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장. 참으세요, 형님(1)
생을 이어가는 동안 한 번 쯤은 죽음을 각오하는 날이 있다.
만약 누군가 칼리안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그 큰 눈을 멀뚱히 깜빡거리는 예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베른으로 살았을 때에는 거의 매일매일이 그런 날이었고 결국 맞이한 마지막 날에도 죽음을 각오했으니 그런 날이 '한 번 쯤 있다' 라고 비장하게 말할 거리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옛칼리안의 삶 역시 마찬가지였다. 얀에게조차 비밀로 해 두고 왕실 서고를 몰래 드나들며 혼자서 마법을 익히던 하루하루가 옛칼리안에게 있어서는 바람 많은 계곡 사이에 놓인 외줄 다리를 건너는 것과도 같았다.
그랬으니 지금의 칼리안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리 없지 않겠나.
그래서 칼리안은 별다른 고민 없이 죽음을 각오했다.
내가 죽을 작정을 하지 않고서 누군가의 숨을 끊어놓고 살아남을 마음을 어찌 먹을 수 있을까. 때문에 숨을 쉬듯, 혹은 눈을 깜박이거나 입 안의 침을 넘기듯 자연스럽게 각오를 했다. 그리고 말했다.
기다리고 있으라고. 살려줄 테니.
- 싫어.
그런데 싫단다.
그것이 기다리라는 말에 대한 대답이 아님을, 정말 신기하게도 칼리안은 아주 잘 알아들었다.
"······ 형님 지키려다 죽을 사람 아닙니다. 저 안 죽습니다."
"알아."
확신 없는 단언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진실인지 아닌지를 가늠해보기도 어려운 동생의 말에 플란츠가 곧장 대답을 전해왔다.
누구보다 똑똑한 플란츠의 대답이니 안 죽는다는 말은 아마도 진실이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든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습관처럼 죽을 각오를 한 사람이 내뱉은 모순된 말을 진실로 만들어버리는 이상한 재주는 또 어디서 배우셨나 싶어서였다.
그 뒤, 잔뜩 긴장한 검사 다섯 명이 한 발을 다가올 정도의 짧은 시간 사이에 두 형제의 대화가 빠르게 오갔다.
"형님 지금까지 누구 몸에 상처낸 건 한 번 밖에 없으신데요. 이름 제대로 부르시라 했더니 식사 하다 말고 대뜸 나이프 던지신 거요."
"······ 알아."
"그 때 저 다쳤거든요. 흉터도 아직 있고, 저 그거 죽을 때까지 안 까먹을 거거든요."
"알아."
이런 와중에 그런 몸을 하고서도 입은 참 잘도 움직인다.
도망 갈 생각은 없는 용기인지 아니면 칼리안의 몸상태를 눈치챘는지,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서도 멀어지기는 커녕 천천히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던 칼리안이 조금 더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그 때와는 아주 많이 다를 겁니다. 다르다는 걸 죽을 때까지 못 잊어버리실 겁니다."
"알아."
가물거리기 시작한 정신머리 덕분에 '레이븐도 두 가지 종류로는 말을 하는데요. 푸르륵, 푸릉, 하고요.'라고 잠깐 짖을 뻔한 칼리안이 큰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레이븐보다 언어구사력 부족한 취급을 받은 것은 죽을 때까지 모를 형을 향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네."
사실 지금 몸을 움직이는 것이 썩 편하지는 않다고. 앞에 다섯 놈 잡고 나서 뒤에 있는 두 전사 잡으러 가다 말고 멈춰 설 것 같다고. 그러니 그냥 형님이 검사 다섯 놈 붙들고 있어 주면 내가 뒤에 있는 두 전사 데리고 있겠다고. 아르센이 올 테니, 잠깐만 상대하고 있으라고.
죽지 말고.
짧은 말.
많은 말이 담긴 짧은 말을 마쳤다. 그 짧은 말 안에 무슨 뜻이 담겼는지, 똑똑한 플란츠도 잘 알아들을 테니까.
칼리안이 발 끝으로 바닥을 한 번 툭 찼다.
