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97화 (298/527)

제52장. 참으세요, 형님(7)

햇살이 비추는 이른 아침.

- 또각, 또각.

작은 구두 소리가 넓은 창 가득한 복도를 울렸다. 보랏빛 장식이 달린 하늘색 드레스 차림의 루이즈가 말 없이 계속 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까지 흔들림 없이 걸어간 루이즈의 발이 멈췄다. 그 앞의 문을 막고 있던 호위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오늘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알고 온 길이니 우선 고하거라."

"죄송합니다."

루이즈가 문 손잡이를 가리켜보였다.

"굳이 내 손으로 열어야 하겠느냐."

"전해드린 바와 같이 오늘은······."

그때, 문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되었다. 모시거라."

데블란이었다.

데블란은, 루이즈나 죽은 디에나에게만은 언제나 깊은 성의와 배려를 보였다. 최근의 일이 있기 전까지는 체이스에게도 큰 흠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겉보기로 그랬다는 뜻이다. 속마음이 어땠을지는 데블란 본인만 알 수 있는 일이니까.

어찌됐건 데블란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기사는 더 이상 막지 않고 문을 열었다.

소파로 걸어와 앉은 데블란이, 안으로 들어선 루이즈가 따로이 묵례를 보이기도 전에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오랜만입니다."

"······ 네. 전하."

부부간의 인사라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서로 만나지 않은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짧은 대답만 전한 루이즈가 데블란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래지 않아 시종장이 들어와 차 두 잔을 내려놓고 나갔다. 말 없는 루이즈의 시선이 그 찻잔에 가 닿았다.

"그래. 사담이나 나누러 나를 찾지는 않았을 텐데. 무슨일입니까."

"그만 멈추시라 말씀드리고자 왔습니다."

루이즈가 고개를 들고 조용히 답했다.

한동안 루이즈를 보던 데블란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을 전했다.

"무엇을 멈추라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벌이시는 일 전부 다, 멈춰주세요."

"나는 여전히 당신을 귀하게 여기고 내 아들을 아낍니다. 또한 내 나라를 운영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중 무엇을 멈출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세자에게 누명을 주실 생각임을 압니다. 여러 거짓을 꾸며내어 얻으려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전하의······"

"듣기에 좋은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꺼내놓는 이야기에 조금 더 신중했으면 합니다."

"그런 전하의 욕심 때문에 죽은 이들을, 저는 모두 지켜봤습니다. 왕비님과 제 가족을 포함해 모든 이들이 어떻게 죽고 어떻게 숨겨졌는지 보았습니다. 지난 밤에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죽었는지. 그 역시 전해들었습니다."

"루이즈."

데블란이 루이즈를 응시했다.

하지만 루이즈는 멈추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카이리스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되고 사형된 이도, 리베른의 국서였으나 사형된 이도 전하만큼 많은 피를 묻히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는 명백한 죄인입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하세요."

"그만."

데블란이 손을 들어올려 루이즈의 말을 막았다.

노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부드러운 얼굴로 루이즈를 보던 데블란이 입을 열었다.

"독이 가득한 그 수면향 하나를 의심하지 않아 건강을 해쳤으니, 따져본다면 그 하나는 나의 잘못이 맞습니다. 다만 그 뿐이니 억지는 그만 부리고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아직 당신이나 세자로부터 등을 돌리고 싶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이미 등을 돌리고 계셨습니다. 전하께서 선택한 방법은 잘못되었습니다. 선택하지 말아야 할 방법들만 취하며 살아오셨습니다."

"선택이 잘못되었다 한들 어찌하겠습니까. 그 역시 생을 살아가는 한 방법인것을."

데블란이 작은 소리를 내며 웃다 대답했다.

여전한 태도를 보던 루이즈가 조용히 손을 뻗어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그 끝을 잠시 매만지다 말했다.

"그저 살기 위한 방법이 아닌, 왕으로서 살기 위한 발악이었다 말씀하셔야 맞지요. 전하께서는 지금의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운 마음에 일생을 비겁하게 사셨습니다. 차라리 저에게 제대로 벌을 내리고 전하께서도 이만 손을 놓으세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드리는 부탁입니다."

"루이즈. 나는 할 말을 모두 하였는데."

이렇게 말한 데블란이 루이즈와 디에나 외의 이들에게는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미소를 지어보였다.

"······ 알겠습니다."

루이즈가 손에 들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 달칵.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대신 평온한 얼굴로 다른 말을 꺼냈다.

"전하의 잘못을 낱낱이 기록한 자료가 있습니다. 잘 숨겼다 하셨겠으나 전하를 지켜본 왕비님과 제 기록이 남았습니다. 전하의 병세에 대해서도 함께 적어두었으며, 병을 고치기 위해 지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도 상세히 남겨 두었습니다. 그것을 본 귀족들은 더 이상 전하를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압니다.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으니 찾는다면 증거도 나올 것이라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나 그것을 안다 하여도 귀족들은 세자의 손을 잡지 못합니다. 세자가 누구의 편이 되어줄지를 믿지 못하여 엉뚱한 이들의 힘을 빌려오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닙니까."

