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95화 (296/527)

제52장. 참으세요, 형님(5)

숲은 크지 않았다.

때문에 하늘을 덮은 먹구름과 번개, 그리고 멀리 벼락이 내리치는 것까지 모두 잘 보였다.

- 우르르릉······.

다만 레이첼이 있는 곳의 사정 역시 에우리아 쪽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탓에 오랫동안 집중하여 상황을 살피기가 어려웠다.

일단 정확한 것은 에우리아도 예기치 못한 상대를 만나 싸움을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상대가 마법사인 듯 하다는 것.

지면이 움직이며 발 밑이 꿈틀거리는 느낌이 났다.

"저쪽 손님도 물을 쓰는 마법사인가."

에우리아와 앨런에게 전해들은 이들.

소드마스터의 힘을 사용한다 했던 이들 다섯이 왔다. 다행인 것은 그들 전부가 대사막쪽의 전사들처럼 대단한 실력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이었고, 불행인 것은 그들 정도의 전력으로는 병사들을 순식간에 몰살시키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는 실력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레이첼이 침중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라도 생존한 이가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으나 슬프게도 살아있는 이의 기운은 느낄 수 없었다. 여러 차례 공방을 통해 병사들을 지키려 하였으나 결국 하나도 지키지 못했고 레이첼은 두 명의 검사를 죽였다.

셋이 남았다.

레이첼이 땅의 기운에 집중했다.

바닥을 밟고 움직이는 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계속하여 찾았다.

- 쿠르릉······.

멀리 하늘에서 울리는 천둥 소리가 점차 커진다.

- 타닷!

그리고 그 사이를 빌어 사방에서 레이첼을 향해 달려드는 세 명의 발소리가 비로소 들렸다. 레이첼이 재빨리 준비해두었던 마력을 방출했다.

- 쿠과앙!

전사 한 명과 검사 두 명. 그들이 디디게 될 땅이 바닥으로 쑥 꺼져내렸다. 그와 함께 주변의 흙이 떠올라 거대한 손 여러 개를 만들었다.

바닥의 움직임을 느낀 전사가 몸을 높이 띄웠다. 그에 비해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검사 두 명이 바위로 빚어진 단단한 손아귀가 검사들의 다리를 향해 뻗어나갔다. 한 명은 빠져나왔고 한 명은 그렇지 못했다.

- 우드득!

뼈가 부서지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싸우지 못하게 된 이로부터 시선을 뗀 레이첼이 여전히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나머지 둘을 바라봤다.

- 물컹······!

발 밑이 다시 움직였다. 높이 도약해 레이첼의 공격을 피해냈던 전사가 빠르게 방향을 바꾸어 다른 곳으로 몸을 피했다. 그보다는 눈치가 빠르지 않던 한 명의 발목이 땅 속으로 잠겨들었다. 발목에서 정강이로, 허벅지로, 갑작스레 생겨난 늪이 검사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 콰악!

검사가 검을 뻗었다. 그리고 단단한 쪽의 바위에 자신의 검을 박아넣었다.

그러자, 마치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처럼 변해버린 바위가 부드럽게 검을 통과시켰다. 지지할 곳을 다시 잃게 된 검사의 몸이 서서히 머리끝까지 땅 속으로 잠겨들어갔다.

검사의 마지막 비명소리에서 애써 눈을 뗀 레이첼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바위를 녹여도, 바위를 깎아 날려보내도, 땅을 들어올리고 꺼뜨리고 작은 지진을 일으켜도, 놈은 모두 다 피했다. 재빠른 움직임으로 작은 조약돌 하나를 밟고 도약해가며 피하고 다시 달려들었다.

- 휘이익!

