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07화 (308/527)

제54장. 들불(4)

석영인지, 유리인지, 아니면 다이아몬드인지.

그 언젠가 칼리안이 둘렀던 보석가루 가득한 붉은 망토가 떠올랐으나 사실 많은 것이 달랐다.

여러 겹의 층이 진 자몽 색 드레스가 걸음걸음마다 가볍게 나풀거렸다. 허리 아랫부분부터 드레스 밑단까지, 드레스를 장식한 반짝이가 조명을 가득 받고 끊임없이 빛을 냈다. 한 줄의 은사로 수를 놓아 과하지 않지만 결코 소박하지 않은 드레스를 완성시켰다.

사실 드레스가 하필 자몽 색인 것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루이즈가 추천하고 우리 히나가 골라 입은 것이라는데 무슨 불만이 생기겠나. 그저 흐뭇하고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역시 우리 히나는 어디 하나 대단하지 않은 면이 없지."

방금 전 플란츠를 보며 끓어오르는 가슴 안고 울분을 토하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어진 칼리안이 이제는 그냥 장성한 자식새끼를 보는 아비의 그것과 같은 눈으로 히나를 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대단한데 안목까지 갖췄으니."

하고 말이다.

꽤 가까운 곳에 있던 탓에 그 말을 다 듣게 된 플란츠는, 질풍노도와 같았던 한 시절을 추억하며 세상을 향한 미련은 다 버리고 여유로운 인생 2막을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모습의 내 동생에게서 애써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데블란을 향해 작게 목례하며 입을 열었다.

"무례한 언사에 사과드립니다."

고개조차 숙이지 않는 사과.

눈꼽만큼도 미안해하지 않는 이의 사과를 받은 데블란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누가 본다면 히나의 일로 여전히 마음 한 편에 앙금이 남은 모습이었으니까.

잠시동안 플란츠와 칼리안을 한 번씩 바라본 데블란의 눈이 체이스에게 가 닿았다.

"작은 왕관이 사람을 바꾸는구나."

"플란츠 왕세자와 제가 주제넘은 일을 꾸몄다 여기십니까."

세크리티아 왕족이 자리한 곳은 다른 이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그에,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의 대화가 이어졌다.

"내가 저 사과를 받아도 좋을지 네 의견을 듣고 싶구나."

"플란츠 왕세자와 전하 중 누가 더 큰 잘못을 하였는지에 대한 제 생각이 궁금하신 것이라면 서로 사과의 말을 주고 받는 것이 좋다 여깁니다. 플란츠 왕세자의 사과를 받지 않고 전하께서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나 역시 실수한 것이 맞다 여기는 것이냐."

"서로간의 관계와 지휘 고하를 벗어나 상대방의 배우자가 될 이에게 부담 될 만큼의 관심을 보이신 것은······ 실수여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고의가 아닌 실수였어야 한다는 뜻의 말.

고개를 끄덕인 데블란이 다시 체이스를 쳐다봤다.

"실수여야 마땅하다라. 재미있는 말이구나."

"그것이 실수가 아니었다면 더 큰 문제가 될 테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나선 것은 나의 행동을 단순한 실수로 만들어주기 위함이더냐.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구제해주기 위해 나의 병을 알렸다는 소리로 들리는구나."

"그렇습니다."

"고맙기도 하지."

"고맙다 여기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리 키워주신 것에 대한 보은일 뿐이니."

계획하지 않았던 일.

히나. 그리고 히나와 함께 입장한 플란츠.

데블란의 예상에서 벗어난 일. 변수.

플란츠와 생각보다 죽이 잘 맞았던 칼리안과 체이스.

잘 준비해두었던 덫에 오히려 스스로가 걸려들었음을 안 데블란의 양쪽 입꼬리가 깊이 올라갔다.

"그래. 그리 여기지는 않으마."

"네. 아버지."

선의를 가장한 이들의 대화가 짧게 오간 뒤, 데블란이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바라봤다.

"축하와 발전을 위해 모인 자리에 사과의 말이 오가서야 되겠나. 서로 얻게 된 오해는 푸는 것이 좋겠네."

