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96화 (297/527)

제52장. 참으세요, 형님(6)

검은 나비.

검은 별을 모아둔 것 같았던, 혹은 검은 밤 하늘을 조각내 둔 것 같았던 그런 모습의 나비를 기억한다.

그것을 기억하자 시스파니안이 생각났고 시스파니안으로부터 받은 기묘한 위로가 떠올랐다. 덕분에 칼리안이 잠시 실소했다.

죽음을 기원하는 검은 나비. 그것 하나를 위로로 삼고 살던 사람이 그것 하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생각 때문에. 그 사람이 하필이면 자신을 이렇게 키워낸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뱀의 자식으로 독하게 자라오지 않았다면 카이리스의 왕자로 눈을 뜬 그 해에 이미 명을 달리 했을 것이다. 지금껏 살아남아 이 곳에 오게 된 것이 데블란 덕분이라면 덕분이다 할 수 있을 사람이 데블란을 상대하려다 덫에 걸렸으니 달리 무슨 말을 더 하겠나.

"내 아우님께서 많이 편찮기는 하신가보군."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는 칼리안을 가만히 쳐다보던 플란츠의 목소리. 플란츠가 참 오랜만에 다리를 꼬며 말을 이었다.

"말로 짖는 걸 못하시고 머릿속으로 짖으시는 것을 보니."

"별 생각 안했습니다."

"그 말을 믿어드리느니 레니시타의 솜털에서 바나나 자라기를 기다리겠는데."

거짓말을 할 거면 믿기게 하던가.

딱 이런 얼굴이 되어 대꾸하는 모습을 본 칼리안이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안 하겠습니다."

그 후 칼리안은 넓은 창문 너머 먼 곳으로 보이는 바다를 말 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방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르센과 아리안느가 보인다.

도와주러 달려왔던 아르센에게 수고했다 고맙다 한 마디를 하지 못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게 된 아리안느에게 인사 한 마디도 건네지 못했다. 눈을 뜨자마자 플란츠가 전해주는 말을 먼저 들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둘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던 칼리안이 곧 입을 다물었다. 그들과 칼리안의 사이로 반투명한 막이 펼쳐져 있던 까닭이다. 아리안느를 온전히 믿지 못한 아르센이 칼리안과 플란츠의 주변에 사일런트를 펼쳐준 것이었다. 데블란의 수에 무슨 대응을 할지 결정하기 위한 대화가 오갈 텐데, 혹시라도 그것을 들은 아리안느가 다른 일을 벌일까 걱정한 탓이었다.

"마나실 후작은."

"와 달라 말씀을 드렸으니 오늘 중으로 오실 겁니다."

"그 뒤에는."

"오시면, 반갑겠죠."

"말고."

"글쎄요. 스승님께서 오시면 무엇을 할까······ 당장 데블란 침실로 스승님을 보내드릴까요. 안 그래도 곧 키리에에게는 알려 줄 생각이었는데 스승님께서 같이 아신다 해서 크게 다를 일은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이제 다시 말로도 짖네."

작게 웃은 칼리안이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려다 말고 아주 짧게 숨을 멈췄다. 그리고 가짜 오러가 담겼던 칼에 깊이 베인 등을 딱딱한 나무에 가져다 대는 것을 그냥 포기하고 플란츠를 쳐다봤다.

"형님 사냥 잘 하십니까."

"활이라면."

"덫을 놓는 것은 보신 적 있습니까."

"없어."

허리를 조금 더 꼿꼿이 세우고 앉은 칼리안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덫이라는 것이 조금 재밌습니다. 사슴을 잡으려면 사슴 다니는 길목에, 여우를 잡으려면 여우 다니는 길목에 덫을 놓습니다. 그런데 그 덫에 뭐가 걸릴지는 사실 알 수가 없습니다. 펼쳐둔 덫에 무엇이든 잡히기는 하는데, 사슴 다니는 길목에 놓은 덫에 여우가 걸리기도 하고, 운이 정말 좋은 날에는 사슴과 여우가 같이 걸려있기도 하니까요."

신물을 몰래 팔고 카이리스 정보도 같이 팔려던 백작을 잡기 위해 만들었던 덫에 레넌이 걸렸던 것처럼.

"데블란이 체이스 형님을 잡으려고 놓은 덫입니다. 거기에 저와 형님까지 같이 걸렸네요. 형님이나 저나 데블란의 시선을 충분히 끌어왔다 생각했는데 아직 아니었나 봅니다."

