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장. 들불(3)
그 행동에 달라진 것이 있다 느꼈다.
자신을 집무실로 부른 데블란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차 한 모금을 마시는 것을 보면서, 체이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네가 많이 달라졌구나."
그런데 데블란이 이런 말을 하며 체이스를 쳐다봤다.
오늘 데블란은 체이스를 오래도록 가만히 두지도 않았고 입에 대지 않던 차까지 스스럼없이 마셨다. 그렇게나 달라진 태도를 보여주면서 오히려 체이스가 달라졌다 하고 있는 것이다.
"제가 드려야 할 말씀 같습니다."
"내가 달라질 것이 있겠느냐."
"호위기사를 대동하지도 않고 저와 독대중이시지 않습니까."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아비가 아들을 만나는데 호위기사라니."
대꾸할 말이 사라진 기분이 든 체이스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고 데블란은 몇 차례 기침을 했다. 그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카스트린 경이 많이 바빠진 듯 보이던데. 귀족들을 만나고 협회장을 직접 취조하고. 예전의 너였다면 하지 않았을 일들을 벌이고 있다 하니 달라졌다 느낄 수밖에 없더구나."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아니라면, 혹여 왕좌에 대한 욕심이 들더냐."
"······ 아버지께서 왕위에 계시니 왕좌에 대한 눈길로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정확히 말한다면 비단 왕좌 뿐이라 하기보다는 아버지께서 바꾸어 두신 모든 잘못된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욕심이라 해야 맞습니다."
"네 눈에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하나 어찌하겠느냐. 내가 바꾸어 둔 것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그리 보이지 않을 테니."
체이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왕궁 밖에 번져가고 있는 소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시는 겁니까. 그 어떤 말이 들린다 하여도 결국 다른 이들은 그 소문이 진실이라 믿지 않으리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으면 될까요."
"소문이 돌고 있더냐. 그런 줄은 몰랐다만. 무슨 소문이 있든 결국은 모두가 진실을 따르게 되지 않겠느냐."
"귀족들이 20년 넘게 익숙해진, 만들어진 모습으로서의 진실 말씀이십니까."
평범한 아버지처럼 아들을 앞에 두고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는 데블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왕좌를 탐낸 아들 체이스. 지금 데블란은 그런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니 데블란은 체이스의 행동에 대한 답을 건네고 있는 것과도 같았다.
데블란이 실제로 어떤 이인지 귀족들에게 아무리 전해 보아야 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뿌리내린 생각이 달라지는 일은 없으리라고. 벌을 줄 때에는 가혹하나 상을 내릴 때에는 확실한 성군. 그것이 귀족들의 눈에 보이는 데블란의 '참 모습'이니, 죽어나간 병사들이나 귀족 세력의 일, 루이즈의 일, 그리고 체이스가 겪은 일도 모두 다 결국은 그럴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여기지 않겠느냐고.
한 마디로, 아비의 자리를 욕심 낸 체이스에게 데블란이 엄벌을 내렸을 뿐이라 여길 테니 헛수고하지 말라는 소리인 것이다.
"모순이 아닙니까. 거짓으로 점철된 모습을 진실이라 여기면 그 거짓이 바로 진실이 된다 하시니 말입니다."
"거짓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한들 확신을 가지고 믿는다면 그것이 바로 진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진실이 아니라 기만입니다."
"차이가 있을까. 나는 모르겠구나."
"기만에는 증거가 없으나 진실에는 증거가 따릅니다."
체이스가 잠시동안 데블란을 쳐다봤다. 그리고 데블란과 마찬가지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협회장을 통해 제온이라는 이름의 세력을 움직인 것을 압니다. 협회장이 모두 인정했고 그에 대한 증거도 제 손에 쥐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전해주신 자료, 어머니께서 겪으신 일, 카이리스의 왕세자와 왕자를 암살하려 한 일에 대한 모든 증거도 가지고 있습니다."
"증거라. 그 사이 많은 것을 얻었구나."
"네.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고작 그런 것들로 내 자리를 얻어내겠다 여기고 있느냐."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되겠구나 여기고 있습니다."
데블란이 웃음 소리를 냈다.
"참고 있었다니. 재미있는 말이구나. 나는 특별히 너에게 인내하라 가르친 적이 없었는데."
"가르치지 않는 대신 여러가지 것들로 저를 묶어두셨지 않습니까."
"나는 네가 유약하고 온화한 아이인 줄 알았다. 그러니 그저 보호하였을 뿐이지."
"유약하고 온화한 성정으로 만들어 두고자 하셨을 뿐입니다. 왕비님과 어머니, 린 후작과 아리안느, 카스트린 경과 귀족들,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목숨들을 쥐고 흔들며 저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인내하도록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 여기는 모양이구나."
