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02화 (303/527)

제53장. 이성이 없는 듯하여(5)

온 몸에 독이 스몄다.

가장 심각한 것은 몸 속이었고 그 다음은 속이 드러난 허리였다. 등은, 그저 베였을 뿐이었으니 가장 마지막이었다.

때문에 축복의 힘도 딱 그 순서로 칼리안을 치유했다. 루이즈를 함께 치료해야 했던 히나는 모든 상처를 한꺼번에 치료하는 대신 속을 채우고 살을 메우는 것에 먼저 힘을 썼다.

덕분에, 곱디고운 이 뽀얀 등에 마치 핏물이 밴 것 같은 새빨간 흉터가 길게 남았다.

"울겠네."

울 거다.

이걸 보면 얀은 분명히 울 거다. 장담할 수 있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키리에가 옷 시중을 들어주며 말을 건네왔다.

"공자님 말씀이십니까."

"응. 내 새끼코끼리 울면 내 정혼자님이 가만있지 않을텐데. 이를 어쩐다."

당장 뛰쳐나가 다 뒤집어 엎어버릴 생각을 꾹꾹 참고 있으면서 겉모습은 참 여유롭다. 그것을 알아서 키리에는 그냥 소리 없이 웃었다. 칼리안이 그 생각을 꾹꾹 참는 동안 흉터를 본 키리에는 살심을 꾹꾹 참았으니 어쩌겠나. 칼리안 따라 그냥 같이 웃는 수밖에.

"혹시나 형님한테는 말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왕자님."

"얀한테 왜 다쳤는지도 얘기하지 마."

"네."

검은 셔츠의 소매에 루비 커프스를 달아 준 키리에가 답했다. 그리고 셔츠 칼라 끝에 작은 루비가 박힌 금장식을 채웠다.

"가서 쉬어. 못 잤을텐데."

"알겠습니다."

검은 수가 놓인 검은 재킷을 입는 것까지 모두 도운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나중에 무리가 없을 테니 두말 않고 자신의 방으로 가 잠을 청했다.

준비를 모두 마친 칼리안이 잠시 거울을 보다 발을 옮겼다.

* * *

한겨울의 카이리스는 바람에도 얼음이 밴다.

한겨울의 세크리티아에는 여전히 꽃이 폈다.

물론 봄부터 가을까지 이어지는 따뜻한 날씨에만 필 수 있는 대부분의 꽃은 모두 저물어 사라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어나는 꽃이 있었다. 꽃은 물론이고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을 다 거두어 가겠다는 듯 독한 바람이 끊이지 않는 카이리스의 겨울과 완전히 달랐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렇게나 혹독한 겨울을 버텨내는 것은 카이리스 사람들인데 더 지독한 것은 세크리티아인이라는 사실이다.

겨울 내내 피어나는 들꽃처럼, 이미 지고 나서도 달빛 아래 한 번을 더 피워내는 시나스타처럼, 세크리티아의 사람들은 실로 지독하다 했다. 제 손으로 제 삶을 들어내어 잘라내듯 지워버린 세크리티아의 대왕을 닮아서 그렇다는 말도 있었고 일생을 바다 소금내에 절여져 살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었다. 증명할 길이 없으니 결국은 그저 말 뿐인 이야기들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크리티아 땅에 터전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대체 왜 그렇게 지독한 성정을 지니고 있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플란츠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잘 먹네."

내 아우님의 위장이 세크리티아의 바다만큼 드넓은 이유에 대해서.

칼리안에 대해 이미 수도 없이 많은 이해를 포기해왔던 것처럼 오늘도 그냥 마음 편히 포기했다. 세크리티아 땅에서 나고 자란 속을 가지고 있어서 위장도 지독하게 변했나보다 하고 말았다.

사실 칼리안이 잘 먹는 모습을 하루 이틀 본 것은 아니었다. 바나나 몇 송이를 그 자리에서 먹어치우는 진귀한 광경도 목도했다. 그런 플란츠가 굳이 입을 열어 칼리안의 식사량을 언급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어마어마하게 먹었다. 아니, 먹고 있었다.

"오랜만에 먹으니까 맛있네요."

"······ 그래."

눈 떴다는 말에 찾아와 보니 바나나 한 송이가 이미 껍데기들만 남아 있었다.

그 후에는 옥수수와 양파를 곱게 갈아 만든 스프 한 접시를 우아한 동작으로 비워낸 뒤 두 접시의 양고기 스테이크를 교양있게 먹었다. 그 뒤 주먹만한 흰 빵 세 개를 소리없이 입에 넣더니 품격있는 태도로 바다 홍합과 굴과 새우를 마늘과 함께 구운 요리를 세 접시 해치웠다.

