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장. 사춘기라 그러시나(1)
끝을 모르고 걷는 길.
끝을 향하여 걷는 길.
플란츠의 세상은 넓지 않았다. 칼리안도 물론 알고 있었지만 플란츠 스스로도 이번에 참 잘 배웠다. 바나나 나무가 자라는 씨앗이 어떻게 생겼는지나 소라 껍데기 속에 담긴 파도 소리가 어떤지도 모르고 살았다. 그러니 플란츠의 세상은 결코, 넓지 않았다.
때문에 그것 역시 몰랐다.
사람은 누구나 끝을 모르고 걷는 줄로만 알았다. 이제는 가끔씩 지나치다 또 가끔씩 생각나는 실리케처럼, 생의 마지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사는 줄 알았다.
그러다 미친놈 하나를 봤다.
그 미친놈을 왜 미쳤다 하느냐 묻는다면 달리 할 말이 없다. 미친 마법사는 사람이기를 포기한 면이 참 많아 미쳤다 하는데 그 미친놈은 미친 마법사와는 궤를 달리하는 진짜 미친놈이다.
그 미친놈은 끝을 향해 걷는다.
플란츠의 좁은 세상에서 그렇게 사는 놈은 없었다. 조금 넓어진 세상이지만 그렇게 사는 놈은 여전히 그 미친놈 하나뿐이다.
- ······ 그렇게 하나씩 아쉬운 걸 없애보면 하루는 더 버텼을까.
이곳에 오기 전, 이른 새벽의 바위 산.
왕실의 마차는 레이븐이 누워있던 곳과 다른 일행들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 그 마차 속에 있던 플란츠는, 드문드문 끊기기는 했지만 키리에에게 건네던 그 미친놈의 말을 듣게 됐다. 어떻게든 뭐 하나는 들키는 놈이니 그냥 못들은 척 그 말을 같이 들었다.
- 하루만 더 벌었으면 무엇이든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
아무튼 그 미친놈은, 칼리안은.
바로 그 하루를 벌려고 사는 놈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간절하게, 하루하루가 마지막인 것처럼 마지막을 향해 산다. 기어코 그 끝이 와도 후회하지 않도록 끝을 준비하며 산다.
그래서 플란츠는.
이 세상에는 끝을 모르고 걷는 사람과 끝을 향해 걷는 사람이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한 명을 더 만났다.
모르지도 않지만 준비하지도 않는 사람. 끝을 피하기 위해 걷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이 우연인지, 기다림인지. 그것을 모르겠구나."
세크리티아 왕궁 별관의 후원으로 나와 계속 걷다 보면 이름 모를 붉은 꽃이 가득한 곳을 지나 또 이름 모를 덤불이 가득한 녹빛의 정원이 나왔다. 체이스가 초대한 조찬을 마치고 답답한 속을 좀 풀기 위해 그곳까지 걸어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나중에 동생 놈을 보든 체이스를 보든 저 붉은 꽃이며 이 덤불 이름이 무엇인지 좀 물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있으려니 누군가 조용히 걸어왔다.
체이스를 썩 닮은 사람.
그 왕제와도 많이 닮았다 했던 사람. 하지만 조금도 닮지 않았으리라 생각되는 사람.
"생각하시기에 따라 다르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마주치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고 기다린 것도 아니었으나 플란츠는 담담하게 대답을 했다. 냉엄한 얼굴로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인 데블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그대의 아우를 만났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혹시 알고 있느냐."
"제가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칼리안이 말하는 모습과 썩 비슷하다.
말투나 목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화법이 참 비슷하다. 그 말마따나 생각하기에 따라 의미가 확연히 바뀌는 것이다. 데블란이나 체이스가 그런 말을 종종 하듯이.
데블란을 우연히 만났다는 뜻인지, 기다렸다는 뜻인지. 데블란이 칼리안을 만난 것에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뜻인지, 관심이 없다는 뜻인지.
"두 형제가 많이 다른 듯 하였는데 닮은 점도 많구나."
"닮았다는 말을 처음 듣습니다."
"의외로구나. 내가 보기에는 많이 닮기도 한 듯 한데. 실은 형제가 참 많이 다르다 하기에 어찌 함께 발을 옮기고 있나 하였는데 조금 이해가 되는구나."