"잘못된 일입니다.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은 만큼, 이제는 더 늦추지 않고 움직일 생각입니다."
"안타까운 일이다. 다른 이도 아닌 너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
"안타까운 부분은 그것이 아닙니다."
체이스는 찻잔 위에 띄워진 수레국화 한 송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곧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아버지의 종말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 종말이 결코 깨끗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저는 그것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종말이라. 썩 마음에 드는 말은 아닌데."
"압니다. 마지막까지 아버지가 그 말을 마음에 들어 하실 일은 생기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실망을 줄 일은 없을 테니."
"이미 너무 많은 실망을 하였습니다. 더는 기대하는 것이 없으니 제가 아버지께 실망할 일도 이제는 없을 겁니다."
체이스의 대답을 들은 데블란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한 번 기침을 했다.
"그래. 더 나눌 말은 없을 듯하니 그만 물러가거라."
"네. 오늘 저녁, 축하연에서 뵙겠습니다."
아쉬울 것 없다는 듯 답한 체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벼운 예를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체이스의 태도가 확실히 달라졌음을 보게 된 데블란이 긴 웃음을 지었다. 그 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책상 앞에 다시 앉아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 팔락.
서류를 대충 훑어내려가던 데블란의 눈길이 멈췄다.
세크리티아 북서부, 네드젠이라는 이름의 지방에 갑작스러운 한파가 찾아들어 다음해 봄에 수확될 농작물이 모두 얼어버렸다는 소식이 보인다. 피해 지역의 세금을 석 달만 미루고 대신 이자를 붙여 지불해도 좋을지 허락을 구하는 내용이 말미에 적혀 있었다.
너그러운 국왕 데블란은 그런 일에 대해서는 늘 관대했으니 쉬이 허락해주면 될 일이다. 하지만 데블란은 그것을 허락하겠노라 서명하지 않은 채 다른 서류를 집어들었다.
- 팔락.
- 틱, 톡, 틱, 톡.
입술을 꾹 다물고 새로운 서류 한 장을 넘기자 종이 팔락이는 소리가 났다. 문득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시계 초침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한파, 농작물, 다음 해 봄, 세금, 석 달.
새로운 서류를 펼쳤으나 생각은 멈춰있었다. 초침 소리 한 번에 한 단어씩 뇌리를 스친다. 조용히 그것을 되새기던 데블란의 입가에 깊은 미소가 떠오른다.
- 탁!
결국은 보고 있던 종이 뭉치를 뒤집어 덮은 데블란의 시선이 시계를 향했다. 백금과 사파이어로 장식된 고급스러운 시계 장식 말고, 착실하게도 움직이는 은색의 초침에 갈색의 눈이 닿았다.
생각의 흐름은 들판에 부는 바람을 타고 번져나가는 불길과도 같아, 그 번짐을 쉬이 바꾸거나 멈추기 어려운 법이라서. 데블란의 머릿속에도 쉬이 바꾸거나 멈추기 어려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세크리티아 새 국왕의 즉위식은 내년 2월에 거행됩니다.'
그렇지.
그런 말을 들었지. 내가.
세크리티아의 선왕이 사망했을 때 자신이 무엇을 했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국왕의 즉위식이라는 것은 선왕이 사망한 당일이나 다음 날 치뤄내는 것이 아니다. 선왕이 사망한 직후부터 선왕의 후계를 새로운 '왕'이라 칭하는 것과 별개로 즉위식이라는 이름의 행사가 거행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데블란 역시 마찬가지.
데블란도 선왕이 사망하자마자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귀족들과 각 나라의 왕실에 왕좌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알리고 즉위식을 준비했다. 왕위에 오른 뒤 즉위식을 치르기까지는 딱 두 달이 걸렸다.
두 달.
그래. 두 달이, 걸렸다.
- 틱, 톡, 틱, 톡.
시간이 흐른다.
데블란은 더 이상 독이 든 향에 취해 잠들지 않는다. 그러니 아마도 과거의 그 때에 비해서는 병세의 발전 속도가 늦춰질 것이다.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얼마나 늦춰질까.
그러고보니 네드젠에서 세금을 미뤄달라 하였는데.
'모든 이들이 아버지의 종말을 바라고 있습니다.'
석 달을 미뤄 지불된 세금을 받는 것은 나일까. 아니면.
- 틱, 톡, 틱······.
체이스일까.
* * *
강한 것과 약한 것.
누군가 칼리안에게 '네가 강한가'를 묻는다면 칼리안은 당연히 그렇다 답할 것이다.