그렇게 잠겨들어가는 몸을 한 번 깨운 뒤 다시 한 번 바닥을 박찼다. 방금 전보다 더 세게, 더 강하게.
- 타앗!
짙은 어둠 속으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숨어든다.
붉은 빛을 내뿜는 검의 잔상과, 같은 빛을 가진 듯한 피냄새가 잠시 맴돌다 이내 사라졌다.
플란츠가 조금 느리게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앞에 선 다섯의 검사들이 '진짜 적'임을 인식했다. 지금 이 상황이 동생 혹은 발칸의 대원들을 마주하고 벌이던 가짜 전투가 아님을 제대로 인지했다.
서로 다른 색의 두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같은 별을 담았으나 완연히 다른 빛을 내는 두 개의 검이 첫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 카아아앙!
먼 곳의 포식자들이 서로를 향해 발톱을 박아넣는 소리가 포효처럼 터져나왔다.
두 번째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칼리안은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다.
강요는 물론이고 채근한 적도 없었다. 되는대로, 혹여 어렵다면 돌아가는 것도 괜찮으니 가능한 만큼만 무리하지 말고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카이리스의 이동 마법진 구축에 대한 이야기다.
레이첼은 르메인의 허락이 떨어진 곳에 마법진을 구축했다. 구축이 완료되고 난 뒤에는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같은 일을 진행하길 반복했다. 그러다보니 드넓은 카이리스의 땅 이곳저곳을 옮겨가며 일을 진행하게 됐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생겨난 뜻밖의 결과를, 엉뚱하게도 에우리아가 체험하고 있었다. 그것도 벌써 두 번째로.
"제일 빠른 속도라더니 진짜 빠르네요. 꼬맹이에게 한 번 들은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빠른 줄은 몰랐어요."
"왕자님 로젤리타 때보다 훨씬 빨라졌어. 마법진 일로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까, 내가 어디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데도 시간은 아깝더라. 그러다보니 이렇게 됐어."
레이첼 스스로가 사용할 수 있는 이동 속도 보조 마법이 엄청나게 숙련된 것이다.
칼리안은 단 한 번도 빠른 작업을 요구한 적 없었으나 느긋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레이첼의 성격 상 이동에 소모되는 시간이라도 줄여보려 하다 보니 얻게 된 성과였다.
"덕분에 늦지 않게 온 것 같네요. 저렇게 우글우글 모여 있는 것을 보니 곧 뭐든 할 것 같은데."
"그러게. 그래 보이네."
"그런데 이곳 국왕은 왜 엘프 숲을 없애버리려는지 이해가 안 돼요. 보복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어차피 여기 사는 엘프들은 어머니나무의 보호를 받지 않아. 애초에 세크리티아에 어머니나무의 힘이 닿은 적도 없었지만. 숲 하나 없어지는 것 말고 세크리티아에서 피해 볼 일은 없으니 숲보다 큰 게 필요하면 저런 일을 저질러 볼 수도 있겠지."
"그럼 칼리안 왕자님은 왜 굳이 그걸 막으려 하는지, 그게 또 궁금해지는데요."
"글쎄. 그것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데블란은 이제 어떻게 행동할까.
데블란과의 대화를 마치고 나온 뒤 칼리안은 계속 그것을 생각했다. 지금 당장 데블란이 가장 쉽게 잡을 수 있을 칼리안의 약점이 뭐가 있을까. 큰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칼리안에 대한 가벼운 경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이득을 겸사겸사 취할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브리지트 숲.
어머니가 어린 시절을 보내 칼리안에게도 소중한 곳이라 이야기했던 곳.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데블란은 잘 알아봤을 것이다.
그곳의 엘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대장로 나르잔은 그 즉시 카이리스에서 발을 빼고 다시 세크리티아와 협상을 하려 들 터였다. 그러므로 칼리안의 소중한 곳을 빼앗는 것이 목적이든, 치유사가 목적이든, 아니면 카이리스의 큰 이득 하나를 빼앗는 것으로 르메인의 재밌는 편지에 화답하는 것이 목적이든, 혹은 전부 다 얻게 되든. 데블란이 지금 바로 목표할 것은 브리지트 숲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대한 생각의 결과로, 본래에는 에우리아와 에일라를 숲으로 보내려 했다. 브리지트 숲이 어디에 있는지 에일라가 모를 수는 있었지만 어쨌거나 에일라는 세크리티아에서 살았던 사람이었으니 그곳을 찾아가는 것에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나가려고.'
