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장. 이성이 없는 듯하여(1)
세크리티아의 왕궁은 카이리스의 것과 달랐다.
다행히도 세크리티아 대왕은 하츠아라와 달리 이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각 건물로 이동하기 위해 마차가 필요한 정도의 왕궁을 짓지 않았다. 리베른이나 텐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정확히 말한다면 다른 모든 나라와 카이리스의 왕궁이 다르다 해야 할 일이다. 다른 왕궁들은 모두 커다란 하나의 본궁과 별관들, 혹은 집무궁과 거주궁을 포함한 서너 개의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니까.
물론 그렇다는 것이 왕궁이 작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른 두 나라도 비슷하겠지만 세크리티아의 왕궁 역시 작은 크기는 아니었다. 상식적인 선에서 이곳 역시 왕가의 위용을 충분히 보여 줄 만큼은 되었다.
'내 아우님께서 별관까지 움직이기 힘드실테니.'
때문에 하루아침에 퍽 거만해진 플란츠가 동생을 걱정하듯 혹은 대단한 아량을 베풀듯 한 말이 영 잘못된 소리는 아니었다.
한가운데 물의 정원을 두고 사방을 둘러싼 직사각형 형태의 거대한 본궁. 본궁을 지나 한참을 더 들어간 곳에 마련된 첫 번째 별관, 그곳을 다시 지나쳐 또 조금을 더 가면 마주할 수 있는 두 번째 별관. 그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카이리스의 일행들이 머무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른 쉴 곳이 필요할 것 같은데.'
거기에 더해 플란츠는 이런 요구를 했다.
칼리안이 그 별관까지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세크리티아의 왕궁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별관의 보안을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였다.
- 우리를 믿지 못한다는 말인지 제 아우를 믿지 못한다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원하는대로 본궁에 자리를 마련해 머무르도록 해주거라.
당장 자신들을 공격한 세크리티아로부터든, 갑작스레 결정된 왕세자위에 불만을 가진 칼리안으로부터든, 보다 안전한 곳에 머물 필요가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그래서 데블란은 이렇게 플란츠의 요청을 잘 들어줬다.
사실은 일행을 별관에 머무르게 한 뒤 감시하려 하였으나 '갑자기 왕궁을 찾아온 앨런 마나실이 플란츠 왕자를 왕세자라 칭했다'는 소식 때문에 그 생각은 물린 채였다.
그리하여 드나들 수 있게 된 익숙한 곳.
그리고 낯선 걸음.
검은 대리석 위에 복잡한 문양을 조각한 하얀 대리석 판을 덧붙인 장식이 보였다. 검은 배경에 하얀 문양이 양각된 것처럼 보이는 복도의 벽면은 더 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황금과 백금으로 조각된 벽이 있는 아르피아 궁과는 또 완전히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이 가득했으나 칼리안은 벽면의 장식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았다. 따로이 눈을 두고 살필 이유가 없을 만큼 익숙한 곳이었으니까.
"왕자님."
"네, 스승님."
그런데 대륙에 딱 셋 뿐인 대마법사 중 한 명과 이 복도를 함께 걷는 일은 칼리안에게 아주 낯선 것이었다.
"힘드시면 오늘도 제 등을 내어드릴까요."
그 낯선 기분이 참으로 안락하여서,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음을 지었다.
"걸어갈 수 있습니다. 괜찮아요."
"버거워지면 이야기 하시지요. 얼마든지 다시 등을 내어드릴 터이니."
"네. 그렇게 할게요."
히몰리카 한 잔에 잠들어서 이미 한 번을 업혀 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친 몸 때문에 키리에도 아닌 앨런의 등에 업힐 생각은 아예 없었다.
때문에 거절한 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칼리안을 보며, 앨런은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50년을 넘게 살면서 왕자님처럼 속을 많이 썩이는 마법사는 못봤습니다. 정신 빼놓고 팔랑팔랑 노닐다 이리저리 상해서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니 대체 이를 어쩝니까."
"죄송해요. 앞으로는 꼭 조심하겠습니다."
"조심하셔야지요. 품에서 떼어놓기만 하면 성한 곳 하나 없이 돌아오는 통에 늙은이가 도무지 마음을 놓고 살 날이 없습니다. 왕자님 한 분이 잘못되면 죽어나갈 생명이 가히 수천은 될 것인데 어찌 그것을 늘상 잊고 사시는지."
앨런이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그 소리에 생명이 팍팍 깎여나가는 기분이 든 세크리티아의 기사들이 어깨를 굳혔다.
