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11화 (312/527)

제55장. 나락으로, 당신을(3)

왕명을 따르는 기사들이 왕궁을 등지고 섰다.

주인을 따르는 새들이 왕궁을 마주보고 섰다.

누군가는 검을, 누군가는 활을, 누군가는 암기를 들었으나 결국 모두가 같다. 모두가 제 생을 바친 이를 위해 서로를 겨누고 있었다.

"노란 울새."

이름이 없다는 것.

다만 오로지 그 하나만이 달랐다.

대륙의 모든 나라, 그리고 대사막. 둥지를 튼 곳과 상관없이 부지런히 정보를 모아 주인에게 전하며 살았다. 누군가를 속이고 배신해가며 주인에게 충성했다. 주인의 명을 듣기 위해 살고 주인의 명을 지키기 위해 죽는 이들이었다.

'남길 말이 있다면 하거라. 내가 들을 테니.'

'없습니다, 저하.'

그러므로 이름이 없다는 그 하나를 제외한다면 왕을 따르는 기사와 주인을 따르는 새는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제온과 연관된 것으로 의심되어 날개를 접게 되었으나 남은 이들은 여전히 체이스의 충성스러운 새였다.

'둥지로 돌아가도록. 필요할 때 연락하겠다.'

그렇게 모인 이들이 왕궁 앞에 서 있었다.

데블란의 새들 말고, 오직 체이스의 말에만 복종할 체이스의 새들이 왕궁 앞에 섰다.

"노란 울새가 맞던가.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서베인 쳄버만이다."

그리고 이제 이곳에 모인 이들은 더 이상 이름 없는 새가 아니었다.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검을 들었다.

- 노란 새가 제 말을 전한다면 살려주시고, 전하지 않는다면 믿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노란 울새, 서베인.

에우리아의 뒤를 추적하지 말라 하였던 체이스의 명을 어기고 에우리아와 아르센의 뒤에 따라붙었던 이. 덕분에 체이스의 손에 명을 달리할 뻔했으나 칼리안의 한 마디 말과 편지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던 이였다.

기사대장이 조용히 등 뒤로 손을 넘겼다. 그리고 왕궁 쪽을 향해 손가락 하나를 뻗어보였다. 그러자 가장 말미에 서 있던 기사 한 명이 조용히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왕궁에 이 소식을 알리려는 것이다.

데블란이 소식을 접하기까지의 시간을 벌기 위해 기사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서베인.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잊었을 줄 알았더니."

"내가 할 말이 아닌가."

"새들이 여긴 무슨 일로 왔지?"

"내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

데블란이나 테일란은 간혹 기사 지망생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이들을 골라 세작으로 키워내곤 했다. 때문에 기사들과 적당한 친분을 지닌 새들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평생을 타국에서 살다 죽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얼굴이 알려진 세작들은 자국 내에서 활동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던 탓이다. 모든 새들에게 값비싼 변장 마법 도구를 제공하기엔 무리가 있었으니까.

서베인도 마찬가지였다.

에일라처럼, 서베인 역시 한때는 기사 지망생이었던 탓에 지금 내성을 수비하러 나온 기사단장과 안면이 있었다.

"새들의 머리가 나빠서, 제 이름 하나를 기억하느라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잊은 것이냐."

체이스를 두고 주인이라 하고 있으나 새들을 부리는 이는 결국 데블란이 아니던가. 그것을 두고 하는 말에 서베인이 웃었다.

"글쎄. 여기 모인 새들은 전부 마지막 모이를 준 분만 기억하는 중인데. 네 말대로 새들은 머리가 나쁘니까."

"반역을 노린다는 말을 잘도 포장해서 입에 담는구나."

"우리의 행동을 반역으로 포장한 것은 오히려 네가 아닌가. 저하의 사람들을 먼저 공격한 것은 너희들이다.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반역이라 하겠나. 오는 칼날을 막기 위해 칼을 드는 것은 반역이 아닌 방어다."

"아니. 반역이다. 반역자의 말로가 어떤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면, 더 늦기 전에 멈추거라."

"명을 어긴 것의 결과가 어떤지는 잘 알고 있지."

체이스를 배신해 보고 듣고 말하지 못하게 되었던 하얀 수리의 뒤를 이어 새로이 새들을 이끌게 된 노란 울새. 서베인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뭔가를 모르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군."

"무슨 소리냐."

"새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조차 모르고 있지 않느냐."

서베인의 손이 올라갔다.

힘있게 뻗어낸 손에서 대형을 갖추라는 수신호가 펼쳐졌다.