'어디를요.'
'바다.'
그러던 중에 플란츠가 갑작스러운 고집을 부렸다.
칼리안은, 세크리티아 귀족들이 플란츠에게 접근했던 것은 알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데블란이 어떻게든 자신을 해치려 하리라는 것 역시 알았고 그 사실을 플란츠에게도 전했다. 그런데 플란츠가 갑자기 바다에 가자 하더니 에우리아와 레이첼을 불렀다.
칼리안을 제외하고 일행 중 가장 강한 에우리아, 그리고 에우리아를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는 레이첼이 필요한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혹시 누군가 칼리안을 공격해오게 할 심산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플란츠의 계획을 적당히 가늠해낸 것이다.
플란츠는 똑똑했고 칼리안은 노련했으니까.
만약 누군가에 의해 칼리안이 정말 위험에 처하고 그에 대한 소식을 체이스가 어떤 식으로든 듣게 된다면 체이스가 왕궁 안에 있으려 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제일 먼저 키리에를 불러 체이스가 왕궁 밖에 나오지 못하도록 막으라는 말을 전해뒀다. 아르센에게는 에우리아와 레이첼의 발을 묶고, 왕실 바다가 있는 곳으로 뒤따라 와 플란츠의 곁을 좀 지켜보라 지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뒤에는 데블란의 계획을 막기 위해 에우리아를, 그리고 생각을 조금 바꿔 에일라 대신 레이첼을 함께 숲으로 보냈다. 레이첼도 세크리티아에 온 적이 있었음을 떠올린 까닭이기도 했고 왕궁 내부를 잘 아는 에일라의 쓸모가 따로이 생긴 까닭이기도 했다.
"이유가 어떻든 시킨 일부터 해야지. 에우리아."
"네. 그래야죠."
두 마법사가 선 곳은 숲 안쪽의 단단한 나무 위였다.
크지 않은 숲을 포위하듯 둘러싸고 조금씩 범위를 좁혀들어오기 시작하는 수많은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주의하라고 하신 것 잊지 말아."
"네. 아무도 안 죽이고 일처리 해본 게 너무 오래전이기는 한데 잊지는 않을게요."
"그래. 놈들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나는 슬슬 숲 뒤쪽으로 가볼게."
"네. 조심하시고요."
"알겠어."
"참. 저희 일 끝나고 한 잔 하고 들어갈까요?"
"좋지, 그것도."
가볍게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인 레이첼이 나무 아래로 텔레포트했다. 그리고 다시 말에 올라 숲의 반대편으로 달렸다. 에우리아와 각각 숲의 절반씩을 맡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발 빠른 레이첼이 에우리아를 내려놓고 숲의 반대편으로 가기로 했던 것이다.
'왕자님께서, 세크리티아의 병사들이 브리지트 숲을 공격한다면 막아달라 하셨습니다. 병사들의 눈에 띄는 것은 상관 없지만 아무도 죽여서는 안 된다 하셨습니다. 죽지만 않으면 된다고도 말씀하셨으니 참고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레이첼의 기운이 금세 멀어진 것을 확인한 에우리아가 키리에가 전해 온 주의사항을 떠올렸다. 그 마지막 말이 참 마음에 든다 생각한 에우리아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걸렸다.
- 파직, 파지직!
에우리아의 양 손 끝에 마력이 집중됐다. 한 쪽 손에서 만들어진 뭉클거리는 물의 기운이 땅 속의 물줄기를 찾아나섰고 또 한 쪽 손에는 강렬한 보랏빛의 스파크가 모여든다.
그리고 잠시 후, 숲의 반대편.