말을 멈춘 데블란이 잠시 생각을 해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라면 나의 피가 섞이지 않은 새로운 이를 왕으로 만들어야 할 터인데. 그 욕심 많은 이들이 과연 누구 하나를 왕으로 내세우겠노라 결정이나 할 수 있을까. 그들은 그렇게 움직이지 못합니다."

"괜찮습니다. 이제부터는 전하가 아닌 세자를 믿게 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만에 하나라도 저는 절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겠노라는 말도 덧붙여 두었습니다. 혹여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제 의지가 아님을 함께 써두었습니다."

루이즈가 데블란을 바라봤다.

데블란은 말하지 않았고 루이즈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세자가 누구보다 저를 걱정하고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이들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제가 전하의 손에 명을 다하면 세자와 전하는 완전히 갈라서게 되겠지요. 그 때에는 귀족들도 마음 놓고 세자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전하께서 그리 어리석다 하시는 귀족들도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전하의 죄를 무시하지 않고 전하의 병세를 알게 되고 세자를 믿기로 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하께서도 모르시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 루이즈."

"전하."

루이즈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덫은 전하께서만 놓으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 같습니다. 전하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제 것을 거는 방법은 저도 압니다. 전하께 배웠으니까요."

데블란이 표정을 굳혔다.

루이즈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 전하의 또 다른 아들이 그러했듯이."

왈칵.

붉은 것이 차올랐다.

루이즈와 체이스의 눈빛을 담은 드레스가 빨갛게 물들었다.

* * *

세크리티아에 제온이 있다.

제온의 개입 덕분에 카이리스의 두 왕자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누가 또 언제 공격을 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탈히 잘 살아서 카이리스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세크리티아 왕궁이 아닌 별장으로 왔다.

- 스승님. 잠시 이곳으로 와주셨으면 합니다.

- 네. 그리하지요.

그리고 앨런을 불렀다. 언제나 그랬듯 앨런은 가타부타 묻지도 않고 칼리안의 말을 수락했다.

당연하겠지만 앨런이 오려면 발칸의 군단장 직위를 지녀서는 안 된다. 단순히 칼리안 왕자의 스승이자 카이리스의 후작이며 또한 세크리티아의 남작인 앨런 마나실로 와야 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어차피 서로간에 눈가리고 아웅인 것을 모르는 사실도 아니었으니 아르센과 마찬가지로 적당히 직위해제나 할 생각이었다. 칼리안의 생각은 그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 지금 바로 카이리스로 돌아가 주십시오. 세자 저하께서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테일란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

얼굴을 보고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대신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테일란은 동요하고 있었다.

- 린 영애가 들고 간 자료가 있습니다. 그것은 별장에 숨겨주시고, 잠시만. 영애와 함께 카이리스로 가주십시오. 보호를 부탁드립니다.

무언가 일이 생겼다.

고개를 든 칼리안이 사일런트 막이 여전한 것을 본 뒤 테일란의 말을 전했다.

"카스트린 경입니다. 카이리스로 돌아가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리안느를 보호하면서요."

"무슨 일인데."

칼리안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테일란에게 질문했다.

- 체이스 형님은 어디 계십니까.

- 이곳에 저와 함께 계십니다만 지금 칼리안 왕자님과 대화하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제가 대신 말씀드립니다.

- 지금 나는 운신이 어렵습니다. 무슨 일인지 정확한 설명 부탁합니다.

- 귀족 세력 중 칼리안 왕자님을 공격한 이들이 있는 것 같다 하여 새들을 통해 조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마법사 협회와도 계속 연락을 취하고 계셨는데······.

익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체이스라면, 칼리안이 정확한 내용을 알려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돌아가는 정황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 후궁께서, 전하와 독대 중 음독을 하셨습니다.

손끝의 움직임이 멈췄다. 붉은 눈이 감겼다.

짧은 말이었으나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루이즈가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이해했다. 곧바로 이유를 찾아낸 머릿속을 저주하고 싶었으나 그에 상관 없이 칼리안의 머리는 착실히 움직였다.

상대방을 몰아세우려 일부러 독을 마시는 그 방법을 누구를 보며 떠올렸을지. 그것까지도.

- ······ 상태는 어떠십니까.

- 좋지 않습니다. 길어야 이틀에서 사흘이라 하였으니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하실 것 같습니다. 최악의 일이 벌어진다면 저하께서는 더 이상 주변을 살피지 않으실 겁니다. 저 역시 저하의 명을 기다리고 있으니 왕자님께서는 서둘러 세크레타를 벗어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자칫하면 휘말리실 수 있습니다.

