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03화 (304/527)

제53장. 이성이 없는 듯하여(6)

그래. 상복이다.

본래에도 검은 옷을 잘 입었으니 그러한 의도로 챙긴 것은 아니었으나, 오늘따라 유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크리티아의 마법사 협회장 메이린이 제온과 손을 잡았다.

익히 알려진대로 세작들은 마법 용품을 많이 썼다. 에일라가 마력탄과 마법의 힘으로 독을 담아 둔 비녀, 그리고 변장을 위한 얇은 팔찌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런 것들을 만들고 제공하는 일 역시 베른의 몫이었다. 그래서 메이린 론즈를 꽤 여러 번 만났고 그러다보니 적당히 친해졌다.

지금 그 일은 여전히 데블란이 하고 있다 했다.

"데블란이나 세크리티아로부터 등을 돌렸다 하기보다는 애초부터 믿음을 가진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 마법사의 신의는 쉽게 꺾이지 않으니."

"그렇겠죠."

데블란이 메이린의 신의를 얻었을 리 없다.

결국은 베른의 빈자리가 또 드러난 셈이다.

그래서 상복이라는 생각을 했다.

베른의 빈자리를 되새길 상복이기도 했고 데블란의 죽음을 기원하는 상복이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그것은 상복이었다. 칼리안은 상복을 입었다.

"엊그제 카스트린 경이 체이스 세자 저하를 대신해 귀족들을 만났어요."

에일라의 목소리가 칼리안을 불러들였다.

검은 재킷의 소매를 장식한 검은 자수를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에일라는 협회장에 대한 이야기 대신 다른 것을 말했다.

"사안이 사안이라 직접 나선 것 같아요. 다른 사람 눈에 띄어도 안 되니까."

"어머님의 그 자료를 건네준거야?"

에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부는 아니었고 데블란이 병에 걸렸다는 것과 린 후작이 그동안 텐실의 신관을 막아왔던 자료, 그리고 데블란 손에 사라진 가문들 정도."

"반응은?"

"생각보다 돌아오는 반응이 괜찮았대요. 그날 세자 저하께서 야밤에 왕궁 밖에서 주사를 부린 일에 대해 귀족들이 호기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빠르게 린 후작이 나온 거구나."

"네. 마나실 후작은 앞에서 경고를 하고 뒤에서는 플란츠 저하와 체이스 저하 덕에 귀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데블란도 우선은 한 발을 물린거죠."

"그래."

작게 답한 칼리안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닮았다.

칼리안과 플란츠는 닮았다. 칼리안이 제 입으로 플란츠에게 직접 그런 말을 했을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확실히 닮았다.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형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자료만 있었으면 귀족들이 그렇게 쉽게 믿고 동요하지는 않았을 것을 왕자님도 아시잖아요. 결과가 나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얼굴이세요."

"결과 문제가 아니라."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루이즈가 칼리안의 방법을 똑같이 따라한 이유는 안다. 데블란이 칼리안을 떠올리도록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리했을 테니, 음독한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선택이라 하나 그런 마음을 먹은 것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런데 플란츠는 아니다.

"왕자님이 실리케를 상대할 때 했던 일을 따라하신 게 그렇게 마음에 안들어요?"

"이해가 안 되는 거야, 나는. 에일라."

소문.

별 것 아닌 듯 하지만 실리케의 근간을 뒤흔든 것. 그것이 바로 실리케의 높고 단단한 탑을 무너뜨리기 위한 칼리안의 첫 수였지 않나.

"내 형님께서는 배우고 실천하는 것에 어찌나 경계가 없으신지······ 그것이 마치 이성이 없는 듯하여."

비꼬는 듯, 혹은 한탄하는 듯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실리케 한 명이 제 세상의 전부였던 놈이 바로 그 실리케를 꺾게 한 방법을 따라했으니, 정신머리 한 편이 남들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돌고 돌아 제 자리에 붙어 있는 모양새까지 닮아있을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세자 저하도 화가 많이 나셨을 테니까요. 받았으면 갚아줘야 하고 화가 났으면 화풀이를 해야죠. 방법이 무엇이든 필요하면 써야 하는 게 맞고요."