먼 곳의 하늘에 갑작스런 번개의 기운이 맴도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레이첼이, 말을 타느라 찌뿌둥해진 어깨를 돌려가며 몸을 풀었다. 그 뒤 양 손바닥을 곧게 펼쳐 땅을 향해 뻗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후 모여드는 병사들과의 거리를 가늠해가며 마나의 흐름에 집중했다.
마력이 모여든다.
심장을 거쳐 팔로, 손으로 모여든 마력이 레이첼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 사아아아······.
바람이 불지 않았으나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마른 나뭇잎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지며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가지 앙상한 나무 위의 둥지에서 간밤의 단잠을 자던 새들이 놀라 날아올랐다.
나무가 흔들리고 숲이 진동했다.
- 쿠구구궁······!
대지의 울음이 이어졌다.
* * *
비웃었다.
지금껏 동생의 실드 안에 잠든 듯이 서 있던 왕자의 검이 강해보아야 얼마나 강하겠나.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 도자기 인형같은 그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던 이의 두 자루 검을 우습게 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콰직!
그래.
목을 가르고 심장을 토막낸 두 검을 비틀어 빼내는 그 순간에서조차 지극히 아무것도 담지 않은 연두색 눈을 보면서, 잘못된 판단에 대한 뒤늦은 후회를 해 보아야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 풀썩!
생을 잃고 쓰러지는 시신의 몸에 검이 같이 딸려가지 않도록 빠르게 회수하며 다음 대상을 골랐다.
아주 잠시동안, 생각만큼 끔찍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손 끝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그리 끔찍하지 않은 이유를 정확히는 알지 못했지만 그랬다.
결국 나도 브리센의 핏줄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길 테니 동요하지 말자며 수도 없이 상상하고 다짐해왔기 때문일까.
- 카앙! 카가강!
그 빠른 머리로도 깊은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 오른손에 다시 한 번 힘을 줌과 동시에 왼손에 들려있던 검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양쪽에서 날아오는 두 검사의 검격을 막았다.
손 끝에 튄 무언가의 온도가 급격히 식어내리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것 역시 생각보다 끔찍하지 않아서, 플란츠는 상대방을 향한 살기를 거두지 않고 계속 흘려보냈다.
네 전사 중 가장 뒤에 있던 놈이 발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플란츠가 두 검을 교차하여 다음 공격을 막고, 둘 중 아래 놓인 검을 빼내어 앞에 선 검사를 향해 찔렀다. 상대의 살 끝이 찢기는 것이 느껴졌으나 깊지 않다. 그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뒤로 훌쩍 뛰어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가장 끝에 선 놈을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 카가강!
두 자루의 검에 아직 온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다는 말이 다루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본래부터도 검을 곧잘 다뤄왔으니 두 검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움직이는 것에도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 이유가 참 똑똑한 머리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칼리안은 설명해주지 않았다. 알려줘봐야 생각만 늘릴 테니까.
- 카앙! 카아앙!
멀리 붉은 빛이 어지러이 움직이며 하나 대 둘의 싸움이 이어지는 것을 일별한 플란츠가 다시 발을 움직였다.
네 방향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피한 뒤 팔을 휘둘러 쳐냈다. 시나스타보다 무거운 검을 쓰는 탓에 채 회수하지 못해 비어있는 찰나의 틈으로 두 검을 같이 찔러넣었다.
한 번 겪어 본 감각이 손끝에 머무르고, 놈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그것을 오래 확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플란츠가 검을 다시 빼들었다. 검은 색의 글씨 위에 붉은 방울이 맺히다 툭, 떨어진다.
곧바로 뒤로 돌아 다음 상대를 찾았다.
- 캉! 카가강!
뻗어나오는 검을 막고 튕겨내고, 찌르고 베어내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스쳐 지나간 누군가의 검날에 베인 팔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으나 거슬려하지 않으려 애썼다. 대신 조금 더 집중하여 상대의 틈을 노렸다.
욕심부리지 않고, 한 명씩.
빈 틈은 절대로 놓치지 않으면서.
남은 셋이 자신들끼리 눈빛을 주고 받더니 잠시 한 발을 물렸다. 그 틈을 탄 플란츠가 멀리 칼리안이 있는 쪽에 시선을 두었다.
하나 대 하나.