"알겠습니다. 전하."

나지막이 대답한 플란츠가 히나와 함께 자리로 가 앉았다. 그리고 데블란은 각 테이블에 좋은 술을 다시 올리도록 이야기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연회장 안은 고요할 뿐이었다.

* * *

히나가 발판을 놓았다.

플란츠가 자리를 마련했고 칼리안이 이목을 집중시켰다.

- 안 그렇습니까. 아버지.

그리고 체이스가 대단원의 막을 올렸다.

그렇게 시작된 이것은, 새로운 한 편의 연극이다.

어느 누구도 다음 차례로 나설 이의 역할을 미리 정해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든 상황이 마치 짜임새있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어쩐지 세크리티아 국왕 전하께서 기침하시는 모습이 심상치 않더라니. 병환이 있어 그러셨던 것인가 봅니다. 안 그렇습니까, 협회장님?"

"어. 그런가보네. 많이 아프신가."

애장품 늘려 기분 좋아진 코코 엄마, 그리고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참으로 재밌을 따름인 코코 아빠가 관객 참여를 유도했다.

마음껏 놀라지도 못하던 이들의 혼란이 그제야 찾아왔다.

"······ 세렌티시여."

데블란이 아프다는 사실을 드디어 받아들였다. 그 하나가 시작이 되어 이후의 모든 이야기들 역시 진실이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국왕이잖아. 국왕이 아픈데도 텐실 치유사에게 치료 받는 것이 불가능한 건 너무한 것 아니야? 전쟁 직후도 아니잖아."

"전쟁 끝나고 서로 좀 흐지부지 잊어버리는 바람에 치유사까지는 다시 들어왔었는데 그게······ 20년 쯤 전에 갑자기 금지됐지. 그래서 지금 텐실이랑 사이 엄청 안 좋은 거잖아. 그때 텐실을 무슨 악마 숭배 집단처럼 몰고가는 바람에."

"그랬어? 누가? 왜?"

"그······ 이 나라 선왕이 사고로 크게 다쳤을 때 저기 저······ 저 분이."

"자기 손으로 텐실 치유사 막아놓고 이번에는 다시 불러들이려 했던 거야?"

"그런 셈이지."

카이리스의 기사들이 숨죽여 속삭이는 소리는 멀리 퍼지지 않았다. 다만 그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던 귀족들의 귀에는 아주 쏙쏙 잘 들어갔다.

"요즘 여기 들어오려다 추방되는 텐실 치유사 많았다던데 텐실은 그걸 또 보내줬나보네. 너그러운거야, 호구인거야."

"목소리 좀 줄여봐. 부르면서 뭐든 줬겠지. 그냥 불렀겠냐."

보여주는 것을 진실이라 믿고 살아오는 것에 익숙해진 이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법을 모두 잊어버린다. 하나의 주장이 진실이었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이후 들려오는 모든 것들 역시 틀림없는 진실이 되는 것이다.

"뭘 줬을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돈이든 신물이든 뒷거래를 했겠지. 여기 귀족한테 뺏은 것들 많다잖아."

그것이 사실이든, 추측이든.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소리없이 퍼져 나가는 사이, 데블란이 지시한 새 술이 테이블에 올랐다.

와인잔 대신 물컵과 비슷한 크리스털 잔이 놓였다.

자줏빛 와인 대신 맑은 갈색의 술이 담겼다.

"······ 세레누스."

칼리안이 즐거운 얼굴을 하며 그 이름을 읊조렸다. 반가움이 과한 나머지 하마터면 '오랜만에 본다'는 말을 덧붙일 뻔했다.

세레누스.

무려 '세렌티의 축복이 깃든 선물'이라는 거창한 뜻이 붙은 이것은 세크리티아에서 주조되는 술의 이름이었다. 카이리스에 히몰리카와 시즐리누가 있다면 세크리티아에는 바질리카와 세레누스가 있는 것이다.

세레누스는 향이 깊고 맛은 진하며 도수가 높았다.

