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05화 (306/527)

제54장. 들불(2)

칼리안과 작별 인사를 나눈 데블란이 돌아갔다.

똑똑한 플란츠는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을 잊지 않았음에 깊은 짜증을 느끼며 아르센을 만나러 갔다.

히나는 본래의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만요' 라고 입모양으로 말을 한 뒤 풀어두었던 칼리안의 셔츠 맨 윗단추를 채워 주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 낯설었던데다 역시 칼리안에게는 지금의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탓에 저도 모르게 그렇게 했다.

"고마워."

칼리안은 스스럼없이 자신을 챙겨주는 히나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물의 정원 한가운데.

더는 숨길 것도 없어진 히나가 칼리안을 향해 수어로 물었다.

- 좀, 어때요?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까.

그것을 모르겠어서, 칼리안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얼굴을 잠시 살피던 히나가 칼리안의 손목에 손을 대어 본 뒤 다시 말을 건넸다.

- 많이, 아파요?

고작 사흘만에 아픈 것을 잊기에는 상처가 큰 탓이었을지, 히나에게 들리지 않도록 해두고 이 나라의 왕과 대화를 나누던 칼리안이 그래서 그렇게 아파보이는 얼굴을 했을지. 그것을 물었다.

칼리안이 웃었다. 검 잘 쓸 것 같던 기사의 외양도 참 잘 어울렸으나, 역시 히나에게는 까맣고 큰 눈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히나."

히나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은 조용히 손을 들어 천천히 움직였다.

- 아직. 아파.

히나가 웃었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 대답했다.

- 아파도 돼요. 괜찮아질 거예요. 제가, 있으니까.

히나가 칼리안의 오른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작은 두 손이 밝게 빛났다.

그래. 괜찮아질 거다.

다시, 따뜻해졌다.

* * *

손에 들린 수정판이 빛나고 있었다.

그 안에서 이쪽을 보던 사람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걱정어린 얼굴을 한 채로.

- 마나실 경. 갑자기 왜 말이 없어.

리베른의 국왕 엘린느였다.

-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앨런이 머물게 된 방은 본궁의 안쪽을 향해 창문이 나 있었다. 그 말인즉슨 창 밖을 봤을 때 베고니아 정원이나 저 멀리 있는 루이즈의 별관이 아니라 물의 정원이 보인다는 뜻이다.

앨런은 수정판을 다시 들어 별 일이 없었음을 확인시켜 줄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그 창 밖만 보고 있었다. 수정판을 들고 있던 팔을 내려뜨리고, 자신을 계속 불러내는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은 채였다.

"······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연락드리지요."

한참이 지나서야 앨런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겠으나 엘린느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앨런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음을 잘 알았으니까.

- 그래. 필요한 것 있으면 얘기하고.

앨런은 대답 없이 수정판에 불어넣던 마력을 끊었다. 그와 함께 손에 들린 수정판이 스르륵 지워지듯 사라졌다.

앨런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창문에 비친 다른 한 사람, 엘린느와 달리 이 방 안에 실제로 함께 있던 사람을 쳐다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였는데 미안하게 되었군. 잠시 들를 곳이 생겼네."

"마나실 경. 안 됩니다."

테일란 카스트린.

대륙의 첫번째 검이자 체이스의 기사이기도 한 이가 강경하게 대답했다.

방금 전.

수정판을 손에 든 앨런이 리베른의 국왕 엘린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때 테일란이 찾아왔다. 체이스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테일란과 만나기로 한 시간에 맞추어 차를 내어 둔 앨런이었으나 정작 테일란이 도착했을 때에는 제대로 반겨주지 못했다. 인사도 건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엘린느가 부르는 것에도 대답하지 못하고 창 밖만 보고 있었다.

그런 앨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안 테일란이 재빨리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봤다. 그리고 깊은 침음을 냈다.

