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장. 들불(5)
수국을 우려낸 차는 색이 바뀌어도 맛이 같았다.
뿌리내린 곳에 따라 꽃잎 색이 바뀌는 독특함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풍성하게 피어오른 꽃의 모습이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수국차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역시 그 색과 상관없이 우러나는 한결같은 단 맛 때문이었다.
그래서 체이스를 만날 때면 거의 대부분 단 향과 상쾌한 향이 함께 났다. 아리안느는 수국차를, 체이스는 민트차를 마셨으니까.
"윽."
식사 후 키위 한 조각을 먹은 뒤 수국차를 마시고 내려놓던 아리안느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좋아하는 것들만 모아놓은 테이블을 앞에 두었으나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여전히 뒷목이 욱신욱신했기 때문이다.
물론 에일라의 매정한 손속에 다친 곳이었다.
"멍은 다 없어졌던데. 아직 다 낫지는 않았나보구나."
"웃지 말아요. 엄마 그 안에서 속 편하게 있는 동안 내가 이렇게 고생했는데 웃으면 어떡해."
"쓸데없이 고집부리다 다친 것을 두고 웃지 그럼. 화를 내어본들 받아 줄 이도 없는 것을."
"세상 사람이 다 내 탓이라 해도 엄마는 내 편 들어줘야지. 너무하네."
"후작 말고 다른 사람 딸로 태어나면 그때 그리 말하거라. 앞 뒤 재어보지 않고 내 딸이 다 잘했다 할 수 있으면 나도 참 좋겠구나."
자리한 위치 탓에 딸의 어리광 하나 마음대로 받아주지 못할 레이지안이 이렇게 말하며 차를 마셨다. 유난히 이런 면에 있어서는 엄격하기 짝이 없다. 때문에 목을 주무르던 아리안느가 슬쩍 웃었다.
"그리고 세상 사람이 다 네 탓이라 해도 네 편 들어 줄 사람이 이미 한 명 있지 않느냐."
"저하는 요즘 바빠서 엄마 딸 편 들어 줄 시간이 없어요. 게다가 나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면 이번에는 내 편 안 들어줄걸. 그래서 그냥 저하한테 말 안했어."
레이지안이 안경을 고쳐쓰며 말했다.
"그 왕자와 관련 있는 사람이라 했던가."
"응. 옛날 정혼자요."
체이스는 본래 레이지안에게까지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 줄 생각은 없었다.
칼리안이 소드마스터 슬레이만 혹은 얀의 아빠 슬레이만과는 깊은 친분을 가지되 공작 슬레이만과는 거리를 두는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아리안느의 모친인 레이지안에게는 비밀을 둘 이유가 없었으나 후작으로서의 레이지안을 온전하게 믿기 어려워서였다.
헌데 텐실의 치유사를 막아서는 과정이 강경하게 바뀌어감에 따라 레이지안의 의문점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체 무엇때문에 그렇게까지 해 가며 텐실과의 골이 깊어지는 결과를 이끌어내고자 하는지에 대해서.
후궁 루이즈나 체이스가 둘러대는 말로는 현명한 레이지안을 온전히 설득시키기가 어려웠고 결국은 루이즈가 레이지안을 만나 과거의 일을 알려주게 되었다.
"그래. 언젠가 들어본 적 있었지. 성격이 참 시원시원한 이를 정혼자로 두었구나."
"저하 동생 성격이 더 시원시원했댔어요."
'그것을 그저 시원시원하다 하여도 좋을지······.'
어울리지 않게 말꼬리를 흐리던 체이스를 떠올린 아리안느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말해 레이지안은 체이스와 아리안느를 파혼시킬 뻔했다. 루이즈와 체이스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그런데 둘이 말하는 미래의 일들이 하나하나 실제로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결국은 믿게 되었다.
왕족이 아닌 탓에 보고 들어본 적도 없는 '시간의 축'이라는 것이 실재했다는 것. 이 나라가 멸망했다는 것. 이 나라와 이 나라의 마지막 기사와 이 나라의 마지막 왕이 어떤 종막을 맞이했는지를 두 눈으로 지켜보게 된 왕의 정혼자가, 시간의 축과 체이스의 시신 앞에 선 채로 제 목에 칼날을 꽂아넣었다는 것. 검은 모래성이 부서져 날리는 것처럼 온 세상이 스러지고, 시간이 되돌아갔다는 것까지.