그 말인즉슨 베른이 꽤 좋아하는 술이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다만 베른은 그것을 그리 많이 즐겨하지 못했는데, 이유는 별 것 없었다. 수도 세크레타 내의 어지간한 술집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들고 귀족들도 아껴 마시는 그 귀한 술을 베른은 그저 빨리 취하는 용도 정도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체이스 스스로도 상당한 애주가였으니 베른의 손에서 귀한 세레누스가 낭비되지 않도록 빼앗아 올 수밖에.

"재밌네."

그것을 내오라 말한 데블란에 대해서는 한자락의 의심도 없이 한 모금을 마신 칼리안이 속삭이듯 말했다.

칼리안의 아주 작은 목소리를 들은 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의문이 어린 눈을 향해 칼리안이 대답했다.

"이런 날 세레누스라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무엇이 이상하십니까."

"내가 잊을 수 없는 날에 마신 술이었거든."

더욱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한 칼리안이 웃었다. 그리고는 맞은편에 앉은 에일라에게 술병을 건네며 말했다.

"에일라."

"네."

"좋아하지, 이거."

여전히 가끔은 적응되지 않는 모습.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한 것 없었으나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칼리안. 그런 칼리안의 모습에 다시 또 조금 더 익숙해져 보려 노력하면서, 에일라가 대답했다.

"네. 좋아해요."

칼리안의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 에일라의 잔에 직접 술을 따랐다.

"이렇게 막 마셔도 괜찮아요? 새 술인데."

"왜. 먹으면 탈 날 술을 내가 너한테 줄까봐?"

"왕자님 말고, 술 주인을 못 믿겠어서."

데블란이 새로 꺼내어 놓은 술.

그 안에 과연 독이 들어있을지, 들지 않았을지. 탈이 날지, 나지 않을지. 에일라는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괜찮아. 누가 의심하고 누가 의심하지 않을지 확인해보려고 꺼내 놓은 술이니까."

독을 넣었을 리가 있겠나.

그저 이 자리에 참석한 귀족 중 누구의 마음이 변했을지, 누구의 머릿속에 데블란을 향한 의문이 생겼을지를 확인해보려 꺼낸 술일 뿐이니.

"우리는 신경 안 쓰고 그냥 마시면 돼."

"네."

칼리안의 괜찮다는 말에 한 점의 의심도 남겨두지 않은 에일라는 그 좋은 술을 한 번에 모두 마셨다. 그리고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세레누스의 잔향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요. 오랜만이고."

"그러게. 오랜만이네."

칼리안이 웃었다.

데블란이 세상을 등진 날. 에일라의 부고를 전해들은 뒤 마신 술. 그것을 이번에는 데블란이 직접 준비해주었으니 재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재밌는 여운에 잠시 잠겨들어 갈 때, 곁에 있던 파란 머리 마법사가 끼어들었다.

"왕자님. 암살자 손에 세뉴 강 앞까지 갔다 돌아온지 얼마나 됐다고 술을······ 술 좋습니다. 술 기운 빠질 때 남은 독 기운도 같이 빠지게 마음껏 드십시오."

칼리안 걱정해주는 마음이 지나쳤나보다.

먹던 고기 빼앗긴 얼굴을 한 채 자신을 바라보는 이의 루비같이 어여쁜 눈을 본 아르센이 재빨리 싱긋 웃으며 하던 말을 바꿨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 수명을 알아서 잘 연장했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다시금 여유로운 모습으로 세레누스 한 모금을 삼켰다. 물론 취기를 몰아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은 절대로 취해서는 안 되니까.

- 데블란은 이 자리에 아리안느를 초대하지 않았습니다. 린 후작 쪽을 공격하려 했든 아리안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려 했든, 형님이 막지 못할 수를 준비해왔을 겁니다. 정혼자의 가문 하나 지키지 못할 유약한 왕세자로 만들어두려 했을 겁니다. 그러니 아예 그 수를 꺼내놓지도 못하게 해야 합니다.

- 나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다. 대비해두었고.

- 다행입니다. 잘 하셨습니다.

