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09화 (310/527)

제55장. 나락으로, 당신을(1)

겉과 속이 다르다.

음악과 춤과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지고, 귀족들을 보는 국왕은 그들의 배신을 의심하며 날을 세우고, 그런 국왕을 보는 왕세자는 국왕의 틈을 찾아 잘라내려 하고. 밖에서는 국왕과 후작의 검이 서로를 위해 날을 드리우고 있다.

이렇게나 겉과 속이 서로 다른 이유로 소란한 그 한가운데에서 플란츠에게 긴 말을 건넸다. 그 뒤 잠에 빠진 듯한 모습으로 고요하게 앉아있던 칼리안이 술기운을 치워내듯 오랜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이상하네요."

"뭐가."

들불이 어떻고 보다 낮은 사람이 어떻고 해가며 알려준 것은, 대공이자 후작이며 고양이 잘 키우는 브리센의 가주인 동시에 발칸 부군단장이기도 한 플란츠 룬 카이리스에게도 득이 될 이야기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수식어 다 필요없을 '플란츠 루 룬 카이리스'가 되었을 때 잊지 말라 건네 준 이야기라 해야 맞을 터였다.

그리고 플란츠는 그것을 그냥 르메인이 한 달에 한 번 유언장 고치는 것이나 왕자들이나 드미레아, 그리고 대부분의 귀족들이 때때로 유언장을 새로 써두는 과정처럼 여기기로 한지 오래였다. 칼리안이 뭔가를 특별히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라 버릇인지 습관인지 모르게 되어버린 빈 자리 대비임을 알고 있었다.

"신기하기도 하고요."

때문에 그에 대해 더 이상의 별다른 감정 없이 가르침만 잘 골라 새겨듣던 플란츠가, 평상시 종종 짓곤 하던 나른한 얼굴로 되물었다. 칼리안의 뜬금없는 말에도 익숙해진지 오래였으니까.

"그러니까. 뭐가."

"이름이 여전히 푸른 솔새인 것이."

"······ 내 아우님께서 술이 과하셨나."

물론 익숙해졌다고 모든 말을 이해하는 건 아니었다.

독주 한 병을 다 비우고 들불 타령하던 동생놈이 생각인지 잠인지 모를 것에 빠져있다 꺼낸 말이 새 부하 이름의 불변함에 대한 감상이다. 누가 봐도 취한 꼴이 아닌가.

"그만 마셔."

"형님의 안배 덕분에 그리 고생한 동생인데 이것 하나를 못 봐주십니까."

생일 맞이로 바다도 보고 구운 대구도 먹겠다며 오른 여정에서 칼도 써 보고 한 단계 직위도 상승하고 정혼자도 생긴 사춘기 왕세자와, 그 왕세자에게 납치되듯 끌려온 왕자가 세크리티아 땅을 밟은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도와도 주고 악몽도 깨워주겠다 나선 것은 불한당같은 형님 저하 너인데 그 짧은 새에 허리도 뜯기고 독도 맞고 곱디고운 등짝에 흉터까지 생겨가며 진짜 야무지게 고생한 사람은 나였다.

문득 그것이 억울해진 칼리안이 플란츠를 잠깐 응시하다가 방금 전 다 비워낸 빈 잔을 톡톡 두드려보였다.

"그리고 어차피."

다 마셨다. 어차피.

"혹시 알고 보면 술 좋아하는 망나니는 왕세자가 아니라 셋째 왕자였다 소문날까봐 그러십니까."

"이미 늦은 것 같아서."

"괜찮습니다. 안 늦었어요. 헤르츠 경 말로는 형님 그날 귀족들 저택 앞에서 보여주신 모습이 참 인상 깊었다 하던데요. 형님께서 힘내주신 덕에 제가 비운 세레누스 한 병 쯤은 저들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겁니다."

그 꼴을 두 눈으로 못 본 것이 한이다.

두고두고 놀려먹을 거리를 자느라 못 봤다.

"실로 양순하신 형님 저하께서 동생을 위해 그렇게나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셨다 하니 감사할 따름이 아닙니까. 덕분에 이렇게 좋은 술까지 마셨으니."

"······ 내 아우님께서는 독에 취해 더 짖으시는지. 술에 취해 더 짖으시는지."

기실 칼리안이 술을 입에 댄 것도 그리 오랜 날이 지나지 않았다. 앨런과 함께 히몰리카 한 잔, 플란츠와 함께 시즐리누 몇 잔, 그리고 오늘 세레누스 한 병이 전부다.

특히 세레누스는 속이 타서 마셨다.

