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92화 (293/527)

제52장. 참으세요, 형님(2)

다섯을 형님한테 남겨놓고 제온의 힘을 쓰던 전사 두 놈한테 덤벼들었지, 그래. 그것까지는 정확한데. 그 때까지는 둘인 게 맞는데. 놈들 중에 하나를 죽였는데 왜 둘이 남았을까.

······아니, 다시 한 명이네.

방금 분명 둘이었는데 다시 보니 하나 맞네. 하긴 그렇지. 둘이 있었고 그 중에 하나를 죽였으니 내 앞에 선 놈이 이제 한 명이어야지. 맞는데 아까는 왜 둘이었지. 이상하네.

- 깜빡.

부옇게 흐려진 시야를 닦아내려는 것처럼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제야 초점이 돌아오며 둘로 보이던 전사가 한 명으로 정확히 보였다.

"아······ 하나 맞구나. 방금 죽인 놈 살아 돌아온 줄 알고 무서울 뻔했잖아."

나같은 놈이 또 생긴 줄 알았잖아.

거듭 확인해보듯 눈을 깜빡였다. 한 명 맞다.

툭툭, 하고 발 끝으로 바닥을 몇 번 더 찼다. 검을 쥔 손에도 몇 번인가 힘을 주어 가며 잠들려는 감각을 다시 깨웠다.

- 깜빡.

조금 먼 곳에서 검격을 주고 받는 다섯 명의 인영이 보인다. 혹시나 싶어 이번에도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다섯 중 하나는 완두콩일 테니 검사 중 한 명이 줄어든 것이리라.

헤르츠 경이 올 때까지 적당히 상대해가며 기다리기만 해도 될 텐데, 그게 아니면 사실 내가 너희들이랑 같은 편인 듯 하니 셋째 왕자 죽을 때까지 사이 좋게 구경이나 하자 해도 될 텐데, 하여튼 융통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서 검사 한 명을 줄여놨나보다. 기어코.

"또 잔뜩 절여지셨겠네."

기어코.

- 쉬이익!

짧은 한숨을 내쉬려는데 호흡 가다듬기를 마친 전사가 달려들었다. 때문에 숨 한 번 제대로 쉴 틈도 가지지 못하고 검을 들어올렸다.

- 카앙!

- 카가강! 캉! 카아앙!

연이은 쇳소리가 청각을 깨웠다.

허리쪽은 여전히 감각이 없었으나 심장의 통증이 계속해서 올라와 가물거리던 정신머리를 꽉 붙들었다. 차라리 다행한 일이다.

땅을 디딘 것인지 그림자를 밟는 것인지 잘 구분하지 못하는 발을 놀려 달려드는 전사의 검을 피했다. 고집스럽게 검을 붙들어 잡고 놈을 향해 찔렀다.

바닷가에서 잡은 넷. 조금 전에 잡은 하나. 그리고 지금 앞에 선 한 놈까지, 제온에서 보낸 대사막의 전사는 총 여섯 명.

"저놈들이랑은 별로 안 친했나봐. 서른 가까이 죽도록 멀뚱히 서있던걸 보니."

궁금하기도 했고 졸음도 좀 치워야 해서 질문을 건넸다. 검사들이 다 죽어나갈 때까지 남의 집 불타는 것을 구경하는 정도의 얼굴로 꼼짝않고 있었는데 그것을 두고 어떻게 한 편이라 여기겠나.

"아직 서먹한 사이였지."

아무 말 안할 줄 알았는데, 서로 검을 맞댄 채 힘을 겨루던 놈이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서먹한 사이.

서로 다른 소속.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오늘 처음 만났거나.

고개만 끄덕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말 대신 검을 보냈고 놈이 그것을 강하게 올려쳤다.

- 카아앙!

불똥이 튀었다. 재빨리 검을 회수하여 휘두르자 흰색이 드문드문 섞인 머리카락이 잘려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까부터 놈이 다시 둘로 보이더라니, 그래도 제대로 노렸다고 생각했는데 엇나간 모양이다.

울컥.

또 한 번 목구멍을 치받는 핏덩이를 습관처럼 삼켜냈다. 웃음이 났다.

'이렇게 약해빠져서야.'

이래서야 파슬리 새싹 줄기같은 분 연약하시다고 놀려먹지도 못하겠네.

- 카아앙! 카강!

멈춰서는 순간 죽는다는 것을 안다. 때문에 끊임없이 발을 놀리고 팔을 휘둘렀다. 물론 그것은 저 놈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적어도 놈은 한 명의 적이 둘로 보일 만큼의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서 더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이며 놈의 빈틈을 노렸다.

