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01화 (302/527)

제53장. 이성이 없는 듯하여(4)

꾸밈이 없는 어두운 방.

귀족이 머무는 곳이라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방. 창살 달린 창문, 푹신하되 포근하지는 않은 작은 침대, 접이식 책상과 두 칸짜리 책장이 있는, 그런 방.

귀족이 지내기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감옥치고는 호사스러운 그 방에서 꽤 오랜 시일을 있었던 레이지안 린 후작은 퍽 평온한 얼굴이었다.

"후궁께서는 어떠십니까."

"고비는 넘기셨습니다. 치료 중이니 차차 좋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내용들은 특별히 숨길 것 없었으나 히나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만은 아니었다. 때문에 체이스는 이렇게만 이야기했다.

"다행입니다. 무탈히 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생각할 줄 알고 제 목소리를 낼 수도 있으나 데블란의 편은 아닌 레이지안. 레이지안이 자신에 대한 반감이 있음을 알면서도, 데블란은 후작저에 암살자를 보내지 않았다. 사실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한다 해야 맞을 터였다. 아무리 데블란이라지만 귀족들을 대표하고 그들을 이끌어 줄 현명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살려뒀다.

대신 데블란은 레이지안이 다른 마음을 먹지 않도록 체이스와 아리안느를 정혼시켰다. 본래의 체이스는 완전한 데블란의 사람이었으니 레이지안에게 '국혼으로 엮인 올가미'를 씌워 놓는 선에서 멈출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플란츠 왕세자께서는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에 세크리티아를 방문하게 되셨군요."

그런 레이지안의 말에 플란츠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과가 사실은 반대라는 것을 이곳에 있는 누구인들 모르겠냐만은 굳이 입 밖에 낼 필요는 없는 말이었으니까.

그 후 플란츠는 레이지안이 아닌 체이스를 향해 질문했다.

- 그 기사. 어디 갔냐고.

- 카스트린 경은 지금쯤 마법사 협회에 있을 겁니다.

앨런과 아르센이 있는 곳이었다.

대륙에서 가장 강하다는 소드마스터가 왜 그 두 마법사가 있는 곳을 찾아갔는지 그 이유를 물으려는데, 둘의 대화는 듣지 못할 레이지안이 체이스를 향해 말했다.

"궁금하신 것이 있다면 말씀하세요.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잠시 말 없이 레이지안을 살피던 체이스가 낮은 한숨같은 대답을 전했다.

"제온에 소속된 대사막의 전사들과 리베른의 마법사가 공격을 했다 하니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제온이 있겠습니다만. 아버지가 제온의 전사들을 어떻게 부리는지에 대한 의문에 앞서 귀족들 쪽을 먼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여겼습니다."

"저를 제외하고 귀족들을 움직이고 제온과 손을 잡을 만한 이가 또 누가 있는지에 대해 알고자 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그것이 누구인지를 확신할 수가 없어서 사실 조금 머리가 아픈 상황입니다. 애석하게도 지금은 나의 새들을 온전히 믿기 어려운 터라. 다른 경로를 통해 들어온 정보가 필요합니다."

"귀족들의 손을 잡으시려면 의심되는 이들을 배제해야 할 테고, 또 어떤 새들이 제온의 손을 잡았는지 알기 어려우실 테니······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레이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마치 귀족 세력이 플란츠 왕세자님을 회유하려 한 것처럼 꾸며내고 왕궁 밖으로 나가도록 유도한 뒤 칼리안 왕자님을 공격했다 하셨습니다. 그 후 제온이 다시 끼어들어 두 분을 다 해하려 했고, 브리지트 숲에 갔던 카이리스의 마법사들도 죽이려 했다 하셨는데.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숲에서는 세크리티아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데블란은 칼리안을 죽이려 했다.

정확히는 칼리안과 에우리아, 레이첼을 모두 죽이려 했다. 그 일을 체이스가 꾸민 것으로 위장하여 체이스를 완전히 무릎 꿇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제온은 대사막의 전사들을 추가로 보냈다. 목격자가 없는 외진 곳에서 둘이 다 죽어버리면 전쟁이 발발할 테고, 그렇게 된다면 데블란도 없애고 양국의 전쟁에 따른 이득도 보게 될 테니까. 그래서 칼리안은 데블란 역시 제온에게 뒷통수를 맞은 것이리라 짐작을 했다. 첫 번째 공격은 데블란의 이득이 많았으나 두 번째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두 번째로 공격을 받으셨을 때 제온의 일원 외에 세크리티아의 검사들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까?"