지닌 서클의 수만큼 정교한 장식이 늘어나는 탓에 화려하기로 따져본다면 대륙 세 손가락 안에 들 것이 분명한 로브. 그 새빨간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꺼낸 말이 참으로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안 잊고 지낼게요, 스승님."
"앞으로 기사 둘 씩은 꼭 붙어다니게 할 터이니 절대 떼어놓지 마시지요. 제가 멀리 갈 때에는 왕자님도 챙겨서 같이 데리고 다닐 것이니 그것도 그리 아십시오."
그러거나 말거나.
익숙한 이 곳에서 아버지의 걱정 가득한 잔소리를 듣는 낯선 기분이 그냥 기껍기만 한 칼리안이, 기운 없는 얼굴로 다시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론은 하나다.
세크리티아 왕궁 안에서 칼리안이 가는 곳에는 무조건 카이리스의 기사 두 명과 앨런이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생각 외로 칼리안을 아끼는 칼리안의 스승이, 오로지 칼리안의 안위를 걱정해서 멋대로 결정한 사항'이었으니 그것을 두고 다른 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그 몸을 하고 기어코 세크리티아의 왕세자 저하를 만나보아야 직성이 풀리시겠습니까."
"후궁께서 갑자기 쓰러지셨다 하니, 체이스 형님께서 걱정이 클 것 같아 마음 편히 쉬기가 어렵네요."
카이리스 일행의 본궁 출입을 허락한 것은 다름아닌 데블란이었지 않나. 칼리안과 체이스가 만나지 못하도록 할 수 있을 유일한 사람인 데블란은 지금 플란츠를 만나고 있었다.
그랬으니, 세크리티아의 왕궁에 들어선 칼리안이 곧바로 체이스가 있는 곳을 찾는 것이나 그 걸음에 앨런과 카이리스의 호위기사들이 따르는 것을 막아설 방도가 없었다.
- 아리안느가 가지고 있는 자료는 지금 헤르츠 경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알려지지 않는 이상은 이곳 사람들은 어머님이 왜 그런 상태가 됐는지 모를 겁니다.
- 그것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 스승님께서 움직여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어머님을 만나는 동안 형님이 데블란과의 독대를 마치고 나올 겁니다. 형님을 이어 데블란을 만나주세요. 마법사 협회와 관련된 일로 나눌 이야기가 많으니까요.
겉으로 오고가는 잔소리와 걱정 대신, 보다 진중한 이야기가 머릿속으로 오갔다.
- 레이첼과 세이렌 경을 빼내어 달라 요청하면서 시간을 끌면 되겠는지요.
- 네. 그 사이에 헤르츠 경이 이곳에 돌아오기로 했습니다. 제가 어머님을 만나고 스승님께서 데블란을 만나시는 동안 형님과 체이스 형님께서 다음 일을 진행하실 겁니다.
- 그리하겠습니다.
"아무튼 왕자님 고집은 도무지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곳의 왕세자 저하만 만나신 뒤에는 다 나을 때까지 옴짝달싹 못하게 할 터이니 그리 아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앨런의 잔소리에 적당한 대답들을 내어놓던 칼리안의 발이 멈췄다.
곁에 서 있는 붉은 로브의 마법사 말고, 짙은 잿빛을 내는 기사의 정복을 입은 옛 스승이 앞에 서 있었다.
"카스트린 경."
"저하께서 밖으로 나오시기에 어려운 상황입니다. 부득이하게 안에서 만나겠다 하시니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한 발을 앞으로 딛었다. 그와 함께 앨런도 칼리안의 뒤를 따라 발을 옮겼다. 그러자 테일란이 앨런의 앞을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
"칼리안 왕자님만. 모시겠습니다."
"미안하네만 나는 지금 왕자님의 호위를 보는 중이네. 따로 떨어져 있기가 어려우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저하께서만 계시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해를 부탁합니다."
루이즈가 누워있는 자리에 타국의 왕자인 칼리안이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쉽게 허락되지 않을 일이다. 그나마 칼리안은 체이스의 허락을 구하고 들어가겠으나 그 외의 사람들은 아니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앨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 걱정 마시고 잠시 세크리티아의 국왕 전하를 만나주세요. 세이렌 경과 레이첼 경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눠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앨런이 썩 달가운 것은 아니라는 얼굴로 테일란을 보다, 맨 앞에 있던 여자 기사 둘을 가리켜보이며 입을 열었다.
"기사 두 명의 호위는 받으시지요. 이 나라의 사람들을 온전히 믿지는 못하겠으니."
