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87화 (288/527)

제51장. 사춘기라 그러시나(2)

엉뚱한 궁금증이 생겼었다.

이제와 깨달았다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아무튼 한 가지 느낀 것이 있다면 데블란도 참 잘 웃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웃음의 의미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아래층에 거주하시는 누구를 참 많이 떠올리게 했다.

- 교환이라······ 아무래도 내가 그대의 앞에서 실수를 한 것이 있나보구나.

그래서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 그 정도로 절박하게 보여졌다니.

만약 동생 놈의 그 버릇없는 시종이 이곳에 있었다면 데블란이 웃는 것의 진의를 알아볼까, 라고.

재미가 있어 웃는 것인지.

아니면 가소롭다 여겨 웃음을 흘린 것인지.

- 제가 오해한 것이라면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 아니다. 그리 여겨야 할 일이 아니니라. 내 기분이 상하지 않았는데 무엇하러 사과를 하느냐.

데블란은 이렇게 말했다.

목숨을 두고 거래를 제안했던 타국의 2왕자에게 화를 내지 않고, 웃었다. 참으로 관대하게도.

- 그나저나 내 목숨과 교환하기에 마땅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어지간한 것으로는 적당한 값이 되기 어려울 터인데······ 당장에 떠오르는 것이 없구나. 이래서야 거래를 하기는 커녕 시간만 지나갈 뿐이니, 나중에라도 내가 내 목숨 연명할 방법이 궁금해지거든 그때 다시 깊이 생각을 해 보마.

- 알겠습니다.

플란츠는 선선히 대답을 전했다. 그리고 그런 플란츠를 꽤 오랫동안 내려다보던 데블란은 더 이상의 말 없이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애초부터 플란츠는 데블란이 곧바로 응하리라 여기지도 않았다. 제 자식인 체이스마저 등을 돌린 것을 알게 된 마당에 정체조차 잘 모르는 타국 왕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행동할 사람이 아니까.

만약 그랬다면 칼리안을 질질 끌고 갑작스럽게 이 나라에 올 일도 없었을 거다. 플란츠를 믿느니 진작에 제온의 검은 조약돌을 심장에 심어 알아서 치료를 하든, 대장로 나르잔이 말한대로 엘프의 도시로 찾아가 치료를 받겠다 하든 했을 테니 굳이 찾아올 이유가 없지 않겠나.

다만 칼리안이 데블란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몰라도, 미쳐 날뛰느라 사춘기같은 것은 아예 눈치도 못 채고 지나쳤을 그 성격에 바른말 고운말 가득한 사람의 언어를 내뱉지 않았을 것만은 분명하다 여겼다. 때문에 칼리안에게 다시 쏠릴 데블란의 시선이나 좀 나눠 가져오면 되겠다 싶어 꺼낸 얘기였다. 그 이상의 소득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었다.

그렇게 데블란이 돌아간 뒤 다시 여유롭게 산책을 마친 플란츠가 별관으로 돌아왔을 때.

"처음 뵙겠습니다, 카이리스의 플란츠 왕자님."

정말 의외의 소득을 하나 얻게 되었다.

별관을 호위하던 기사 한 명이 플란츠의 앞을 막으며 말을 건넨 것이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이 나라의 기사들은 왕족의 앞을 가로막고도 고개숙이지 않나 보군."

상대는 플란츠를 처음 본다 했으나 플란츠는 아니었다. 유난히 특이점 없이 생긴 얼굴 때문에 오히려 더 기억에 남는 이였다.

"죄송합니다."

"됐고."

몇 달 전.

카이리스를 찾았던 체이스의 여러 호위기사들 중 스치듯 마주쳤던 한 명의 얼굴을 떠올린 플란츠가 나른하게 내리 뜬 눈으로 상대를 쳐다봤다.

"말해."

너는 데블란의 사람인가, 체이스의 사람인가.

아니면 둘 모두 아닌가.

그것을 가늠해보면서.

* * *

그날 낮에 플란츠가 데블란을 만났든 말든.

카이리스에 왔던 기사 중 한 명이 플란츠를 찾아갔든 말든.