"분명합니다."

"다른 증거가 없는데 어찌 확신을 하십니까."

이 말에 대한 대답은 플란츠가 했다.

"내 아우님이 봤으니까."

숲에서 만났던, 두 전사를 제외한 서른 두 명의 검사들은 제온의 소속으로 보기 힘들었다. 사용하던 검술, 전사와의 대화를 떠올린 칼리안은 그들이 세크리티아 귀족의 사병이리라 이야기를 해줬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인 레이지안이 말했다.

"후궁께서도 그 일을 알고 계십니까."

"칼리안 왕자가 세크리티아의 검사들로부터 공격당했다는 이야기까지, 지난 밤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모두 들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후궁께서는 귀족들이 제대로 힘을 합쳐 제온이 아닌 세자 저하의 손을 들어주기를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만. 아무리 이유가 있었다 하나······ 음독이라니. 좋지 않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심각한 상태로 간신히 살아 돌아온 칼리안.

귀족들이 체이스를 믿고 체이스의 손을 잡도록, 그리고 더 이상 칼리안에게 칼을 건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데블란의 앞에서 독을 마신 루이즈.

하룻밤에 속절없이 둘을 모두 잃을 뻔한 체이스가 테이블 밑으로 내려 둔 주먹을 꾹 쥐었다.

레이지안은 며칠 전 보았을 때보다 몇 배는 수척해진 체이스를 한동안 바라보다 말했다.

"후궁님께서 그리 되신 것이 큰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누군가 그 일을 더 숨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급히 손을 쓴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마나실 남작이 같은 일을 당했다 한다면 전하께서도 입막음을 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그 정도의 큰 일을 조사하려면 결국 린 후작이 필요하니, 린 후작이 풀려나기를 원한 이가 일을 도모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하와 각별한 관계라 하였던 카이리스의 왕자님이나, 그 왕자님의 스승에게 일어난 일에 저는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저는 이곳의 생활에 큰 불만이 없으니까요. 저하께서도 그것을 염려하여 오신 것은 아닌 듯 합니다만."

작은 미소를 띤 레이지안이 이렇게 말했다.

사실 체이스는 레이지안 역시 의심에 대상에 넣어두고 있었다. 지난 밤 내내 키리에가 레이지안 쪽을 살피지 않았다면, 때문에 레이지안이 다른 일을 꾸밀 시간이 없었음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함께 의심을 했을 터였다.

덕분에 의심 하나를 줄이게 된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후작을 경계한 까닭이라기 보다는, 플란츠 왕세자가 아니라 마나실 경의 차에서 독이 나온 것이 이상하여 찾아왔습니다. 지난 밤까지만 해도 플란츠 왕세자의 목숨을 노리던 이들이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왕세자가 아닌 왕자였다면, 플란츠 왕세자께서 드신 잔에서 독이 나왔겠지요. 그런데 도중에 마음을 바꾸어 마나실 남작이 마신 차에 손을 썼다는 것은."

플란츠가 짜증 어린 표정을 지었다.

독을 받을 뻔했던 당사자를 앞에 두고 너무 아무렇지 않게 상대방의 수를 논하고 있는 저 두 명의 대화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까닭이다.

"내 위치가 바뀐 걸 알았다는 거잖아."

계획의 변경.

칼리안이 예상했던 것처럼 본래에는 플란츠를 해치려 했으나, 플란츠가 왕세자위에 오른 것과 앨런이 세크리티아를 찾았음을 알게 되었다. 플란츠의 '효용 가치'가 조금 바뀌게 된 것이다.

발칸의 전권을 쥔 왕세자가 되었으니, 플란츠를 죽여 전쟁을 불러오기보다는 차라리 다시 손을 잡아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했을 수 있다.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획을 바꿨을 겁니다. 다만 그렇게 하려면 지난 밤에 섣부르게 플란츠 왕세자에게 칼을 보냈던 일을 누군가에게 덮어씌워야 했을 테고."

이렇게 말한 체이스의 눈이 레이지안을 향했다.

정황 상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될 수 있을 레이지안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본인들은 한 발 물러나있다 상황을 보려 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는 갑작스럽게 독차를 건넬 대상을 바꿀 이유가 없었다.