잠시 생각을 해보던 테일란이 칼리안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전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게나 칼리안을 감싸고 돌던 앨런이 어쩔 수 없이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하는 상황, 그리고 두 명의 기사가 칼리안과 함께 루이즈의 앞에 서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따 뵐게요, 스승님."
"늘 조심하시지요."
"알겠습니다."
앨런과 인사를 마친 칼리안이 테일란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검을 가르쳤다는 예전의 스승에게 칼리안을 맡긴 뒤 문앞을 잠시 서성이던 앨런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만들어보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키리에만 문 밖에 남겨둔 채 다른 기사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칼리안이 할 일을 하는 동안 앨런은 데블란을 만나야 했으니까.
* * *
"오늘 놀랄 일이 많은데. 카이리스에 변고가 생긴 것은 아닌지를 걱정해야 하나 고민을 좀 하였네."
"걱정을······."
데블란의 말투가 다소 바뀐 것을 느낀 플란츠가 별다른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리고 대답할 내용을 고르는 것처럼 잠시 입을 다물고 찻잔을 들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생각난 것이 있다는 것처럼 동작을 멈추고 도로 내려놨다.
"걱정을 하실 여유는 있는 듯 보여 다행입니다."
"내가 여유를 지니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세크리티아의 국왕 전하께서 카이리스를 걱정하실 이유 역시 없었습니다. 전하께 변고가 있거나 칼을 이용해 빼앗은 세자위가 아니니 크게 우려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문제없는 책봉이라면 나 역시 마음 놓고 축하를 건네도 되겠군."
"그보다는 마음 놓고 차를 마셔도 된다는 말씀을 먼저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자 체이스의 친모인 루이즈가 사경을 헤매는 와중이다.
아무리 플란츠가 먼저 청했던 독대 자리라 하나 데블란의 태도가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래서 행동으로 경계하고 '여유가 있어 보인다'며 말로도 경계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블란은 루이즈에 대한 이야기는 완전히 배제한 채 플란츠의 상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 그렇지. 내가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았군."
"그렇습니다."
"그런 것에 마음에 쓰고 있는 줄은 몰랐네."
'차에는 입을 대지 마시고, 어머님 일을 알고 있다 먼저 이야기하십시오. 데블란의 말에 끌려다니지 말고 형님께서 계속 이끌어 가시고요.'
"여러모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상황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겠지. 충분히 이해하네."
고개를 끄덕인 데블란이 플란츠 앞의 찻잔을 가리켜보이며 웃었다.
"그 차에 장난을 쳐두지는 않았으니 안심하게."
데블란은 루이즈의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플란츠는 찻잔 쪽으로는 시선을 두지 않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다른 것에는 어떻겠습니까."
"다른 것이라······ 글쎄. 무엇을 하든 그대가 온전히 안심할 수 있는 일이 있겠나. 다만 또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귀한 손님이니 조금 더 편안히 머물다 가도록 여러모로 신경을 써 보겠네."
"신경 쓸 곳을 잘못 짚으신 것 같습니다."
플란츠가 살짝 팔을 들어 자신의 허리 부근을 가리켜 보였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이셨는지, 먼저 그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간밤에 그대를 향했다는 검에 나의 손이 닿았다 생각하는 것처럼 들리는군."
'다친 것을 알리셔도 상관없습니다. 책임을 묻고, 불쾌함을 보이셔도 됩니다.'
"세크리티아에 전하의 손이 닿지 않는 일이 있겠습니까."
"글쎄. 나는 아무에게나 손을 뻗을 사람은 아니네만."
"그렇기 때문에 전하의 손이 제게 닿았다 여기고 있습니다만."
내가 굳이 신경써가며 해를 입힐 만큼 네가 대단한 인사는 아니라는 말에, 나는 당신이 굳이 신경써가며 해를 입힐 만큼 대단한 사람이 맞다는 대답을 했다.
데블란이 잔기침 섞인 웃음소리를 냈다.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한동안 웃음을 꺼내던 데블란이 플란츠를 응시했다. 플란츠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전하께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내 무엇이 그대에게 실망을 주었을까."
"제 아우 하나를 상대 못하고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이용이나 당한 전하의 판단에, 후궁에게 독이 든 찻잔을 내미는 그 비좁은 아량까지 보았으니. 실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데블란은 루이즈의 독차는 루이즈 스스로가 꾸민 일이라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역시 그리 완벽한 사람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다만 그 정도의 일로 벌써 나에게 실망했다 하는 것을 보니 애초에 나를 아주 높이 평가한 듯 한데······ 이번 일로 내 위신이 아주 많이 내려갔겠군."