지금껏 보았던 수많은 에메랄드 중 가장 옅었던 것, 혹은 연한 색의 비취를 떠올리게 하는 밝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카이리스의 왕세자가 물의 정원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테일란은 앨런이 그 왕세자나 왕세자의 호위 기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두 명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칼리안, 그리고 데블란.

두 명이 대치했다.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이곳에까지 긴장감이 전해지는 모습으로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마주 웃었다.

그것을 본 앨런은 더 이상 엘린느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고, 수정판으로 연결되던 통신을 끊었다. 그리고 테일란과의 대화를 잠시 뒤로 미루려 했다. 그런데 테일란이 앨런의 앞을 막았다.

"비키게. 카스트린 경."

"미안합니다만 못 비킵니다."

테일란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대륙 첫 번째 검의 방해를 받은 대마법사에게서 세상의 끝을 담은 듯한 피어가 흘러나왔다.

"자네는 나를 막지 못하네."

"상관없습니다. 멋대로 움직이시면 따라 내려가 다시 막겠습니다."

테일란이 앨런을 만난 것이 한 두 번은 아니었다. 다만 언제나 체이스 혹은 칼리안과 관련된 일로 마주쳤을 뿐이라서 둘 사이에 친분이 있다 할 정도는 못 되었다. 그럼에도 꽤 친숙한 마음이 든 탓에, 테일란은 화를 숨기지 못하는 대마법사의 날카로운 반응에도 거부감 혹은 애먼 서운함을 느끼진 않았다.

그 앨런이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왜 자네가 나를 막아서는가."

"마나실 경이 나서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안 되는가."

"저희의 발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워야 합니다. 모르시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건, 확인이다. 테일란의 입을 빌어 앨런이 움직여서는 안 될 이유를 재차 확인받고 머릿속에 새겨두려는 행동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스스로를 설득시켜야 하는 앨런의 참담한 얼굴을 향해 테일란이 입을 열었다.

"마나실 경의 제자이기 이전에 저의 제자였다 했습니다. 제 검을 배워갔을 만큼이라면 충분히 강한 분일 테니 나서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자네 제자이기 이전에 내 아들이네. 내 발이 내 아들 하나 마음대로 지키지 못할 만큼 무거울 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렇게 무거워야 지킬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앨런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동안 밖을 살피던 앨런이 온갖 감정을 다 담은 얼굴을 하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감정을 미처 잠재우지 못한 은회색의 눈을 보던 테일란이 다시 말했다.

"고개 돌리고 모르는 척 하라는 것이 아니라 참으시라는 겁니다. 마나실 경이 움직이면 해결은 쉽겠으나 영원한 문제로 남습니다. 그것은 이곳의 누구에게도 도움되지 않을 일입니다. 나중을 위해서, 지금은 그냥 계십시오."

짧고도 긴 시간이 지났다.

주변을 잠식하다 숨 막힐 듯 몰아치던 피어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식은 등에 소름이 돋았던 것을 그제야 느낀 테일란이 의식적으로 숨을 쉬며 긴장을 풀었다.

테일란은 앨런의 앞을 막고 있던 팔을 내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감사합니다."

앨런의 피어에 영혼이 깎여나가는 기분을 참아낸 것은 테일란이었는데 고마운 마음을 전한 것도 테일란이다. 테일란이 제 모든 것을 집어삼킬듯한 피어를 참아낸 대신 앨런은 더 큰 것을 견뎌내 주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정원에 모여 있던 이들이 각자 흩어지는 것을 느낀 앨런이 비로소 대답을 전했다.

"다음에는 그리하지 말게. 자네가 누구인지를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을 터이니."

"다음에는 제가 마나실 경을 막을 일 없습니다. 칼리안 왕자님이 전하를 마주할 일도 더는 없을 겁니다."

앨런은 장담하듯 대답하는 테일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 안에 놓인 테이블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앉게."

테일란이 그쪽으로 가 앉은 뒤, 앨런이 테일란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나를 찾아 온 이유가 있을 것인데."