앨런과 테일란은 물론이거니와 아르센을 위시한 여러 마법사들, 키리에를 위시한 여러 기사들을 두고도 칼리안은 모두 강하다 할 터였다. 다만.
"고기 써는 나이프가 이렇게나 약해서야······ 텐실에서 만들었나."
고기 써는 용도로 만들어진 고급 나이프.
다만 그것만은 약하기 짝이 없다 하였다.
여유로운 얼굴로 고개를 든 칼리안이 눈을 깜빡였다. 혹시나 또 헛것을 보는 중인가 싶어서 한 행동이었으나 애석하게도 모든 것은 진실이었다.
"왕자님."
곁에서 들려오는 키리에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로, 조용히 눈을 내리뜬 칼리안이 생각을 했다. 누가 뭐라해도 칼리안은 충분히 이성적인 어른이니까.
나이프보다 약할 것 뻔한 강아지풀 속줄기같은 저 자식 아니 불한당 아니 내 형님 저하의 창창한 허리를 동강 낼 순 없으니 이걸로 대신한 셈 치고 너그럽고 이성적인 내가 참아야 참기는 뭘 참아 이게 지금 참을 일이야?
"칼리안 왕자님."
테일란이 호위 중인 어머님이랑 함께 있어야 할 우리 히나 오늘 되게 예쁘게 입었네.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히나 왜 저기에 있느냐고.
해가 닳고 달이 부서져도 세상에 둘도 없이 명량한 우리 히나만 있으면 온 세상이 낭랑한데 내가 지금 저 꼴을 보려고 이 날 이 때까지 형님 저하 이 새끼 너 잠깐만.
"숨 쉬십시오, 왕자님."
"나 괜찮아. 괜찮으니까 나 잠깐만."
나 잠깐 실수 한 번만.
잠깐 눈 깜빡할 새 딱 한 번만 실수 좀 하겠다고.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도 좀 하고 그러다 보면 누구 하나 조져버리기도 하고 나 어차피 형님 되게 많으니까 괜찮고 그런 거 아니겠느냐고.
"지금은 안됩니다."
물론 지금 키리에 속은 괜찮아서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칼리안보다 조금 더 이성이 있었고 칼리안이 키리에에게 다른 명령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리고 있을 뿐.
이런 모습에 레이첼은 당황했고 에우리아는 흥미롭게 구경했으며 에일라는 앞에 놓인 와인을 한 입 마셨다. 그리고 아르센은 베어내듯 매끈하게 조각난 나이프를 슬쩍 집어 마법사 주머니 안에 넣었다. 두 번째 애장품이 생겼다.
여하간 그랬다.
강아지풀 솜털 색 머리카락 가진 저 왕세자 옆에서 새벽 별처럼 환히 반짝이는 우리 히나와 피 한 방울 안 섞인 칼리안은 키리에가 말렸다. 이쯤 해서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자면 히나의 친오빠다.
아무튼 다행인 사실은 플란츠가 히나를 소개하자마자 눈치 빠르게 펼쳐진 아르센의 사일런트 덕분에 칼리안의 목소리가 이 자리의 일행들이 아닌 다른 이들의 귀에 들어가지는 않았다는 것. 칼리안의 말과 머릿속은 결단코 곱지 않았으나 그 얼굴에는 여전히 흠잡을 곳 없는 미소가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축하할 일이 하나가 아니었군."
동강 난 나이프 찾으려다 못 찾고 옆에 있던 포크를 집어들려던 칼리안의 귀에, 홀랑홀랑 집 나간 이성 돌아오게 만드는 기적적인 목소리가 내리꽂혔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소식을 접한 바가 없어 조금 놀랐네. 미리 알고 대접하지 못해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축하해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애간장이 녹아내린 칼리안의 마음은 모를, 아니. 알고는 있겠으나 코코 똥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을 고매한 왕세자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 생일 축하 왜 안해주냐며 그 난리를 피우던 왕세자가 맞을까 싶은 차분한 분위기에, 귀족들이 생경한 눈으로 플란츠를 쳐다봤다.
"축하해야 할 일은 맞으니 인사는 해야지. 진심으로 축하하네. 그나저나 베른 자작이라······."
하필 그 이름이 데블란의 입에서 나오는 바람에 완벽히 이성을 차린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숨을 참으며 살기도 참아내는 사이 데블란의 말이 이어졌다.
"낯이 익지 않군. 못 보던 얼굴인데."
데블란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 부탁드릴 게 있어요.
- 말해.
- 세크리티아에 있을 때만이라도 잠시만 제 정혼자인 척 해주시는 건 어려울까요? 이곳의 국왕 전하가 어떻게든 저를 불러다 치료를 요청할 것 같아서요.