에일라가 에일라다운 대답을 했다.

피식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에일라가 뒤로 미뤄주었던 주제를 다시 꺼냈다.

"그래. 그건 두고, 협회장에게서 얻어낸 정보는 있어?"

에일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함께 흔들리는 비녀가 괜스레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시선이 갔다. 그런 칼리안의 귀에 에일라의 침착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오늘 아침까지는 린 후작이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눴는데, 입이 무거워요. 데블란 역시 협회장을 통해 제온의 전사들을 부른 것 같다 했지만 아직은 정황만 확인되고요. 그리고 오늘 밤에 카스트린 경이 협회장을 직접 만날 것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내가.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고문에는 취미 없으실 것 같았는데."

"취미 없어."

"그럼 그냥 계세요. 여기 이제 왕자님이나 제 나라 아니에요."

돌려 말하는 것 모르는 에일라가 칼리안의 침잠을 깨뜨렸다.

"그렇네. 내가 그걸 자꾸 잊네."

"네. 그러니까 다른 생각 말고 정신 차려요, 왕자님도. 또 그렇게 다쳐오지 말고요."

"죽이겠다며 찾아오더니. 벌써 걱정해주는거야?"

에일라의 눈이 잠시 찌푸려졌다 돌아왔다. 그러더니 에일라는 정말 의외의 대답을 했다.

"주인 바뀐지 얼마 안됐어요, 저. 다 적응하기도 전에 새 주인 만날 일 생기는 건 별로라서."

이 말에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그래. 다른 주인 만나게 하긴 힘들지, 내가."

에일라의 비녀가 다시 한 번 흔들린다.

돌아가면 저것부터 바꿔줘야 되겠다 생각을 한 칼리안이 잠시 시간을 확인해본 뒤 물었다.

"히나는 별 일 없지?"

"네. 의심사지 않도록 저 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이 돌아가면서 함께 다니고 있어요. 다른 기사들도 서로서로 짝지어서 드나들고 있으니 특별히 눈에 띄지는 않을 거예요."

"내가 알아야 할 다른 건."

"없어요. 당장은."

"알겠어."

"이제 뭐 하실 거예요?"

칼리안이 사일런트 막을 거뒀다.

시야를 조금 가리던 반투명한 막이 사라지자,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던 베고니아 꽃밭이 명확히 보였다.

"내가 할 일."

에일라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조금 먼 곳에서 칼리안을 데리러 온 이가 눈에 보였다. 데블란의 시종장이다.

칼리안이 누굴 다시 만나려는지 눈치챈 에일라가 곧바로 물어왔다.

"같이 가면 안 되나요?"

"칼 꺼낼 거잖아. 안돼."

곧 칼리안이 목을 조이던 셔츠의 가장 윗단추를 하나 풀었다. 그리고 작게 기지개를 켰다.

남들이 있는 곳에선 보이지 않던 모습이었으나 뭐 어떻겠나. 보는 이라고는 에일라, 그리고 칼리안과 아무 상관 없는 데블란의 시종 뿐이니.

조금쯤, 풀어져도 되겠지.

"다녀올게."

칼리안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것을 눈치챈 에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녀오세요."

그리고 얌전히 칼 집어넣고 기다리겠다는 대답을 했다.

* * *

세크리티아 왕궁의 본궁은 조금 독특하다.

가운데에 거대한 물의 정원을 둔 직사각형 형태. 즉, 길다란 건물 두 개와 보다 짧은 건물 두 개가 네모난 모양을 이루며 이어져 있었다. 처음 지어졌던 궁을 증축하여 그런 모습이 되었다 했다.

그 덕에 본궁의 어느 곳을 가든, 바깥쪽을 향해 난 창을 통해서는 베고니아 꽃이 가득한 외부 정원이 보였고 본궁 안쪽을 향한 창밖으로는 물의 정원이 보였다.

- 카이리스 왕궁에서는 이런 곳이 없어서 더 신기한 것 같아요.