- 잠시만. 카스트린 경.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 내가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주먹을 쥐었다.

그 손이 떨리는 것을 본 플란츠의 눈이 가늘게 변했고, 칼리안의 눈동자가 조용히 플란츠를 향했다.

"히나가······ 필요합니다. 형님."

그 말과 함께 내용을 전한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플란츠가 칼리안을 가로막았다.

"지금 상황에 세크리티아 왕궁에 가면 데블란이든 제온이든 아우님을 얌전히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으실 텐데."

"막을 수 있습니다. 제가. 게다가 스승님께서도 오실 테니 이 이상 큰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고치고 나면. 그 뒤는."

히나를 불러와 루이즈를 치료하면 그 뒤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제 몸 하나 건사 못할 상태가 되어서는 히나를 제대로 보호할 수 있는지를. 그것도, 가까이 히나를 두고 더 이상 침착하지 못할 데블란과 여전히 어디에 있을지 모를 제온을 곁에 둔 채로.

"세크리티아의 상황을 잊지 않았습니다. 감안하고 움직일테니 그렇게 우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나실 후작도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처럼 꾸미고 올 것 아닌가."

"맞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왕자 둘이 아무것도 아닌 마법사들 줄줄이 끌고 뭘 얼마나 감안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감안하지 말고 대비하라는 말인데."

힘 말고, 힘보다 더 큰 것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앨런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지내면서 습격자들에 대해 알아보고 체이스의 즉위를 돕다 돌아가는 것과, 당장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처해 앨런까지 동원하여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돌아가는 것은 완벽히 다른 문제였으니까.

"가진 자리에 책임이 따르는 것만큼, 책임질 수 있는 자리가 가진 힘도 중요하다는 걸 가르쳐주신 분은 아우님 아니던가."

"······ 스승님께서 군단장 직함 달고 이곳에 오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엘프의 도시를 찾기 전에도 플란츠는 비슷한 말을 했었다. 물론 칼리안에게 배운 것이었으니 칼리안도 모르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자리가 높아지면 책임질 수 있을 범위도 늘어나지만 행동에 따른 여파도 커진다는 것에 있었다. 때문에 이제껏 아르센의 직위를 그렇게 멋대로 올렸다 내렸다 해가며 지내지 않았던가.

"나 말고 마나실 후작이 군단장 직함을 달면 그렇게 되겠지. 내가 군단장 직위 잘 쓸 만한 자리에 오르면 되지 않나."

"형님."

잠시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것을 되돌린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플란츠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제 알아들었다.

위협 받는 왕자를 도우러 온 제 3자 말고, 위협 받는 스스로가 높은 자리를 가지면 된다는 소리다. 관광이나 하겠다며 놀러 온 힘없는 왕자가 왕세자가 되면, 그리하여 칼리안과의 상황이 하루아침에 역전되면, 누구든 함부로 손을 쓰지 못할 테니까.

"아무리 란델 형님과 사이가 나쁘다지만, 너무 잊고 사시는 것 아닙니까."

왕자 둘이 사라지고 발칸의 군단장과 부군단장이 전부 다 공석이 된다. 시오나가 잠시 왕궁의 안전을 살피겠으나 그것은 고작해야 르메인의 목숨을 보호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다.

그러니 만에 하나라도 세크리티아 왕궁으로 간 칼리안과 플란츠의 상황이 달라진다면 그 틈을 탄 란델이 가만히 있겠는가. 정확히는 란델과 줄이 닿아있는 그레이 브리센 후작이나 텐실을 뜻하는 소리였다.

"그건 전하께서 알아서 할 일이지."

그간 못해온 아버지 노릇 하느라 애도 쓰고 신경도 쓰고 머리도 쓰는 일은 르메인이 하면 된다. 어려울 것 없지 않나.

"어차피 텐실 쪽 꿍꿍이도 알아 볼 생각인 줄 알았는데."

"이런 식은 아니었고요. 세자위는 발칸 제복과 왕자 정복 갈아입듯이 함부로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자리 아닙니다."

"내리는 것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허튼 말씀 거두십시오. 자칫하면 형님 죽습니다. 왜······"

"죽겠다는 게 아니라 살겠다는 거잖아."

플란츠가 칼리안의 말을 뚝 잘라먹은 뒤 말을 이었다.

"고양이 지키며 사는 것도 사는 방법이라고 내 아우님께서 얘기하셨지 않나."

"······ 그 고양이가 그 고양이는 아니었습니다만."

플란츠가 시스파니안만 닮은 줄 알았는데 하츠아라의 피가 섞이기는 했나보다. 이성이 없는 것을 보니 알겠다.

루이즈에 대한 걱정과 커져만 가는 일을 감당해보려는 한숨이 칼리안의 입에서 길게 흘러나왔다.