"확인하고자 하는 일이 있어 왔습니다."

"얘기하게."

"지금의 마나실 경께서 겪은 일이 아니니 놀라실 수 있겠습니다만, 상황이 상황이라 허락 없이 말씀드리는 것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조금쯤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말해보게."

"세자 저하께서, 과거의 그 전쟁 중 카이리스 군대가 세크리티아로 오는 것에 마나실 경의 도움이 있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카이리스의 군대를 세크리티아의 목전까지 이동시킨 것에 앨런의 힘이 작용했으리라는 말이었다. 그것이 가능하게 할 마법을 부릴 만한 이는 당시 8서클에 올랐던 앨런 뿐이었으니까.

"하필 이런 날 이런 때에 말씀을 전하게 되어 미안합니다."

테일란이 침통한 얼굴로 사과했다.

만약 앨런이 그것을 알아내지 않았다면, 하필 이런 날 이런 순간에 듣게 된 저 말로 인해 정말 많이 동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앨런은 그 일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칼리안이 히몰리카 한 잔을 마시고 곧장 잠들었던 날에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가.

"그것은 체이스 저하의 생각인가?"

칼리안은 굳이 그런 것까지 체이스에게 알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렇습니다."

"미안할 것 없는 일이네. 익히 짐작하고 있었으니. 그래서, 그에 대해 무엇을 부탁하려는 것인가."

"지난 번에 마나실 경을 보았을 때와 이번의 기운이 많이 다릅니다. 전하와 만나셨을 때 독을 걸러내신 일도 있고 하여 먼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혹시 마나실 경께서는 지금······."

"서클을 하나 더 늘렸는지 묻고자 하는 것이라면, 아직 아니네. 그냥 내가 대단한 것이지."

"······ 그렇습니까."

이번에는 앨런이 테일란을 향해 질문했다.

"혹시 지방 귀족의 사병을 이곳에 옮겨두려 하였는가."

"맞습니다. 데블란의 군사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귀족들의 힘을 얻어야 하니 말입니다."

숨기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테일란이 데블란을 칭하는 말이 바뀌었다. 그것이 테일란의 본심이리라.

"데블란의 군사들은 자네 혼자서도 쓸어버릴 수 있을 터인데."

"시험해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홀로 나서서 왕궁을 정리하고 체이스 왕세자께 왕좌를 드린다면, 그것은 결국 두 번째 데블란을 만드는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잘 압니다."

앨런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래. 내가 괜한 것을 물었네. 어찌됐건 그에 대해 내가 곧바로 도움을 주기는 어렵네."

"알겠습니다. 시일을 조금 더 잡으면 될 일이니 괜찮······."

"며칠만 기다리게. 곧바로는 아니라 해도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니."

앨런의 의미심장한 말이 테일란의 말을 잘랐다.

"그러고 보면 우리 왕자님은 참으로 대단하시지. 대륙 최고의 검사와 마법사를 모두 스승으로 둔 셈이 아닌가."

대륙에 세 명 있는 마법사 말고 최고의 마법사.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테일란이 체이스를 대신한 인사를 전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마나실 남작."

카이리스 왕자의 스승 말고, 세크리티아의 새로운 왕을 옹립할 권한을 가진 남작 앨런 마나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하루가 지나갔다.

키리에가 건네준 것을 확인한 칼리안이 묘한 얼굴을 했다.

"확실히······."

"데블란은 데블란."

키리에의 곁에 서 있던 플란츠가 말을 받았고 에일라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각 같아선 앨런의 조언을 한 번 듣고 싶었으나 앨런은 전날 저녁부터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 방에서 뻗어나오는 기운을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던 칼리안은 에우리아에게 앨런의 방 앞을 잠시만 지켜주기를 부탁했었다.

어찌되었건 그런 이유로 앨런을 만나지는 못했고 지금쯤 레이지안 린 후작을 만나고 있을 체이스를 방해하지도 못하겠어서, 잠시 생각을 해보던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런데 왜 저에게 물으십니까."