히나를 칭찬하고 아르센과 실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일부러 만들어낸 여유가 끊임없이 오고 가는 사이, 마음 속으로는 체이스를 향해 계속하여 말을 건넸다.

- 이쪽에서는 지금 암살자와 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데블란과 텐실의 관계에 대한 의문도 튀어나왔습니다. 그러니 형님께서는 데블란을 의심하거나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칼리안의 말이 전해지자 멀리 앉아있던 체이스가 손을 들어 세레누스를 한 모금, 칼리안과 똑같이 삼켰다. 그와 함께 체이스의 답이 들려왔다.

- 걱정 없이 잘 먹고 가면 되겠느냐.

- 네. 술도 드시고, 물도 드십시오. 음식도 모두 한 번씩 맛을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웃음을 지우시면 안 됩니다. 다만 데블란에게는 더이상 이야기를 건네지 마십시오. 데블란을 겁내거나 걱정하지는 않지만 친한 것도 아닌 것처럼, 끊임없이 경계를 하는 것처럼 보여져야 합니다. 지금 형님께서 보여주시는 모든 것이 귀족들에게는 첫인상이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 그래. 잊지 않으마.

체이스가 상황을 파악하는 것에는 부족함이 없으나 처세는 그렇지 않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처세에 빠른 것은 데블란이고 그 뒤는 칼리안이 아니던가.

- 드르륵!

곧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크게 울리는 의자 소리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칼리안을 향했다.

"내가 그만 정신을 놓고 있던 사이에 내 형님 저하께서 많이 서운해하셨다 들었습니다."

마음 약한 우리 형님 저하께서 도대체 얼마나 많이 서운하셨으면 그 밤에 귀족들 거주 지역에서 주사를 부리셨는지.

필요에 의한 망나니 인격 잘 써먹고 왔던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다른 이들에게는 그것이 '그 때의 서운함을 떠올린 왕세자의 짜증' 정도로 보였겠지만 칼리안의 눈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내 아우님께서는 왜 또 나를 팔아드시려 드는지.'

정도로 해석하면 맞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한 미성이 장내를 다시 울렸다.

"하여, 내가 이 자리를 빌어······."

이야기를 잠시 멈춘 칼리안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영롱한 소리가 장내를 울리고, 보기 좋은 정도로 따라진 술잔에 마법 등불의 빛이 비춰 반짝인다.

"친애하는 내 형님, 카이리스의 플란츠 왕세자 저하께 직접 축하주를 건네드리고자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술잔을 손에 든 칼리안이 모두를 둘러보며 어여쁘게 웃었다.

국왕인 데블란에 앞서 건배사를 제의하는 것이 또 다른 무례인 것을 잊을 정도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술에 닿아 비둘기의 핏빛과도 같이 붉어진 입술에, 그것이 누구든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을 고운 미소가 그려졌다.

모두의 술잔에 데블란의 새 술이 담겼다.

귀족들은 반대하지 않았고 데블란은 반대하지 못했다.

동강 난 나이프는 새까맣게 잊은 것처럼, 오로지 정성으로 가득 채워진 칼리안의 축하인사가 시작됐다. '실로 좋은 형제 사이'에서 동생 역할을 잠시 맡은 칼리안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귀족들은 흡족한 얼굴을 했고 플란츠는 코코 똥 씹은 얼굴이 되어갔다. 물론 칼리안은 신경 안 썼다.

그렇게 길고 긴 인사가 끝날 즈음에는, 모두의 머릿속에서 새 술에 들었을 지 모를 독에 대한 걱정이 까마득히 잊혀졌다. 그렇게 모두가 술잔을 들었다.

"형님 저하께서도 한잔 하십시오. 좋은 날이니."

"······ 알았어."

플란츠가 만들어 낸 변수에 어떤 귀족이 다른 마음을 먹었는지 구분하지 못하도록, 모두가 새 술을 마셨다.

실로 오랜만에 꽃다운 미모 잘 써먹은 칼리안이 데블란을 바라봤다.

"참으로 기분 좋은 밤이 아닙니까. 전하."

그리고 생긋, 웃었다.

자고로 미모란 과할수록 좋다 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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