아, 저놈 팔뚝만한 크기의 구운 랍스터도 저 고상한 뱃속에 들어갔다. 중간중간 사라진 작은 접시 위에 뭐가 있었는지는 굳이 다시 떠올리는 것도 귀찮다.

"형님이 너무 안 드시니까 제가 많이 먹는 것처럼 보이는 것 아닙니까."

웃기지 마라.

차라리 히나 키가 자랐다는 말을 인정하겠다.

이렇게 대답했다가는 작년에 던진 나이프 갚아주겠다며 직업 전문가의 나이프 던지기를 시연해 줄 동생놈임을 잘 알았다. 그래서 플란츠는 그냥 자신이 비운 스테이크와 샐러드 접시, 그리고 먹고 남은 흰 빵 반 조각만 잠깐 내려다봤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여한을 풀겠다는 듯 민트잎 든 탄산수 두 잔을 비워낸 칼리안이, 동생 눈 떴다는 말에 찾아와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식사를 함께 하고 있는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리고 뭔가를 물으려는데 플란츠의 입이 먼저 열렸다.

"몸은."

"괜찮습니다."

완벽히 다 나았다는 말은 아니다.

적당히 움직이고 머리를 더 많이 쓰다가 필요할 때 검 뽑을 만큼은 된다는 뜻이다.

"주무셨습니까."

"괜찮아."

마음 편히 잤다는 말은 아니다.

"네."

완두콩이 완두콩 색이라 말해줬다 해서 제 손으로 누군가의 심장을 베어낸 느낌까지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애초부터 그것을 모르고 칼을 뽑진 않았을 테니 그냥 짧은 대답만 했다.

"저 지금 며칠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사흘."

"오래 잤네요. 어머님은 어떠십니까."

"상황이 나쁜 건 아닌데. 아직."

상태가 나빠진 것은 아니지만 아직 정신을 차리지는 못했다는 소리였다. 축복의 힘도 없고 칼리안만큼 지독한 것은 이 세상에 딱 칼리안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히나가 있으니 그래도 다시 나빠질 걱정은 없겠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 칼리안이 한동안 플란츠를 쳐다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 반지며 팔찌며 다 가져가셨고 얀도 없습니다. 키리에는 내내 제 곁에 있었던 터라. 제가 알아야 할 것이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별 일 없었는데."

"형님 자꾸 그렇게 거짓말 하시면 키 안큽니다."

"짖지."

"더 짖기 전에 얘기해주세요."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더 쉴 생각은 아예 없는 놈이다. 플란츠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한 번, 그리고 긴 말이 하나 나왔다.

"히나는 치료하는 중이고 아우님의 새 부하가 호위 맡았던데. 세크리티아 마법사 협회장 체포했고 린 후작 석방됐고. 마나실 후작은 리베른으로 연락을 했고 세이렌 경과 그레이스 경은 마법사 협회 드나들면서 정리하는 중이고.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정원에서 오리 키우는 것 봤고 린 영애는 아우님에게 화가 나 있던데. 그 정도."

"······ 음."

혼란스럽다.

사흘 동안 대체 뭔 일이 있었나.

이해되는 일과 이해되지 않는 일과 있어야 할 일과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일과 왜 생겼는지 모를 일이 뒤죽박죽 섞여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칼리안은 그 모든 혼란의 끄트머리를 붙들고 질문같지 않은 질문을 했다.

"아리안느는 왜······?"

"아우님의 새 부하가 기절시켜서."

에일라가 누굴 기절시키는 방법이야 한 가지다.

"설마 에일라가 아리안느를 때렸습니까."

"자료 받으려다가."

플란츠가 귀찮다는 듯 상황을 조금 더 전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한 칼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참 오랜만에 느껴지는 기분을 좀 참아볼까 하다가 참지 못하고 그대로 큰 웃음을 터뜨렸다.

왕자의 수하가 타국 후작의 딸을 기절시켰는데 재밌단다.

"손속에 주의를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필요하니까 했을 겁니다."

"린 영애는 우리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것 같던데."

"믿는 것이 이상한 일 아닙니까. 아리안느는 그렇게 어리숙한 사람 아닙니다."

"린 후작이나 데블란이 문제 삼으면 어쩌려고."

"그 정도는 체이스 형님이 어떻게든 알아서 잘 막아주실 겁니다. 괜찮아요."

아리안느에게 완전히 붙들려 있던 것 같던 체이스를 떠올려본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칼리안 말이 안 믿긴다는 뜻이다.

