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장. 들불(1)
아.
내가 또 돌았나보다.
'굳이 '또'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답을 내기 어려울 것 없는 의문이다.
플란츠가 누구를 보고 이성 없는 것을 배웠겠나. 그래서 이번 일은 그냥 속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인내심 짧고 이성 없는 놈이 또 한 번을 돌았나보다, 하고.
'이렇게까지 돌아버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실낱같이 남은 이성이 아주 잠시 전의 일을 떠올렸다.
- 다녀올게.
- 네. 다녀오세요.
정원에서 에일라와 인사를 나누고 본궁으로 돌아와 회랑을 걸었다. 아치 형태를 가진 기둥이 만들어내는 아름답고 규칙적인 그림자 속을 말 없이 걸었다.
물의 정원을 걷고 있던 더 작은 그림자가 하나, 그보다 긴 그림자가 하나. 그 모습을 보았을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인내심을 잘 잡았다. 나중에 돌아가서 대련할 일이 늘어나겠다 하는 생각은 했지만 돌진 않았다.
잠시 그렇게 히나와 플란츠를 보며 서있으려니 맞은편에서 또 다른 그림자 하나가 걸어왔다.
"앞에 전하께서 오십니다, 칼리안 왕자님."
뒤에서 따라오던 시종장이 말했다.
시종장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을 보다 눈만 내리뜨듯 목례를 했다. 데블란은 그에 응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물의 정원에 있던 둘을 데블란이 봤다.
아니, 히나를 봤다.
데블란의 시선이 처음부터 계속하여 히나를 보고 있었다. 플란츠가 그것을 보았다. 눈치빠른 플란츠가 무언가를 알아봤다.
데블란이 다시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쳐왔다.
"히나."
플란츠가 히나를 불렀다.
데블란의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형제가 경고하듯 확인시켜 준 사실을 목도하게 되었다.
데블란은, 이미 알고 있었다.
히나를. 칼리안을.
데블란이 웃었다. 그래서 마주 웃었다.
"······ 아버지."
나는 사람이고 쟤는 내 동생인데 어째서 쟤는 가끔 말하고 종종 으르렁거리고 대체로 짖는지 모르겠다 싶은 플란츠의 깊은 고민 중에서 '쟤'를 담당한 사람이 담담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 다시 눈을 떴다.
* * *
세크리티아는 카이리스와 달랐다.
수도 세크레타에 거주하는 귀족들은 카이리스만큼 많지 않았다. 왕실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자신의 영지가 인근에 있거나, 혹은 수도에서 일하며 거주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은 각자의 영지에서 지냈다.
지역이나 세력을 기준으로 소규모의 모임을 가지고 정보를 교환하곤 했으며 굳이 수도에서 오랜 기간을 머무르지 않았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결코 입 밖에 내지 않는 이유 때문이었다.
- 칭찬하고 상을 주는 것에 아낌이 없는, 자애로운 왕.
상이 필요한 일에 있어 데블란은 결코 옹색하게 굴지 않았다. 공정히 판단하여 마땅한 작위를 내리고 그에 걸맞는 영지를 하사했다.
세크리티아의 영토는 카이리스보다 좁았고 자리는 한정적이었으나 데블란에게는 언제나 상으로 내릴 적합한 작위와 그에 꼭 맞는 영지가 있었다.
- 어떻게 항상 빈 작위와 영지가 있는가.
- 새 작위와 영지를 받는 귀족은 계속 생겨나는데 왜 부족하지 않은가.
그 이유를, 귀족들은 굳이 궁금하다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목이 '메마르고 병들어 더는 쓸모가 없어진 가지'처럼 잘려나가길 원치 않았으니까. 그래서 숨을 죽였다. 영지 안에서 조용히 머무르며 자신의 작위와 영지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으로 내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달랐다.
카이리스보다 좁은 땅 위에 사는 이들이었으나 말이 퍼져나가는 속도는 카이리스보다 늦었다.
그것을 걱정한 테일란이 입을 열었다.
"저하.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겠습니까."
사흘.
많은 말을 담은 새가 도착하기에는 빠듯한 시간.
- 데블란의 병환이 매우 깊어 향후를 장담하기 어렵다.
- 데블란이 병의 치유를 위해 텐실의 신관을 불러들이려 했으며 이를 막은 후작 레이지안 린을 구금했다. 리베른의 암살자를 끌어들이고 카이리스의 왕세자와 왕자에게 큰 부상을 입힘으로써 이 땅에 전쟁을 불러 일으킬 뻔하였다.
- 데블란과 독대하던 루이즈가 마신 차에 독이 들어있었고, 이로 인해 루이즈는 매우 위독한 상태이다.
사흘.
진실과 거짓이 잘 섞인 소식을 귀족들이 전해듣고,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선택하기에는 부족한 시간.
- 데블란 듀라한 세크리티아의 패정은 극에 달했다.