어느새 지근거리에 도달한 전사의 검이 레이첼을 향해 휘둘러졌다. 레이첼의 눈은 전사의 것보다 빠르지 않았다. 때문에 그 움직임을 정확히 따라가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레이첼이 밟고 있던 땅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코앞에 있던 레이첼의 신형이 멀찍이로 옮겨졌다. 가만히 선 채로 전사의 검을 피해낸 레이첼이 마력을 움직였다. 전사의 주변 바위가 모두 다 떠올라 전사를 향해 쏘아져 날아갔다.

- 카아아앙! 카앙!

한 두 번의 바위를 베거나 막아낸 전사가 다시 몸을 틀었다. 그리고 날아오던 바위 하나를 밟고 레이첼을 향해 검을 내찔렀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레이첼의 몸이 휙 멀어져서, 전사는 또 허공을 베었다.

또 어느 때는 전사가 밟고 선 바닥이 쭉 멀어진다. 레이첼의 몸이 휙 하고 움직이며 멀어졌고, 전사는 레이첼을 따라 달려들며 쉼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것을 피하고, 뾰족히 다듬은 바위를 쏘아보내고, 모래를 가득 일으켜 시야를 막아서도, 전사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고 대응하며 레이첼을 노렸다.

"하아······."

공격을 위한 마법이 많지 않았다. 왕궁에서 숲까지 오는 동안 마력의 소비도 상당했던 탓에 사용할 수 있는 마법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남은 마력으로 도망을 칠까.

하던 레이첼이 피식 웃었다. 속도의 차이가 있으니 차라리 도망을 친다면 쉬울 일인 것을 안다. 만약 그리한다면 전사의 검이 어디를 향하게 될지도 잘 알았다.

- 휘이익!

전사의 검이 다시 날아든다.

내가 베로니카에게는 인사를 하고 나왔는데.

아버지한테는 말을 했었나.

순간적으로 기억을 더듬어보던 레이첼이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전사를 향해 암석의 쐐기를 날려보낸 그 순간.

- 화르륵!

이곳에서는 절대 들리지 않을 소리와 함께 불덩이 하나가 전사를 향해 날아들었다. 레이첼의 암석 쐐기를 피한 뒤 검을 휘두르려던 전사가 몸을 뒤틀며 갑작스러운 불덩이를 피해냈다.

- 콰앙!

땅에 처박힌 거대한 불덩이가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무슨 일인지 파악도 하기 전에 또 하나의 불이 전사를 향해 날아갔다. 두 번, 세 번, 연속하여 계속하여 전사를 몰아세웠다.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전사의 발을 레이첼이 다시 밀어냈다. 누가 왔는지 볼 겨를이 없었다. 일단은 전사 먼저.

- 콰아앙! 쾅!

화염의 채찍이, 화염의 창이, 화염의 덩어리가 전사의 목숨을 끝없이 노렸다. 전사의 옷 끝이 불에 타오르고 그 눈이 짙은 살의에 휩싸였다.

전사의 몸이 높이 도약했다.

레이첼이 마력을 운용했다. 전사가 디디게 될 곳을 빠르게 계산했다. 그곳에, 멀쩡해보이는 숲의 땅 밑에 마지막 남은 힘을 모조리 쥐어짜 마법을 보냈다.

- 탓!

전사가 발을 디뎠다.

겉보기로는 조금도 티나지 않던 땅 밑이 일순간에 모래가 되어 사라지며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수백의 날카로운 창이 바닥에서 솟아 있었다. 레이첼을 도우러 온 또 다른 마법사가 전사의 머리 위에서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 콰아아앙!

창의 끝을 밟고 다시 몸을 띄우려 했던 전사의 몸이 폭발의 여파에 말려들었다. 커다란 힘에 밀리듯 바닥을 향해 내팽개쳐졌다. 그리고 그 바닥에는······.

- 콰직!

결코 유쾌하지 않은 소리와 함께 마지막 남아있던 전사의 생명이 끊어졌다. 레이첼은 미간을 찌푸렸고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잿빛 로브의 마법사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그레이스 경."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

한동안 로브를 쳐다보던 레이첼이 그제야 아는 것을 마주한 얼굴로 가늘게 웃었다.