- 어차피 여기 왕세자나 내 아우님이나 내가 알아서 할 텐데, 왜.
- 세상에는 정당한 행동만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다른 나라라고는 해도 국왕의 요청을 당사자 대신 거절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고요. 왕세자님들이나 왕자님이라 해도요.
- 그래서.
- 영향력 큰 자리에 있으면 그만큼 많은 일을 겪겠지만 대신 남들이 함부로 건드리지도 못해요. 그리고 제가 제멋대로 따라와서 벌어진 일이니 제가 잘 해결하고 싶어요.
네 정체 들킨 것이 너 때문에 생긴 일은 아니지만, 그게 네 탓이 맞다 해도 네 일 네가 해결하겠다면서 나는 왜 써먹느냐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의외로 순한 왕세자는 득실을 따져보는 대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해.
- 감사합니다. 대신 그 동안의 치료비는 안 받을게요.
드미레아의 바나나처럼 히나의 치료에도 빚이 쌓여가고 있었다는 걸 이제 알았다. 정확히 말한다면 발칸의 어마어마한 급여로 지불되고 있는 줄 알았다.
······ 아니었나보다.
급여는 급여고 두 형제 치료비는 별도 비용이었나보다. 그것 역시 왜 이제야 알려주는지 물어볼까 하다가 의외로 정말 순한 왕세자는 이번에도 고개만 끄덕였다.
- 알았어.
플란츠 치료비가 왕세자의 이름값이라면, 칼리안은 제 빚을 갚기 위해 카이리스를 팔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럼 나는 이제 어디에서 고양이 키우나 고민하면서.
도박장에서 히나와 키리에를 꺼내 준 것으로 칼리안은 이미 평생 치료비를 선 지불한 셈 쳐주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아무튼 히나는 제안했고 플란츠는 수락했다.
칼리안은 평생의 인내심을 쓰는 것에 성공했다.
"능력이 귀한 사람이라 눈에 띄지 않게 동행했습니다."
"능력이 귀한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칼리안은 참았다.
데블란과 플란츠의 문답이 오고 가는 동안 히나의 단단한 얼굴을 봤고, 지금 상황이 '해를 입지 않기 위해' 히나가 노력한 결과임을 얼추 이해했다. 그래서 실수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리 말하니 궁금증이 이는군. 무슨 능력이 있기에 그렇게까지 숨겨가며 국경을 넘었는지 물어도 되겠는가."
"······ 전하."
연두색 눈이 데블란을 향했다.
"제 아내 될 이에게 왜 그리 관심을 보이시는지. 결례가 아닙니까."
플란츠가 참지 않았다.
순간 다시 한 번 연회장 안에 정적이 맴돌았다. 생각보다 침착해보였던 왕세자의 대답이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어서, 모두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때, 칼리안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플란츠를 불렀다.
"형님······ 플란츠 저하."
귀족들의, 카이리스 사람들의, 히나와 플란츠의, 체이스의, 그리고 데블란의 시선이 모두 다 칼리안을 향했다. 칼리안이 모든 이들에게 들리기 딱 좋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서만이라도 언행에 신중을 기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연약하신 아우님께서 방금 전에 나이프 동강 낸 것 내가 다 봤는데 지금 누가 누구 언행을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께서 나를 또 가르치려 드시는군."
"이곳의 국왕 전하께서 카이리스의 치유사에게 관심을 주셨을 뿐이지 않습니까.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것은 오히려 큰 무례가 될 수 있습니다."
20년 넘게 뿌리내린 데블란의 통치 방식은 귀족들의 사고를 정지시켰다. 소문 한 번에 데블란을 향한 의심을 쉬이 드러내기 힘들 만큼 숨죽여 살았다. 쉽사리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보여주는 것만을 진실이라 믿을 만큼 겁을 집어먹었다. 마음 속의 벽을 쌓았다.
그런 이들일수록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 앞에 무너지기 쉽다.
"이것이 나의 무례인가."
"네. 형님 저하께서 무례하셨습니다."
"그래."
이를테면 타국 국왕의 결례를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 왕세자나, 왕세자의 무례함을 서슴없이 지적하는 왕세자의 동생.
"내가 잘못했군. 반성하지."
"들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잘 들어야지. 내 아우님 말씀은 항상 옳았으니."
그리고 별 말 없이 아랫사람의 훈계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같은 것 말이다.
"플란츠 왕세자. 전하께서 병환이 깊습니다. 그로 인해 관심을 두신 것 뿐이니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결국 양국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마련한 자리이니 서로 잊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마음 속을 단단히 채우던 벽이 무너졌을 때 들린 말은 곧.
"안 그렇습니까. 아버지."
진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