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93화 (294/527)

제52장. 참으세요, 형님(3)

펜델리아.

그런 이름인 것을 이제 알았다.

"저기 저것. 펜델리아로 만든 약입니다."

아르센이 가리켜보인 방향에 커다란 식물 하나가 있었다. 갈색의 반점이 있는 녹색 줄기에 끝이 살짝 갈라진 넓은 잎사귀가 붙어 있는 모양새. 본 적 있는 것이었다.

겉은 초록색이고 속은 분홍색인 열매가 열리는데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던 말이 생각났다.

"왕자님과 대련하고 난 뒤에 쓰려고 치유사 베른 경에게 받아 두었던 겁니다. 치유사는 고사하고 치료사를 부를 수도 없는 상황이니 약이라도 쓰시는 것이 나을 겁니다. 펜델리아는 처음 보시겠지만······."

"알아. 뭔지."

"플란츠 왕자님께서 그런 걸 어떻게 아십니까."

술처먹고 절벽에서 굴러내려갔다가 눈 떠보니 온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고 했었다. 엘프의 도시에서 칼리안이 말해줬던 것을 한 글자도 잊지 않고 떠올린 플란츠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내 아우님께서 술이 과하셨던 날에 절벽에서 실족해서 붙여본 적 있다고 알려줬는데."

"······ 아."

애석하게도 아르센은 플란츠가 애써 포장해준 말의 속뜻을 제대로 알아듣고 말았다.

세크리티아라 해서 왕족에 대한 취급이 다르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공도 되지 않은 생풀을 왕자의 몸에 붙였다면 뭔 일이 있었을지 대충 짐작이 가는 것이다.

"아······ 무튼 플란츠 왕자님 쓰십시오."

"나보다는."

경사가 크지 않은 오르막길을 걷는 에스티나의 움직임에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리며 말을 멈췄다. 통증이 밀려든 까닭이다. 에스티나도 발걸음이 험하지 않은 말이었으나 이런 길을 걸을 때조차 주인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레이븐만큼은 아니었으니까.

어느새 상처 부위의 피도 멎고 조금씩 아물어가고는 있었다. 하지만 벌어진 상처가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감각에는 친숙해지기 힘들었다.

플란츠가 잠시 숨을 고르며 날카로운 느낌을 다스리다 말을 이었다.

"내 아우님에게 필요할 것 같은데."

"펜델리아는 미약한 독성이 있는 약재입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상관없지만 지금 왕자님이 쓰시면 오히려 좋지 않습니다."

아르센이 길게 팔을 뻗어 건네 준 약병을 보던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기절한 채 레이븐의 위에 엎드려있는 검은 머리 미친놈 하나가 보였다.

아르센이 레이븐의 안장에 칼리안을 올려두었던 처음보다는 숨을 쉬는 것도 나아졌고 보랏빛이 돌던 입술도 조금씩 본래대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숙취는 무시하고 과한 욕심을 부려 체한 것은 풀어주지 않아도 다친 것 하나는 잘 고쳐주는 시스파니안의 축복 아니던가.

조금 전, 레이븐에 기대어 서 있던 동생 놈의 모습이 생각났다.

검에 베인 상처가 팔에 하나, 그리고 허리에 하나.

플란츠는 그것만으로도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데 어떻게 표정 하나 찌푸리지 않고 서 있을 수가 있는지.

지독한건지. 무식한건지. 아니면 익숙한건지.

가늠이 안 된다.

짧은 한숨을 한 번 내쉰 플란츠가 달빛 아래 드러난 핏기 없는 손을 잠깐 쥐었다 폈다. 그리고 더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법사."

"네."

"그들을 마주했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마법사가 얼마나 되나."

"제온 말씀이십니까. 아마 세이렌 경 정도라면 무리 없이 살아나오겠지만, 저를 포함한 나머지는 상황에 따라 다를 겁니다. 저 역시 죽을 뻔했던 것을 아시잖습니까."

강하다.

마지막으로 죽었던 제온의 전사가 보내온 눈빛을 잊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나섰고 칼리안이 막아섰기에 칼을 겨눠보지 못했으나 만약 겨누게 되었다면 살 수 있었을까.

글쎄.

아마 절대로 살지 못했을 것이다.

한동안 그 생각을 이어나가던 플란츠가 다치지 않은 쪽 팔을 아르센에게 내밀었다.

"줘."

"뭘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수정판."

