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13화 (314/527)

제55장. 나락으로, 당신을(5)

옅은 황금빛 와인에서 포도의 단 향이 풍겼다.

드미레아 만나고 오던 길에 세크리티아로 끌려온 칼리안을 대신해, 의외로 세심한 플란츠가 챙겨 온 것이다. 이를테면 지난 언젠가 먹었던 세크리티아산 신 귤 한 알에 대한 값이었다.

칼리안은 본궁에 들어가 체이스를 지키고 서 있다 데블란과 함께 있던 플란츠를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그 길로 체이스와 플란츠 모두를 끌고 별관으로 왔다.

그 후에는, 밥을 먹었다.

카이리스 중북부에서 만들어지는 단 맛 강한 디저트 와인을 한껏 즐긴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레이지안 린 후작 쪽의 상황은 잠시 잊은 듯한 여유로운 태도였다.

"카이리스의 귀족 회의에서 아버지와의 대화를 공개하다니. 꽤 괜찮은 생각을 했구나."

"사실은 드미레아가 계속 왕궁을 찾고 있는 상태이긴 합니다. 왕실과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관계가 여전하다 알려야 할 것 같아서 따로 부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시오나 힐이라는 소드마스터가 호위기사들을 도와 힘을 보태주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으로는 부족하겠다 생각이 되어서요."

"그렇지. 자리를 비운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왕궁이 텅 빈 상황이 되었으니."

"네. 발칸의 수뇌들과 저, 플란츠 형님 저하까지 다 이곳에 와 있는데다 세자위까지 전례 없는 방법으로 정해졌으니까요."

칼리안의 말에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카이리스에는 칼리안이 없다.

아르센도 없고 앨런도 없다. 한 마디로, 르메인 목이 정말 간당간당하다는 소리다.

드미레아가 벌써 세 번이나 왕궁을 찾아와 르메인과 대화를 나누다 돌아갔다. 칼리안과의 거래 덕분에 제대로 쓰이고 있는 시오나는 틈이 날 때마다 아르피아 궁을 찾아와 르메인의 호위기사들을 보조해주고 있었다.

"란델 왕자 쪽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겠지만 브리센 쪽은 그렇지 않을 테고."

"아. 사실 그레이 브리센 후작도, 스스로는 다른 마음을 먹을 생각을 섣불리 가지지는 못할 테지만요."

"······ 그래. 네가 그자에게 무엇을 했는지 전해 들었었지. 그래도 네가 예전만큼 손을 쓰진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제가 요즘 잘 참습니다."

많이 착해진 칼리안이 헤실헤실 웃었다.

칼리안이 좋아한다던 돼지 등뼈 요리에 손을 대 보려다 그레이의 허리가 떠올라버린 플란츠가, 다진 닭가슴살과 길쭉하게 썰어낸 사과를 절인 양배추로 돌돌 말아 놓은 것 한 덩이를 대신 집어든 것은 못 본 척했다.

"네. 어쨌거나 주변에서 브리센 후작을 선동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요. 그래서 마침 회의가 있는 날이기에 일부러 회의 도중에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도록 하자고, 플란츠 형님 저하와 미리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지금 나눈 이야기처럼, 카이리스의 중앙 귀족 회의 도중에 수정판을 통해 데블란의 대화가 공개되도록 한 것은 칼리안과 플란츠가 사전에 함께 짠 계획이 맞다.

이 상황에 르메인의 안위에 문제가 생긴다면 '앨런을 등에 업은 칼리안과 동맹 상태인' 플란츠가 무사히 왕궁에 돌아와 왕위를 잇게 될 것이니, 란델이 다른 마음을 먹을 이유가 없었다. 얌전히 둔다면 플란츠가 알아서 세자위에서 내려올텐데 무엇하러 건드리겠는가.

다만 귀족들, 특히 그레이 브리센 쪽은 걱정이 되었다.

그레이가 칼리안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맞았으나 그 진짜 속내까지 알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이참에 르메인을 물리고 플란츠를 빠르게 왕위에 올려 브리센의 힘을 공고히 하려는 귀족들의 움직임이 없으리라 장담하기가 힘들었다.