- 두근!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심장에서 보내오는 날카로운 느낌은 도무지, 정말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다. 한계에 달한 심장이 무심히 두근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윙윙 울렸다.

- ······ 두근!

붉은 빛을 내뿜던 검이, 스러지듯 사라졌다.

"하아······."

눈을 깜빡였다.

먼 곳의 인영을 다시 살핀다. 셋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또, 하나를 줄여놨다.

저러다 파슬리 싹 다 시들 판이다.

- 우우웅!

쥐어 짜내듯 검을 만들어냈다. 눈을 깜빡였다. 발을 움직였다. 팔을 놀렸다.

"그냥 둬도 알아서 죽게 생긴 놈이 잘도 버티는군."

전사의 말에 대답 대신 그냥 웃었다.

참 똑똑하신 어느 분이 나 안죽는다 했다 하면, 기껏 진실로 만들어 둔 확신 없던 그 말이 사실은 거짓이었노라 부정당할 것 같아서.

전사의 검을 다시 한 번 밀어냈다. 검이 다시 사라졌다. 다시 만들어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죽은 놈의 검이 부러지도록 내리치지 말걸. 검이 또 사라지려 하기에 심장의 끝을 붙들고 매달리는 기분으로 다시 웃었다.

찰나의 틈을 타 다시 한 번 플란츠 쪽을 살폈다.

그리고 더는 웃지 못했다.

"대체, 왜."

완두콩이 보였다.

그래. 보였다. 눈을 깜빡여볼까 하다가 그냥 쳐다봤다. 둘로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제대로 한 명으로 보였으니까. 그래서 그냥 쳐다봤다. 더 웃지도 못하고 쳐다봤다.

생각했던 딱 그대로 잔뜩 절여진 완두콩이 보였다. 달려오고 있었다. 왜.

"칼리안."

불렀다.

칼 든 놈들을, 그것도 셋이나 등 뒤에 주렁주렁 매달고 달릴 생각을 한 놈이 나를 불렀다.

"······ 받아."

검이 날아왔다. 검을 받았다.

아.

저 형님이 미쳤나보다.

또 미련한 짓을 한다. 멋있으라고 둘로 나뉘는 검이 아니라는 걸 잊어버렸나보다. 제 검술 실력이 반쪽짜리 검으로도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수준은 된다고 착각했나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진짜 미쳤나보다.

정말로, 미쳤나보다.

전사를 향해 발을 박찼다. 숨어들고 나타난다. 놈의 뒤에서, 앞에서, 검을 내찔렀다. 놈을 몰아세웠다. 그러다 놈이 다시 둘로 보여서 놈의 목 대신 허공을 또 찔렀다. 빌어먹을.

- 카앙!

근처에 자리잡은 플란츠와 검사들이 서로의 목숨줄을 노리는 소리가 들렸다. 완두콩이 막은 소리다. 말 짧은 것을 알아듣게 되니 칼 막은 소리도 알아듣게 됐나보다.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들려야 할 곳은 이 쪽인데 그 쪽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 캉!

완두콩이 다시 막았다.

다음 공격은 피했다, 아니. 맞은 것 같다. 심하게 베였나. 찔렸나. 모르겠다. 소리 하나가 줄어들었다. 완두콩이 한 놈을 더 줄여놨나보다. 그런 걸 보면 많이 베인 건 아닌건가. 모르겠다.

심장이 또 뒤틀린다. 모르겠다. 반쪽짜리 검으로 완두콩이 얼마나 버틸까. 그것도 모르겠다.

- 카아아앙! 카가강! 카앙!

본능만 남은 것처럼, 하필이면 청은색인 그 검에 오러를 두르고 살기를 내뿜었다. 정말로 발톱을 세우고 이를 드러낼 것처럼 검을 휘둘렀다. 그 와중에도, 멀쩡한 두 귀는 전사와의 칼부림 소리가 아니라 다른 곳의 소리만 골라 착실히 들려주고 있었다. 재밌는 일이다.

완두콩의 공격이 막혔다. 다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왜? 앞에 선 전사로부터 눈을 떼 소리가 들려오던 방향을 봤다. 잿빛의 검이 반대편 놈의 손아귀에 붙들려있는 것이 보인다.

훤히 다 보인다.

무슨 생각을 했고 무엇을 내려놨고 얼마나 쓰잘데기 없는 걱정을 하는지 훤히 다 보인다.

"이······."

생각이 앞서서 검을 먼저 내리지는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미련한 완두콩."

달렸다.