그러니까 여기 앉아있는 이 분. 온통 민트색이랑 흰색밖에 안보여서 꼭 무슨 잘라놓은 오이 알맹이랑 마주 보고 얘기하는 것 같이 되게 심하게 상큼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이 분이 우리 히나 팔짱을 끼고 들어오는 바람에 마셨다.

그것이 또 하필이면 세레누스라서, 맞은편에 에일라가 있었어서 조금 더 마셨을 뿐.

"저는 형님과 달리 대외 인격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서, 이 정도 마신 것으로는 카밀론에서 개 키우는 데에 방해될 것 없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것이 걱정되어 형님 노릇 하시는 것 아닙니까."

"아니야."

씩 웃은 칼리안이 무어라 말을 하려는데, 시종 한 명이 다가와 빈 잔과 빈 병을 치우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어떤 술을 준비해드릴까요."

사일런트를 거둔 칼리안이 대답을 위해 입을 열었다.

"탄산수."

그리고 이렇게, 플란츠 쪽에서 답이 들렸다.

플란츠가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빠른 대답을 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고개 숙여 대답한 시종이 멀어지는 것을 멀뚱히 보던 칼리안에게서 웃음이 터졌다.

"안 취한다니까, 자꾸 못믿으시네."

"반말."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안한다고."

"네."

칼리안이 안 믿는 것이 분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에일라가 앉아있던 자리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취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신기해서 그럽니다. 여전히 푸른 솔새인 것이요."

"취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옆에 앉은 왕세자가 누구인지를 혼돈하셨나본데."

아까부터 체이스나 알아들을 법한 말을 고스란히 플란츠에게 꺼내놓고 있으니 말이다.

시종이 새로 가져다 준 탄산수 잔에 물방울이 맺힌다. 그것을 손가락 끝으로 훑어내리며 뜻 모를 미소를 짓던 칼리안이 말했다.

"신기하다 하기보다는 이상하다 말해도 될 것 같은데. 제가, 그러니까 예전의 제가 에일라를 처음 만났을 때 에일라가 저를 죽이겠다며 마력탄을 던졌습니다."

"이상해야 할 건 이름이 아닌데."

사람이, 그것도 왕자가.

도대체 뭔 짓을 하고 살았기에 처음 만난 사람이 죽이겠다며 마력탄을 던지느냔 말이다. 그리고 대체 뭔 생각으로 자기 죽이겠단 사람을 거둬들이고 정혼자로 삼았는지. 그 점이 이상해야 마땅하지 않나.

나는 내 동생한테 국왕이 지녀야 할 올바른 마음가짐 말고 참된 망나니의 길 혹은 진정한 술꾼의 바른자세 따위를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단추 몇 개 더 풀고 향수병에 주섬주섬 술 담아서 조심조심 뿌린 것으로 망나니 소리 들었던 왕세자가 고민인지 억울함인지 모를 생각을 하는 사이,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 때 던진 마력탄에 저 대신 파란 새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지은 이름입니다. 푸른 솔새. 그 뒤로 에일라는 마력탄을 안 썼어요. 지금이야 여전히 마력탄을 참 잘 쓰고 있지만 그 때는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그 날의 일 때문에 세작명도 그렇게 지었는데 이번에는 제가 없는데도 푸른 솔새입니다. 똑같이."

"······ 이번에도 새를 죽였나."

"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마력탄은 아니었지만, 실수로 새를."

그 말을 듣던 플란츠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폴룬 남작은 살아있어. 히나도."

"네. 압니다. 죽었어야 할 이들이라 해서 무조건 죽지는 않았어요. 살았어야 할 이들이 죽은 뒤 되살아난 경우도 없었고요. 파란 새 한 마리 때문에 이상한 운명론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뭔데."

"저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이들이 아니라면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일라는 저로 인해 바뀌었던 사람이라서, 제가 없어진 만큼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지내는 대부분의 이들은 그렇습니다. 멜피르 폴룬 남작도, 히나도요. 그런데 그 파란 새는 아니잖아요. 그러니 결국 죽어야 할 날에 죽은 것은 아닐까."

플란츠는, 지금 칼리안이 단순히 파란 새 한 마리의 정해진 운명을 논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들었다. 칼리안에게 몸을 내어주고 떠나버린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제온."

"네."

"원래 있었다는 거지."

"네. 어렴풋이 그렇겠거니 여겨오긴 했지만, 괜스레 그것을 증명 받은 것 같아서. 안도한다고 하면 이기적인 생각일까요."