"닮아서라 하기보다는, 배움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배웠느냐."
"때에 따라서 손을 잡기도 하고 등을 보이기도 해야 함을 가장 먼저 배웠습니다."
칼리안이 '카이리스 왕족의 말이 없거나 짧은 것은 시스파니안을 닮았기 때문'이라 믿고 있음을 알 리 없을 플란츠가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칼리안의 말이 많은 것은 세크리티아 왕가의 특징이라고.
"배운대로 행하고 있는 것일 뿐이더냐."
"배운 것을 필요한대로 행할 뿐입니다."
"무엇을 누구에게 어찌 배웠는지 궁금하구나."
그것이 아니라면, 쉼없이 짖어대는 칼리안은 물론이고 체이스도 꽤나 시끄럽게 구는 편인데 데블란마저 이렇게 말이 많을 다른 원인이 없지 않겠나. 온 가족이 화목하게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울 환경은 아닌 듯 보이니 왕가의 특징이라 여길 수밖에.
"많은 것을 형제에게 잘 배웠습니다."
덕분에 조금 지쳐버린 플란츠가 귀찮은 기색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많은 것을 형제에게 잘 가르치지는 않고 배우기만 했느냐."
"누굴 가르칠만큼 마음이 넓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형제는 마음이 퍽 넓은가보구나."
"오지랖이 넓습니다."
드디어 귀찮은 내색을 읽은 모양이다.
왕자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을 마지막 말에, 데블란이 웃음 소리를 냈다. 그러다 그 끝에 기침 소리가 함께 나왔다.
"쉬셔야 할 것 같으니 저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잠시 데블란이 기침하는 모습을 보던 플란츠가 말했다.
칼리안은 대화하는 내내 말버릇이 좋지 않은 대신 대화를 그만하는 것에 대해 허락을 구했다. 그런데 플란츠는, 타국의 국왕에게 예의는 지키지만 대화를 마치고 물러가는 것은 제멋대로 결정하려 하고 있었다. 예법대로라면 어느 한 쪽도 정답이 아니다.
"실로 재밌는 날이다. 오전에는 그대의 형제가 나를 즐겁게 하더니 지금은 또 이렇게 그대가 즐거움을 주는구나."
당신은 즐거울지 몰라도 나는 안 즐겁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열흘 치 말은 한 것 같다.
생각해보니 어느 순간부터 말을 좀 많이 해야 하는 경우가 늘고 있었다. 그 중 태반이 데블란과 관련된 일로 동생 놈에게 꺼낸 말들이었다.
"즐거움을 위해 대화를 나눌 관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전하."
"그러한가."
불편함을 지우지 않고 대답을 하고 나니 데블란이 또 웃었다.
"혹, 그대는 무엇을 걸어보았느냐. 상대의 것을 가져오기 위해 무엇을 걸어보았는지. 그것은 이 자리에서 듣고 싶구나."
그러더니 또 말을 건다.
데블란.
짜증난다.
싫어하든 말든 양껏 짖어대는 어떤 놈의 성격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아서 더 짜증난다.
"걸어본 적 없습니다."
그 짜증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플란츠가 이렇게 답을 했다.
"어째서 걸어본 적이 없었느냐."
"제 것을 걸어야 할 만큼 가치있는 것들은 이미 제 수중에 있었습니다."
"뺏을 필요가 없이 이미 다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로구나. 그렇다면 만약,"
"전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이 전하의 목숨이라면."
플란츠가 데블란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데블란이 또 말을 하기 전에 자신이 할 말을 했다.
"교환하기에 마땅한 것을 걸어주십시오. 구할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데블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드디어 좀 조용해졌다.
* * *
네 명.
대사막의 전사 네 명이 한꺼번에 덤볐다. 넷의 검이 똑같은 붉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칼리안의 검술을 알고 찾아온 이들이니 그 실력이 호락호락하진 않을 것이다.
언뜻 뒤를 돌아본 칼리안이 조금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한 살 늘어나더니 철이 드셨나. 말 잘 들으시네."
그 말대로, 플란츠는 오늘따라 동생 말을 참 잘 듣고 있었다. 이쪽 사정 신경 안 쓰고 고양이 들여다보고 있다는 소리다.
"그것 참. 무관심인지 믿음인지······ 아니면 고양이가 대단한 건가."