"데블란이 이대로 물러날 리 없으니, 어차피 기어코 데블란을 만나러 가실 것이라면 차라리 데블란과 카이리스 귀족 모두에게 경고가 될 수 있도록 하려 했습니다. 전쟁 걱정에 카이리스가 술렁일 수는 있겠지만, 전하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낫겠다 싶어서요."

"잘 한 생각이다. 우선은 카이리스 국왕 전하의 힘을 자연스럽게 과시할 필요가 있으니."

데블란이 플란츠에게 손을 내밀도록 유도하고, 데블란의 속내를 알게 된 르메인이 당장 그 자리에서 발칸을 움직일 수 있을 상황을 잠깐 만들기로 했다. 왕궁이 텅 빈 것 처럼 보여도 발칸은 여전히 왕궁 안에 있음을 상기시켰다.

플란츠는 궁지에 몰린 데블란을 잘 움직였고 데블란은 생각대로 입을 열었다. 르메인 역시, 플란츠가 장담했던대로 화를 냈다. 거기까지는 사전에 계획한대로 돌아갔다. 거기까지는.

"네. 그런데."

말을 멈춘 칼리안이 물끄러미 플란츠를 쳐다봤다.

"다른 말을 더 하고 오셨네요. 플란츠 형님 저하께서. 그건 계획이 없었는데."

또 팔렸다.

바닷가에 갔던 날에는 상황 파악을 위해 팔렸고 이번에는 데블란이 서둘러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팔렸다. 물론 팔린 사람은 칼리안이고 판 사람은 플란츠다.

르메인이 앨런 마나실을 움직일 명목을 만들었다.

앨런 마나실을 언제든지 이곳에 불러올 수 있음을 데블란에게 보여줬다. 원하는대로 앨런을 이곳에 나타나게 해준다면, 앨런이 데블란을 먼저 공격하게 해준다면, 칼리안을 없애달라며 거래를 청했다.

플란츠의 그 말을 데블란은 받아들였다. 아니, 받아들일 뻔 했다.

조건으로 플란츠를 본궁에 억류해두고자 했으나 플란츠가 그것을 거절했고 칼리안이 건져왔으니 당장은 거래가 무산됐다 해야 할 일이다. 다만 거래 제안이 유효한 것은 맞으니 플란츠를 억류해두지 않고도 앨런을 불러들이는 쪽으로 데블란이 마음을 정한다면, 거래는 다시 진행 될 것이다.

"상황이 생각처럼 진행되었으니 플란츠 왕세자도 다른 것을 노려 볼만 했지. 마나실 경이 먼저 나서주기를 바란다면 아버지도 플란츠 왕세자의 손을 잡을 테고, 그렇게 해야 아버지의 마지막 패가 무엇인지 알게 될 테니 말이다. 무엇이 있는지는 알고 전면전을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

승산이고 나발이고 형님 동생 또 팔렸다고.

구운 베이컨 사이에서 안 몽글몽글한 양파 옆으로 치워내고 있는 저기 저 연두색 형님 저하가, 최선의 방법이라면서 나를 막 팔아먹었다고. 그건 왜 얘기 안하고 올리브나무 제일 꼭대기에 난 잎사귀 줄기같은 저 형님 편 드시냐고.

그 와인이 그렇게 입에 맞으시냐고.

형님이 와인 좋아하신다는 말은 내가 해준 거라고.

"······ 그건 그렇죠. 그런데 형님 와인 한 병에 너무 달라지신 것 아닙니까."

"향이 좋구나. 맛도 빠질 곳이 없고."

할 말 많은 얼굴로 양고기를 꼭꼭 씹어 삼키는 동생을 본 체이스가 잠깐 웃었다. 그리고는 향 좋은 와인을 잠시동안 입에 머금었다 삼켰다.

여기저기 팔려다니는 처량맞은 신세가 된 것이 억울하고 서럽기 그지없으나 어쩌겠나. 사실은 사실이니.