데블란은 여전히 체이스를 끌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당장 호기심이 동하는 칼리안이나 플란츠 말고, 자신의 목숨줄 늘릴 방법을 철저하게 막고 있는 체이스부터 붙잡아놓으려는 생각을 아직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는 칼리안을 죽여버릴 마음을 먹고 플란츠에게 호기심이 동하는 척 해가며 모두를 다 속였다.

귀족들과 결탁한 체이스가, 칼리안과 두 마법사를 죽인 뒤 그 일을 데블란에게 뒤집어씌우려 한 것처럼 꾸며내려고.

"체이스 형님이 형님과 손을 잡고 저를 공격한 것을 꾸며내면, 그 일을 빌미로 체이스 형님을 협박해 볼 수 있겠죠. 이번 일을 린 후작이든 누구든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귀족에게 뒤집어씌워 전부 다 목을 잘라내버리고 진심어린 사과의 뜻을 보이면 전하께서도 전쟁까지 마음을 먹지는 못하실 테고요. 형님 손에 발칸이 있으니까."

귀족의 힘을 등에 업은 체이스가 플란츠와 힘을 합쳐 칼리안을 몰아낸다. 만약 그리 되더라도 르메인은 전쟁을 일으키지 못한다. 공범 중 한 명이 자신의 둘째아들인데다 그 아들이 발칸을 쥐고 있지 않나. 전쟁에 나선 플란츠가 세크리티아를 공격할지 자신의 아버지를 공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르메인은 조용히 넘어갈 수 밖에 없다.

전쟁이 벌어지면 힘을 얻는 것은 사병을 지닌 귀족과 군권을 지닌 이들이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 전쟁을 일으키면, 간신히 줄어든 브리센의 세력이 커지고 군대를 가진 플란츠의 힘이 늘어날 뿐이다. 데블란은 그것을 안다. 알고 있으니 칼리안을 없애버리고도 나라와 제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 계산을 했으리라 생각을 했다.

칼리안의 스승 노릇은 안 하고 군대 우두머리 자리에 앉아있는 앨런이 칼리안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데블란은 모르니까. 플란츠가 사실은 어떤 성격인지에 대해서도 데블란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때문에 데블란은 칼리안을 없애고 체이스를 손 위에 올려놓고 자신의 생명도 늘려놓을 덫 하나를 잘 만들었다. 그것에 칼리안과 플란츠가 제대로 걸려들었다.

"······ 라고 생각을 했는데. 아닌 것 같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별장을 찾기 전과는 또 조금 다르게, 두 형제의 제대로 된 대화가 이어졌다.

"하나만 죽는다면."

"맞습니다. 형님이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는 덫이었다면, 그런 생각으로 일을 벌인 게 맞았을 겁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잠시 눈을 내리떴다.

다리 위에 덮여있던 검은 이불을 손 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한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조금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제온의 전사들과 검사들을 왜 굳이 나눠서 보냈을까. 저에게 독까지 썼다는 것은 반드시 제가 죽기를 바랐다는 것인데 왜 나눠보냈을까. 검사들이 다 죽어가도록 제온의 전사들은 왜 끼어들지 않고 있었을까. 하고요."

긴 말을 한 탓에 목이 말라서, 칼리안이 침대 옆에 놓여있던 물컵에서 물을 따라 그대로 모두 마셨다. 물을 마셔도 괜찮은지도 몰랐지만 그 컵에 뭐가 담겼을지도 의심하지 않고 마시는 거리낌없는 태도에 플란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칼리안은 그 모습에 그리 신경쓰지 않은 채 잠시 숨만 멈췄다 다시 쉬었다.

"아무리 형님이 먼저 공격을 했다지만, 검사들이 형님을 곧바로 죽이려 드는 태도도 이상하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라면 저 하나에게 끝까지 달려들었어야 하는데 손을 잡으려 하는 2왕자를 너무 쉽게 버리는 패로 삼는 것이 이상했어요. 그 때라도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저나 형님이나 생각이 짧았네요."

완두콩 색깔 타령이나 간신히 하고 그대로 졸도해버린 탓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지만 일단 칼리안은 자신들의 부주의를 탓했다.

한동안 천장의 샹들리에와 창 밖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제온.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데블란도 속은 게 있는 것 같은데."

"제온의 행동이 변수인 것은 맞는 것 같죠."

"아마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다 다시 잠시 숨을 끊어 쉰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바닷가에서 전사들이 나타났을 때 형님에게 말을 걸었다던 그 기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셨으니, 데블란이 준비한 것은 아마도······ 첫 번째로 마주쳤던 제온의 전사 네 명. 그리고 브리지트 숲에 보낸 이들이 전부였을 것 같습니다."