"세크리티아의 협회장님."

"세자 저하께서 잠시 가보라 하셨는데 이런 일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전날 아침 한 번을 만났던 세크리티아의 마법사 협회장, 6서클의 화염 마법사 메이린 론즈가 씩 웃었다.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레이첼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보랏빛의 번개가 하늘에서 내리떨어지기 시작했다.

* * *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들어앉고 벼락이 내리친다.

- 콰앙! 쾅!

병사들을 보호중인 실드와 실드 사이, 물기 가득한 숲 속에 에우리아의 머리카락과 참 비슷한 보랏빛의 번개가 줄기줄기 뻗어내려와 대지를 강타했다. 일반적인 5서클 마스터 마법사의 손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장관이 하늘과 땅을 잇는다.

- 쩌저적, 쩌적!

- 콰아앙!

하늘을 향해 뻗은 손은 내려 올 생각을 않고, 수십의 낙뢰가 에우리아가 바라보는 지점에 끝도 없이 떨어져내렸다.

세크리티아의 병사들이나 그들을 이끌던 기사가 죽어버린 바람에 남은 이들을 임시로 통솔하게 된 또 다른 기사들은 실드 건너에서 질린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 콰앙! 쾅! 콰아앙!

마지막 벼락이 떨어지고 난 뒤, 짙고 짙은 연기가 한 발 늦게 피어올랐다.

물이 가득했던 대지는 새카만 잿더미가 되었고 바위는 그을리고 깨졌으며, 아름드리 나무는 조각나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것을 확인한 에우리아가 조용히 팔을 내렸다.

에우리아가 가진 가장 강력한 공격.

치유력을 지닌 제온의 일반 병사들을 일순간에 잿더미로 만든 힘이다. 한 명이면 죽이면 되고 두 명이면 죽여버리면 된다. 실드가 있다면 깨뜨리면 되고 치유력이 있다면 심장을 태우면 된다.

그러니 어려울 것은 하나도 없는,

"······ 와."

일인 줄 알았는데.

잿더미로 변해버린 숲의 한 곳.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마법사를 보는 에우리아의 입가에 즐거운 기색 가득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앨런이 만들어내는 불의 실드와 비슷하지만 확연히 다른, 탁한 느낌이 가득한 붉은 실드. 분명 제온의 마법사였다.

"······ 지나."

구면이었다.

타오르는 불꽃같은 다홍색 머리의 여자.

에우리아에게 물의 마법을 알려준, 두 번째 스승과도 같은 6서클의 마법사가 잠시 에우리아를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와 함께 강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대기를 감싼 마나가 또다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 파직, 파지직!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딱히 회포나 풀자며 건넨 말도 아니었던 에우리아의 손 끝에도 보랏빛의 구체가 생성되었다.

- 뭉클!

에우리아가 물의 힘을 끌어냈다.

바닥에 고여있던 물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이곳저곳에 퍼져있던 물방울이 한 곳으로 모여들더니 공중으로 떠올랐다.

- 지지지직!

수많은 물의 구슬 하나하나에 에우리아의 전기가 담겼다. 그리고 지나라 불린 제온의 마법사를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지나가 팔을 휘둘렀다. 차디찬 기운의 회오리바람이 한 차례 몰아쳐갔다. 에우리아가 쏘아보낸 물의 구체가 모두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투둑 투둑 떨어졌다.

허공에서 만들어진 얼음의 창이 높은 곳에 서 있는 에우리아를 향해 쏘아진다. 텔레포트로 가볍게 자리를 벗어나 공격을 피한 에우리아가 스파크 가득한 물의 창을 만들어 똑같이 되돌려보냈다.

얼려서 부서뜨릴 새도 없이 날아온 공격에 지나 역시 텔레포트를 했다.

- 쿠과과광!