아무튼 돌아가면 얀한테 다 말할 거다.

내 등짝 좀 보라고 하면서 싹 다 말할 거다.

"그래서, 린 후작 쪽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계획을 조금 바꿨다. 분위기만 한 번 일으키고 흩어질까 했는데. 상황이 생각처럼 진행됐으니 나 역시 다른 것을 노려 봐야지."

"지금 억류 중인 귀족들부터 풀어달라 요구하고 있습니까."

"그래."

"그럼 그 뒤에는."

"새들 써서 귀족부터 꺼내는 게 낫지 않나. 오늘 중으로."

마지막 말은 칼리안이나 체이스가 아니었다.

칼리안과 체이스의 대화를 열심히 들으며 알아서 배를 다 채운 플란츠의 말이었고, 칼리안은 플란츠를 쳐다보며 배부른 얼굴을 했다.

"제가 참 뿌듯합니다. 이렇게 잘 배워가며 쑥쑥 크고 계시니."

"잘 먹고 또 짖지."

생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체이스를 대신해 답했다.

"체이스 형님의 힘으로 귀족들을 먼저 돕고, 그 후에 귀족들이 나서서 데블란을 끌어내려야 형님께서 왕위에 올랐을 때 귀족들이 대가를 입에 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린 후작의 도움을 먼저 받은 것은······."

"이번에는 국혼을 해야겠지. 아리안느가 싫다 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 볼 생각이다만."

"네. 린 후작가와 국혼이 진행된다면 다른 문제는 없을 겁니다. 후작의 힘을 등에 업었다는 말이 나올 수는 있겠으나 새들과 왕실 기사단, 그리고 마법사 협회를 중심으로 해서 발칸과 같은 새로운 군대를 만들게 되면 그런 말은 서서히 사라질 테니까요."

내 동생은 정혼은 했지만 국혼은 안했다.

그냥 오래오래 혼자 살았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몰라도 아무튼 안했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국혼하겠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니 새 키우는 놈도 국혼을 안했나보다.

'확실히, 나이가 많지는 않았나보군.'

그래도 서른을 넘기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다면 과거의 플란츠 역시 서른을 넘기기 전에 왕위에 오르고 전쟁을 냈다는 소리다.

돌아가면 르메인에게 몸에 좋은 음식이라도 챙겨 드시라 해야겠다고, 좀 별난 결론을 낸 플란츠가 말했다.

"내 아우님의 옛 형님이 여기에서 지내는 것이 썩 보기 좋지는 않을 텐데. 위험해도 본궁에 돌아가 있는 것이 낫지 않나."

"내가 타국 왕세자와 왕자의 보호 아래 몸을 숨겼다 보여질까 우려하는 겁니까."

"맞아."

"괜찮습니다."

이렇게 말한 뒤 웃어보인 체이스가 와인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젖혔다.

창 밖을 본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새들이나 좀 키우는 줄 알았더니."

지금 별관에는 키리에와 히나, 레이첼, 그리고 카이리스의 기사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정원이 조금 작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디에나 왕비의 별장과도 비슷한 크기의 별관이었으니, 그 크기에 비해서는 머무르는 인원이 적었다.

그러니 별관 앞에 빼곡하게 서서 본궁 쪽을 향해 도열해있는 저 수많은 기사들은 분명, 체이스의 기사들일 것이다.

"손 놓고 있지 말라고, 어느 버릇없던 왕자 한 명이 이야기를 해줘서. 덕분에 조금 빨리 움직였는데 이렇게 도움이 되는군요."

세크리티아 왕실의 기사들.

테일란의 관리 아래 있던 기사단 하나를 모조리 제 편으로 끌어들여 두었다. 데블란의 직속 기사단이나 또 하나의 왕실 기사단은 여전히 데블란의 아래 있지만, 왕궁 밖의 새들과 안에 있는 기사단을 합치면 전면전이 일어도 숫적으로 쉬이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내전이 일어도 해를 입지 않도록 내가 잘 보호할 테니, 걱정 말고 쉬면 됩니다. 플란츠 왕세자."