"어쨌든 저하랑 나만큼 사이좋진 않았대요. 아마 저하랑 나 때문에 그 사람이랑 정혼한 게 아닐까 했었어요. 그러니 저하는 그 쪽 편 들어줄걸. 미안해서."
"정작 본인은 모른다 하지 않았더냐."
"본인은 자기가 누구였는지 몰라도. 우리 저하 미련한 성격인 거 알잖아요."
"그래서, 서운하더냐."
"아니. 좋다고 하는 소리지. 미련한 사람 귀엽잖아."
레이지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편 안 들어줘도 좋다 하니 나도 계속 네 편 안 들어주어도 되겠구나."
"딸한테 정말 너무하네, 우리 엄마."
"딸이라 해서 특별히 봐 주는 사람이면 좋겠느냐."
"아니. 그건 아니에요."
"그래. 그럼 되었다."
누구보다 중립적인 눈으로 세상을 살아왔던 레이지안이 아니었다면, 체이스와 함께 자신을 찾아온 플란츠를 그렇게 담담하게 대하기 어려웠을지도 몰랐다. 그것 하나는 참 다행이었다.
"난 이래서 우리 엄마가 좋아."
"그리 사고를 치고 돌아다녀도 안 내쫓았으니 좋아해야지.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
"네. 어련하시려고요."
웃음을 터뜨리느라 목 주무르던 손을 내려놓은 아리안느가 키위 한 조각을 더 먹었다. 그리고 신맛 끝에 묻어나는 단맛에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레이지안이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자료를 손에 들고 일어났다. 석방된 레이지안에게 다시 건네진 루이즈의 자료였다.
곧 레이지안이 창가로 가 커튼을 젖혔다.
넓은 후작저의 마당을 가득 채운 검은 인영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 많이 모였어요?"
사병들.
테일란과 레이지안을 믿고 모인 몇몇 귀족들의 사병이었다.
"그래. 물꼬를 틀 만큼은 되겠구나. 다행히도."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저하 말로는 전하께서 엄마를······."
"걱정 말고 있거라. 아무 일도 없을 테니. 내 딸 지키려면 내가 무사해야지. 그렇지 않겠느냐."
당연한 말을 참 든든하게 꺼내는 레이지안을 보며 아리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꽃잎이 흩날리는 듯 했다.
아니. 작은 새 혹은 나비의 첫 날갯짓과 오히려 더 많이 닮았다.
이른 새벽의 안개 가득한 산 속에서 그 날갯짓을 보면 이렇게나 반가울까. 아니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던 꿈 속에서 그 날갯짓을 보면 이렇게나 반가울까. 한 걸음 한 걸음 참 신중하게도 내딛는 히나의 발걸음을 지켜보는 빨간 눈에 여지없는 애정이 한가득 묻어났다.
"우리 히나. 춤은 언제 또 배웠대."
작위를 받았으니 배워야 할 것도 많았다. 다만 춤 선생을 따로 붙여 주었던 기억이 없었다. 그러니 아마도 얀이나, 아니라면 드미레아가 가르쳐 주었을까. 어쩌면 에일라일 수도 있고 발칸의 다른 단원들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누구든 춤을 가르쳤고 히나는 잘 배웠다.
서툴지만 조금씩 발을 맞추는 그 걸음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한 탓에 눈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래.
그 눈길이 떨어지질 않아서.
"키리에."
"네."
참으로 기분 좋은 밤이라 말하며 데블란을 약올린지 얼마나 됐다고 또 한 번 인내심의 한계가 왔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 귀하신 완두콩께서 태어나신 날을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게다가 놈이 정혼자라며 데려온 사람이 히나였다. 그러니 당연한 수순이 이어진 것이다.
축사와 건배가 끝났으니, 그 다음 순서.