- 파지직!

그 때를 노린 에우리아가 다시 한 번 바닥에서 물을 끌어올렸고, 지나가 내딛는 땅에 강한 전류를 흘려보냈다. 지나의 얼음창이 다시 한 번 에우리아를 향하자, 그것을 피한 에우리아의 손에서 긴 번개 줄기가 뻗어나가 지나의 실드를 내리쳤다.

- 콰앙!

폭음과 함께 지나의 몸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지나의 몸이 병사들을 가린 실드의 앞에서 나타났다. 지나가 손가락 끝으로 실드를 한 번 건드린다.

- 쩌적! 쩌저적!

새하얀 서리가 실드를 감싸며 얼어붙었다. 얼굴을 굳힌 에우리아가 실드를 보강한 뒤 지나를 공격했으나 지나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한 번 더 텔레포트를 운용해 인근의 나무에 올라선 지나가 에우리아를 보며 살짝 웃어보였다. 그리고 발 아래 보이는 에우리아의 실드를 향해 팔을 뻗었다.

- 까드득! 카드드득!

달갑지 않은 소리가 났다.

- 콰아앙!

지나의 발 밑에 모여든 물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터져나왔다. 실드를 향한 공격을 막고자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그것은 붉은 실드를 때릴 뿐 공격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 휘리릭!

살얼음이 가득한 긴 채찍이 에우리아를 향해 휘둘러졌다. 실드를 펼쳐 그것을 막은 에우리아가 채찍 반대편으로 긴 번개를 보낸다. 찰나와 같은 시간에 채찍을 타고 상대방을 향해 도달한 전기 공격이 지나의 실드를 강하게 때렸다. 막혔다.

그 순간, 실드 안쪽으로 나뉘어 들어간 지나의 마력이 물을 움직였다. 바닥이 솟아오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병사들이 발 밑을 내려다보았을 때.

- 콰아앙!

- 쌔애액! 쌔액! 쌔애애액!

실드로 보호되지 않은 바닥을 뚫고 치솟은 지나의 물이 뾰족하게 얼어붙었다. 하나하나의 비수가 되어 하나하나의 병사들을 꿰뚫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양 쪽에 흩어져있던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일순간 들려오고 순식간에 멈췄다. 결국은 모두 죽었다.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6서클의 마법사. 그리고 5서클의 에우리아.

그 숫자 하나의 차이. 쌓아올린 마나의 차이. 지닌 마력의 차이. 고작 그 차이 때문에.

"젠장."

에우리아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 뒤질라고."

주먹 끝에 보랏빛 스파크가 강렬한 빛을 냈다.

자신과 크게 관련은 없었으나 어쨌거나 살리지 못한 이들에 대한 미안함은 미뤄뒀다. 친분 많던 이와 목숨을 놓고 싸움을 벌이게 된 상황에 대한 혼란함은 애초부터 미뤄뒀다.

스승이었든 6서클이든 제온이든 뭐든 저새끼는 그냥 적이니까.

- 파지직! 파직!

에우리아가 지나를 향해 전기의 기운 가득한 창을 만들어 보낸다. 밝은 빛에 긴 잔상이 남았다.

지나가 실드를 펼쳐 에우리아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더는 에우리아를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냉기를 끌어올렸다. 에우리아의 사방이 얼어붙기 시작한다.

끊임 없이 만들어진 물의 창이 에우리아의 손을 떠나 지나를 향해 날아갔다. 모두 다, 붉은 실드에 막혀 덧없이 흘러내렸다. 소용없는 물이 자신의 발 밑에 고여드는 것을 지나는 무시했다. 그것에 전기가 흘러도 어차피 막힐 테니까.

바람에 흔들리던 나무가 움직임을 멈췄다. 얼어붙었다. 나무가 뿌리내린 땅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낙엽도 얼어 움직임을 멈췄다. 대사막의 한 가운데 선 것처럼, 에우리아의 주변이 모두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 냉기가 빠르게 에우리아를 향해 다가왔다.