어쩐지 뒤통수는 조금 전이 아니라 지금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된 칼리안이 혼잣말을 내려놓으며 발을 놀렸다.
동생에 대한 관심은 원래 많지 않았을테니 그건 둘째치고, 믿음이 과한 것인지 고양이가 대단한 것인지를 조금 따져보다 믿음이 과한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고양이 두 마리 보느라 동생 죽어나가는 꼴에도 관심 안 두는 형님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다 여기기에는 조금 억울했으니까.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세크리티아의 기사 열다섯 명을 불러 저 멀리 계시는 형님 좀 보고 배우라 했다. 괜히 여기 싸움에 끼어들었다 어디 잘려나가지 말고, 자기 생일에 동생 기일 겹쳐두려는 저기 저 효율적이고 파릇하신 분 옆에서 고양이나 같이 보고 있으라 했다는 소리다.
저 기사들이 맘을 바꿔 덤벼든다 해도 칼리안이 갈 때까지는 적당히 버텨 줄 플란츠임을 알아서 그리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너희들 중에 기사 아닌 놈 있으면 어디 하나 분지르는 것으로는 안 끝날 테니 얌전히 잘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은 해줬다.
- 카아아앙!
그렇게 웃지도 울지도 못할 마음으로 주변을 대강 정리한 칼리안은, 양쪽에서 시간차를 두고 뻗어나오는 두 자루의 검을 하나하나 쳐낸 뒤 팔을 움직였다.
그림자 속에서 휘둘러지는 칼리안의 검을 놈들이 막았다.
위에서 내리치는 공격과 옆을 베고 들어오는 공격을 막은 칼리안은 다시 몸을 감췄다. 소금기 가득한 가운데 유난히 파릇한 냄새가 날 것 같은 곳으로 놈들이 가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네 명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일단 형님이 데블란을 만났고, 왕궁 밖으로 나왔더니 제온이 찾아왔다.'
플란츠가 칼리안을 미끼로 썼다.
이런 시점에 정말로 바다나 보러 오자고 조를 플란츠가 아니지 않나. 제 입으로 꿍꿍이가 있다 하기가 무섭게 제온의 전사들이 왔으니 저 전사들을 이끌어낸 것은 플란츠가 맞다. 문제는 그 꿍꿍이를 칼리안에게도 말을 안 했다는 거지만.
정말로 오늘을 동생의 기일로 만들 셈인가 하는 생각에 실소한 칼리안이 다시 한 번 검을 내뻗었다.
'누구 짓이지. 데블란 짓은 아닐텐데.'
왕궁을 나오자마자 전사들이 붙었다면 데블란과 제온이 연관되어 있다는 소리다.
······ 라고 믿게 하려는 수작이다.
물론 연관이 있을 수는 있다. 칼리안도 계속 그리 여겼다. 다만 데블란은 에반도 하지 않을 생각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 정도로 멍청했다면 지금까지 칼리안과 플란츠를 탐색하지도 않았으리라. 하다못해 일행들을 전부 죽여 없애고자 했다면 독을 쓰는 것이 낫다. 식사든 물이든 장난만 좀 쳐 두면 칼리안을 제외한 모두가 쉽게 사라질텐데 무엇하러 귀찮게 이런 짓을 벌이겠나.
- 카가강! 카앙!
그렇다면 데블란이 아니라 왕자들의 갑작스러운 외출을 알 정도의 관계자.
'혹은 데블란의 짓이 아니리라 생각할 것을 염두에 둔 진짜 데블란.'
이렇게 무리한 일을 벌일 데블란이 아니리라 여길 것을 역으로 노려, 아예 대놓고 일을 벌였을 가능성.
"궁금해 죽겠네."
어쨌거나 궁금증 해결은 나중에. 일단은 뒤통수 맞아 심란해진 마음을 좀 달래야 할 필요가 있었다.
- 쉬이익!
- 카앙! 카가강!
오러로 만들어진 단검 네 개를 날려보낸 칼리안이 발을 박찼다.
넷 중 새빨간 머리의 전사 한 명을 향해 칼리안의 가는 손가락이 움직였다. 예리하고 얇은 것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반투명한 푸른 빛이 허공을 갈랐다.
빨간 머리가 제 앞으로 날아드는 단검을 쳐냈다.