"······ 제가 그걸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렇게 말하며 그 비싸다는 수정판을 꺼내들던 아르센은, 플란츠에게 마법사들의 가방이 없음을 상기하고 그것을 도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돌아가면 드리겠습니다."

"쓰지 말고."

"굳이 넣을 곳도 없는 커다란 수정판을 왜 지금 돌려달라하시나 했더니, 설마 제가 이걸 멋대로 쓸까봐 그러시는 겁니까?"

닳는 것 아닙니다, 하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아르센을 향해 플란츠가 대꾸했다.

"이미 썼잖아."

아르센의 입이 조용히 다물렸다.

잠깐 칼리안 쪽을 보던, 정확히는 칼리안의 눈치를 보던 아르센이 속삭이듯 물었다.

"수정판 쓴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마나실 후작을 부른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플란츠와 대화하는 것은 참 어렵다.

어떻게 알았는지를 물으니 또 엉뚱한 말을 했다.

아르센이 왕자들을 도우러 오기 전에 그 수정판을 가지고 레릭에게 연락해 앨런과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이미 다 알고 묻는 말임을 힘들게 이해했다.

"무서워서 플란츠 왕자님 앞에서는 물도 못마시겠습니다. 물 마신 것 하나 가지고 사흘 전에 뭘 먹었는지 알아내실 것 같습니다."

아픈 와중에도 플란츠는 아르센이 자신을 다시 '플란츠 왕자님'이라 부른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르센이 플란츠의 앞에서 그렇게 꼬리를 말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않나.

앨런을 통해 부군단장에서 그새 또 물러나게 된 것이다.

"모를 줄 알았다는 게 더 놀라운 것을 모르나."

"직위만 떨구고 왔습니다. 군인이면 여기에서 사람 못 잡습니다."

상황 안 보고 사람 잡는 에우리아와는 달리 아르센은 상황 보고 사람 잡는 마법사였다. 그래서 싸움에 참여하기 전에 잠깐 앨런을 불러 말했다. '시스파니안께서 만드시고 군단장님께서 손봐주신 그 마차 우리 코코가 아주 편안하게 자알 쓰고 있습니다' 라고.

그 말을 들은 앨런은 그 자리에서 아르센의 직위를 정성스럽게 해제시켜줬고, 아르센은 소속만 발칸인 그냥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로 얌전히 돌아왔다.

"마나실 후작께서도 무슨 일이 있는 것은 눈치챈 것 같지만 이 곳에 오지는 않겠노라 했습니다. 오게 되면 화를 많이 낼 것 같다 하기에 아직은 괜찮으니 기다리시라고 해 두었습니다."

"그래."

짧게 답한 플란츠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내리막길에 들어서면서 에스티나가 한 번 더 몸을 크게 움직인 탓도 있었고 생각에 잠겨든 탓도 있었다.

그런 플란츠를 물끄러미 보던 아르센의 시선이 시나스타로 향했다.

그동안은 줄곧 검집 속에 들어있었던 탓에 보지 못했던 것을 조금 전에 봤다. 칼리안의 손에 들려있던 청은색의 검신에 적혀있던 글자를 봤다.

그것을 떠올리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과거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인성 짧은 저 왕자의 검에 새길 글씨를 그렇게 정성스레 써줬나, 하는 마음에.

"상관 없지 않나."

뜬금없이 플란츠가 이런 말을 했다. 어느새 고개를 돌린 이의 연두색 눈이 아르센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누가 써 준 글씨였든. 무슨 일이 있었든. 이제는."

"······ 제 글씨인 줄 아셨습니까."

"대충."

말 그대로 대충 대답한 플란츠가 눈을 감았다.

아프기도 했고 설명하기 귀찮기도 했고.

플란츠를 잠시 보던 아르센의 입에서 소리 없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굳이 그런 이름을 아무나에게 전해주면서 새겼을 것 같지 않아서 생각해보다가. 옆에 있었을 만한 사람이 없지 않았을까.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끝까지 함께 있었다 하니 만약 누가 있었으면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아니었을까 싶던데."

그런데 대답하지 않을 것 같던 플란츠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아르센의 글씨를 알아본 건 아니었지만 지금과 달리 제 옆에 아무도 없었을 과거의 플란츠와 끝까지 같이 있었다던 아르센에게라면 그 정도 일은 시켰으리라 여겼다. 막연한 예측이었으나 오늘 시나스타를 쳐다보는 아르센의 반응 덕에 확신을 했다.