"내 아우님께서 얼마나 잘 무시는지 데블란이 몰랐던 것 같으니. 그렇겠지."

여전한 멍멍이 취급에,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제가 죽어서 귀찮아질 일을 먼저 없애두려면 세이렌 경 쪽을 확실히 처리해야 하는 것이 맞으니, 브리지트 숲으로도 제온의 일원들을 보냈겠죠. 실제로 양쪽 다 죽으면 좋은 일이고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체이스 형님을 옭아맬 수단이 될 테니 상관 없다 여겼을 것 같은데."

"······ 두 번째."

"네. 검사들과 두 명의 또 다른 제온은 저 뿐만 아니라 형님까지 노렸습니다. 그것은 데블란이 보낸 이들이 아닙니다. 검사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전사들이 기다린 것을 보면 서로 온전히 같은 편도 아니고요."

데블란은 체이스를 잡기 위한 덫을 놨다.

겸사겸사 칼리안도 함께 잡을 덫을 놨다.

그런데 누군가 끼어들었다.

"이 땅에서 두 왕자가 나란히 죽으면 가장 손해보는 것은 데블란이죠."

칼리안은 죽어도 데블란에게 큰 상관이 없지만 플란츠까지 죽으면 안 된다.

두 형제가 싸우던 중에 둘 다 죽었다는 것은, 물론 변명할 거리는 되어 줄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발칸을 가지고 르메인의 움직임을 묶어 둘 세력이 사라지는 것 아닌가. 플란츠까지 죽게 된다면 르메인은 발칸을 손에 쥘 것이고, 브리센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검이 날아들 때 떠올렸던 전쟁에 대한 걱정을 다시 상기한 플란츠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정말로 전쟁이 벌어질 테니까요."

톡톡톡.

칼리안의 손 끝이 작은 소리를 냈다.

"신뢰가 없군."

"그러게요. 제온을 어떻게 부렸는지는 몰라도 데블란도 뒷통수를 맞았네요."

그렇다면 카이리스와 세크리티아의 전쟁으로 이득을 얻게 될 이들이 누구일까.

"전쟁이 일어나면 귀족들의 힘이 강해집니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리스와 세크리티아의 전쟁이 일어나면 이득을 보는 것은 나머지 국가들일 테고요."

안으로는 세크리티아의 귀족들이, 밖으로는 양국을 제외한 두 나라가 원하는 전쟁. 누군가 그 전쟁을 원하고 있다는 소리다.

"대륙 모든 곳에 퍼져있는 제온이라 해도 우두머리는 있을테고, 그 자가 전쟁을 원했고, 이곳 귀족들을 회유해서 이번 일을 꾸몄다는 것이 가장 크겠네요. 한 쪽으로는 데블란과 손을 잡은 척. 또 한 쪽으로는 회유에 넘어간 귀족들을 끌어들여서. 그런데 계획이 실패한 것 같으니······ 이를 어찌해야 할까······."

데블란의 덫에 걸린 것은 맞다.

데블란 역시 제온과 귀족의 덫에 걸릴 뻔했다. 데블란이 덫에 걸리지 않은 것은, 순전히 칼리안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칼리안은 데블란의 덫에, 데블란은 제온의 덫에 걸린 셈이다.

"재밌네요."

톡톡톡.

"키리에와 기사들은 여전히 왕궁에 있습니까."

"감시하라고 시켰다며. 린 후작 쪽."

그렇게 말한 플란츠의 시선이 잠시 사일런트 막의 밖을 향했다.

"그래서 아우님의 새로운 수하를 시켜 데블란 몰래 데려온 것 아닌가."

공격을 당할 것까지는 예상을 한 채로 왕궁 밖을 나섰던 칼리안이었다. 정확하지는 않았어도 귀족들 중 다른 마음을 먹은 이들이 있으리라는 것도 예상을 했다.

제온을 움직일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만약 귀족들이 모여든다면 그 중심에 누가 있을까. 그것을 생각해보다 우선은 린 후작 쪽의 감시를 맡겼다. 체이스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체이스의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린 후작이니까. 감옥에 갇혀있다 하나 귀와 입이 닫힌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만에 하나 린 후작이 허튼 일을 벌이고 있을 때를 대비해서 에일라를 보냈다.

"저기요, 거기 두 왕자님들. 사람을 잡아왔으면 대접을 해줘야지 말이 왜 그렇게 길어요?"

칼리안과 플란츠가 자신을 한 번씩 쳐다본 것을 눈치챈 아리안느가 큰 소리로 질문을 건넸다. 그 모습을 본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리다 또 숨을 참았다.

"세상에서 제일 태평한 인질이네요."