전사가 뒤따라오며 검을 휘두른다. 등에 맞았나. 모르겠다. 아픈가. 모르겠다. 달렸다. 시나스타를 붙들어 잡은 손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완두콩 어깨를 붙들어 잡았다. 등 뒤로 옮겨놨다. 피 냄새가 후두둑, 짙어진다.

등 뒤가 아프다.

가르쳐 준 것 다 까먹은 미련한 놈. 망할 놈. 원수같은 형님같으니.

"아뇨."

안 죽었다.

그럼 됐다.

그건 알겠다.

* * *

'이대로 물러나기엔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플란츠 왕자님.'

이름 모를 빨간 꽃 가득한 화원 한 구석에서, '옆 나라 왕자의 사정이 안쓰러워 견딜 수 없던 한 사람'이라 자신을 소개한 기사가 그렇게 입을 열었었다. 그 입에 저 꽃을 다 처넣어줄까 하다가 한 번을 참았다. 계속해보라며 고개를 까닥여 보이니 놈이 말을 이었다.

'칼리안 왕자는 플란츠 왕자님의 모친을 살해한 사람입니다.'

어머니의 손을 잡은 내가 죽은 채로 사는 길.

어머니의 손을 놓고 나를 뺀 모두가 사는 길.

후자를 선택한 것은 나였다. 내 어머니를 살해한 것은 칼리안이 아니라 실리케였고, 또한 실리케를 내버린 브리센이었다. 그것을 나도 알고 칼리안도 아는데 저 놈은 모른다. 몰라서 하는 말이니 이해하고 넘어갔다. 무지는 죄가 아니라 하였으니.

'뿐만 아니라 플란츠 왕자님이 지닌 모든 것을 모조리 빼앗아 쥔 사람이 아닙니까.'

애초부터 가진 것이 없던 나는 무엇을 뺏겼던가.

브리센을 뺏겼나.

- 주변이 다 풀밭이었어도 완두콩은 완두콩색입니다.

내 아우님이 나로부터 브리센을 털어내주려 하고는 있는데 그것을 빼앗았다 봐야 하나. 그건 틀린 것 같은데. 그게 아니면 또 뭘 빼앗아 가져갔을까. 제 살을 깎아서 나에게 준 것만 많은 동생 놈이 빼앗아 가진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뺏긴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이 안났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훑을 줄 아는 브리센같은 놈들의 눈에는 그렇게도 보이는걸까 싶어 두 번을 참았다. 무지는 죄가 아니지만 브리센같은 멍청함은 죄가 되니까.

'그래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거들어주시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세 번. 참았다.

'언제든 상관 없으니 왕궁 밖으로 함께 나오십시오. 왕자님의 걸음에 방해가 되는 것을 저희가 대신 치워드리겠습니다.'

바다 보러 온 기념으로 한 번을 더 참을까 하다가, 불편하고 싫으면 굳이 참지 말라고 하신 내 아우님 말씀이 생각났다.

'기억해두지.'

그래서 나도 더는 참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움직였다.

계획의 끝에 체이스가 있었다. 제 목숨 노려지는 일은 아무 상관 않겠지만 체이스가 왕궁 밖에 나오는 일은 반대할 것이 분명한 칼리안이 아닌가. 그래서 말을 안했다. 그래서 일이 엉망이 됐다. 전부 다 어그러졌다.

칼리안의 목숨도 덜 노려지게 할 겸 귀족들 사이에 숨어있는 의심스러운 놈들의 정체도 좀 확인해서 체이스에게 건네줄 겸 참지 않고 행동한 것의 결과가 이렇게 번질 줄 알았으면 한 번을 더 참아볼 걸 그랬다. 아니라면, 나오기 전에 그냥 칼리안에게 얘기를 할 걸 그랬다.

"······ 늦었습니다."

어쨌거나 이제는 지나간 일이 됐다.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왔다.

제 살 다 깎아 내주고 이제는 목숨까지 깎아주려는 동생 놈의 등에 생긴 긴 자상을 잠깐 보던 플란츠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얼음 방벽이 깨져나갔다. 놈들이 움직였다.

놈들의 목표는 애초부터 아르센이 아니라 칼리안이었다. 칼리안이 플란츠의 앞에 실드를 씌워놓고 플란츠의 손에 검사 한 명이 죽은 뒤부터는 구분 없이 둘 다 노렸지만 우선순위는 칼리안이었다.

때문에 검사들은 칼리안을 향해 다가왔고 전사는 아르센 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아르센의 손에 새파란 한기가 어렸다.

- 쩌적!

- 쌔애액! 쌔액!

전사의 발 밑이 얼어붙음과 동시에 세 개의 얼음창이 검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 콰직!