"그렇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말이네. 나를 그리 높이 보았다 하니 반갑고, 그대에게 내 손을 두지 않아 실망했다 하니 아쉽고. 무어라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 드네만. 근래 나를 그리 대단하게 보아주는 인사가 없어 그런가, 그대의 말이 이렇게나 반갑고 아쉬울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많은 곳에 신경을 쓸 것을 그랬지. 그러니 이를 어찌한다······."
"한 번 틀어진 것을 되돌릴 수는 없다 여깁니다. 저는 전하께 실망을 한 채로, 전하께서는 저에게 기대를 두지 않은 채로, 잠시 머물기만 하다 돌아갈 테니 이 이상 신경써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데블란이 선뜻 고개를 끄덕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작은 미소를 띤 채 플란츠를 보며 질문 하나를 건넸다.
"그대가 이곳에 홀로 찾아왔으니 돌아가는 길 역시 같아야 마땅할 것 같은데. 내가 그것에 신경을 써주는 것은 어찌 생각하는가."
"과연."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플란츠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마시지 않고 내려놓았던 찻잔을 다시 들어올려 한 모금을 길게 마셨다.
"······ 신경을 쓰실 수 있을지."
원래의 자리에 소리 없이 찻잔을 돌려놓은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단하여. 물러가겠습니다."
대화는 여기까지.
이번에도 먼저 물러가겠다는 허락을 구하지 않은 채 인사를 건네고 뒤로 돌아 저벅저벅, 밖으로 나갔다.
'전하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제 것을 거는 방법은 저도 압니다.'
'······ 전하의 또 다른 아들이 그러했듯이.'
천천히 닫히는 집무실 문을 바라보던 데블란이 살짝 눈을 내리떴다. 루이즈의 말을 떠올려 보던 데블란의 얼굴에 긴 미소가 그려졌다.
* * *
루이즈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창백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운 채였으나, 칼리안에게서 루이즈의 모습을 가려줄 커튼은 내려져 있지 않았다.
칼리안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루이즈의 앞에 섰다.
"돌아가라 하였는데. 칼리안."
루이즈의 손을 잡은 채 곁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체이스가 마른 목소리를 냈다. 칼리안은 다른 대답 없이 잠시동안 루이즈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히나."
칼리안을 따라 들어온 두 명의 호위기사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한 걸음을 내딛자, 키가 한 뼘쯤 줄어들었다. 또 한 걸음을 내딛으니 짙은 갈색의 긴 머리가 은빛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딛으니 체격이 줄어들고, 마지막 한 걸음에 그을린 피부가 하얗게 변했다. 어느새 언제나와 같이 크고 까만 눈을 한 모습으로 돌아온 히나가 칼리안의 곁에 섰다.
칼리안의 옆에서 루이즈를 바라보던 히나가 팔을 뻗었다. 그런데 그 방향이 루이즈가 아닌 칼리안을 향해 있었다.
히나가 칼리안의 손목을 가만히 잡았다.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 않았던 칼리안은 그 손을 피하지 않고 그냥 두었다. 곧 히나는 루이즈에게도 같은 행동을 한 뒤 손을 뗐다.
- 자상한 왕자님이 더, 심해요.
체이스와 테일란은 알아듣지 못할 말.
칼리안이 손을 들어올려 아주 천천히, 서툰 수어를 만들어 보였다.
- 나는, 튼튼해.
- 저는, 자상한 왕자님 먼저, 고치고 싶어요.
- 나는, 쉬면 나아.
- 이 분이, 중요해요? 왕자님 상태가, 훨씬 더, 안 좋아요. 어떻게, 이렇게 다쳐서, 돌아다녀요?
혼이 났다.
잠깐동안 고민을 하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히나. 당장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내 어머니같은······ 분이야. 그러니까."
히나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다른 나라의 후궁이 자신의 어머니같은 사람이라는 말에 놀라지도 않은 채로, 그 큰 눈에 자신만의 고집을 가득 담은 히나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 그런 분을 두고, 다쳐서 왔어요? 왕자님 대신, 치료 받은 걸 알면, 이 분은 더 아파요.
더 혼났다.
히나가 다시 손을 뻗어 칼리안을 또 붙들어 잡았다. 그리고 테일란이 가져다 둔 의자에 앉혔다.
- 움직이기만 해요.
알아들을 수 있는 말.
- 진짜, 맴매할 거야.
그리고 여전히 알 수 없는 말.
더 이상 설명 않고 말을 마친 히나의 양쪽 손이 루이즈와 칼리안에게 하나씩 가 닿았다.
곧 그 작은 두 손에 봄날의 햇빛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