어느새 한 놈을 잡은 모양이다.
아무튼 지독하게 미친 놈이라는 생각을 하며 두 검을 다잡았다. 그런데.
- 깜빡.
멀리 보이던 두 개의 붉은 빛 중 한개가 갑자기 점멸하듯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플란츠는 잘 알았다. 자칫하면 브리센에 가서 고양이 안 키우겠다는 선언을 해도 플란츠 심장이 죄일 일이 사라진다는 소리다.
"······ 하."
앞에 선 세 놈, 저 먼 곳에 있는 한 놈.
어느 쪽을 먼저 챙길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 타앗!
플란츠가 세 명의 전사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리고 달렸다. 그 언젠가의 어느 날처럼, 다만 이번에는 어머니 말고 동생이 있는 쪽으로.
뒤를 따라 달려오는 검사들의 발소리가 들렸고 당장 죽어 사라질 얼굴로 웃던 동생 놈의 눈이 플란츠를 향하는 것이 보였다.
"칼리안."
새빨간 눈이 커진다.
"······ 받아."
등 뒤의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신경 쓰지 않는다. 한 손에 든 검을 칼리안에게 집어던졌다.
그리고 다시 뒤로 돌아섰다.
가까이 다가온 세 검사의 검이 일제히 내리꽂힌다. 하나 남은 검을 들어 막았다. 둘이 막혔고 하나는 놓쳤다. 허리를 비틀어 피했다. 다시 한 번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무시했다. 팔을 움직여 휘둘렀다. 두 검을 튕겨내고 검을 틀어잡아 하나를 막았다.
검을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칼리안이 쓰던 방법을 배웠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검을 왼손으로 다시 잡았다. 플란츠의 검에 힘을 싣고 있던 놈이 지지대를 잃고 휘청인다. 놈의 심장을 꿰뚫었다.
- 카아아앙! 카가강! 카앙!
플란츠의 곁에서 두 마리 맹수가 맞붙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울리며 숲이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역시 신경쓰지 않고 오른손에 다시 검을 쥐었다.
둘 중 한 놈의 명치를 찔러들어가던 플란츠의 검이 막혔다. 상대는, 검이 아니라 장갑 낀 손으로 플란츠의 검을 잡았다. 두 개의 검을 반으로 나눈 만큼 얇고 가벼운 검이었으니 그만큼 쉽게 붙들렸다. 놈이 남은 한 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붙들린 시나스타를 빼내어 막으려 했으나 녹록치 않았다.
또 하나의 검이 있었다면 그 손을 쉬이 쳐냈겠으나 그것은 지금 칼리안의 손에 들렸다. 다시 검을 놓고 피할까 했으나 또 한 놈의 검이 날아들었다. 이 순간에도, 똑똑한 머리는 순식간에 판단한 것을 알려왔다.
피할 방법이 없음을.
- 쉬이익!
이런 곳에서 죽어서 결국 이 땅에 전쟁을 또 불러오게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습게도.
- 서걱!
그때, 검사의 손아귀가 잘려나갔다.
비명소리가 귓가를 얼얼하게 울렸고 누군가의 손이 플란츠의 어깨를 붙들어 뒤로 물렸다.
"아뇨."
소리 없는 혼잣말에 대한 대답이 들렸다.
어느새 달려온 동생 놈이 또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이제 세 개의 검을 앞에 두게 된 칼리안의 손에서, 청은빛의 검이 불안하게 깜빡이는 오러를 다시 머금었다.
확신 없는 단언을 한 번 더 내뱉은 칼리안이 팔을 움직였다.
검사들의 검이 둘, 전사의 검이 하나. 날아든다. 칼리안이 검을 내뻗는다. 피 냄새가 짙었고 붉은 빛이 명멸했다. 네 개의 검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금속이 무언가에 긁히는 듯한 소리를 냈다.
- 카가가각!
칼날이 서로 얽혀들며 내는 예리한 소음이 아니었다. 네 개의 검은 서로 얽혀들지 않았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
두터운 얼음의 벽에 막힌 네 개의 검이 눈에 보였다.
"······ 늦었습니다."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