순식간에 두 명의 검사가 칼리안의 앞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로 쓰러졌다. 길고 두꺼운 얼음의 창에 몸이 꿰뚫린 채였다. 용케 얼음창을 피한 검사의 목에 긴 자상이 생긴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청은빛의 검이 자신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검사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 상태로 칼리안을 잠시 쳐다보다가 플란츠 쪽으로 눈을 돌렸다.

- 퍽!

아니, 돌리려 했다.

제 죽음도 눈치채지 못한 놈의 배를 걷어차 멀찍이 쓰러뜨린 칼리안이 다시 검을 쥐었다.

발 밑이 얼어붙어 멈칫한 전사가 발에 힘을 주었다. 엉겨붙어 있던 얼음이 산산이 깨지며 반짝였고 그런 놈을 향해 네 개의 얼음창이 쏟아지듯 떨어져내렸다.

- 쌔애액!

- 카가가강!

전사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쏜살같이 날아드는 얼음의 창을 전부 막아낸 놈이 눈 앞의 아르센을 향해 검을 휘둘렀으나 얼음 벽에 다시 막혔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여지없이 울린다.

아르센의 손 끝이 다시 한 번 전사를 향했다. 십수 개의 얼음 쐐기가 놈을 향해 날아갔다. 서릿발같은 새하얀 기운이 놈의 몸을 휘감으려 들었다.

놈이 검을 들어올렸다. 그와 함께 칼리안의 검이 놈의 심장을 향해 휘둘러졌다. 놈은, 그 전사는, 현저히 느려진 속도로 날아드는 칼리안의 검을 비웃는 대신 신중히 쳐냈다.

- 카아앙!

- 카강! 캉!

발 밑의 얼음을 떨쳐내며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전사가 칼리안의 검을 막고, 올려쳤다. 그 틈을 타 긴 얼음창이 다시 날아갔으나 그 역시 막혔다.

- 카앙! 카가강! 카앙!

칼리안이 발을 한 번 휘청였다. 전사가 검을 내뻗었다. 칼리안이 검을 들었다. 플란츠가 앞으로 나섰다. 칼리안이 막아섰다.

- 쩌저적!

한 겨울에 꽁꽁 언 세뉴강에서 들릴 법한 소리가 났다. 단단하게 뭉친 얼음이 몸집을 부풀리는 그런 소리가 났다. 아르센이다.

전사의 검 끝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메말라 갈라진 강바닥 위에 빗물이 다시 흐르듯, 새하얀 얼음의 기운이 사방으로 가지를 넓혀가며 검을 타고 내려갔다.

아르센이 움직였다. 검사의 손이 얼어붙었다. 칼리안이 움직였다. 검을 뻗었다. 전사가 팔을 들었다. 두 검이 서로를 부술 듯이 충돌하며 굉음을 냈다.

- 카아아앙!

그것이 시작이 되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전사의 단단한 검에 균열이 일었다. 오러를 담도록 만들어진 강인한 검에 잔금이 갔다. 아르센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 계속, 계속, 전사의 검에 냉기를 보냈다. 칼리안이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러 놈의 검을 내리쳤다.

- 쩌엉······!

버티지 못한 날붙이가 마지막 울음소리를 냈다. 부서졌다. 사방으로 비산했다. 빠르게 마력을 운용한 아르센이 플란츠에게 실드를 씌웠다. 칼리안에게는 씌우지 않았다. 방해만 될 뿐임을 안다.

전사가 한 발을 뒤로 물렸다. 주변에 널린 검을 집어들었다. 다시 달려든다.

칼리안이 손을 뻗었다.

플란츠가 제 손의 검을 마저 넘겼다. 그것을 받아들었다. 두 개의 검을 하나로 합쳤다. 온전한 시나스타를 이번에는 칼리안이 손에 들었다.

숨을 멈췄다. 발을 박찼다. 검을 뻗었다. 놈이 막았다. 신경쓰지 않는다. 그딴 검으로는,

- ······ 콰직!

못 막는다.

전사가 새로 집어든 검이 그대로 부서져나갔다. 전사의 검과 그 너머의 심장과 그 안에 든 생명이 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전사의 몸이 기운다. 쓰러진다.

더는 숨 쉬지 않는다. 죽었다. 죽였다. 아니.

지켰다. 이번에는.

그건 알겠다.

* * *

붉은 불길이 치솟았다.

세크리티아의 기사들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습격자들의 시신을 없애두려는 아르센의 불길이었다. 저들의 시신을 남겨둔다면 참 요긴한 협상 키가 될 것을 알고 있었으나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모두 태웠다.