- '신성한 핏줄'의 칭호를 부여받은 이는 또 있다.
- 어미를 잃을 뻔한 것에 분개한, 그리고 테일란 카스트린을 손에 쥔 젊은 왕세자.
사흘.
그럼에도 불구하고.
- 체이스 듀라한 세크리티아.
왕관을 뺏어 올 정당한 명분을 가지게 된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이 퍼져나가기에는 충분한 시간.
"충분해."
충분하다.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소문이란 들불과도 같은 것이라서."
준비를 마친 체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보랏빛의 시선이 소리없이 움직여 앞에 선 이를 향했다.
"카스트린 경."
"네, 저하."
북쪽 대사막의 추운 하늘에는 신비로운 빛이 여울처럼 흐른다 하였다.
그 여울에 시선을 두면 밤이 새고 태양이 떠오르도록 고개를 돌리지 못한다 하였다. 그 빛에 눈이 매이면 폐가 얼어붙어 숨이 차오르도록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였다.
"그대는 나의 검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검인가."
찬 하늘 위의 여울과 꼭 닮았을 두 눈이 테일란을 통찰했다. 그와 함께, 카이리스의 땅에서 건넸던 물음이 다시 한 번 건네져 왔다.
긍지 높은 기사는 일말의 고민 없이 답을 전했다.
"저는 여전히 저하의 검입니다."
"그래."
그저 꿈을 꾸었을 뿐이었으나 실망하고 잃은 것이 너무 많았던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치기. 그만하게 해 줄게."
새파란 하늘 아래.
새하얀 맹금은 날개 펼 준비를 마쳤다.
* * *
같은 나라 같은 왕궁에 있던 또 다른 한 사람도 무언가를 펼쳤다. 사일런트를 펼쳤고 곱게 접어두었던 밑바닥도 함께 펼쳐들었다.
- 이제 뭐 하실 거예요?
칼리안의 이름을 가지게 된 이후, 아니.
왕제가 된 이후 단 한 번도 풀어놓지 않았던 셔츠 맨 윗단추. 그것을 처음으로 풀어내고 이곳에 왔었다.
- 내가 할 일.
그러니 그 밑바닥은 어쩌면, 이미 진작부터 셔츠와 함께 펼쳐져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라. 네가 나를 그리 불러주는 것이냐."
데블란이 기꺼운 듯 답했고 베른은 고개만 끄덕였다.
"무엇이라 부르든 상관은 없겠다만 내 생각이 맞는 듯 하니 그것 하나는 기쁘구나."
그러고보니 어쩐다.
이 일을 알면 내 멋진 정혼자께서 정혼도 깨고 내 목숨도 깨 놓으려 할 텐데. 잘 살아서 파혼당하지 않으려면 비밀 새어나갈 일이라도 없애놓고 가야겠네.
이제는 실낱의 끄트머리만큼 남은 이성이 걱정거리 하나를 떠올렸고, 그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냈다.
해결책 찾았으니 됐다.
"네. 아버지는 맞히셨고 저는 들켰네요."
문제 하나와 해결 방법 하나를 잘 찾아 조금 만족스러워진 베른이 씩 웃었다.
"그렇다면 무어라 다시 인사를 해야 할까."
"굳이 인사까지 나눠야 하겠습니까. 다시 만난 것도 진저리나는데."
"아무리 그래도 도리가 있는 법이니······ 그래, 그렇지. 반갑다고 하면 다시 건네는 첫인사로 썩 어울리지 않겠느냐."
그 역시 답을 내기 어려운 질문이 아니어서 베른은 곧바로 대답을 했다.
"반가운 척 해주시면 달가운 척 해드리겠습니다."
"그래. 반갑구나."
"고맙습니다."
어쩌다보니 이 자리에 동석하게 된 파릇파릇한 왕세자가, 똑같은 인성의 부자가 주고받는 실로 화기애애한 대화를 낱낱이 듣다 말고 나까지 같이 환장해버리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쓰는 사이.
"혹시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무엇을 말이냐."
"당신이 드디어 죽어 사라졌던 날의 세크리티아가 어땠는지."
대화의 주제는 진득한 인성에 점점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플란츠는 환장이고 뭐고 히나가 사일런트 막 안으로 절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만 온 신경을 쓰기로 했다. 히나가 이 대화를 들으면 둘 다 혼낼 것 같아서였다.
이런 필사적인 상황은 모를 데블란이 여전한 얼굴로 대답을 전했다.
"내가 죽었던 날이라면 참으로 많은 이들이 기뻐하지 않았겠느냐."
"그랬나보다, 하고 말았습니다."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음에 데블란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그저 여상한 날이었나 보구나."
"네. 그저 여상한 날이었습니다."
데블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베른이 전해준 것처럼 여상한 얼굴로 잠시 무언가를 생각해보다 입을 열었다.
"허나 이상하지 않느냐."
"무엇이 이상합니까."