소중한 우리 히나가 생전 처음으로 춤 추는 것을 보고 있는데 앞에 서있는 햇봄의 귀리 싹같은 놈이 왜 자꾸 시야를 가리는지 알 수가 없는 그 순서 말이다.
"숨 쉬어. 너도."
"······ 네. 왕자님."
자몽 색의 어여쁜 드레스에 민트색 긴 망토가 자꾸 스친다. 하필 놈의 망토도 은색으로 수를 놨다. 레릭을 만나면 너네 왕세자 옷에는 은색 자수 넣지 말라는 말을 좀 해줄까 하다가 놈은 왕세자고 나는 왕자라서 참았다.
플란츠는 민트색 셔츠에 흰 정장을 입었다.
때문에 둘이 합쳐 참 생기있는 한 그루의 자몽 나무가 자꾸 떠오르는 것을 어찌저찌 잘 참았다. 덕분에 포크 하나가 기어코 동강이 나고 아르센은 애장품 하나를 더 늘렸다. 이왕이면 세트로 모아두는 것이 낫겠지 싶어 은근슬쩍 눈에 잘 띄는 곳에 스푼을 옮겨놓는 아르센을, 칼리안은 보지 못했다.
다행한 일이다.
아니었으면 스푼 대신 아르센 허리가 동강 났을 거다.
"······ 히나만 보면 좀 괜찮아."
"알겠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칼리안이 속으로 세렌티 이름을 백 번쯤 부르는 사이, 정확히는 세렌티에게 백 가지 정도의 험한 욕설을 꺼내놓으며 인고하는 사이, 파티 주인공들의 춤이 드디어 비로소 간신히 끝났다.
그렇게 파티가 무르익어가자 술 한 잔에 긴장을 좀 푼 귀족들이 저마다의 파트너 손을 붙들고 연회장 가운데로 나섰다. 기분 좋아진 히나가 키리에 손을 붙들고 다시 춤을 추러 나가고, 독한 세레누스 반의 반의 반 모금에 얼굴 빨개진 아르센과 에우리아가 멋들어진 춤을 시작하고, 자리에 홀로 남겨진 플란츠가 홀로 세레누스를 한 병 가까이 비워낸 칼리안의 독한 시선을 대놓고 피하던 그 무렵.
이때까지 모든 것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던 데블란에게 시종장이 다가와 짧은 말을 전했다. 데블란의 손가락이 긴 호선을 그리는 것을, 칼리안이 놓치지 않고 보았다.
- 움직이기 시작했나 보구나.
- 린 후작 말씀이십니까.
- 린 후작도, 그리고 아버지도.
- 알겠습니다.
그리고 칼리안의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플란츠가 놓치지 않고 보았다.
"시작됐나본데."
"형님 눈치는 정말 빠르시네요."
"린 후작이 사병을 준비한다 했으니까. 내전을 벌이려는 건가."
"네.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암암리에 린 후작의 손을 붙들고 있던 귀족들의 사병을 모아 왕궁으로 출발할 테니. 어찌본다면 내전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데블란이 그런 움직임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정말 움직이는군."
"네. 린 후작 저택으로 데블란의 군사가 갔을 겁니다. 반역의 증거를 붙들고, 린 후작과 아리안느를 인질 삼아 다시 한 번 체이스 형님을 압박하려 하지 않을까. 그리 생각합니다. 저라면 그랬을 것 같아서요."
"그럴 것을 린 후작도 알고 있잖아."
데블란의 함정인 것을 알면서 굳이 사병을 준비하고 내전을 시작하려는 린 후작의 계획에 대해 묻는 말에, 칼리안이 웃으며 답을 전했다.
"어차피 체이스 형님과 카이리스 사람들만 무사하다면 저와 스승님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린 후작도 데블란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희들에 대해서는 양쪽 모두 계산에 넣지 않을 겁니다. 그리 본다면 린 후작에게는 이보다 좋은 기회가 또 없죠. 모든 왕족과 데블란의 편에 서 있던 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데, 이곳의 세크리티아 사람들만 없애면 왕실 장악하는 건 쉬운 일이니까요."
칼리안은 카이리스의 왕자다.