만약 칼리안이 왕궁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아리안느를 붙잡아 자신의 앞으로 데려오라는 첫 명령을, 에일라는 무리 없이 수행했다. 그렇게 붙들려 온 린 후작의 딸이 자신의 배를 가리켜 보였다.

기억에 없는 오랜 친구와의 인사보다, 자신의 어머니가 이번 일의 배후로 의심 받고 있는 상황보다, 배고픈 것에 대해 먼저 해결해달라는 뜻이었다.

"식사 하고 오십시오. 저는 체이스 형님과 연락이 닿으면······."

이렇게 말하던 칼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플란츠 역시 같은 것을 봤다.

- 칼리안 왕자님. 혹시 맞으십니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빛나는 반지.

그것을 통해 흘러들어온 것은 체이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 ······ 얘기하세요. 카스트린 경.

칼리안이 다시 숨을 참았다.

* * *

겉은 달콤하고 속은 고소하다.

잘 볶은 아몬드에 얇은 초콜릿을 씌우고 굳히기를 반복한다. 손톱만한 아몬드 조각이 어느새 작은 손가락 한 마디 크기가 될 정도로 여러 번의 초콜릿을 덧입힌다. 그렇게 하면 바삭한 듯 부드럽고 아몬드의 단단함이 상하지 않은 달콤하고 고소한 초콜릿이 만들어진다.

"요리사의 솜씨가 늘었습니다."

쓴 초콜릿을 몇 겹 씌워놓아도 좋을 것을, 우유와 설탕이 가득 든 부드러운 초콜릿으로 덧씌워 만들어 낸 아몬드 초콜릿을 천천히 씹었다. 그리고 우유 거품과 시나몬 향이 가득한 커피로 입 속의 아몬드 조각을 모두 삼킨 앨런이 꽤 흐뭇한 얼굴을 했다.

자몽이 든 젤리나 좀 먹으면 모를까 여전히 그리 단 것을 왜 먹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르메인이 앨런의 앞에 서류 뭉치를 내려놓았다. 그 뒤에는 앨런이 온 뒤로 부지런히 단 것 만드는 법을 숙련해나가고 있는 요리사 대신 다른 것을 칭찬했다.

"발칸이 생각보다 빠르게 정상화되는군. 갑작스레 몸집을 부풀려 혼란하지 않을까 했는데."

"괜한 걱정을 하셨습니다."

"마법사단과 기사단의 사이가 좋아지기 힘들다 여겼네."

"마법사 모아 군대 만들 생각은 하신 분께서 그런 편견을 가지고 계셨습니까."

"성격들이 워낙 다르다 들었으니까."

앨런의 손가락이 방금 전까지 집어먹고 있던 아몬드 초콜릿을 향했다.

"툭하면 녹아 사라지는 놈과 단단하기 짝이 없는 놈을 같이 붙여두니 저렇게나 좋은 맛이 나는데, 사람이라 하여 다를 것이 있겠는지요."

이렇게 말한 앨런이 커피 한 모금을 더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왕실 마차에서 새끼 오리 키울 생각이나 하면서 사는 놈들이라 해도 천성이 글러먹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마법사들과, 스스로를 호밀 쿠키라 생각하는 이가 키워낸 기사들이 서로 어우러지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발칸의 마법사들은 싸움에 능한 이들이다.

한 자리에 못박힌 듯 선 채로 주문이나 좀 외려다 기사의 검에 허무하게 베여나갈 어리바리한 놈들이 아니었다.

그런 마법사 한 명과 기사 한 명을 붙여두면, 열에 아홉 이상은 마법사가 우세할 터였다.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은 그 차이를 결코 시기하지 않았다. 개인의 전력 차는 당연히 있겠지만 기동성과 숫자의 차이에서는 기사들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제대로 알았다. 그렇게 마법사와 기사의 차이를 정확히 주지시키며 키워낸 기사들이 발칸에 왔다. 기존에 있던 브리센의 기사들은 플란츠의 손 아래 정신머리가 고쳐졌다.

그랬으니 서로 어우러지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불안할 것 없이 계속 지켜보시지요. 썩 봐줄 만한 군대가 된 만큼 앞으로도 보기 좋게 잘 클 터이니."

발칸 잘 큰 것이 다 누구 덕인지도 모르면서 괜한 걱정을 하느냐. 전하께서는 걱정하는 능력도 없는 모양이니 그냥 얌전히 지켜나 봐라. 뭐 이런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아침부터 찾아와서 초콜릿 몇 개를 집어먹더니 쓴 소리 하나 없이 말을 받아주고 있었다.