"다만. 갑작스럽게 마음을 바꾸면 실수가 생기게 마련이라."

이렇게 입을 연 뒤 잠시 말을 끊은 체이스가 레이지안을 보며 물었다.

"카이리스의 왕세자가 결정된 것을 지금 귀족들이 알고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됩니까."

"거의 없습니다. 제가 이곳에 갇혀 살기 전이라면 저를 통해 이런저런 정보를 받았겠으나 지금은 완벽할 정도로 정보가 통제되고 있으니까요. 카이리스의 왕자들이 세크리티아를 찾은 사실을 아는 정도까지는 되겠으나, 글쎄요. 오늘 오전에 갑작스레 결정된 왕세자위에 대해 알지는 못하겠지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렇다면 나와 내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어느새 테이블 위로 올려진 체이스의 손가락이 잠시 톡톡 소리를 냈다. 안타까운 얼굴이 된 레이지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메이린 론즈."

세크리티아의 마법사 협회장.

"카이리스의 헤르츠 백작이 왕자님의 뒤를 이어 협회로 찾아갔다면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겁니다."

레이지안과 마찬가지로 같은 이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던 체이스가 실소했다.

왕위에 오른 뒤 마법사로 이루어진 군대를 만들기 위해, 체이스는 미리부터 마법사 협회와 꽤 좋은 관계를 쌓아오고 있었다. 그러니 메이린은 체이스를 믿지 못하고 전쟁을 일으키려 할 이유도 없었고 레이지안을 공격할 이유도 없었다. 앨런을 적당히 건드려 세크리티아에 커다란 위협을 가져오게 할 마음을 먹을 이유 역시 없었다.

메이린이 제온과 연관되어있지 않다면, 없는 것이 맞았다.

"······ 제온과 손을 잡은 이를 찾은 것 같습니다."

체이스가 말했다.

독이 들었을지 모를 차를 쭉 들이켜봄으로써 누군지도 확신 못할 상대가 목표를 바꿨는지를 확인한, 제 몸 아낄 줄 모르는 타국의 왕세자를 보면서.

* * *

마법사의 신의란 쉬이 꺾이지 않는 법이라.

- 파지지직!

두터운 얼음의 벽 위에 짙은 보랏빛의 전류가 흘렀다.

엘프의 도시를 찾아가던 중 시오나 힐을 마주했을 때 발칸의 대원들이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모양새의 실드였다.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아리안느의 소지품을 찾아 아르센에게 건네던 중 화염구에 맞을 뻔했던 에일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위험이 감지된 순간 몸을 날려 피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거의 동시에 아르센의 실드가 씌워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한 구의 시신이 되어 있으리라.

"······ 세크리티아 새끼들 지독하다더니."

이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두 명의 고개가 한 쪽으로 휙 쏠렸다.

"그런 험한 말씀 왕자님 앞에서 하시면 큰일납니다, 협회장님."

"다 지독한 건 아니에요."

아르센과 에일라였다.

이 자리에 있던 또 한 명의 마법사인 레이첼은, 여유로운 대화에 끼어드는 대신 바닥을 움직여 아리안느가 쓰러져 있는 소파를 자신들의 뒤로 옮겨왔다.

"자네 혹시 린 영애 많이 세게 때렸나?"

주변을 둘러보던 아르센이 에일라를 향해 물었고 에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르센은 매우 아쉽다는 얼굴이 되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영애가 일어나서 이 꼴을 봐야 우리 안 믿은 것을 사과할 텐데. 아쉽게 됐군."

"됐으니까 코코 챙겨, 꼬맹이."

"이미 챙겼습니다, 협회장님."

"그래."

겁대가리든 코코든 잘 챙기긴 한다.

피식 웃은 에우리아가 앞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에우리아의 반대편을 향해 서있던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왕세자 저하이시며 부군단장이셨던 군단장님께서도 이 꼴을 보셔야 기밀 흘린 것을 반성하실 텐데. 그것도 아쉽게 됐습니다."

플란츠와 체이스가 확인한 바와 같은 자세한 정황은 아직 몰랐다. 다만 공격이 오는 순간 대충 눈치를 챘다.