그러니 세크리티아의 내전에 함부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단, 체이스가 무사하다는 전제 하에.
그 말은 곧, 체이스가 죽으면 칼리안이 움직이고 앨런이 뒤를 따른다는 뜻과 같다. 그러니 데블란은 아직 체이스의 목숨을 건드릴 생각은 하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린 후작은 체이스를 죽일 이유가 없다.
그러니 둘 모두, 당장 칼리안의 힘이 개입될 걱정 없이 서로간의 힘겨루기를 계산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린 후작은 데블란을 없애고 체이스를 옹립한 뒤 귀족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그리고 데블란은 린 후작을 없애고 체이스의 입지를 좁혀두어 자신의 힘을 더 공고히 하기 위해.
"함정인 줄 알면서 뛰어든다는 건데."
"네. 아시지 않습니까. 상대의 패를 가져오려면 무엇을 걸어야 하는지. 저희도 많이 해봤고요. 서로가 준비한 함정이 있으리라 여기더라도 피해를 감수하고 밀어부치는거죠."
데블란이 관심을 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데블란의 눈 앞에 스스로를 드러낸 히나처럼. 살기 위해서 이미 여러 번 목숨을 내어 놓은 칼리안과 플란츠처럼.
"다만 데블란이 모르는 것이 있으니, 린 후작이나 아리안느는 괜찮을 겁니다."
"뭘 모르는데."
"데블란은 오늘 린 후작이 자신의 목을 가지러 오리라 생각하겠지만, 아닙니다. 적당히 치고, 빠지고, 몸을 숨길 겁니다. 그게 오늘 린 후작이 할 일이에요."
"그럼 그 뒤는."
"계기가 되는 거죠."
플란츠의 연두색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세크리티아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 들에 자란 풀은 많이 말랐습니다, 형님. 레이븐은 물론이고 에스티나도 맛없다며 먹지 않을 만큼 바싹 말랐습니다."
버릇처럼 또 다른 말로 대답을 대신한 칼리안이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세레누스 병을 들었다. 거의 다 비워진 술병 안에서 찰랑이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잘 말라있는 들에 불씨가 튀면 누구도 막지 못합니다. 마법사들이 쉴 새 없이 물을 만들어 뿌려도 불이 번져나가는 속도를 이기지 못해요. 불은 숲으로 번지고 숲에서 흩날린 불티는 다시 또 다른 들로 옮겨가고. 집을 태우고 사람을 집어삼킵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마른 들에서 시작되어 사람을 집어삼키는 불. 모두가 말라 비틀어진 이 시기에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그런 불입니다."
칼리안의 잔에 마지막 남은 갈색의 술이 채워졌다.
"그것이 들불입니다, 형님. 본 적 없으시죠."
"없었어."
"오늘 형님과 저, 그리고 체이스 형님이 불을 놨습니다. 이 자리에서 알게 된 것들이 귀족들 머릿속에 불꽃처럼 피어오를 테고, 린 후작은 그 불을 퍼뜨릴 바람이 될 테고요. 진실을 알고 행동하는 방법을 알게 되면 모두가 알아서 움직이게 될 겁니다. 그건 절대로 데블란이 끄지 못할 불이에요."
왕궁에서 보아오던 것은 오로지 마법사의 손 끝에 이는 불. 사람이 다스리는 불 뿐이었다. 언뜻 애달프기도 하다가 쓸쓸하기도 하던 모닥불은 얼마 전에 보았다. 그 역시 마법사의 손짓 한 번에 새카맣게 식어 사라졌다.
사람의 손 앞에 다스려지지 않는 불은 본 적 없었다.
"보다 낮은 사람들의 힘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말 한 마디에 웅성거리고 겁을 집어먹고 꼬리를 만다 하여 우습게 여기시면 안 됩니다. 데블란은 그것을 무시하고 우습게 여기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 누굴 믿을 수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왕궁 안에서 남은 살 날이 얼마나 되는지만 계산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 겁니다. 무지의 대가라 해야겠네요."
칼리안과 체이스는 아는 것.
데블란은 모르는 것.