그것이 또 이상해서 앨런을 잠깐 쳐다보던 르메인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또 무슨 일이 생겼나본데."

"그리 보이십니까."

"그대는 3왕자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대하는 게 달라지는 위인이니. 이렇게 단 소리를 하는 것도 이유가 있겠지."

앨런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식을 둘이나 남의 나라에 보내놓고도 소같이 굴 인사는 아니신 모양이니 다행입니다."

"······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전하의 모가지입니다."

"그것은 항상 걸려있는 줄 알았는데. 새삼스레 필요한 일이던가."

"새삼스레 필요할 일이 생겼습니다."

"얘기하게."

"발칸의 모든 권한을 플란츠 왕자님께 내리시지요. 플란츠 왕자님을 통솔할 권한은 전하께서 손에 쥐십시오."

발칸의 마법사단과 기사단을 움직일 권한도, 두 부군단장을 통솔하는 권한도 본래에는 앨런이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지금 세크리티아에 있는 2왕자와 카이리스의 국왕에게 넘기겠다 말하는 것이었다.

"정혼자의 아버지와 잠시 담소를 나누기 위해 소공작이 곧 올 겁니다. 저택을 찾은 귀한 손님도 소개해드리겠다 하니, 거절 말고 며칠 왕궁에 머무르게 하시면서 발칸의 기사단 검술이나 좀 보아달라 하시지요."

지그프리드의 저택에 누가 지내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공작저에 머무르게 된 귀한 손님이 리리에 브리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시오나 힐.

칼리안과 비슷한 수준이라던 그 소드마스터를 왕궁 안에 두고, 발칸의 군단장 자리는 플란츠에게 넘기고, 플란츠를 움직일 권한을 르메인이 직접 가져야 하는 상황.

미간을 지그시 누르며 생각에 잠겼던 르메인이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헤르츠 부군단장의 직위를 해제했던데. 그대에게도 같은 것을 해달라 청하는 것인가."

"해임을 말함입니다. 저기 저 놈들은 군단장이 잠시 없어져도 제 몫을 할 놈들이니 믿어보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일시적인 해임인가 영구적인 해임인가."

"세크리티아의 지도가 바뀌어야 한다면 영구적인 해임이 되겠지요. 바라는 일은 아닙니다만."

"······ 왕자들의 안위에 문제가 생겼나."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전쟁이지 그대의 해임이 아니네."

"전하께서 세크리티아와 전쟁 일으키시면 아드님들 보실 일 영영 사라집니다. 그냥 겨울 한 철 못 보시는 것으로 만족하시지요."

이렇게 답한 앨런이 시간을 확인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얘기하게."

"세자위, 지금 내려주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르메인이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 * *

하얀 셔츠를 입었다.

목을 반쯤 가리는 넥칼라가 달린 검은 재킷과 검은 바지를 입었다. 금색의 자수로 수놓아진 카이리스의 문장을 잠시 바라보다가, 금색의 단추가 달린 긴 코트를 입었다. 그리고 검은 털 장식이 더해진 붉은 망토를 걸쳤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왕궁 안에서 칼리안을 맞이한 것은, 왕궁에 계속 머무르던 카이리스의 기사들과 키리에였다.

파리한 안색의 칼리안, 그에 못지 않은 플란츠가 다시 세크리티아의 왕궁으로 돌아왔다. 상황을 살피며 잠시 몸을 추스를까 하던 생각을 접고 우선 오게 되었다.

"괜찮아."

에우리아와 레이첼은 여전히 마법사 협회 안에 머무는 중이었고 아르센은 우선 아리안느와 함께 별장에 남았다. 인질 삼아 붙든 아리안느를 잠시 보호해달라는, 체이스로부터의 부탁이었다.

"······ 체이스 형님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어머님은."

이어진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왕궁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와 동시에, 세크리티아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칼리안과 플란츠, 키리에, 그리고 이들을 호위하듯 곁에 선 카이리스의 기사들을 둘러쌌다.

"왕궁 안에 불온 세력의 움직임이 확인된 바, 카이리스의 왕자님 일행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모시라는 전하의 명령이십니다."

"······ 안전하게 모시려는 행동은 아닌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만, 칼리안 왕자님. 별관으로 바로 모시겠습니다."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칼리안이 무어라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 우우웅!

왕궁 앞에 거대한 마력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칼리안의 눈에 반가움이 스쳤고 플란츠가 한 발자국을 뒤로 물렸다.

뒤이어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붉은 빛무리가 모여들며 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스승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칼리안 왕자님."

붉은 로브로 몸을 감싼 앨런이 조용히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넨 앨런의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왕세자 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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