- 사사사삭!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림자를 밟는 소리가 일제히 울렸다. 어둠 속 여기저기서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속속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마법 등불을 든 레이지안의 사병들을 둘러쌌다.

소리는 내성의 안쪽에서도 울렸다.

어느새 내성의 기사들을 제압하고 성벽 위에 올라선 또 다른 새들의 화살이 기사들을 겨눴다.

그것을 본 기사단장의 얼굴이 굳었다.

서베인이 기사단장 쪽으로 한 발을 더 다가서며 말했다.

"왕궁에 소식을 전하려 했더냐. 왕궁 쪽에는 우리가 없을 줄 알았더냐. 시간이 필요한 것이 비단 너희들 뿐이었을 것 같더냐."

기사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들어가지."

대신, 기다렸다는 듯 레이지안이 입을 열었다.

레이지안을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인 테일란이 서베인을 향해 손짓했다. 그것을 본 서베인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준 뒤 왕궁이 있는 방향으로 한 발을 더 다가갔다. 복면 쓴 이들을 감싸듯 둘러싼 새들이 일제히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은 대화가 이어질 일도 없었다. 성벽 위에 이미 새들이 올랐다 해도, 왕궁의 기사단이 모두 제압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기사대장은 포기하지 않고 검을 들었다. 그리고 서베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 했다.

- 쉬이익!

짧은 파공음이 있었을 뿐이다.

바람이 한 번 일었고, 눈 앞에 검이 있었다.

어느새 복면을 벗은 테일란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 기사대장을 겨누고 있었다. 그제야 테일란을 알아 본 기사대장의 눈꼬리가 매섭게 변했다.

"······ 저하께서 정말 반역을."

"이것은 반역이 아니라."

기사대장의 목 쪽으로 검을 더 가까이 대어 말을 막은 테일란이 자신의 외날검을 뒤집어 잡았다.

"되찾는 것이다."

본래부터 이 나라의 왕은 체이스였으니까.

- 퍼억!

말을 마친 테일란이 기사대장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날 선 소리 대신 둔탁한 소리가 이어지고, 얇은 갑옷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던 기사대장이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그와 함께 서베인을 위시한 새들이 발을 박찼다.

테일란이 다시 움직인다.

칼날은, 조금도 번뜩이지 않았다.

* * *

- 후궁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연회는 중단되었다.

- 테일란 카스트린이 보이지 않습니다.

- 왕궁 안에 앨런 마나실을 포함한 카이리스의 일부 마법사들이 종적을 감췄습니다.

- 레이지안 린 후작이 내성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내성 밖에 소란이 일었다는 것을 이유로, 연회에 참석했던 귀족들은 잠시 왕궁에 머무르게 되었다. 안전을 핑계로 대었으나 정확히 말한다면 억류였다.

더 이상 별관까지 이동하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지 못할 카이리스의 3왕자 일행은 모두 왕궁의 별관으로 옮겨 머무르게 했다. 이 역시 왕궁 밖 사정으로부터의 타국 왕족 보호를 명목으로 했으나, 결국은 격리였다.

- 레이지안 린 후작이 왕궁 밖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의 앞에······ 세자 저하의 세작들이 있습니다. 세작들, 그리고 테일란 카스트린이 함께 있습니다.

데블란은 생각에 잠겼다.

책상 앞에 앉아 턱을 괴고 눈을 내리 뜬 채로 밤을 지샜다.

왕궁의 기사들이 모두 왕궁 앞으로 나섰다.

- 사망한 기사는 없습니다. 무력 충돌은 있었으나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불리하다.

오히려 먼저 공격을 가한 것은 데블란이었다.

- 왕궁 밖의 사정을 알려달라며 귀족들의 항의가 거셉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룻밤만에 귀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년을 넘게 침묵하던 이들이, 고작 하룻밤만에.

체이스는 더 이상 참지 않겠다 하였고 칼리안은 데블란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였다. 레이지안 린이 움직였고 새들이 모여들었다.

'앨런 마나실은 어디에 있느냐.'

'보이지 않습니다.'

데블란의 새들은 종적을 감췄다.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체이스의 새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을 이제야 알았다. 생각의 끝이 나질 않았다.

"왜 가만히 있는가. 먹지 않고."

"세자위에 올랐다 하여 예법을 잊지는 않았습니다."

생각 잇기를 잠시 멈춘 데블란이 입을 열었고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지 않을 이가 조용히 대답했다.

식사에 초대한 주인이 먼저 음식을 먹는 것.

