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94화 (295/527)

제52장. 참으세요, 형님(4)

언덕 위의 작은 궁전.

체르밀 궁보다 작지만 더 아름다운 새하얀 궁전. 죽은 왕비 디에나의 별장이었던 곳. 지금은 루이즈가 지니고 있으나 과거에는 아마도 그 왕제에게 물려졌을 곳. 멀리는 달빛에 반사된 바다가 일렁이는 것이 보이고 발 아래로는 누군가를 기리는 새하얀 꽃이 만발해있는 곳.

작년의 이 계절 즈음에 기억을 찾았다던 체이스가 만들어 두었을지, 아니라면 기억을 찾은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던 루이즈가 만들어 두었을지. 단 한 번도 발을 디딘 적 없는 자신의 방에 잠시 머무르게 된 칼리안은 이 방을 누가 꾸며놓았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편안히 쉬었다.

잠깐 일어나 잠시 웃다 조금 말하고 다시 잠든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향해 섰다.

멀리 하늘에 파란 별이 하나. 그리고 빨간 별이 하나. 그 곁에 수많은 별이 흰꽃처럼 한가득 피어난 하늘 아래로 소리 없는 푸른 빛이 별이 되어 떠오른다.

하늘로 오르는 붉은 불꽃도 보았고 바다 너머로 흘러가는 푸른 불꽃도 보았는데 별이 되어 떠오르는 하얀 꽃을 직접 볼 줄은 몰랐다. 또 처음 보는 것이 생겼다. 그것도, 그 왕제가 지냈다던 황량한 방에서.

'아무튼 재밌네요.'

재미가 있나.

아르센이 건네준 휴식이 한편으론 기꺼웠을 만큼 쉼없이 체이스를 지켜오던 놈이 이번에는 아르센 덕분에 숨을 붙인 채 체이스가 준비해 준 곳에서 쉬고 있다. 그 왕제가 이곳을 영영 오지 못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이곳에 다시 오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도 모두 플란츠 자신이었으니 재미보다는 차라리 우스운 상황이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아니라면 이것 역시 세렌티의 장난이려나.

덕분에 결국 잠들지 못했다.

하지 말라 했던 자책을 멋대로 또 했다 하기보다는 그냥 이런저런 기억에 잠겨 생각이 많아진 탓에 시나스타의 손잡이를 가만히 쥐고 선 채로 미동 없이 창 밖만 바라봤다.

하얀 꽃이 더이상 별이 되어 날아가지 않을 때까지, 먼 바다를 비추던 달이 하늘 너머로 몸을 숨기고 마지막까지 빛나던 별이 빛 속에 잠들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해가 떠올라 그 먼 곳의 윤슬에 눈이 부실 때까지.

"왕자님과 계속 같이 다니시더니 어느새 검의 길에 오르셨습니까?"

때문에 하룻밤을 새는 정도는 애초부터 일상인지라 유일하게 상태 멀쩡한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잠깐 아침밥 먹고 오자며 방에 들어왔다가 이런 말을 했다. 뭘 믿고 그 몸으로 밤을 샜냐는 소리다.

심란해서 못 잤지 객기부리다 밤을 샌 것이 아니었다.

생일이 되기가 무섭게 달갑지 않은 일들을 너무 많이 겪게 되었던데다 잠은 못자고 몸은 아파서 짜증이 한가득이다. 때문에 플란츠가 한쪽 입술을 마음껏 끌어올리며 대꾸했다.

"새 아버지가 걱정하고 있는 것을 아시면 내 아우님께서 많이 속상해 하실텐데."

이성 잃은 칼리안 정신머리 고치는 데에는 히나만한 이가 없고, 아르센 입 다물리게 하는 방법으로는 칼리안만한 것이 없지 않나. 이유가 뭐가 됐건 앨런이 이 곳의 상황을 알도록 만들었으니 그걸 일러바치겠다는 협박으로 시끄러운 입을 막았다.

하고싶은 말 참 많은 얼굴을 하고 있던 아르센이 '그래도 내가 어른이니까 참는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다시 말했다.

"알았으니 식사 하십시오."

"생각 없어."

"계속 그렇게 안드시면 언제까지고 저 올려다보셔야 할 텐데 괜찮으십니까?"

체이스 형님이 형님보다 키 큽니다.

했던 어느 누구의 말이 왜 함께 떠오르는지 모르겠지만.

짜증 가득한 얼굴이 되어 돌아서다가 다친 곳의 통증까지 몰려와 더 크게 인상을 쓴 플란츠가 저벅 저벅 걸어 소파에 앉았다. 정말 생각 없다는 뜻이다. 키 크려고 밥 먹었다가 체하는 일은 이제 사양하고 싶었으니까.