"들판에 핀 불꽃과 바람이 모여 들불이 되는 것을 보시게 될 겁니다. 잘 지켜보고, 배우시면 됩니다. 잊지 않으실 테니까요. 형님이라면."
마지막 남은 세레누스가 다시 한 번 찰랑이는 소리를 내다 칼리안의 입 속으로 사라져갔다.
[외전] 세레누스
그게 참 신기하지.
분명히 포도로 만든 술에서 포도 향은 온데간데 없고 다른 온갖 향이 나는데. 어떻게 맡으면 호두 껍질 냄새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맡으면 비에 젖은 흙냄새 같기도 하고. 그러다 언뜻 계피 향이 나는 것도 같고. 그렇게 많은 향이 나면서도 포도 향은 절대 안 나거든.
그 오크통 안에서 무슨 시간을 보내면 그렇게나 달라질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봐도 답을 내기 전에 항상 다 마셔버려서 결국 그냥 잠들고 말아.
어떻게 생각해, 넌.
에일라.
* * *
- 콰아아앙!
그 날을 기억해 낸 것은 파란 새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성 안의 기사 수련장에서 듣게 된 거대한 폭음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비에 젖은 흙냄새가 떠올라서일까.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정확한 것은, 그 날 소나기가 내렸다는 거다.
그 비를 피하려 파란 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왔었다.
그리고 폭발이 일었다.
햇빛 아래 쏟아지던 빗줄기 사이로 매캐한 연기가 퍼져나가다 사라진 기억이 났다.
"이 새끼가······ 처돌았나."
은빛의 검을 든 기사가 잇사이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막 써먹는 몸뚱이 중에 유일하게 애지중지하는 청은색의 긴 머리카락을 죄 태워먹을 뻔한 탓도 있었지만, 주먹보다 작은 애먼 새 한 마리가 그 폭발에 휘말려 죽어버린 탓이 더 컸다.
"검 쓰는 새끼가 마력탄을 왜 쓰는데."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이겨보라 하셨습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말랬지, 검 대련 중에 마력탄 던지라고 했어?"
"다른 조건이 있었다면 먼저 말씀 해주셨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기사가 되는 방법은 많다.
돈이 많거나, 연줄이 있거나, 어려서부터 다른 기사 밑에 들어가 종자 노릇 해가며 한 단계씩 올라가 서임을 받거나, 기사 작위를 내릴 권한을 지닌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맹세를 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왕실의 기사 양성소 문턱을 넘거나.
모르는 이가 그 이야기를 듣는다면 아마도 마지막 방법이 제일 만만하다 평할 것이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사 양성소 문 앞에 서 있는,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왕자부터 쓰러뜨려야 문턱 넘을 기회가 생긴다는 것만 제외하면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기는 했다.
어쨌거나 그 왕자가 유명한 것은 성격 때문이었지 지닌 검술의 강함 때문은 아니었다. 덕분에 그 문턱 한 번 넘어보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하루에도 너댓은 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다수는 세 번의 공격을 넘기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그 왕자 검술이 참 강하다는 사실이 성격에 대한 소문에 먹혀 까맣게 잊힌 것이었다는 새로운 깨달음만 얻은 채로.
"마력탄 못 쳐냈으면 새 새끼 아니라 여기 있는 다른 놈들 다 뒤지는 건 생각 안해봤지."
"그 정도로 강한 마력탄은 비싸서 못 삽니다. 그리고 마력탄 하나 못 막으실 분이라고 생각 안했습니다."
기사, 베른의 입에서 헛웃음 소리가 나왔다.
"새는, 실수입니다."
"실수?"
"못 봤습니다. 묻어주고 오겠습니다."
"묻어주고. 내일부터 와."
그래서 합격시켰다.
"함부로 던진 마력탄으로 엉뚱한 생명 잡아먹는 짓 더는 못하게 해 줄 테니까."
검 잘 쓰고 성격 올곧은 놈이라서가 아니라, 유난히 눈에 띌 만큼 예쁜 얼굴로 검 쓰는 것이 신기해서가 아니라, 밖에 내 놓으면 안 될 미친놈 같아서 합격시켰다.