"잘 됐군."

타국 왕자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타국 왕세자와 왕자, 그리고 왕세자의 정혼자를 데블란으로부터 보호중인 체이스가 다시 자리로 와 앉았다. 그리고 마음에 꼭 드는 와인을 다시 즐기기 시작했다.

그래.

포도로 만든 술에서는 포도 향이 나야지.

* * *

- 그래서, 저는 언제쯤 나서면 되겠습니까?

- 그보다 스승님 지금 대체 어디 계십니까?

서클 하나를 늘리고 대륙 온 지역에서 체이스의 새들을 모아다 숨겨둔 뒤에 린 후작의 사병들을 내성 앞에 옮겨줬다. 그렇게 자신의 개입과 힘을 과시한 앨런 마나실이 사라진 것이다.

연회장에서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이제야 연락이 된 탓에, 칼리안의 목소리에도 반가움이 그득했다.

- 요즘 너무 새 아들만 챙긴 것 같아서 잠시 만나러 왔습니다.

- ······ 그 좋은 곳을 혼자 찾아가셨습니까.

'로닐 마나실'

흔들리는 필체가 고스란히 새겨진 묘비명을 내려다보던 앨런이 조금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우는 것 같기도 한 얼굴을 했다.

남모르게 왕궁에 들러 꽃을 가져와 이 곳에 온 것이 한밤이었는데, 어느새 아침이 되고 낮이 되고 칼리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세크리티아에 계속 있으면, 서클이 늘어난 김에 아무래도 왕궁 하나를 통째로 엎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이 아이도 보고 마음을 좀 다스릴까 해서 와보았지요.

-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저는 같은 일 겪지 않을 테니 제 걱정 마세요.

- 꼭 독을 먹고 피를 토하고 쓰러져야 같은 일이라 하겠습니까. 내새끼가 다른 놈이 보낸 칼에 다치고 말에 다치는 것도 결국 똑같은 일인 것을.

차라리 적당히 힘이 있었으면 얼마든지 화를 내고 복수라도 해줄 텐데 너무 강하여 그러질 못했다. 테일란의 말대로 가장 강한 이들은 발걸음도 가장 무거워야 하기 때문에.

그 때에도 그랬다.

아무것에도 화내지 못한 채로 이 땅에 머물렀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힘이 있어 힘을 억눌러야 하는 모순 속에 살았다.

- 체이스 형님께서 기사단을 불러놨습니다. 키리에도 날을 세우고 있고 전하께서도 화를 많이 내셨다 합니다. 안전하게 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저도 무르게 굴지 않을게요.

- 무르게 군 것은 아십니까.

- 네. 반성하고 있습니다.

- 그나마 알고는 있다 하니 다행입니다.

- 반성 많이 하고, 정신 잘 차리고 있을게요. 오셔서 마음껏 화내도 될 때 다시 부르겠습니다. 그때까지 인사 잘 나누고 계세요. 제 생각은 마시고요. 아버지 뺏겼다며 서운해 하겠습니다.

앨런이 웃었다.

-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곧 칼리안과 통신을 마친 앨런이 손에 들고 있던 꽃 한 송이를 내려놨다. 베로니카가 사오고 히나가 선물로 주었던 꽃. 투명한 붉은 빛의 꽃잎을 지닌 탓에 칼리안이 생각났던, 단 향이 나는 꽃. 카바니아였다.

태어난 날짜, 생이 저문 날짜.

아들의 이름 아래 마지막 날의 날짜가 적히는 것을 볼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여전히 그 날짜를 보는 것이 낯설고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 위에 꽃을 놓았다.

"베로니카가 사온 화분에서 그 꽃이 피었다더구나."

네 딸이 약을 만들겠다며 그 꽃을 샀다는 말.