"나랑 마지막 인사 할 때까지만 해도 이중 속성이 아니었는데. 그 조약돌이 꽤 유용한가봐."

"많이."

에우리아의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이 들려옴과 동시에 지나의 발 밑이 폭발했다.

"억울한데. 난 이거 하려고 꽤 고생했거든. 돌맹이 하나로 이중 속성이 될 수 있는 줄은 몰랐어서."

- 콰아아앙!

에우리아의 공격이 다시 한 번 지나를 향했다. 막혔다.

'전기를 익히면 번개도 내리꽂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니에요? 할머니 마법 너무 시시한데.'

'손바닥에 전기 줄기 만든다고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더냐? 벼락이 그렇게 좋거든 서클이나 한 일곱 개 쯤 만들어 보거라.'

'그때까지 언제 기다려요. 늙어 죽겠다.'

강자의 눈은 약자보다 느리다.

에우리아는 사방에서 모여드는 냉기가 언제 자신을 잠식할지 제대로 계산했다. 지나는, 자신의 밟고 선 물이 서서히 더워지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에우리아 세이렌.

'······ 그냥 내가 만들고 말지.'

정확히는 물과 전기, 이중 속성의 5서클 마스터 마법사.

때문에 가능한 것.

습기 가득한 더운 구름에 전기가 충돌하면 번개가 된다. 습기 가득한 더운 구름을 불러 올 마력이 없다면, 그냥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 쩌적! 쩌저적!

에우리아의 로브가 더 이상 펄럭이지 않는다. 얼어붙기 시작했다.

에우리아는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디로 피하든 저 얼음은 에우리아를 따라와 기어코 얼려둘 테니, 실드로 몸을 보호하며 계속하여 물의 공격을 이어갔다.

물을 보낸다. 물이 흐른다. 물이 데워진다. 끓는다.

습기 가득한 더운 것이 지나가 밟고 선 땅 밑에 고여들었다.

- 쿠구구궁······.

지나의 발 밑이 울기 시작했다.

지나가 고개를 숙였다. 텔레포트를 하려 했다. 농도 짙은 끈적한 물이 지나의 발을 붙들고 늘어진다.

'마법 만드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더냐.'

'뭐, 안되면 마는거죠.'

고작 물에 적셔 감전 잘 되게 하려고 리베른까지 가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재밌어 보이던 바람 마법이니 화염 마법이니 다 때려치고 재미도 없는 물의 마법을 5서클까지 수련한 것이 아니다.

살면서 대마법사 이름표 달 일은 요원한 것 같아서 그냥 속 편하게 두 개를 배웠다. 그거 하나 해보려고 그 고생을 했다.

- 쿠아아앙! 쾅! 콰아앙!

벼락 꽂으려고!

- 콰아아앙! 콰과광! 콰과과광! 콰광! 쾅!

초근거리에서 만들어진 벼락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발 밑에서 올라오는 수십, 수백의 벼락이 붉은 실드를 사정없이 깨뜨렸다. 그 어느때보다 두텁게 만들어진 붉은 방벽이 산산조각나 사라졌다.

맨 몸의 마법사를 향해 벼락이 꽂혔다.

- 콰아아앙!

강자의 눈은 약자보다 높은 곳에 있는 탓에.

고작 5서클의 마법사가 그 강한 마법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던, 벼락이 제 발 밑에서 자신을 향해 올려꽂히게 될 줄은 몰랐던 마법사의 몸뚱이가 새카맣게 타올랐다. 심장을 향해 벼락이 들어섰다.

"고작 돌맹이 하나 가지고······ 어디서 함부로 진짜에게 싸움을 걸어."

여섯 개의 서클이 흩어진다. 타올랐다. 생명을 꺼뜨리는 굉음 사이로 에우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질라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 * *

익숙한 발소리.