베른의 부재로 인해 망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만에 하나 제온도 베른의 영향을 받았을까봐. 과거에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이들이 갑작스레 만연하는 것이 혹시라도 베른이 시간을 되짚어 돌아와 모든것이 뒤죽박죽 된 탓일까봐. 그것에 대한 걱정을 덜었다고.

결국 칼리안과 직접 연관되지 않은 파란 새가 정해진대로 살다 죽었다는 사실이, 제온 역시 칼리안과 무관하게 과거에도 만연했으나 단지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에 대한 반증이라 믿고 안도하려 한다고. 문득 찾아온 에일라와, 그 에일라의 파란 새 덕분에.

"내 아우님께서는 여기에서 지내는 내내 그 생각을 하신 거군."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형님께서 전쟁 걱정을 떨쳐내지 못하셨던 것처럼요."

"가지라던 죄책감이 그 쪽은 아니었는데. 왜."

엘프들의 도시에서 플란츠가 했던 말.

베른이 끊어낸 생명에 대한 죄책감 떨쳐내려다 말라죽지 말라 했던 말.

"그러게요. 그 쪽이 아니었는데."

"반말."

"아무튼 형님께서도 제 얘기 안 들어주시니 저도 형님 말 안 들을 수밖에요."

"내가 또 뭐."

"독차."

내 동생이 계속 반말한다.

일부러 말 꼬리 끊어먹는 것이 분명한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형님 너 데블란 앞에서 그 차 왜 마셨는지 내가 다 안다는 뜻이 담긴 살기등등한 눈은 웃지 않은 채로, 입만 움직여 생글생글 웃었다.

그 꼴에 짜증이 난 플란츠가 마시던 탄산수 잔을 탁, 내려놨다.

- 퐁당!

플란츠의 잔에 들었던 탄산수가 튀어 칼리안의 잔으로 쏙 들어갔다. 조금 전 되짚어보던 기억 속 아리안느의 말이 떠오른 칼리안이 실소하며 말했다.

"술 대신으로 가져오라 하신 것이니 술인 셈 치고 소원 빌면 되겠네요. 형님."

내 동생이 또 뜬금없이 짖는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플란츠에게 세크리티아 술꾼들이 소원 비는 때를 알려 준 칼리안이 플란츠의 심장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그냥 사시는 것 말고, 스스로를 좀 아껴가며 잘 사시라고. 제가 혹시 말씀 안 드렸습니까."

"기억 안 나."

"지금 말씀드린 셈 치면 되겠네요. 그런 셈 치고······ 소원 하나 빌어보십시오. 세렌티한테."

또 뜬금없이 평생 해본 적 없는 숙제를 덜렁 남겨 준 동생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말 없이 잔을 들여다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무슨 소원."

"형님 스스로를 위한 소원이요."

"왜."

칼리안이 대답 대신 탄산수 잔을 쳐다봤다. 다른 것 궁금해하지 말고 소원이나 빨리 고민해보라는 뜻이다. 평생 해본 적 없는 일일 테니 쉽게 정하지는 못할 테니까.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는데."

칼리안의 팔이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플란츠의 탄산수 잔을 톡톡 쳐 보였다.

"세렌티 있는 곳."

세렌티도 어딘가 있기는 하겠지.

완두콩 소원 들어주려면.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한 칼리안이 체이스와 데블란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또 반말 한 것은 모르는 채로.

소매로 감춰진 손목의 팔찌.

앨런과 연결된 칼리안의 팔찌가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 * *

어둠 짙은 그 밤.

레이지안 린 후작의 거대한 저택에 모여든 사병들이 움직였다. 많은 수가 모여 있으니 밤의 어둠에 가려질 수는 없겠으나, 그럼에도 모두가 검은 옷을 입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둠 속에 쉬이 눈에 띄지 않을 모습을 갖췄다.

창가의 커튼을 내린 레이지안이 익숙하지 않은 얇은 사슬 갑옷을 입었다. 그리고 그 위에 검은 로브를 걸쳐 입었다. 직접 나서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혹시나 있을지 모를 암살 시도에 대한 최후의 방어책이었다.

"조심해요, 엄마."

담담한 얼굴로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던 아리안느가 그제야 무언가가 실감난다는 듯 잠긴 목소리를 냈다.

"왕궁 앞에 모여 시위를 하다 흩어질 생각이다. 무력이 오고 갈 일은 없으니 그리 보지는 말거라."

"그래도. 전하가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니까."

"걱정 말래도. 문 단속이나 잘 하고."

"네. 알았어요."