"얼마나 메마르게 살았으면 이런 사람을 곁에 두고 썼을까. 하는 생각도."

아주 잠시 애잔한 눈으로 플란츠를 볼 뻔했던 아르센이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음에도 글씨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낸 덕에 하마터면 그냥 버릴까 깊이 고민하게 만든 검을 잠시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베인 곳의 통증 때문에 다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할 말을 뺏겨 버린 아르센이 코코 똥 씹은 표정을 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나라고 너같은 놈 옆에 있고 싶어 있었겠냐'는 말을 하면 왕족 모독죄가 성립되어서 발칸에서 잘려볼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래도 동상은 만들어보고 잘려야 마법사다운 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참고 넘기기로 한 아르센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 반응에 플란츠가 피식 웃었고 아르센이 볼멘소리를 냈다.

"웃음이 나오십니까."

"나오는데. 왜."

"그렇게 따랐다던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이제 안 따라다니는데도요."

"상관 없는데. 그것도."

아르센의 말 뜻을 안다.

예전에는 그나마 아르센이라도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게 나란히 서 있을 사람이 없는데 괜찮은지를 묻는 것이다. 세크리티아의 기사가 그리 말했고 칼리안도 그것을 걱정했듯이.

"별로. 루시랑 안네 있는데. 왜."

특별히 누군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다면 모를까. 단 한 번도 그것이 아쉽다 여겨본 적 없던 탓에 이런 대답을 했다.

사사건건 우는 소리하며 따라다니는 시종 하나에 매일같이 갱신하듯 더 새로운 사고를 치는 발칸만으로도 족하다. 매일 짖다 수틀리면 물려고 드는 검은 고양이 하나도 버거운 판에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 곁에 둬서 뭐하나. 머리만 아프지.

거짓 없는 대답을 한 플란츠가 앞을 쳐다봤다.

멀리, 거대한 정원을 가진 작은 궁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 *

말보다는 새가 빠르다.

많은 일이 있었으나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던 탓에 여전히 한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즈의 별장에 도착하니 열 명 가량의 이들이 조용히 나와 셋을 맞이했다. 칼리안의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체이스의 연락이 먼저 간 모양이다.

기사들이 들것에 칼리안을 뉘여 침실로 옮겼다. 아르센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칼리안도 플란츠도 적당히 처치를 받았다.

적당한 처치라 말하는 이유는, 이곳에 있는 이들이 체이스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의 하수인이라는 말은 들었으나 온전히 믿지는 못하여 그들이 준 약을 먹지도 바르지도 않은 까닭이다. 플란츠는 아르센이 가져다 준 약만 썼고 칼리안은 해독이 마저 될 때까지 그마저도 하지 못하게 했다.

- 다른 더 필요하신 것은 없습니까, 플란츠 왕자님.

- ······ 바나나.

- 바나나, 말씀이십니까?

- 많이.

그 후 칼리안이 언제 일어날지 몰라서 침대 옆에 바나나를 좀 쌓아놓게 한 뒤 칼리안이 누운 침대와 좀 떨어진 창가로 가 섰다. 칼리안이 일어나든 왕궁에서 칼리안의 사람들을 더 보내든 그 전까지는 아르센이 혼자 호위를 봐야 했으니 각자의 방에 마음 편히 들어앉아 있기가 어려웠던 탓이었다.

나도 다쳤는데 쟤가 더 많이 다쳐서 나는 제대로 못 쉬는 그런 상황이지만 어쨌거나 내가 자초한 일이 맞으니 별 불만을 가지지는 않기로 했다.

- 사아아아······.

먼 곳에 바다가 보이는 실로 조용한 곳.

가장 높은 층의 그 방은 한 쪽의 벽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었다. 그 앞에 서서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 반짝.

푸른 빛.

넓은 정원 한 곳에서 푸른 빛이 맴돌고 있었다.

마법사의 불빛은 아닐텐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한참을 바라보니, 한쪽에서 빛나던 푸른 빛이 이내 조금씩 퍼져나가듯 늘어났다. 그렇게 오래지 않아 온 정원이 푸르게 빛나게 되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푸르게 맴돌던 빛무리가 마치 가벼운 홀씨가 바람에 흩어지듯 퍼져나가며 하늘로 오르기 시작했으니까.

넓은 정원 한가득 누군가를 기리는 꽃만 심어 둔 이 곳에서, 달빛 아래 두 번째 피어나는 그 꽃이 푸른 빛으로 변해 떠오르고 있었다.