그 꼴을 본 아르센이 무어라 말을 하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 우우웅!

플란츠의 팔찌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얼굴을 굳히는데 아르센이 갑작스레 제 품을 뒤지더니 주머니 속에서 수정판을 꺼냈다. 플란츠의 눈초리가 저절로 칼리안을 향했다. 칼리안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에서도 플란츠의 것과 똑같은 빛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 브리지트 숲에 갔던 세크리티아의 병사들이 전부 죽었습니다. 플란츠 왕자.

플란츠를 향한 체이스의 연락.

- 리베른의 마법사 한 명이 사라졌다는 연락이 왔네.

그리고 다급히 칼리안과 아르센을 찾는 앨런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그에 대해 둘 모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하던 순간 똑똑한 플란츠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 하나 더 벌어졌다.

"하루 만에 이런 곳에서 다시 보니까 또 색다르게 반갑네요. 많이 다쳤어요?"

내 동생의 오랜 친구이자 내 동생의 옛 형님의 정혼자면서 나도 기억 못하고 저 분도 기억 못하지만 서로간의 깊은 은원 관계가 있다 했던 그 분이 노크도 없이 벌컥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내 안부를 묻는 상황을 마주한 플란츠가 조용하고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아픈 몸을 이끌고 칼리안이 잠들어 있는 침대로 걸어갔다.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놈이 필요했다.

* * *

아무 문제 없었다.

상황 봐가며 사람 잡는 아르센 말고 상황 안 보고 사람부터 잡는 에우리아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식은 두고 잡았다. 만약 에우리아가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보내온 남의 병사를 멋대로 죽여 없앨 만큼 생각 없는 이였다면 지금의 위치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레이첼이라 하여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레이첼은 상식 뿐 아니라 상황도 보아 가며 사람 잡는 마법사에 속했다. 애초부터 공격을 위한 마법을 숙련한 것도 아니었던데다 누군가의 죽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얼마나 큰 상실이 되는지 사무칠만큼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세크리티아의 병사들이 브리지트 숲을 공격한다면 막아달라 하셨습니다. 아무도 죽여서는 안 된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전해진 칼리안의 말을 두 마법사가 지키는 것에는, 정말 아무 문제가 없었다.

- 파직, 파지직!

플란츠가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칼리안을 깨우러 가기 얼마 전의 늦은 밤, 브리지트 숲.

"이 밤중에 여기까지 뭐하러 왔나?"

한 손 위에 번개를 올려 둔 에우리아가 발밑을 바라보며 질문을 건넸다. 횃불들을 하나씩 든 채 숲을 포위한 이들 중 가장 강해보이는 기사 한 명을 향해서였다.

참 효율적이고 사용도 편리한데다 누구나 구하기 쉽고 심지어 가격까지 저렴한 마법 등불을 두고, 굳이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하나씩 들고 숲을 둘러싼 병사들의 의도를 모르는 척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그래도 에우리아는 일단 방문 목적을 물었다. 비록 한 손에 살기등등한 스파크를 내뿜는 보랏빛 구체를 올려둔 채였다고는 하나 가타부타 아무 말 없이 일단 공격부터 하고 보는 마법사 성격에 이 정도면 크나큰 배려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높은 나무의 가지 위.

지지할 곳 하나 없었으나 위태로움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태도로 가지를 딛고 서서는 기세좋게 시비를 거는 에우리아의 모습에, 조금씩 다가오던 병사들의 발이 일제히 멈췄다. 그리고 곧 '일단정지'라는 말이 병사들의 입을 타고 양 옆으로 퍼져나갔다.

자신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전진하던 병사들의 발도 모두 멈춘 것을 확인한 에우리아의 입꼬리가 가늘게 올라갔다.

"누구냐."

밝은 달을 등지고 선 탓에 실루엣만 보이는 마법사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기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모습을 보여도 되고 정체를 들켜도 되지만 제 입으로 이름을 먼저 말할 수는 없는 상황도 잘 이해한 에우리아가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을 전했다.

"코코 아빠."

한 달 동안 온 정성을 다해 품어 탄생한 소중한 내 자식이, 주량은 비루해도 꽃 취향은 안 식상한 파란 머리 마법사를 엄마로 삼았으니 별 수 있나. 남아있는 아빠 자리 꿰찰 수밖에.

"제대로 된 정체를 밝히거라. 태도가 상당히 무례하구나."

"어. 미안. 나이랑 같이 예의도 말아먹은지가 오래돼서 횃불 들고 엘프 숲에 찾아온 의심스러운 놈들한테까지 꺼내 보여 줄 예의가 없어. 그리고 질문은 내가 먼저 했어. 뭐하러 왔냐니까?"