"데블란이 체이스 형님과 아리안느를 정혼시킨 것은, 아리안느의 안위를 걱정한 린 후작이 알아서 목소리를 줄여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본래부터 서로 많이 친했던 탓에 둘 다 정혼에 반감이 없었습니다만. 사실 왕족의 짝은 대체로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에 맺어집니다. 형님도 아시겠지만요."

또 뜬금없는 말을 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칼리안이 조금을 더 웃다 말을 이었다.

"형제가 둘이 있을 때 한 명의 상대방이 그 정도로 대단한 가문의 사람이라면, 다른 한 명의 상대가 누가 될지 관심을 많이 받습니다. 왕위를 놓고 가문간의 싸움이 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다른 한 명이 왕위에 전혀 관심이 없으면, 그리 특별한 사이도 아니고 서로 바빠 오래 보지도 못하는데다 가족도 가문도 없는 기사 지망생을 정혼자로 삼기도 합니다."

그 기사 지망생이 누구일지 눈치 못챌 플란츠가 아니다.

대체로 칼리안의 말에 놀라지 않던 플란츠도 이 말에는 조금 놀랐던지, 음료 든 컵을 들었다 내려놓는 손이 잠시 멈췄다 움직였다.

"그러니 체이스 형님은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을 겁니다.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 그래."

"그보다. 반지랑 팔찌, 이제 돌려주시겠습니까."

하나도 도움 안 되는 상황 설명은 그냥 체이스나 앨런에게 듣기로 한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그 요구가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저도 모르게 '국혼 없이 정혼만 했다면 그 왕제는 몇 살이었을지'를 따져보느라 머릿속이 조금 바빠져버린 플란츠는 칼리안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반지와 팔찌를 절대 돌려주지 않겠다 생각했던 것도 잊고 그것들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칼리안이 씩 웃었다.

플란츠는 똑똑했지만 칼리안은 노련했으니까.

* * *

그리고 딱 거기까지.

오랜만에 눈을 떴고 마음에 드는 옷을 입었다. 바나나도 먹고 밥도 먹었다. 앨런은 칼리안을 보자마자 그 따뜻한 팔로 꼭 끌어안고 다독다독해주기 시작했다. 개운하지는 않아도 꽤 많이 좋아진 몸 상태와 과분할 만큼의 온기에 한없이 풀어지던 기분이 칠흑의 구렁텅이로 쑥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앨런의 팔 안에서 한 걸음을 빠져나온 칼리안이 고개 숙인 채 시린 목소리를 냈다.

"형님께서는 차에 독이 들었는지 몸소 확인해보셨고······."

차에 독이 들지 않았으리라는 확신 때문에 데블란의 앞에서 객기를 부려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왕세자위에 오른 것을 상대가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벌인 행동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까지 무모하게 군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플란츠를 만나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당장 화가 나는 일이 또 하나 있었다.

"독차는 스승님께 갔다는 말씀이십니까."

플란츠가 확인해보려 했던 그 상대, 세크리티아의 마법사 협회장 메이린 론즈는 플란츠에게 독차를 건네지 않았다. 거기에서 멈췄다면 다행이다 하며 넘어갔을 일이지만 메이린은 그러지 않았다. 플란츠가 아닌 앨런으로 대상을 바꿨다.

앨런에게, 하필 독을 건넸다.

"끄떡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몸이야 그렇겠습니다만.

말을 삼킨 칼리안의 주변에, 창 밖에 피어난 꽃들을 전부 다 꺾어버릴 듯한 찬 기운이 휘몰아치다 잠잠해졌다.

앨런이 독에 해를 입지 않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그것이 정말인지 확인하려 하거나 물어본 적 없었다. 리베른에서 선물받았다던 단 술을 아들 로닐이 아닌 앨런이 그냥 마셨다면 아무도 죽지 않았으리라는 끔찍한 가정을 앨런이 다시 떠올려보게 될까봐.

"앞으로는 그 누구도 스승님께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책이나 마시지요."

실리케의 앞에서 독을 마셔서, 그 일을 루이즈가 알게 되어서, 칼리안이 앞뒤 가리지 않고 데블란의 심장을 꿰뚫어버리지 않아서, 그런 이유들로 벌어진 일이라 여기지 말라 하였다.

"안 할게요."

"그럼 되었습니다."

아무렇지 않음을 가장하며 대답한 앨런이 소파를 가리켜보였다.

"재미 하나 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이만 앉으시지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푼 칼리안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앨런은 잠잠한 얼굴로 칼리안을 보다 입을 열었다.