"이름 뭐야."
"에일라. 에일라 베르단디입니다."
하늘은 맑았고 소나기가 내렸다.
파란 새 한 마리가 죽었다.
그렇게 만났다.
* * *
첨탑을 좋아했다.
사실 바다를 더 좋아했으나 바다는 자주 찾아갈 수 없었으니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첨탑에 올랐다. 첨탑에는 적당히 넓은 바닥과 적당한 높이의 난간, 그리고 네 개의 기둥만 있었다. 그 높은 곳에 벽도 없었으니 늘 바람이 거셌다.
그 곳을 찾아가 습관처럼 바닥에 앉았다.
길고 긴 머리가 바람결에 제멋대로 흐트러졌으나 신경쓰지 않았다. 시야가 좀 가려진다 해서 칼 못드는 것도 아니었으니 굳이 그걸 묶어서 정리할 필요를 못 느꼈다.
다만 베른과 달리 그것을 참 싫어할 어느 한 명이 살짝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머리 좀 묶어. 정신 사나워."
"머리끈 잃어버렸어. 하나 주던가."
"맡겨놨어? 몇 번째야?"
"머리끈 비싸? 뭘 그렇게 아까워해?"
"지금 내가 아까워하는 걸로 보여?"
"어."
똑같은 어투로 맞받아치는 왕자의 말대꾸에, 후작 영애가 기가 막히다는 얼굴을 했다.
"이 머리 희뿌연 놈이······."
"너 자꾸 잊어버리는데 우리 형님 머리도 나랑 같은 색이야."
"저하랑 같다고 하지 마. 환상 깨져."
"너무하네. 형님이랑 결혼할 사이 됐다고 나 이렇게 구박하면 내가 서운하지."
"결혼은 무슨. 난 연애만 할 거야."
"그럼 다음 대 왕은 누가 하나."
"네가 하면 되겠네."
이 말을 들은 베른이 실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한 얼굴로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까 너 어제 히젠 거리에서 내 기사들이랑 술퍼먹다 옆 테이블이랑 싸움난 거 우리 형님한테 아직,"
"아. 때마침 머리끈 하나가 남네."
베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분홍색 레이스 리본이 달려있는 짧은 머리끈 하나가 눈앞에 내밀어졌다. 그것을 받아 든 베른이 리본만 투두둑 뜯어내 돌려주며 싱글거렸다.
"잘 쓸게, 아리안느."
"어제 일 저하한테는 말하지 마. 괜히 걱정하니까."
물론 체이스가 걱정할 대상은 아리안느가 아니었다.
말싸움이 곧 주먹다짐으로 변했다던 그 자리에 후작의 영애가 끼어있었음을 알고 수명이 반쯤 깎였을 상대방 쪽이었다.
"이미 새들이 다 전했을 테지만. 안 할게."
"그래."
아리안느가 술병을 막고 있던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바람 많이 부는 첨탑 위에 있었음에도 그 특유의 향이 훅 번져나온다.
"전하 술 창고 또 털어온 거야? 세레누스 중에서도 상급 같은데."
"아버지한테 선물 들어온 것 가져온거야."
"훔쳤어?"
"가져왔다니까. 아버지는 어차피 누가 준 술은 입에 안 대는데, 아깝잖아."
"그러다 그 안에 독이라도 들었으면 어쩌려고."
"아버지 대신 죽은 불쌍한 아들 되는 거지."
아리안느가 다시금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린 후작에게 들었는데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그냥 깊이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다른 말을 꺼냈다.
"기사 지망생 더 들어왔다며."
아리안느의 물음에, 긴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대충 빗어 넘기던 베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게 얻어낸 머리끈이 바람에 날아갈까 입으로 꼭 깨문 채 꺼낸 대답이 이어졌다.
"한 놈."
"엄청 예쁘다던데."
능숙한 손놀림으로 머리 묶기를 마친 베른이 입을 열었다.
"얼굴 잘난 만큼 검도 잘 쓰면 나는 이미 우리 스승님 넘어섰을걸."
"······ 그래. 어련하시겠어."