기사는 대답 대신 에우리아를 살폈다. 그 침묵이 길어지자 주변을 휙휙 둘러보던 에우리아가 여유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하긴. 물어볼 것도 아니네. 겨울도 오고 나무는 바싹 말랐고 나뭇잎도 많이 떨어져 있으니 숲 하나 쯤은 되게 잘 타겠다. 그치."

언뜻 달빛에 비춰지는 보라색의 긴 머리. 여자 마법사. 그리고 손에 올려진 번개. 여러 상황과 보여지는 것들을 조합해 본 기사가 낮게 읊조리듯 물었다.

"에우리아 세이렌인가."

"어. 맞아. 맞으니까 빨리 횃불 끄고 가."

"······ 카이리스 왕자의 일행이 왜 타국의 일에 끼어드는가."

"몰랐는데 여기 카이리스 왕비님 고향이더라. 그래서 우리 셋째 왕자님께서 여길 곧 와보실 예정인데 불나서 다 없어져 있으면 애석하잖아."

한낮에도 죽은 자의 망령을 몰고 다닌다는 그 에우리아 세이렌이다.

지금 이 곳에 있는 것은 고작해야 기사 몇 명과 병사들이 전부다. 병사 대신 기사들로만 모여 있다 해도 녹록치 않을 마당이 아닌가. 때문에 기사는 입을 꾹 다물고 일단 물러나야 할지, 혹은 이대로 더 말을 나눠봐야 할지를 잠시 고민했다.

"고민하지 말고 가."

기사가 나름대로의 예의를 보여주고 있든 말든 일단 이곳에 횃불을 들고 온 이상은 고운 말로 상대해주기가 어려웠다. 저 불이 나무에 붙는 순간, 단순히 프레이야의 고향이 불타는 것 뿐 아니라 엘프의 거주구역을 둘러싼 카이리스와 세크리티아의 외교 문제가 생기게 되니까.

한동안 기다렸음에도 기사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던 에우리아의 손에 물의 마력이 모여들었다.

- 우우우웅······.

뭉클거리는 기운이 순식간에 모여들며 숲의 바닥 아래 깊은 곳에서 흐르던 물을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바닥이 울렁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은 기사가 고개를 돌려 병사들에게 말했다.

"물이다. 모두 나무 근처로 움직여 대비하라."

기사의 말을 들은 병사들이 일제히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현명한 명령이었고 빠른 움직임이었다.

땅 속에서 물이 솟더라도 휩쓸려가지 않고, 앞에서 전기 속성의 공격이 있더라도 나무 뒤로 피신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대응 방법이었다.

일단 횃불부터 꺼버리려던 에우리아의 마법이 예정대로 이어졌다면 그랬을 것이다.

"······ 젠장."

갑작스럽게 인근에서 감지된 마나의 기운을 느낀 에우리아가, 짧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운용하던 물의 힘을 흩어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힘을 위한 마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힘의 흐름이 갑자기 변경된 것에 주변을 흐르던 마나가 요동쳤으나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기사와 병사들은 에우리아의 시선이 자신들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것과 더 이상 발 밑이 울렁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 모여. 살고싶으면."

조금 큰 소리로 기사를 향해 말한 에우리아의 손이 움직였다.

사용할 일 없으리라 생각한 보랏빛의 스파크가 먼 하늘 위에서 빛을 내기 시작했고 구름이 모여들었다.

- 쿠르르릉······.

달빛 가린 구름 사이에서 불안함 가득한 울림이 이어졌다.

에우리아의 소리를 듣지 못한 기사가 곁에 선 병사를 향해 나무에서 다시 떨어져 서로 흩어질 것을 명령했다.

- 쩌저적! 쩌적!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기사의 명령을 받은 병사가 가까운 곳에 선 다른 병사에게 말을 전달하려 한 발을 내딛었다.

- 콰아아앙!

그 순간, 굉음이 터져나오며 땅 속의 물줄기가 폭발하듯 치솟았다.

방금 달려가려던 병사의 몸을 그대로 꿰뚫어버린 물의 회오리가, 꼬리가 잘려나간 뱀의 몸부림처럼 주변을 휩쓸며 인근의 병사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에우리아의 힘이 아니었다.

가장 단단하고 높은 나무의 위에 올라 있던 탓에, 첫 번째 공격에서 의도치않게 몸을 보전한 에우리아가 급히 반대편 손을 움직였다. 거대한 마법을 준비해나가는 것과 무관하게 마력을 다시 한 번 끌어올려 땅 속의 물을 움직였다.

- 쿠르르르······.

땅이 일렁이고 하늘이 울린다.

에우리아의 마력에 붙들린 또 다른 물줄기가 땅을 밀어올리고, 이런 맑은 날에 결코 볼 수 없을 마른 번개가 하늘을 밝히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 콰광!