"형님께서 피하고자 하신 것을 굳이 하지 않으시더라도 방법은 찾을 수 있습니다."

"전쟁, 안 나게 할 거라며. 이번에는. 그럼 된 것 아닌가."

이렇게 대꾸한 플란츠가 팔을 뻗었다. 그리고 칼리안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낚아채듯이 빼냈다. 플란츠는 그것 하나에도 제대로 대응을 못하는 칼리안을 보며 눈꼬리를 찌푸리다 앨런과 연결된 팔찌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거짓말 못하시는 아우님께서는 그만 짖고 가만히 계셨으면 좋겠는데."

지금 짖는 것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 된 칼리안을 보며 플란츠가 한쪽 입술을 쭉 끌어올렸다.

"카밀론 가서 개 키우시도록 어련히 알아서 살려드릴 테니."

칼리안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 * *

플란츠가 한 발을 뒤로 물렸다.

앨런으로부터 아주 조금, 거리를 두고 섰다.

칼리안과 앨런으로부터 만들어낸 작은 거리. 그 사이로 앨런이 허리를 살짝 숙여 예를 보인 뒤 말했다.

"전하께서 세자위에 대한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오늘부터······."

"알아."

플란츠가 잠시 칼리안을 쳐다봤다.

마뜩치 않은 얼굴로 플란츠를 보고 있던 칼리안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였다.

곧 앨런이 칼리안의 곁에 다가가 보란듯이 망토를 여며주며 말을 건넸다.

"몸도 성치 않으신 분께서 이렇게 추운 날에 나와계십니까."

힘의 분산.

권력과 직위는 플란츠에게, 앨런은 칼리안에게.

이런 상황이 눈에 보이도록 하기 위한 행동이지만 그 걱정만큼은 진심이었다. 그것을 아는 칼리안이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 있기가 좀 버겁기는 하네요."

이 말을 듣고 움직인 것은, 놀랍게도 앨런이 아닌 플란츠였다. 플란츠가 기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 아우님께서 서 있기 힘드시다는데. 계속 세워 둘 셈인가."

"아무리 나라가 다르다지만 지금 자네들 일국의 세자 저하와 왕자님을 상대로 이것이 무슨 태도인가. 설마 지금껏 계속 이런 취급을 해왔는가."

앨런이 한 소리를 더했다.

왕궁 앞에 나타난 붉은 로브의 마법사.

카이리스를 처음 찾았을 때와 달리 지금은 어둡지도 않았다. 때문에 그 특이한 머리 색이 아주 잘 보였다. 누가봐도 앨런 마나실이 아닌가.

갑작스레 등장한 대마법사로부터 질책을 들은 기사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안으로 모시겠다고 말씀을······."

"안 어디."

플란츠가 말을 끊었다.

"별관입니다, 플란츠 왕자님.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왕궁에,"

"아니."

또 말을 끊어먹은 플란츠가 기사들을 둘러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생각이 너무 짧군. 연약하신 내 아우님께서 별관까지 움직이기 힘드실테니 다른 쉴 곳이 필요할 것 같은데."

시스파니안이시여.

축복의 힘은 역시 조금만 덜 사려깊었어야 했습니다. 아파서 말고 억울해서 죽을 것 같아요.

"······ 참으세요, 형님. 저는 괜찮습니다."

새 직위에 아주 잘 적응한 플란츠의 말에 간신히 한 손을 보태준 칼리안이 곁에 선 앨런에게 살짝 몸을 기댔다. 연기가 반, 정말로 서 있기에 힘이 들었던 탓이 반 섞인 모습에 앨런이 작게 혀를 쯧 찼다.

"그리고 나는, 세자로서 이 왕궁에 다시 방문하게 되었으니 세크리티아의 국왕 전하께 인사를 드려야 되겠고. 지금 당장."

카밀론 가기 싫다더니.

물 만난 생선이 따로 없다.

매우 오만방자해진 플란츠가 기사에게 계속 시비를 거는 사이 다시 한 번 체이스 쪽으로 연락을 시도했다.

- ······ 칼리안.

그리고 비로소 답이 들렸다.

드디어 체이스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 몸은 좀 어떤지 걱정이구나.

-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어머님은 어떠십니까.

체이스는 칼리안에 대한 걱정부터 꺼내놓고 있었다. 그것이 못내 반갑다 말하는 대신 칼리안이 고개를 들며 말을 전했다.

- 아직은 더 나빠지지 않고 있다만. 모르겠구나.

- 괜찮으실 겁니다. 그러니 다른 생각 말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체이스가 대답하지 않았다.

칼리안의 고개가 조금 옆으로 움직였다. 함께 왔던 카이리스의 기사들 쪽으로 눈을 둔 칼리안이 체이스를 달래듯 말했다.

- 제가 왔습니다. 히나와 함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