"시나스타입니다."

그래.

시나스타였다.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그 새를 못 참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놈이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왜."

"그냥. 깼습니다."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앨런이나 키리에가 곁에 있든 아니면 체르밀의 제 방에 누워야만 제대로 잠드는 놈인 걸 모르지는 않아서, 플란츠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피는."

"멎었습니다. 허리에도 감각이 돌아오고 있네요."

"그래."

그렇게 강제로 힘을 썼음에도 착실하게 움직인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해독을 마쳤다.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등이 쑤시는 걸 보니 역시 그 때 등을 맞기는 했나보다며 실소한 칼리안이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고개를 멈추고, 잠시 숨을 참았다.

"혹시 체이스 형님께서 이곳을 알려주신 겁니까."

"후궁 루이즈의 별장이라던데. 모르는 곳인가."

칼리안이 손바닥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모를리가요."

별보다 푸른 시나스타의 빛이 아니더라도 방 안을 볼 정도는 되었다.

무늬 없는 검은 시트, 어두운 잿빛의 커튼, 광이 나지 않는 짙은 갈색의 가구들. 액자 하나, 화병 하나 놓여 있지 않은 황량한 방. 가끔씩 와서 지냈던 곳이 기억과 똑같이 꾸며져 있었다.

없어졌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다.

"······ 제 방인데."

왕비 디에나의 별장.

그리고 그 안에 마련했던 베른의 방이었다.

이 시간을 살아가지 않은 베른의 흔적을 마주한 칼리안이 꽤 오래도록 웃음소리를 냈다.

체이스는 이 방을 칼리안에게 내어줄까 말까 참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다친 것이 걱정되고 혹시나 이곳을 보며 울적해하지 않을까 그것도 걱정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별장을 알려준 이유를, 굳이 이 방에 칼리안을 둔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웃었다.

"제 이름 뜻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나 보네요."

플란츠가 물끄러미 칼리안을 쳐다봤다.

"물어보면 이제 알려줄건가."

습관처럼 어깨를 으쓱여 보이려다 등이 욱씬거려 멈춘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뇨. 형님 이름 뜻도 안 알려드릴건데 제 예전 이름을 왜 알려드리겠습니까."

"······ 그래."

순간적으로 짜증이 드러난 얼굴을 보며 피식 웃은 칼리안이 창 밖을 봤다.

"아무튼 재밌네요."

"뭐가."

"헤르츠 경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충분히 싸웠으니 이제 쉬라고. 키리에는 멈추지 말라 하였는데, 둘이 성격도 다르고 하는 말도 어떻게 그렇게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작고, 갈라지고, 피로 가득한 음색이 이어졌다.

"조금 전에 헤르츠 경이 찾아왔을 때 어찌나 반갑던지. 그렇게 헤르츠 경을 보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지난 번에도 헤르츠 경이 오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 하고요. 사실 멈추지 말라는 말이 저는 참 기껍다가도 서러웠는데. 쉬라는 그 말에는 서럽다가도 기껍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이제와 플란츠에게 불만을 내어놓듯 꺼내는 말이지만, 솔직히 너무 힘들고 버거웠었어서.

"그게 또 재밌어서요. 결국 이 땅에서 헤르츠 경을 두 번을 기다린 셈이 되었으니. 그런데 그 이유가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이."

"······ 그래."

칼리안의 목소리가 조금씩 잠겨들어갔다.

"그렇다고 그 일이 좋았다는 건 아닙니다."

"알아."

"그러니까 같은 일 두 번 겪지는 않을 겁니다."

"알아."

"쓸데없는 걱정 마시고 쉬세요. 형님 한 분 때문에 전쟁 날 일, 이번에는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안 둘 거니까."

"······ 반말."

"형님 때문에 이렇게 다쳤는데 그것 하나 안 봐주십니까."

플란츠가 대답 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상처 하나 값으로 반말 한 번을 얻어낸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작게 웃었다.

푸른 빛무리가 일렁이며 칼리안의 얼굴을 비추다 하늘로 떠올랐다. 익숙한 향 가득한 침대에 다시 몸을 뉘인 칼리안이 곧 잠에 빠져들었다. 키리에도, 앨런도 없었으나 깊은 잠을 잤다.

불과 몇 시간 뒤.

- 브리지트 숲에 갔던 세크리티아의 병사들이 전부 죽었습니다.

체이스로부터 이런 연락을 받은 플란츠가 잘 자는 동생을 깨워내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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