"둘."

둘을 잡았고 둘이 남았다.

갈색 머리 전사를 향해 달려들다 갑자기 방향을 바꾸며 사라진 칼리안이, 뒤에서 공격해오던 금발 전사의 심장을 순식간에 꿰뚫었다. 처음에는 집요할 만큼 한 명만 공격하더니 곧바로 싸움 방법을 바꾸는 칼리안을 본 두 명의 전사가 잠시 거리를 벌렸다.

그 틈을 타고 칼리안의 머리가 다시 돌아갔다.

'싸움 중에 이렇게 생각이 많아서야.'

죽을맛이다.

바로 얼마 전에도 싸우다 말고 생각 한 번 잘못했다가 배에 구멍이 나는 바람에 히나한테 엄청 혼나고 밥까지 못 먹지 않았던가. 칼리안은 그 날의 배고픔을 잊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날 플란츠의 입으로 들어가던 고기들을 잊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지만.

여하간 집중을 좀 해야 했고 잡생각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머리가 돌아간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대체 뭐지.'

검을 들 필요가 있으니 주저하지 않을 뿐 결코 즐겨하지는 않는 칼리안이 아니던가. 그리고 칼리안이 제 손에 피묻히는 것을 어떻게 여기는지에 대해 앨런 다음으로 잘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이 바로 플란츠다.

그런 플란츠가 굳이 동생 뒤통수 한 번 때리겠다고 이런 상황을 계획할 만한 사람은 아니지 않나.

그러다보니 머리가 자꾸 다른 생각을 했다.

- 세이렌 경이나 그레이스 경이 마법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플란츠 왕자님께서 둘에게 무슨 말을 전했는지 듣지 못했습니다.

칼리안이 데블란과 대화한 내용을 전해들은 플란츠가 키리에 몰래 전달했던 이야기는 또 무엇이었을까. 플란츠는 무슨 이유로 어떻게 제온을 이끌어냈으며, 그에 대해서 칼리안에게는 왜 비밀로 해두었을까.

"설마······ 진짜로 사춘기라 그러시나."

나는 저 나이에 안 그랬던 것 같은데.

- 부우웅!

찰나의 생각을 이어나가던 칼리안의 앞으로 갈색 머리 전사의 검이 날아왔다. 양날검, 혹은 검등이 매끄러운 외날검과 다르게 들쭉날쭉한 톱날이 검등을 대신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일단 찔러넣기만 하면 검에 걸리는 것이 무엇이든 같이 딸려나올 모양새에, 칼리안의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취미가 고약한데."

작게 중얼거린 칼리안이 발을 움직였다.

- 카아앙!

- 타다다당, 카앙! 카가강!

허무하리만치 빠르게 허물어진 두 전사와 달리 남은 두 명의 싸움은 노련했다. 그리고 칼리안은 동시에 그들 두 명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갈색 머리의 전사가 톱날이 달린 면으로 칼리안의 공격을 막은 뒤 검을 비틀어 쳐냈다. 붉은 오러의 검에 맞물린 톱날 몇 개가 부러져 나갔으나 전사는 신경쓰지 못했다.

앞을 막으면 어느새 뒤에서 칼리안의 검이 날아든다. 그것을 막기 위해 뒤로 돌면 머리 위에서 칼날이 떨어져내렸다. 그 사이사이에 단검과 마법이 날아들고 쉴 새 없는 검격이 쏟아졌다. 언제 생겼는지도 모를 잔 상처가 아무는 감각을 깨우칠 시간도 없던 탓에, 갈색 머리 전사는 칼리안의 공격을 막는 것에만 온 신경을 썼다.

갈색 머리 전사가 잠시 멀어진 틈을 타, 회색 머리를 가진 또 한 명의 전사가 마력탄 하나를 꺼내 집어던졌다.

툭, 하고 모래 바닥 위에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칼리안의 신형이 사라졌다.

- 콰아아앙!

어마어마한 굉음이 태풍 몰아치는 바다의 파도소리처럼 울려퍼진다.