"뭐를."

"형님 탄생일 파티 아닙니까."

"말이 좋군."

"말이 좋든 핑계거리로 삼았든 명분상으로는 엄연히 탄생일 파티인 것을요. 어머님도 무탈하시고 나라의 큰 화를 불러일으킬 뻔한 마법사 협회장 메이린 론즈도 잡았으니, 늦었지만 이제라도 축하 자리를 마련해보겠다 하지 않습니까."

루이즈가 오늘 아침 정신을 차렸다.

더 이상 힘을 숨길 이유가 없어졌으니 히나는 아예 대놓고 온 힘을 다해 치료를 했다. 그리고 루이즈가 눈 뜬 것을 보자마자 방으로 돌아가 세상 모를 잠에 빠져들었다. 덕분에 지금은 아르센과 레이첼이 히나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가지 않겠다 하면 가지 않을 것처럼 말씀하시는군."

"당연히 따라야죠. 지엄하신 형님 저하 말씀인데."

"그만 짖······."

플란츠가 말을 멈췄다.

키리에야 다 듣고 다닌다지만 어쨌거나 에일라까지 있는 자리에서 동생 놈한테 짖는다 만다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명목이 무엇이든 칼리안이라면 당연히 참석을 할 것이다. 술에 독을 넣든 암살자들을 잔뜩 준비해두든 다른 귀족들의 앞에서 칼리안을 압박할 수를 준비해두었든 다 상관없이 초대받은 자리를 거절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플란츠의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칼리안의 수를 읽을 데블란을 어떻게 대해줘야 할지를.

잠깐 생각해보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석하지. 전부 다."

"네."

칼리안이 일말의 고민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키리에에게 '모든 일행이 초대 자리에 함께 가는' 조건으로 파티에 참석하겠노라 전해달라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누군가는 더 큰 힘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누군가는 해를 입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또 누군가는 싸움에서 이길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해가며 며칠이 흘렀다.

그렇게 날이 지나, 데블란이 초대하고 칼리안이 거절치 않은 파티가 시작되었다.

음식이 마련되고 음악이 흐른다.

고급스러운 잔에 와인이 채워진 그 곳에 세크리티아의 귀족들이 자리하고 카이리스의 기사들이 동석했다. 드레스를 차려 입은 생소한 모습의 에우리아와 레이첼, 그리고 언제나 아름다운 에일라. 아르센, 키리에의 곁에 칼리안이 있었다.

그렇게 모인 이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려 애썼다. 수도에 거주하는 귀족들 뿐이라 그 수가 많지 않았던 탓에 눈을 돌리는 곳마다 칼리안의 일행들이 보였다.

곧 체이스가 입장하고 데블란이 들어왔다.

파티의 주인공인 플란츠를 남겨두고 모두가 자리했다. 각자의 자리를 찾아 착석했다.

"플란츠 룬 카이리스 왕세자 입장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준비를 끝마쳤을 플란츠가 입장했다.

파티의 주인공이었으니 당연하게도 모든 이들의 시선이 플란츠를 향했다. 언제나와 같은 여유로운 얼굴의 칼리안 역시 플란츠가 들어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 갑자기 이렇게 부탁드려서 죄송해요, 왕세자님.

- 아니야.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저 희멀건한 놈 옆에, 어여쁘고 귀하여 누구 하나 손 못 대게 할 우리 히나가 왜 같이 있을까.

"······ 키리에."

"저도 몰랐습니다."

게다가 히나가 왜 저 놈 팔짱을 끼고 있나, 하고.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가슴은 허락하지 못할 일을 목도한 칼리안의 입술이 아주 긴 호선을 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입장 소개가 빠졌군."

태평한 얼굴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히나 베른 자작. 내 정혼자에 대해서."

장내가 고요히 가라앉았다.

칼리안이 손에 들고 있던 식사용 나이프가 뚝, 반으로 부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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