체이스의 모습을 지켜봤다.
"전하. 사람의 생에는 흔적이 남습니다."
체이스가 고요한 눈으로 데블란을 바라봤다.
"많은 것을 지웠다 여기셨겠으나, 모든 것이 지워지고 잊혀지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간 흔적은 그리 쉬이 지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부정하신다 하여 저들의 삶이 잊혀질 수는 없습니다."
데블란이 긴 한숨을 쉬었다.
그것이 마치, 반역을 저지르고도 부모를 탓하는 아들을 앞에 둔 이의 침통한 얼굴과도 같았다.
"또한 전하께서 지워낸 그 수 많은 목숨 역시, 흔적이 남았습니다. 모든 것을 부정하기 보다는, 똑바로 바라보고 이제라도 용서를 구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엄한 말을 하는구나. 네가. 체이스."
세자라는 말 대신 이름이 불린 것에 체이스가 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테일란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테일란이 움직인다.
데블란의 주변으로 다가 온 왕실의 기사단이 테일란으로부터 데블란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테일란은 데블란을 향해 걷지 않았다. 그를 향해 검을 뻗지 않았다. 아직은.
- 저벅, 저벅.
세상에서 가장 발이 무거워야 할 이의 걸음 소리가 군중들을 향했다. 그리고 그들 중 어느 한 곳에서 멈춰섰다. 수많은 군중들. 그들 중 가장 작고, 가장 어린, 누군가의 앞에 섰다.
그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테일란이 가만히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앞으로 이끌었다.
"······ 아."
차마 참아내지 못한 탄식, 혹은 안도.
그것이 칼리안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말 없이 그 아이를 지켜보던 데블란이 입을 열었다.
"누구인가, 저 아이는."
테일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체이스도 입을 다물었다.
작디 작은 그 어린 아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칼리안 쪽에서 흘러나왔다. 어느새 작은 사일런트 막이 펼쳐져 있었다.
"살아남은 아이입니다."
그 언젠가 자신은 구해내지 못했던.
지금은 살아있는 아이.
"나락으로, 당신을 인도해 줄."
가지치기의 생존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