언제나와 같은 이유다. 칼리안 뿐 아니라 이제는 플란츠의 대외 홍보용 실력까지 사실과 많이 달랐다는 증거를 버젓이 남겨 두면, 지금 당장은 저들이 습격했다는 사실 하나가 유리하게 쓰일지 몰라도 나중에는 아닐 테니까.

- ······ 칼리안은 많이 다쳤을 테고. 플란츠 왕자는 어떻습니까. 멀쩡하진 않을 것 같은데.

- 살아있어. 둘 다.

아르센으로부터 건네받은 두어 개의 붕대를 어떻게 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해보다 포기했다. 그걸 감을 여력이 됐으면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의 부축을 받을 일 없이 에스티나의 안장 위에도 혼자 잘 올라탔을 거다.

어찌됐건 체이스는 둘의 상태를 더 묻지 않았다.

둘이 함께 있었고 둘 중 누군가가 체이스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면 칼리안이 했을 것이다. 굳이 플란츠가 연락을 해왔는데 그랬다면 칼리안의 상태가 어떤지를 물어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나.

- 나오지 마.

- 알고 있습니다.

플란츠는 이제야 비로소 칼리안과 제대로 '대화'를 했다. 플란츠가 말하고 칼리안이 고갯짓을 몇 번 하다 만 것을 대화라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칼리안이 무엇을 준비해두고 나왔는지 알아들을 정도는 됐다. 그래서 플란츠는 당초 생각했던 계획을 싹 잊기로 했다.

한참 말이 없던 체이스가 다시 이야기를 전했다.

- 지금 있는 곳에서 반대편으로, 숲을 지나 동쪽 길을 따라 가면 내 어머니의 별장이 있습니다. 칼리안이 다쳤다는 것을 아버지가 적당히 눈치챌 수 있고 다른 귀족들의 눈에서 물러나 있을만한 장소로는 가장 좋을 겁니다. 아리안느의 사람들이 관리하고 있으니 다른 말이 새어나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테고. 브리지트 숲으로 간 두 마법사가 돌아오면 키리에와 함께 보낼테니 우선은 그곳에 가 있는 것이 낫겠습니다.

- 눈치 빠르군.

- 누구 형인데. 그 정도를 모를 리가.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 그래.

- 나는 이곳에서 할 일을 할 테니.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

- 알았어.

체이스와의 대화를 마친 플란츠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잊고 있던 피 냄새가 난다. 손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이제야 보인다. 그것을 한참 내려다보다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봤다.

전투가 끝난 뒤, 급한 마음에 자기소개도 하지 못하고 공격부터 한 아르센은 알아서 할 일을 찾아 했고 칼리안은 레이븐에 꼿꼿이 기대 서서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체이스에게 대화를 걸 마나도 사용하지 못할 만큼 상태가 엉망인 것을 아는데 티를 내질 않는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무어라 말을 하려는데 칼리안이 눈을 떴다. 그리고 에스티나의 위에 앉은 플란츠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앨런이 선물로 주었던 망토도, 하늘색의 재킷과 하얀 바지도, 그 안의 하얀 셔츠까지 전부 제 색을 잃었다. 파릇파릇하던 머리카락이 피에 젖었다. 손에 묻은 마른 피를 닦아낼 생각도 않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을지 뻔하다는 얼굴로 그렇게 한참동안 플란츠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마나를 움직였다.

[클린]

팔찌에 마나 불어넣는 것도 못하던 놈이 마법을 썼다.

할 일 끝내고 걸어오고 있던 멀쩡한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 내버려두고 굳이 제 손으로 피를 지웠다.

"너."

"아무리 그래봐야."

칼리안이 플란츠의 말을 막았다.

그러더니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손을 들어 플란츠를 가리켜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완두콩 색깔."

아니. 짖었다.

- 쿵!

그리고 졸도했다.

또, 졸도했다. 짖기를 마치고 졸도해버렸다. 이쯤 되면 일부러 저러나 의심을 좀 해봐야 할 것 같다.

가까이 온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다급히 허리를 숙여 칼리안을 부축해 들었다. 얼굴을 숨긴 놈의 어깨가 떨리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아주 잘 보인다.

"······ 웃지 마."

"노력해보겠습니다, 플란츠 왕자님."

한 번 참은 플란츠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하늘의 별이 온통 완두콩처럼 보여서 그만 볼까 하다 그냥 계속 하늘을 봤다. 고개 숙이지 말라는 소리였으니 하늘에 뜬 완두콩들만 계속 봤다.

풀물이 들었어도 완두콩 색인 게 맞겠지.

거짓말 못하는 내 아우님께서 완두콩 색이라 하시니.

그건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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