레이지안이 사병들을 이끌고 나간 뒤에도 아리안느는 몸을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후작저의 문을 걸어 잠그고 남은 사병과 함께 이 자리를 지킬 예정이었다.

레이지안을 대신할 후작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했던 까닭도 있었고 저택 밖보다는 안이 안전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이유보다 중요한, 또 다른 이유 하나가 더 있었다.

- 똑똑.

준비를 마친 레이지안이 발을 옮기려던 때, 문을 두드리는 낮은 소리가 고요한 실내를 울렸다.

"모시거라."

누가 왔는지 묻지도 않은 레이지안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와 함께 작은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맨 앞에 선 후작저의 집사장. 그리고 아리안느가 후작저를 비우지 말아야 할 더 중요한 이유가 될 이를 포함한 여러 동행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긴장과 반가움이 섞인 눈을 한 아리안느가 허리를 숙여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후궁님."

"네. 오랜만이에요. 아리안느."

루이즈였다.

독에서 깨어난지 아직 오래 되지 않은데다 쌓여오던 수면향의 독기운이 아직 모두 치료되지 않았다. 때문에 여전히 병색이 감도는 얼굴이었으나, 루이즈는 꼿꼿하게 선 채 흔들림 없는 눈으로 아리안느를 바라봤다.

그런 루이즈의 뒤에 테일란 카스트린이 서있었다.

루이즈를 호위하여 함께 들어와 아리안느와 가벼운 인사만 주고 받은 테일란이 레이지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심지 굳은 이의 목소리가 그 입에서 흘러나왔다.

"모시겠습니다."

"그래. 출발하지."

저택을 찾은 일행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 레이지안이, 아리안느에게 다가와 가벼운 포옹을 했다.

"다녀오마."

"네. 다녀오세요."

레이지안이 아리안느의 어깨를 몇 번 툭툭 두드린 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제는 루이즈를 대신해 레이지안을 호위하게 된 테일란이 그 뒤를 따랐다.

그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아주 잠시동안 듣고 있던 아리안느가 루이즈를 부축하여 편안한 의자에 앉도록 에스코트했다. 그리고 다시 뒤로 돌아 생긋 웃어보였다.

"사과해달라는 얘기 안 할 테니까 이 저택 잘 부탁해요. 아무도 못 들어오도록."

여전히 긴장한 얼굴. 하지만 겁 먹지 않은 목소리.

그 모습을 본 사람이 작게 웃었다.

"내가 지키는 건 후궁님과 영애지, 저택이 아니에요."

청록빛의 아름다운 드레스 대신 가장 편안히 입던 검은 가죽 수트를 입고, 늘 떼어놓지 않았던 비녀로 바다 빛 긴 머리를 틀어올린 에일라가 말을 이었다.

"저택은 이분들이 지킬 거고요."

마찬가지로 어느새 가장 편안한 로브 차림이 된 코코 아빠와 코코 엄마를 가리켜 보이면서.

'두 사람, 연회장에서 함께 있다 꽃 사주러 다녀와도 이상할 것 없지 않습니까? 한참 연애 할 나이들인데.'

내 형님은 정,혼,도, 하셨는데 까짓거 연애라고 해서 못할 것 있느냐고.

뭘 알고 하는 소리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는 칼리안의 말은 들어야 했으나, 에일라처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실력은 갖추지 못한 두 사람. 그래서 매력적인 춤을 추듯 함께 움직이다 참 자연스럽게 연회장에서 퇴장한 두 사람이 아리안느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들 편안히 계시지요. 저는 다시 나가 볼 터이니."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 모두를 왕궁에서 후작저까지 무사히 이동시킨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세크리티아 국왕의 폭정에 뻗쳐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서클 하나가 늘어나버린 어느 소규모 영지의 남작. 그리하여 이제 다시 스물 셋의 외모를 지니게 된 8서클의 대마법사.

- 축하드립니다, 스승님.

앨런 마나실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 감사는 나중에 직접 얼굴 뵙고 드리지요.

- 네. 그렇게 해요. 우선은······.

어둠 짙은 그 밤.

모여든 이들이 손에 들린 것을 켰다. 마법 등불을 켰다. 수많은 불빛이 어둠을 밝힌다.

모두가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탓에 오로지 마법 등불만 눈에 보였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마치 카이리스의, 세뉴 강 위의 안네루시아처럼 보였다. 데블란에게 죽은 수많은 이들을 위한 불꽃처럼 보였다.

짙은 어둠 가득한 그 밤.

수많은 이들의 불꽃이 왕궁을 향해 흘러가듯 출발했다.

- 제 유령을 나락으로 밀어넣은 뒤에.

들불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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