실드를 펼치며 공격의 여파로부터 벗어난 칼리안이 아주 잠시 고개를 돌려 멀리 떨어진 바닷가 쪽을 살폈다.

아르센이 보였다.

아르센이 이쪽의 공방에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칼리안을 돕는 대신 플란츠를 막아설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나도."

붉은 입술이 긴 호선 하나를 그려낸다.

"······ 할 줄 알아. 그런 거."

바람이 모여든다.

그 어둠의 한 가운데, 바람이 분다.

- 사아아······.

마나의 소용돌이가 칼리안을 향해 모여들었다. 붉은 빛을 띠는 검은 망토가 이리저리 흩날렸다.

마법사가 마법을 시전할 시간을 주는 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짓인지 잘 아는 두 전사가 거리를 좁혔다. 그와 동시에 칼리안과 전사들 사이의 모래가 솟구쳤다.

- 콰아아아!

사람의 몸집만한 바람 기둥이 한 방향으로 위협적으로 회전하며 모래를 밀어냈다. 세 개의 토네이도로 전사들의 시야를 막은 칼리안이 다시 발을 박차더니, 회전하며 용솟음치는 바람 기둥 사이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회색 머리 전사가 칼리안의 목을 노리며 검을 뻗었다.

- 콰광!

그러자 회색 머리 전사의 발 밑에서 압축된 바람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모래를 흩뿌렸다.

순간적으로 뒤를 향해 몸을 날린 회색 머리 전사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 두 발을 디뎠다. 토네이도인지 폭발인지 모를 힘에 휩쓸린 전사의 옷자락 끝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가볍게 실드를 펼쳐 자신이 폭발시킨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한 칼리안이 앞으로 날아드는 검을 튕겨낸 뒤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칼리안의 뒤에서 생성된 네 개의 붉은 단검이 갈색 머리 전사를 향해 날아갔다. 아직 근처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 회색 머리 전사에게서는 관심을 끈 채였다.

- 쌔애액!

- 타다다당! 카아앙!

정신없이 불어오는 모래바람을 뚫고 날아오는 단검 중 세 개를 피했으나 한 개가 목을 스쳤다. 따끔하는 감각에 인상을 찌푸릴 새도 없이 칼리안의 검이 날아들었다.

- 쿠콰앙!

둘이 있는 곳으로 달려들던 회색 머리의 발 밑에서 또 한번 폭음이 터졌으나, 같은 공격이 올 것을 예상한 회색 머리는 이미 그곳을 벗어나 칼리안의 코앞에 도달해있었다.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첨예한 검 끝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몸을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칼리안이 서있던 자리에 회색 머리의 검격이 지나갔고, 그와 함께 가느다란 바람의 창이 회색 머리 전사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 카아앙! 캉, 카가강!

- 카앙! 카강!

회색 머리가 한 발을 물리면 갈색 머리의 톱날같은 검이 칼리안을 향해 날아든다. 그것을 쳐내면 다시 한 번 회색 머리의 긴 검이 칼리안의 목을 노려왔다.

- 카앙!

- 쌔애액!

물리력을 담은 마력.

칼리안이 날려보낸 바람의 창이 회색 머리 전사의 검에 막혀 멀찍이 날아가 사라진다. 그 움직임을 눈으로 좇을 새도 없이 붉은 오러의 검이 다시 한 번 둘을 향해 달려들었다.

단 한 순간 숨 쉴 틈도 주지 않을 듯이 몰아붙이는 공격에 회색 머리의 전사가 황급히 허리를 굽혀 붉은 검을 피했다. 그러자,

- 콰직!

등 뒤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상황을 파악한 회색의 머리가 아래로 수그러진다. 길게 땋아 내린 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진득하게 흘러나온 붉은 선혈이 바닥에 떨구어진 톱날 가득한 검을 덮었다.

"······ 셋."

회색 머리 전사의 목덜미 뒤로 가느다란 미성이 와 닿는다.

* * *

호위기사.

데블란이 붙여 준 세크리티아의 호위기사들과 플란츠의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아르센이 슬쩍 웃었다.