- 없긴 하지.

사방이 본궁 건물에 막힌 모양새가 된 물의 정원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분수가 있고 사방의 모서리에 각각 작은 분수가 있었다. 그 다섯 개의 분수는 작은 물길로 서로 연결되었으며, 정원을 가로지르는 넓은 물길도 세 개가 더 있었다. 중간중간 징검다리처럼 대리석이 놓이고 그 위에 마법 등불을 설치해 두었다.

때문에 낮에는 햇살이 들고 밤에는 등불에 비친 얕은 물이 언제나 반짝이는 그곳은 카이리스에서는 볼 수 없을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만약 하츠아라였다면 인위적으로 각진 물길이 아니라 넓은 들을 가로지르는 냇물을 옮겨다 둔 것처럼 만들었을 테니까.

- 카이리스 왕궁의 인공호수나 시냇물도 좋지만 여기도 정말 예뻐서 마음에 들어요. 나중에 돌아가면 다시 보고 싶어질 것 같아요.

- 그래.

어쩌다보니 팔찌 부자가 됐다.

체이스와 연결된 것이 하나, 히나의 귀걸이와 연결된 것이 또 하나.

칼리안이 잠에 든 뒤, 칼리안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키리에가 급한대로 그것을 플란츠에게 맡겼었다. 그날 왕궁 안에 있던 이가 플란츠와 체이스 뿐이었으니 정말 어쩔 수 없이 맡겼다. 그리고 플란츠는 팔찌를 아직 돌려주지 않았다. 지금은 키리에가 자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플란츠는 하루에 두 번 이상 보고 싶지 않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하루의 대부분을 붙어있어야 하는 그 파란머리 미친 마법사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1층의 회랑을 걷고 있는데 바다색 머리를 비녀로 틀어올린 검사가 보였다. 조금 전 칼리안이 말했던 이야기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시선을 두니 에일라가 플란츠 쪽을 쳐다봤고, 함께 있던 히나가 에일라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불렀다.

'아, 잘됐다. 왕세자님이 저 호위해주세요.'

에일라의 마법도구 덕분에 완전히 다른 인상이 된 히나가 이런 말을 했다.

'브리지트님이 제 호위 봐 주실 차례인데 칼리안 왕자님 만날 일이 있다고 해서요. 잠깐만 왕세자님 호위해드리는 척 따라다닐게요.'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이며 생긋 웃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 달라진 머리색과 눈동자, 늘어난 키와 체격. 전부 다 달라졌는데 웃는 얼굴만은 그대로다.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도 그대로다.

그러고보니 키가 자라기는 했다.

도로 줄어들겠지만.

'······ 그러던지.'

그 생각을 하니, 입 밖에 낸 것은 아니었지만 히나가 작다 여겼던 것이 조금 미안해졌다. 그래서 이렇게 잠깐동안 기사 한 명이 왕세자를 따라다니는 척 왕세자가 기사를 호위해주게 되었다. 에일라가 돌아올 때까지. 아르센은 좀 기다려도 되는 사람이니까 신경 안 썼다.

할 일 없이 한가하게 정원을 구경하는 척 사방의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발을 옮겼다. 히나의 손을 볼 필요는 없었는데 습관처럼 계속 손을 내려다보게 된다.

조용하다.

분수의 물 소리, 발 밑을 흐르는 물 소리만 귀를 채운다.

- 치료는 더 안받으셔도 정말 괜찮아요?

- 괜찮아.

- 아프면 말해주세요. 소공작님은 지키는 걸 잘하시고 브리지트님은 싸우는 걸 잘하시지만 저는 고치는 걸 잘하니까요.

- 알았어.

-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다치지는 말아요. 지난번처럼 또 이상한 것 마시면 정말로 맴······ 화낼 거예요. 오빠가 다쳐오는 걸 걱정할 일이 없어져서 좋아했더니, 칼리안 왕자님이랑 플란츠 왕세자님이 다쳐오기 시작해서 하나도 안 좋아요.