익숙한 목소리.

"칼리안."

익숙한 모습의 방에서 잠이 들었고 꿈 꾸지 않는 깊은 잠을 잤다. 어느새 지척까지 발소리가 다가온 뒤에야, 낮은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을 때에야 누군가 방 안에 같이 있었음을 알았을 만큼 깊은 잠을 잤다.

숨소리 하나 크게 내지 않으며 잠을 자던 칼리안이 조용히 눈을 떴다. 언젠가 그곳에 누웠던 이의 연보라색 눈 대신, 붉은 루비와 같은 투명한 눈동자가 아주 잠시 주변을 살폈다.

"······ 네."

침대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자신을 부른 덜 익은 라임 알맹이같은 사람을 잠깐 올려다보던 칼리안이 짧게 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잠시 숨을 참았다.

등이 여전히 아프다. 허리춤의 감각이 완전히 돌아와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해독이 완료되고 피는 멎었으나 하룻밤 안에 상처가 아물기에는 상처가 크고 깊었다. 독이 강했다.

곁에 쌓여 있는 바나나를 잠깐 쳐다본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히나가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당장은 무언가를 먹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리 쪽의 상처가 좀 나으면, 그때 손을 대기로 한 칼리안이 플란츠를 올려다봤다.

"잠깐."

"네. 말씀하십시오."

여전히 인상 한 번을 찌푸리지 않아 도대체 얼마나 나은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칼리안을 잠시 보던 플란츠가 일단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칼리안과 플란츠, 그리고 아르센이 이 별장에 찾아왔을 즈음에 숲에서 싸움이 벌어졌고 에우리아와 레이첼이 공격을 당했으며 세크리티아의 병사들이 모두 사망했다는 사실. 데블란이 세크리티아의 병사들을 살해한 혐의로 두 마법사를 체포하기 전에 체이스가 마법사 협회를 움직였음을, 그리하여 지금 두 마법사는 협회 건물 안에 머무르게 되었음을.

"······ 아."

이야기를 모두 들은 칼리안이 짧은 소리를 냈다.

그렇게나 조심했음에도 데블란의 덫에 걸렸다.

플란츠를 찾아간 기사의 정체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칼리안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플란츠가 어떻게 움직일지를 가늠한, 똑똑하면서 칼리안보다 조금 더 노련한 데블란이 기사를 시켰다. 귀족들간에 데블란을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리라 여기도록 꾸며냈다. 칼리안의 큰 전력이 숲으로 향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측했다. 제온과 손을 잡은 것인지, 제온을 부리는 것인지는 몰라도 두 마법사를 죽이기 위한 전력을 추가로 보냈다.

제 손으로 제 병사들을 전부 다 죽여가면서 이 일을 꾸몄다.

"그래서······ 체이스 형님은 마법사 협회를 움직였고, 데블란에게 반한다는 뜻을 완전히 겉으로 보이게 됐네요."

아까부터 체이스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으나 돌아오는 소리가 없었다. 칼리안이 잠시 한숨을 쉬었다.

"테일란을 움직일 생각까지는 안하셔야 할 텐데."

지금 일어난 상황을 데블란이 제대로 이용한다면 체이스의 반역을 꾸며낼 수 있다. 자신의 뒤를 이을 단 한 명의 아들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겠으나 이 일을 빌미로 체이스를 완전히 손 위에 올려놓으려 할 터였다.

체이스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모르지 않은 채로 협회를 움직였다.

"어떻게 할 건데."

플란츠가 조용히 물어왔다.

멀리 서 있는 아리안느에게 살짝 눈인사를 건네고, 아르센을 보던 칼리안이 씩 웃었다.

"제가 아파서······ 움직이기가 좀."

걷고 뛰는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칼리안의 팔찌가 빛나는 것을 보던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 스승님.

아빠, 부른다.

우리 아빠 엄청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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