상대와 붙어 싸우는 것 좋아하는 마법사 아르센은, 칼리안의 붉은 검이 화려한 궤적을 수놓고 있는 저 곳에 들어가 신나서 뛰어다니다가는 모가지 잃어버리기 딱 좋을 판임을 잘 알았다. 그래서 멀찍이 플란츠의 옆에 선 채로 남은 전사들의 발이라도 묶어줘 볼까 하다 말았다.

- 콰아아아!

바람의 마력이 모여드는 것을 느낀 탓이다.

오래지 않아 몇 개의 토네이도가 칼리안과 두 전사 사이에 만들어지는 것이 보였다. 오러를 남겨두고 마법을 써도 될 만큼은 여유가 있다는 소리였으니 섣불리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어설프게 돕겠다고 나섰다가 남은 놈들 중 한 명이 아르센 잡겠다고 플란츠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기라도 하면, 칼리안이 그 전사 잡는 척 아르센도 겸사겸사 잡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도 했고.

- 쌔애액!

물론 가만히 있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곁으로 다가오려는 호위기사들의 발 앞에 얼음의 창 하나를 꽂아넣은 아르센이 사납게 웃으며 기사들을 봤다.

"카이리스의 마법사단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다."

그 뒤에는,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자기소개를 했다.

세크리티아의 기사들.

정확히는 칼리안이 얼굴을 모른다 여겼고 지금은 다른 기사들의 가장 앞에 서 있다 발을 내딛던 두 명의 기사들을 향해서였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온다면 카이리스 왕족에 대한 공격 시도로 간주하겠다."

잘 써먹으라고 다시 돌려준 부군단장 직위의 힘을 빌어 경고성 가득한 말을 건넨 아르센을 향해,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위험할 것 없을 텐데."

"압니다. 미쳤다고 호위기사가 왕족에게 덤비겠습니까."

"그런데 왜."

왜 굳이 세크리티아의 기사들을 협박하고 있느냐는 말에 아르센이 짧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혹시 이 상황, 왕자님의 형님되시는 부군단장님 예상대로가 맞습니까?"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 빼고."

"제온에서 나설 것도 알고 계셨습니까."

이런 질문에 눈꼬리를 찌푸린 플란츠가, 먼곳에서 들려오는 칼리안의 전투 소리를 잠시 듣다 입을 열었다.

"세이렌 경은."

"협회장님 여기 안 옵니다."

"왜."

"부군단장이신 왕자님."

제온이 올 것이라 완전히 예상을 한 것은 아니지만 대비는 해두었었다. 그런데 두 마법사를 대신해 파란 머리가 왔다. 그러더니 질문에 대한 답은 하지 않은 채 플란츠를 불렀다.

"말해."

"팔찌가 빛나는 것을 봤습니다. 혹시 세크리티아의 왕세자님을 왕궁 밖으로 불러내려 이 일을 계획하신 것이라면, 오지 않으실 겁니다. 왕궁에 기사 베른 경이 남아있습니다. 세크리티아의 귀족들이 왕세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왕궁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자 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유가 무엇이든 세크리티아의 귀족들과 제온이 얽힌 것을 확인한 것으로 목적 달성한 셈 치시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기사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에도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뒤통수가 너무 아파서."

대신 다른 곳에서 답이 들렸다.

어느새 마지막 전사의 숨을 끊어낸 칼리안이 플란츠의 뒤에 서 있었다.

아르센의 마지막 말을 칼리안도 함께 들었다. 때문에 이 순간 뭘 해야 할지, 칼리안도 잘 알았다.

뚜벅뚜벅 걸어간 칼리안이 플란츠의 앞에 섰다.

그 손 끝에 다시 붉은 빛이 모여든다.

"설명."

서늘한 검날이 플란츠의 목에 닿았다.

검날보다 더 서늘한 목소리가 칼리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목소리보다 더 서늘한 살기가 플란츠의 귓가를 울렸다.

"······ 하십시오. 형님."

붉은 검날을 타고 흘러내린 굵은 핏방울 하나가, 뚝.

모래사장 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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