뻔뻔한 대꾸를 들은 아리안느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베른이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머릿속이 돌아있는 놈 같아서 데려왔어."
"실력이 좋다는 거야, 나쁘다는 거야."
"실력도 좋지만 아무튼 재밌다는 거야."
"재밌나."
"재밌지."
"뭐가 재밌나."
"그런 놈이랑 같이 있으면 나도 돈 게 티 안 나니까."
아리안느는 소위 말하는 소꿉친구였다.
혈통 귀한 형제들과 티격태격 싸우며 컸다. 체이스와 베른처럼, 아리안느와 베른 역시 서로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만 돌아. 저하가 걱정 많이 해."
"형님 앞에서는 안 돌아. 걱정 마."
"그걸 걱정하는 거야. 저하 앞에서만 안 도니까 저하가 네 걱정을 못해주잖아."
가지치기.
베른이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그것 하나만 빼고.
"우리 형님은 나 말고도 걱정할 것이 산더미라, 하나 더 안 얹어드려도 돼."
가벼운 말투로 대답한 베른이 자신의 잔에 세레누스를 따랐다.
그 뒤 아리안느의 잔에도 술을 따를 때, 아리안느의 술잔에 담긴 술이 한 방울 튀어 올랐다. 그러더니 신기하게도 베른의 잔에 퐁당, 들어갔다.
"아. 소원이다. 소원 빌어야지."
그것을 본 아리안느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속설을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잔에서 튀어오른 술이 다른 사람 잔에 들어가면 세렌티에게 소원을 비는 것이다. 신기한 우연으로 한 방울의 술을 덜 먹게 됐으니 못 먹은 술 대신 세렌티에게 소원 들어주기를 청한다는 의미였다.
"뭐라고 빌게."
"내 친구 그만 돌게 해달라고."
"글러먹었네. 이미 늦었어."
"그래도 혹시 알아? 세렌티께서 소원 하나 들어주실지."
"그렇게 빌어서 소원 들어 줄 세렌티였으면."
내가 돌 일도 없었어.
"······ 됐고. 술이나 마셔. 나 곧 나가봐야 하니까."
"이 시간에 어딜 가?"
베른이 쓴 웃음을 잠깐 지었다.
그리고 아리안느를 보던 시선을 돌려 아래를 쳐다봤다. '세렌티의 축복의 깃든 선물'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술을 눈에 담았다.
"세렌티 없는 곳."
포도로 만들었지만 포도 향은 안 나는 독한 술이 베른의 입 속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 * *
말을 안해주면 알지 못하는 법이라서.
말을 안해주면 알아들을 수 없는 법이라서.
* * *
언제나와 다름없는 날들이 지나간다.
언제나와 다름없이 세렌티 없을 날이 지나간다.
아침이 되고, 체이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테일란에게 검을 배우고, 기사 지망생들에게 검을 가르치고, 다시 체이스와 식사를 하고.
밤이 되고. 가끔 한 두개의 상처를 입고. 그렇게 어느만큼의 시간이 다시 흘렀다.
베른은 계속하여 첨탑에 올랐다.
가끔 아리안느가 함께 했으나 대체로 혼자였다.
버릇처럼 그곳에 올라 습관처럼 발 아래 펼쳐진 곳을 보던 베른이 잠시 눈을 내리떴다. 그러다 돌연 허리춤의 검을 빼어 등 뒤를 겨눴다.
- 화아악!
자신의 목 앞에서 멈춘 검을 보지도 않는 사람이 그 곳에 서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오늘 베른은 머리끈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그것은 베른을 마주보고 선 이의 것이었다.
파도가 일렁이듯 흩날리는 바다색 머리카락을 보던 베른이 검을 집어넣고 입을 열었다.
"몰래 오지 마. 그러다 죽어. 에일라."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야."
"급히 여쭐 것이 있는데 이곳에 계시다 하여 왔습니다."
"말해."
"그런데 다른 것 먼저 여쭤봐도 됩니까."
애초에 뭘 물으려 했는지도 말하지 않은 채였으니 무엇을 먼저 묻든 상관할 것이 못되었다.
"뭐든 좋을대로 해."