"애초부터 체이스 왕세자님과 손을 잡을 생각이 없었던 것 아닙니까. 발칸같은 군대가 또 생겨봐야 제온에 득 될 것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가보네. 우리 온 김에 이곳의 왕세자도 처리하고 우리도 같이 잡을 생각에 신났겠어."

"이게 다 우리 왕자님께서 유능하신 탓 아니겠습니까."

"뭔 소리야. 인과가 왜 그래."

"그냥 그런 게 있습니다, 협회장님."

아리안느와 레이첼, 그리고 에일라를 가운데 두고 서로 등을 맞댄 모양새로 서 있던 에우리아와 아르센의 대화에서는 큰 긴장감을 찾기 어려웠다. 6서클의 메이린 뿐 아니라 마법사 협회 안에 머무르던 스무 명 가량의 마법사들이 그들을 향해 팔을 뻗고 위협해오는 상태였음에도.

- 콰아앙!

곧 그 여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누군가 방벽을 공격했다. 그와 동시에 얼음의 위를 흐르던 전류가 한 쪽으로 쭉 뻗어나갔다.

- 파지지직!

눈이 멀 듯한 밝은 빛이 번뜩이며, 한쪽 구석에서 방벽을 공격했던 마법사의 실드가 허무하리만치 쉽게 깨어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담은 전류에 감전된 마법사가 그 자리에서 쓰러져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가 되었다.

- 콰과광!

- 콰앙! 콰아앙!

사방에서 몰려든 마법사들이 아르센의 방벽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입술을 꾹 다문 아르센이 이 갑작스러운 공방에 대비하듯 힘을 끌어올렸다. 마법의 힘으로 보호되고 있는 협회의 건물이 우르릉거릴 정도의 충격이 오고갔다.

마법사들의 싸움에 검을 다루는 이가 끼어드는 것은 자살행위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 에일라는 말 없이 아리안느의 앞을 막고 서서 마법이 튀는 것으로부터 자신과 아리안느를 보호했다.

바닥이 얼어붙고 그 위를 흐르는 전류가 마법사들을 덮쳤다. 텔레포트를 이용해 몸을 피한 마법사의 발 밑이 쭉 끌어당겨져, 결국은 전류가 흐르는 바닥 위를 밟는다. 사방에서 얼음창이 난무하고 마법사들의 실드가 얼어붙으면 그 위로 작은 벼락이 내리꽂힌다.

- 콰아아앙!

다시 한 번 거대한 폭발이 일며 화염의 힘이 아르센의 얼음 방벽을 뒤흔들었다.

- 쩌저적!

서클이 가져오는 마력의 차이가 두터운 얼음에 긴 금을 냈다. 날카롭게 벼려진 눈을 한 아르센이 다시 한 번 힘을 끌어모으던 그 때.

- 우뚝!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사방에서 움직이던 마법사들의 움직임이 갑작스레 멈췄다.

중력의 힘이 방벽 밖의 마법사들을 짓눌렀다. 일행을 공격했던 마법사들의 움직임을 한순간에 멈추게 한 사람, 7서클 대마법사의 적은발이 멀리서도 아주 잘 보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 서걱!

협회장의 화염 덩어리로도 한 번에 파괴되지 않았던 아르센의 방벽 한 켠이 푸딩처럼 잘려나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 귀퉁이의 구멍으로 누군가 쑥 들어왔다.

"다들 무사하십니까."

새파란 기운의 오러가 형형하게 빛나는 검을 든 이가 카이리스 마법사들의 안위를 확인했다.

테일란 카스트린.

얼음 방벽의 힘을 무색하게 만든 대륙 제일의 검사를 보던 아르센이 자연스럽게 한 발을 옆으로 옮겼다.

기절해 있는 아리안느를 몸으로 가린 아르센이, 생애 가장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칼리안은 잠을 잤다.

대마법사는 자신의 할 일을 했다.

대륙 첫번째의 검 역시 자신의 할 일을 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도, 카이리스의 왕세자도, 모두가 자신의 할 일을 알아서 잘 찾아 했다.

데블란은 생각을 했다.

루이즈는 치료를 받았으며, 레이지안은 상황을 주시했다.

날이 지나갔다.

하루가, 이틀이, 사흘이 지나갔다.

"······ 흉터 값. 받아야겠는데."

거울에 비춰진 등에 남은 긴 흉터를 바라보면서, 비로소 다시 눈을 뜬 칼리안이 길게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