그 이후 초대받은 이가 음식에 손을 대는 것. 언뜻 본다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나 그 유래는 결코 가볍지 않은 예법.

자리를 마련한 이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의심에서 기인한 예법이다. 사람을 초대해놓고 독을 준비하는 일이 빈번하여 생긴 관례였다.

"내가 그대를 초대하고 음식에 독을 넣었을까 이제와 걱정이 된 것인가. 지난 번에는 그렇게 서슴없이 차를 마시더니."

"주의를 받아 그렇습니다. 아무것이나 먹지 말라는."

"카이리스의 왕세자에게 주의를 줄 이가 누가 있을까."

"누가 있겠습니까."

노골적으로 데블란을 믿지 못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플란츠가 되묻듯 대답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나서지 않도록 그렇게나 반대하던 놈을 떠올리며 눈꼬리를 찌푸렸다.

그리 유추하기 어려운 답은 아니었던 탓에, 데블란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쪼록 내가 어제의 일로 그대에게 사과의 뜻을 전하는 자리가 아닌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껏 그대들의 음식과 차에 그 어떤 장난도 쳐두지 않았네. 신용의 뜻으로 보아줄 수 있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플란츠가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 어떤 것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다만, 꽃과 해산물은 입에 맞지 않아서."

그리고 이렇게만 이야기하며 식탁을 가리켜보였다.

객의 입맛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풍부한 해산물과 식용 꽃, 그리고 화려한 꽃장식이 눈에 띄었다.

"이런. 내가 그것은 몰랐군."

"괜찮습니다."

더 이상 무언가를 들기를 종용하는 것도 우스웠다. 게다가 어찌됐건 목적은 플란츠를 불러내 이야기하는 것이었지 정다운 식사를 이어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데블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인 물을 마셨다.

"그래. 사설이 길었군. 마음이 소란하니 할 말을 정리하지도 못하여서 그렇네. 이해하게."

"그렇습니까."

"왕궁 밖에는 나를 음해하는 이들이 모여있고, 왕궁 안에는 나를 없애려는 이들이 모여있고, 이런 깊은 덫을 어찌 빠져나갈까 고민을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더군. 그러다 알게 됐지. 결국 애가 타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내 아들이 나를 향해 칼을 드리우는데 그 마음이 어찌 소란하지 않을까."

"전하."

플란츠는 데블란을 쳐다봤다.

잠시 데블란을 응시하던 플란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브리센과 똑같은 말을 입에 담으시면 실망할 것 같습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다 구석에 몰리면 핏줄을 입에 담느냔 말이다.

"원하는 것을 말씀하시면, 듣겠습니다."

꽃도 싫어하고 해산물도 싫어하고 말 많은 것도 싫어하지만 같은 핏줄 앞세운 뻔한 가식을 가장 싫어하는 플란츠가 데블란의 말을 막았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전쟁입니다."

"무슨 이유로 그리 생각하는가."

"체이스 왕세자의 인질로 삼을 만한 후궁 루이즈님과 체이스 왕세자의 정혼자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체이스 왕세자는 칼리안 왕자가 보호 중이고 밖에서는 레이지안 린 후작이 사병을 끌어모으는 중인 것 같습니다."

데블란은 아무 말 없이 플란츠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체이스 왕세자의 새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전하께서 체이스 왕세자를 억류하고 있는 광경이니, 전하께서 떠올리실 수 있을 방법은 전쟁밖에 없습니다. 전쟁이 난다면 모든 상황이 역전될 겁니다. 그것도, 앨런 마나실의 선제 공격과 같은 좋은 명분이 있는 전쟁 말입니다. 안그렇습니까."

데블란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살 길을 묻는다면 알려주겠다 했지, 그대가. 나에게."

"그렇습니다."

"그것을 알려준다면 혼자 안전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돕겠네. 3왕자가 얌전히 탑으로 들어갈 리 없으니."

이 말 많은 사람이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칼리안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절대로 모르는 것이 있으리라고."

"모르는 것이라. 그것이 무엇인가."

"나는 내 동생을 배신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겁니다."

"······ 그러한가."

"그리고 또 하나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플란츠가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앞으로 내려놓았다. 데블란의 눈이 플란츠의 손에 들린 것을 향했다.

- 혼자 돌아간다는 말이나, 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혹시 내 아들들에 대한 소리인가.

데블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목소리가 이어졌다.

- 전쟁을 상대해 줄 생각은 없으나 그대 나라에 군대를 보내줄 수는 있네. 오로지 그대 한 명의 목숨을 위해서.

플란츠가 비딱한 웃음을 지었다.

부를 아빠는 칼리안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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