이윽고 두터운 땅을 뚫어낸 물이 솟구쳤고 곧 커다란 두 개의 물줄기로 갈라져 양쪽으로 뻗어나갔다. 그 뒤에는, 중앙의 병사들이 이미 전멸한 탓에 양 쪽으로 나뉘어진 병사들의 앞을 각각 가로막고 드넓은 물의 장막을 펼쳐냈다.

숲의 뒤쪽으로 간 레이첼의 안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레이첼보다 현저히 약한 놈들 먼저 건사해야 할 상황이다.

"쯧."

살려주러 온 것이 아니라 안 죽이고 돌려보내려 온 길이다. 누구인지 알 수도 없는 이의 공격으로부터 세크리티아의 병사들을 살릴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 쉬이이익!

- 콰아앙!

거대한 물의 뱀이 그대로 돌진하여 에우리아의 장막을 밀어쳤다. 옆으로 뉘인 한 줄기의 커다란 물기둥이 두 갈래, 세 갈래로 나뉘어지며 사방에서 장막을 후려쳤다.

- 콰아앙! 콰앙!

물의 힘이 서로 맞부딪히는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굉음이 계속 울렸다.

상대의 물기둥이 향하는 방향 쪽으로 장막의 힘을 더해가며, 에우리아가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번개를 내리꽂을 준비는 마쳤으나 숨어든 놈을 보지 못했다. 섣부르게 저 물 위에 번개자락을 뻗어내면 기껏 살려낸 병사들 다 죽일 판이니 상대의 위치부터 확인해야 했다.

때문에 에우리아는 한 쪽의 마력으로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강한 마법을 준비하고 또 한 쪽의 마력으로는 병사들을 보호하면서, 남은 마력의 실타래를 펼쳐 인근에 있는 또 다른 마법사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 쿠과과광! 콰아앙!

양 쪽으로 길게 늘어선 물기둥이 독사의 몸짓처럼 길게 늘어나더니 길이를 늘려 장막 위로 치솟는다. 그와 동시에 에우리아의 손이 빠르게 움직여 다시 한 번 물을 움직였다. 길이를 늘린 장막이 병사들의 머리 위를 감쌌다.

그런데 그 순간, 날카로운 파열음이 귀를 찢을 듯 터져나왔다.

- 쩌적, 쩌저적!

상대를 찾아 내리꽂기만 하면 될 에우리아의 번개 소리가 아니다.

무언가가 급속히 얼어붙는 소리. 지금 막 에우리아의 장막을 내리친 물의 기둥이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나는 소리.

고개를 내민 물기둥의 끝이 긴 창과 같이 늘어나더니 수십의 얼음창으로 모습을 바꾼다. 그리고 주저없이 물의 장막을 뚫고 쏟아지듯 내리꽂혔다.

- 쌔애액!

- 쌔액! 쌔애애액!

비명소리가 귓가를 잠식한다.

에우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얼음 마법.

물의 힘을 이 정도로 사용해가며 얼음의 창을 만들 수 있는 물 속성의 마법사는 없다.

'상대는 둘 이상. 혹은 나와 같은 놈.'

에우리아와 똑같은 이중 속성의 마법사.

그런 놈이 있던가? 미간을 찌푸린 에우리아가 다시 한 번 마력을 운용했다.

- 콰득! 콰드드득!

물의 장막을 회오리로 바꾸어 쏟아지는 얼음창들을 잘게 부숴버린 에우리아의 시선이 일순간 한 곳을 향해 휙 돌아갔다.

물의 기운이 어느 한 지점으로부터 뻗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 쿠구궁······!

- 콰르릉! 콰지직!

찾았다.

- 우우웅!

물의 장막을 없앤 에우리아가 거대한 실드를 만들어 확연히 줄어든 병사의 앞을 막았다.

카이리스의 마법사와 세크리티아의 병사들이 대치 중인 상황에서 병사들을 잡아 죽이는 놈이 가진 꿍꿍이가 달리 뭐가 있겠나. 횃불 든 세크리티아 놈들의 의도만큼이나 눈에 훤한 것이다.

마법사의 힘은 일반인의 것과 차원을 달리한다.

마법사에게 있어 병사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다. 마법사는 절대적 강자이며, 병사는 마법사에 비한다면 상대적 약자에 속한다. 약자를 이유 없이 찢어발기는 마법사는 질 나쁜 놈이다.

거기에 더해 카이리스에 뒤 구린 선물을 보낼 마음을 먹고 찾아온 것이 분명한 악질적인 새끼는,

- 쿠아아앙! 쾅! 콰아앙!

상황 봐 가며 살려놓을 필요가 없는 새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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