"혹시 술 좋아하십니까."
"자주는 아니고. 가끔 아리안느 만날 때."
그 말에 에일라가 등 뒤에 두었던 손을 내밀었다.
언젠가 아리안느와 함께 마셨던 세레누스가 들려 있었다.
"이거 비싸다던데."
"훔친 것 아니고 독 든 것도 아닙니다. 그냥 제가 좋아하는 술이라 가져왔습니다."
그것을 걱정해서 물은 것은 아니었는데.
베른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늘 그래왔듯 바닥에 앉아 맞은편을 가리켜보였다.
가느다란 달이 구름에 가려져 사위가 어두웠으나 둘 모두 개의치 않고 술을 주고 받았다.
"그런데 웬 술이야? 물어볼 건 또 뭐고."
더 이상은 마력탄을 쓰지 않는, 기사 서임을 눈앞에 둔 에일라가 한동안 베른을 쳐다봤다.
"몇 명입니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왕자님께서 남모르게 지운 목숨. 몇 명인지 여쭙는 겁니다."
몇 명인지 알면 많이 놀랄 텐데.
몇 명이었는지 내가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을 알면 더 놀랄 테고.
"······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어."
"어제 우연히 티온 백작가에 들어가시는 왕자님을 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바로 그 가문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따져 생각해보니 왕자님께 피냄새가 짙던 날마다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잊어버려."
"그 많은 이들을 죽여 없애야 했던 이유, 무엇이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잊으라고 하지 말고 말씀해주십시오. 이해하려 노력하겠습니다."
세상이 뒤집힌다 하여도 지워지지 않을 일.
그런 일에도 이유가 있었다 말하고 너에게 이해를 받는다 하여 무엇인들 달라질까.
달라지기를 바랐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을.
"얘기한다고 달라지는 것 없어. 앞으로도 계속 같을 테고. 그러니 거기까지만 해.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얼마 전에 전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기사 말고 다른 것 해 볼 생각 없는지 물으시기에, 이름없는 새가 되어 살고 싶지는 않다 했습니다. 긍지 속에 살고 명예롭게 죽겠다 했습니다. 왕자님같은 기사로 살다 죽겠다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있어.
고맙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에일라."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지 마, 에일라.
그러지 마.
* * *
그리 했는데.
- 푸른 솔새. 왜 텐실로 보내셨습니까.
- 능력이 좋은 아이 아니더냐.
- 들여보내 주십시오. 제 정혼자입니다.
- 정혼자라니. 너와 그리 친분 있는 아이가 아니었음을 내가 아는데. 여전히 너는 거짓말을 못하는구나.
- 아뇨. 맞습니다. 정혼자.
- 그렇게 해서라도 살려놓고 싶더냐.
- 제 사람이니까요.
어떻게 해서든 살리려 했는데.
내가, 너를.
에일라.
- 왕제님. 푸른 솔새가······.
평생을 짓누를 듯 하던 뱀의 그림자가 기울었다.
저물었다.
사라졌다.
그리고 푸른 솔새가 함께 떠났다.
- 찾아와. 여기로 데려와.
제 실수로 사라진 새 한마리를 직접 묻어주던 모습이 생각나서. 굳이 그 먼 곳이 아니라 이 곳에서 내가 직접 보내주겠노라며 시신을 찾아왔다.
늘 머리에 꽂혀있던 비녀가 그 손에 들려 있었다.
푸른 바다빛 머리카락만은 여전했다.
"에일라."
술을 준비했다.
좋아한다던 세레누스에서는 포도 향이 안 났다.
오크통에 담아두지 않았다면 그것은 계속 그렇게 달고 짙은 포도향이 났을 텐데. 세레누스에서는 포도 향이 안 났다.
포도 향을 잃은 그 술을 사람들은 세렌티의 선물이라 하였다.
무엇이.
어떻게.
"미안해."
너무 늦어서.
살리지 못해서.
"······ 에일라."
* * *
그 날 너를 그냥 보냈다면 어땠을까.
내가 너를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너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이해를 구했다면 어땠을까.
나는 이제와 이렇게 후회를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넌.
에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