"린 후작이 석방되었습니다."

"네.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정확한 내용을 알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앨런이 메이린 론즈를 체포하게 된 이야기를 마저 전하며 덧붙였다.

"마법사 협회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진행되는 중이니, 그쪽 일이 보통 많은 것이 아닙니다. 그 덕에 결국은 린 후작이 석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이 마법사 협회 뿐만 아니라 제온과도 연관이 있어 엘린느에게도 연락을 했습니다. 마법사 협회의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조사차 보내겠다 하였으니 참고해 두시지요."

"알겠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 밖에 내기 싫은 이름 하나를 올렸다.

"데블란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조용합니다."

"병세가 악화되었다거나 다른 이유는 보이지 않고요."

"네. 그냥 조용합니다."

"불안한 일이네요. 스승님이 계시다 해서 몸을 사릴 리는 없는데."

제 나라에 무슨 세력이 숨어들었는지에는 관심 두지 않고 칼리안에게 암수를 뻗은 데블란에게 앨런은 제대로 된 경고를 전했다. 세크리티아의 남작 앨런 마나실이 세크리티아의 지도를 바꾸든 주인을 바꾸든 무엇 하나는 바꿔놓겠노라고.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 아닙니까."

"에반이라면 그 말을 듣고 숨죽이고 상황을 살폈겠습니다만 데블란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무의미하게 사흘을 보낼 사람이 아니에요."

경계심 가득한 말을 들은 앨런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무의미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자님께서 잠에 드셨던 그 날이 플란츠 세자 저하의 생일이었지 않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러고보니 선물 미리 주기를 잘했나보다.

생일까지 팔아가며 이곳에 왔는데 정작 생일 선물은 주지도 않고 잠만 잔 동생이라며 두고두고 원망을 받을 뻔했지 않나.

"그날 밤, 플란츠 왕세자가 왕궁 밖으로 나갔습니다."

"······ 또요."

"헤르츠 경이며 세이렌 경이며 줄줄이 끌고 다녀왔으니 그것은 무어라 타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줄줄이 끌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우리 왕자님께서 왕세자께 무엇을 가르쳐 두셨는지 제가 아주 잘 보았습니다."

"제가 무엇을요."

그 일을 떠올린 앨런이 웃음을 참는 얼굴이 됐다. 대체 뭘 했는지 불안한 마음이 된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을 때.

"사람이 취하면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는 법이 아닙니까."

이렇게 말한 앨런이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그날의 일을 전했다.

그날 밤.

고요하기 짝이 없는 귀족들의 저택가.

- 오늘, 새벽에는 습격을 당하고 아침에는 독을 마실 뻔하고도 아직 살아있으니 축하를 해야지.

- 축하는 왕궁 안에서 받으셔도 되지 않습니까, 플란츠 왕세자 저하.

그 조용한 곳에서 참 커다란 소리로 옥신각신해가며 카이리스의 왕세자에게 축배를 건넬 세크리티아의 귀족은 하나도 없느냐 했단다.

- 파란 머리 마법사.

- 네, 저하.

그 희멀건한 얼굴에, 호화찬란한 옷을 입고, 새하얀 말을 타고, 마법사 협회를 반파시키며 싸움을 벌이고 온 새파란 머리 마법사와 보라 머리 마법사를 이끌고.

온 사방에 제 입으로 소문을 냈단다.

- 이곳의 전하께서도 병환이 깊다 하고, 후궁께서는 내가 미처 마시지 못한 그 독을 마시고 쓰러졌다 하는데. 왕궁 안에서 축하를 하라니. 생각하는 것이 마치 브리센같으니 부군단장 직위 잃어버린 것도 괜한 일이 아니군.

- 차라리 욕을 하시라니까요. 위험하니 드리는 말씀 아닙니까.

- 오늘. 이 내가 태어난 날에. 내가 스스로 축하를 하겠다는데. 하나뿐인 내 아우님께서 저리 다쳐 누워계시니 다른 축하할 이를 찾아봐야 하지 않나.

세크리티아 국왕의 병환이 깊음을.

루이즈가 독을 마시고 쓰러졌음을.

누군가 감히 카이리스의 왕세자와 왕자를 시해하려 했음을. 플란츠와 브리센이 사이가 좋지 않음을. 플란츠와 칼리안의 사이가 나쁘지 않음을.

"······ 하."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었다.

"참 잘 배우셨네요."

거울 속에 다시 한 번 칼리안의 모습이 비췄다.

완전히 새까만 차림이 멋들어진 상복을 연상시킨다.

그리 보이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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