베로니카가 네 뒤를 이어서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말. 알아서 꽃을 찾고 스스로 사올 만큼 많이 자랐다는 말. 그렇게 많이 자랐지만 그 꽃을 잘못 산 것처럼 아직은 미숙한 때가 있다는 말. 네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단 것은 못 챙겨왔지만 꽃에서는 단 향이 나니 이해해달라는 말.

그 꽃을 닮은 새 아들이 생겼다는 말.

"······ 어느새 시간이 흘러서. 꽃이 피었다더구나."

참 많은 말이 그 꽃 한송이에 담겨 함께 놓였다.

그 꽃 한 송이에 많은 말을 담은 탓에 다른 말을 더 하질 못했다. 그냥 물끄러미, 여전히 낯선 곳에 적힌 아들의 이름만 물끄러미 봤다.

그 후로 얼만큼의 시간을 보냈는지 몰랐다.

칼리안과 이야기를 나눈 것이 낮이었는데, 어느새 해가 기울고 저물어 노을이 졌다. 긴 그림자가 앨런의 꽃과 앨런의 많은 말 위에 다시 내려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더 지났을까.

붉은 석양을 대신해 푸른 어둠이 하늘에 스미기 시작했을 때. 그때까지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앨런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너무 오래 있었나보군."

이번에는 웃음이 반, 그리고 난처함이 반.

먼 곳에 여섯 필의 말이 끄는 화려한 마차 한 대가 보인 까닭에.

황금으로 장식된 새하얀 자개 마차를 뒤로 한 채로 누군가 홀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이대로 다시 세크리티아에 가버릴까 하던 앨런이 곧 다시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망갈 줄 알았더니."

"도망을 갈까 했는데, 받아먹은 것이 많아 그리 할 수가 있어야지요."

"보내 둔 것이 많아 다행이군. 하마터면 눈 앞에서 놓칠까 조마조마했는데."

밝은 금발. 짙은 분홍빛의 눈동자.

리베른의 국왕 엘린느였다.

"여기에 머리색 특이한 마법사 한 명이 왔다 하기에,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기다렸는데 영 오질 않더라니."

가볍게 말하고 있었으나, 엘린느는 로닐의 무덤 쪽을 보지 않고 있었다. 보지 못하고 있다 해야 맞을 것이다. 이제까지 앨런을 기다렸음에도 오질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어려운 발걸음을 했으리라.

"인사하시지요. 오랜만에."

때문에 앨런이 먼저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허락을 받은 뒤에야, 엘린느가 한 발을 뒤로 물리고 로닐의 무덤 쪽을 향해 묵념을 했다.

앨런만큼 할 말이 많았던지.

엘린느의 인사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엘린느가 앨런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다시 젊어졌는데. 나 만났던 그 때로 돌아가버렸으니, 이것을 부럽다 해야 하나."

"부러울 것이 있겠습니까. 오래도록 죽지 못하는 굴레를 쓴 것인데."

"그래도 그 마음을 먹어 다행이네. 별 탈 없이 일을 해결한 것 같으니."

이 말에 앨런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해결이라니.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말했지 않나. 이 쪽에서 도망간 마법사가 있다고. 그에 대해 별 일 없이 죽였다 하기에 그대가 처리를 한 줄 알았는데."

"제가 아니라 카이리스 마법사 협회장이 맞닥뜨리는 바람에, 협회장 손에서 명을 달리했습니다."

이번에는 엘린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자가 어떻게?"

도망친 마법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사실을 급히 전했다. 에우리아가 다행히 별 탈 없이 죽였다 했으나 꽤나 고전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후 엘린느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데블란을 만난 칼리안을 보게 되는 바람에 대화를 중단했었다.

그래. 그렇게나 급박히 돌아가는 상황으로 인해서.

"그대 쪽의 협회장은 5서클일텐데. 어떻게 7서클을 상대하나."

기본적인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

"······ 지나. 그런 이름이라 전해들었습니다. 아니었는지요."

다른 두 명의 7서클 마법사는 가명을 썼다.

그들의 진짜 이름을 앨런은 몰랐다.

심장에 스산한 바람이 이는 기분이 든다.

엘린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잘 보였다.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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