"너만은 그 날을 그리 기억해주고 있으니, 그것이 과연 여상하다 할 일일까."
데블란이 죽었음에 대해 그 누구도 놀라거나 기뻐하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보냈다면 베른은 그것을 어찌 기억하느냐는 물음이었다. 데블란을 향한 적의를 보건대 그 누구도 관심가지지 않았던 죽음이라 하여도 베른에게만은 기억에 남지 않았겠느냐는 뜻이기도 했다.
"기대를 저버려 죄송합니다만."
베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필 그 날에 제 정혼자의 부고가 전해져서요."
- 왕제님. 푸른 솔새가······.
"왕제가 되자마자 들은 첫 소식이 그래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워낙 데면데면했던 사이라서 이제 좀 친하게 지내볼까 했는데 못하게 되었다 하니, 아쉬운 마음이 컸어서."
데블란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까운 일이구나."
"아뇨. 그보다 기꺼운 일이 또 있겠습니까."
그리 오랜 시간동안, 그리고 여전히 데블란의 유령에 시달리고 있던 베른의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저는 여전히 이렇게 살아있고 제 정혼자도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당신 한 명만 이 세상에서 다시 사라지고 남은 이들은 여상스러운 날을 보내게 될 텐데. 안타깝기는요."
거짓말 못하는 베른이 이렇게 이야기하다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 주량이 줄어든 것은 조금 안타깝네요."
그래도 그건 다시 늘리면 되니까 그것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렇다 하나 실로 안쓰러운 일이 아니더냐. 네 아비라는 나조차 너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 네 생이 모두 사라지고 잊혀진 것 아니더냐."
"긁지 마요. 화가 많은 사람이라."
데블란이 가장 알고 싶어 할 일.
그렇지만 가장 알고 싶지 않을 일.
"아버지 숨 끊어진 날이 언제였는지 알려드리고 싶어지니까."
데블란의 입이 비로소 다물렸다.
"궁금하면 언제든지 물어보십시오. 시간 거슬러 다시 살면서 죽어야 했던 사람을 살린 적은 없었는지, 그 사람은 문제 없이 지금도 잘 살고 있는지, 정해진 시간대로 살다 결국은 그 시간에 다시 죽지는 않았는지. 제 정혼자는 그 날이 지나도록 살아있을 수 있을지.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될지. 숨김없이 다, 알려드릴테니까."
그에 대해 조금쯤의 진실과 조금쯤의 거짓을 섞어 이야기했다. 죽었어야 했을 멜피르와 히나는 여전히 잘 살아있었으나 오로지 옛칼리안만은 정해졌던 그 날에 삶을 놓았으니, 사실은 베른도 정확히 확신하지는 못할 일이었다. 베른이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을 데블란은 모르니 상관없는 일이다.
곁에 서 있던 플란츠가 작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서, 베른이 잠깐 그 쪽을 보다 다시 데블란을 봤다.
"그러고보면 참으로 솔직한 성정이구나. 숨긴다 하여 증명할 길 없을 일을 이렇게 알려주니."
"네. 거짓말 하는 취미는 없어서."
당신처럼 될까봐.
"허면 카이리스의 국왕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
한동안 말 없이 베른을 보던 데블란이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데블란은 그런 편지를 보내지 않았던가. 르메인이 그 일을 알고 있는지 알리고 싶지 않다면 히나를 데리고 찾아오라고.
그 일을 생각한 베른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세크리티아 국왕이 많이 아프다더니 정신머리가 아팠나보다 하겠죠. 아버지가 걱정할 일 아닙니다."
곧 베른이 웃음을 멈추고 데블란을 쳐다봤다. 고개를 올리고 눈을 내리뜬 채 데블란을 바라봤다.
"그런데 분명히. 긁지 말라 말씀드렸는데."
"그랬지. 그 말을 내가 잠시 잊었구나."
"세크리티아 새 국왕의 즉위식은 내년 2월에 거행됩니다."
나름대로의 성의를 담아 건넨 협상이 무산됐으니 다음 순서를 찾아갔다. 데블란은 웃지 않았다.
"칼리안."
지금껏 지켜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자신을 향해 돌아오는 새빨간 눈동자를 향해 말했다.
사람을 지나치게 구석으로 밀면 뜻밖의 사고를 일으키게 마련임은 이미 잘 알아서.
"그만."
오늘은 거기까지만 하라 이야기했다.
한동안 플란츠를 보던 붉은 눈동자가 제 빛을 찾았다.
"네."
그리고 데블란을 향해 마지막 말을 건넸다.
"친애하는 제 형님 저하께서 올 겨울은 따뜻하게 보내고 싶다 하셨으니. 이곳에서 한겨울 보내고 즉위식 보고, 축하해드리고 나서. 내 나라로 돌아가겠습니다. 전하."
남은 날이 생각보다 적음을 알려준 칼리안이 고개 숙여 예를 보였다.
작별을 고하는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