플란츠가 다시 한 번 생소한 얼굴을 했다.

- 알았어.

맞는 말이다. 히나는 고치는 걸 잘한다.

그렇게나 생각이 많았는데 물 소리만 들린다.

길고 긴 잔소리도, 그 말을 하는 이유도, 낯설어서. 낯선 것이 여전히 이상하지만 싫지만은 않은 것 같아서. 플란츠가 아주 작게 웃었다.

그래. 정말로 고치는 것을 잘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히나."

- 네.

머리 말고 귀로 들린 목소리에 히나가 플란츠를 쳐다봤다.

"칼리안의······."

이렇게 말하던 플란츠가 입을 다물고 다시 머릿속으로 말을 전했다.

- 칼리안의 몸 속에 있던 독을 없앴지.

- 이번에는 독이 없었지만 해본 적은 있어요. 이곳의 후궁님도 독을 드셔서 없애고 있고요.

- 그럼 만약에.

플란츠의 말이 잠시 멈췄다.

빠르게 돌아가던 머리가 하나의 가설을 만들어냈다.

- 심장 속에 돌이 들어있다면. 그것도 아픈 것으로 보고 고칠 수 있나.

- 돌이요?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입술을 꾹 다물고 생각을 해보던 히나의 고개가, 반갑게도. 정말 반갑게도 위 아래로 움직였다.

- 카이리스 왕궁의 치유사가 그런 병이 있다는 얘기는 해줬어요. 몸 속에 돌이 자라서 아픈 병도 있다고. 어떻게 고치는지 배웠으니까, 심장 속에 있는 돌이라 해도 가능할 것 같아요.

되돌리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놈들을 죽이지 않고 무력화시킬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플란츠가 눈을 내리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을 이어나갔다.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는군."

그런데 그때, 플란츠의 생각을 끊는 목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을 만나기 위해 걸음하던 중 눈에 띈 두 명을 향해 직접 다가온 사람.

데블란이었다.

'절대로 마주치면 안돼, 히나. 마주치더라도 들켜서는 안돼. 말을 걸면 뒤로 물러나. 손도 쓰지 말고 끄덕이지도 말아야 해. 절대로 혼자 있게 두지 않을 테니까, 누가 함께 있든 너는 뒤로 물러나.'

칼리안의 경고가 히나의 귓가를 맴돌았다.

히나가 한 발을 뗐다.

찰나의 순간 바닥에서 떨어진 발이 뒤로 향했다가 다시 앞으로 갔다. 한 발을 앞으로 내밀고 나섰다.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지금 히나는 치유사도 아니고 백작도 아니니까. 기사의 복장을 하고 있으니까. 함께 있던 사람이 왕세자니까. 누군가 플란츠를 호위한다면, 술주정 한 번으로 데블란을 매우 곤란하게 한 왕세자를 데블란 앞에 세워두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플란츠의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늦었다.

- 저벅.

히나보다 큰 보폭으로 한 발을 나선 플란츠가 자연스럽게 히나의 앞에 섰다. 데블란의 시선이 히나 쪽을 향했을 때, 플란츠가 인사를 건넸다.

"세크리티아의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살짝 움직여 그 인사를 받은 데블란이 말을 건넸다.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듯하여 잠시 와 보았네."

"제가 전하의 여유를 방해한 것 같아 조용히 생각을 해보던 중입니다."

데블란이 웃었다.

칼리안이 한 번의 인내심을 이미 써버려서 더 이상 참지 못했을 때 짓던 그 얼굴로 웃었다.

"방해라. 그래. 알고는 있는 듯 하니,"

"저와."

그리고 또 다른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이야기 하시죠. 제 형님 말고."

햇살 아래 반짝이는 물의 정원 가장자리에서, 검은 상복같은 옷을 입은 채로. 데블란과 똑같은 얼굴로 웃음짓는 이가 그곳에 서있었다.

"······ 아버지."

어느새 히나의 발 앞까지 펼쳐진 사일런트를 본 플란츠가 눈을 감았다.

아.

내 아우님이 미치셨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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