뒤이어 날아오는 길고 가느다란 것은 보지 못했다.
- 쌔애액!
칼리안이 마법사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 콰직!
깨달음의 대가가 꽤 아프다.
바람의 창이 놈의 몸을 꿰뚫었다.
바람의 힘은 상처를 벌리고 헤집는다.
재빨리 몸을 피한 덕에 심장에 구멍이 생기지는 않았으나 놈의 옆구리가 주먹만한 크기로 뜯겨나갔다. 휘청이던 놈이 검으로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붉은 기운이 모여들며 놈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한다.
칼리안이 놈에게 달려든다.
살기.
인간 이하의 짐승 같은 살기, 혹은 인간 이상의 절대자 같은 살기. 그런 살기가 빨간 머리의 온 신경을 곧추세운다.
제 앞으로 날아드는 새빨간 눈동자를 향해 놈이 검을 치켜들었다.
- 카아앙!
놈이 이를 악물며 칼리안의 검을 쳐냈다. 그리고 말을 잘 듣지 않는 몸을 강제로 움직여 검을 내리그었다.
그와 동시에 칼리안의 뒤에서 생성된 바람의 창이 놈을 향해 날아든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는 바람의 힘을 고스란히 담은 마력이 놈을 향해 쇄도했다.
- 쌔애액!
- 카앙!
놈이 창을 쳐냈다.
뒤이어 날아오는 칼리안의 검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칼리안의 모습이 사라졌다.
놈이 집중하여 주변을 살핀다.
그 사이 달려드는 셋에게 단검과 창을 날려보내 발을 막은 칼리안이 빨간 머리의 뒤에서 몸을 드러냈다.
- 쉬이익!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뻗어오는 검을 느낀 빨간 머리의 전사가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울컥, 하고 놈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백사장을 적셨다.
- 쌔액!
칼리안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숨 두어 번을 쉴 사이에 여섯 번의 공방이 오갔다. 어떤 것은 날아오고 어떤 것은 짓쳐든다. 놈이 몇 걸음 뒤로 움직이며 칼리안의 공격을 피해냈다. 공격 하나라도 허락한다면 그 즉시 생명의 끈이 끊일 것을 알기에 이를 악물고 피해냈다.
- 카가강! 카앙!
칼리안의 발이 다시 땅을 박찼다. 그와 함께 바람의 창들이 놈을 향해 날아든다. 놈이 빠르게 검을 회전시켜 그것을 막아냈다.
아물어가는 상처가 벌어졌다. 다른 전사들이 칼리안을 향해 달려들었고, 세 개의 검을 쳐낸 칼리안은 빨간 머리 놈을 향해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빨간 머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계속하여 몸을 움직이는 통에 치료가 수월치 않았다. 뚝뚝 흘러내리는 놈의 피를 잠시 내려다 본 칼리안이 감정 없는 목소리를 냈다.
"확실히 다른 놈들이 대신 치료해주지는 못하나보네. 치유사가 아니라서 그런가."
만약 다른 세 놈이 타인에 대한 치유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빨간머리의 상처는 이미 다 나았을 테니까.
치유사가 아닌 이상은 다른 이의 상처 치료를 해주진 못함을 확인한 셈이다. 하긴 그랬으니 데블란이 굳이 치유사를 찾았겠지. 제온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다."
한층 짙어진 살기가 놈의 발을 잡아채듯 휘몰아쳤다.
"······ 그냥 없애면 되겠네."
속삭이는 듯한 미성이 빨간 머리의 귓가에 들려왔다.
어느새 놈의 코앞에 나타난 칼리안이 붉은 검을 내질렀다. 등 뒤에서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을 느낀 놈이 반대 방향으로 돌아섰다.
눈앞의 마법과 등 뒤의 검.
무엇을 먼저 막아야 하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 쌔애액!
- 타다다당! 카앙!
허리를 뒤틀듯 움직인 놈이 팔뚝만한 크기의 바람 송곳 몇 개를 쳐낸 직후 다시 몸을 돌려 칼리안의 검을 내리쳤다.
그 순간, 칼리안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사라졌다.
힘을 받아줘야 할 상대의 검이 사라지자 빨간 머리 전사의 몸이 중심을 잃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찰나의 빈틈을,
- 서걱!
칼리안은 놓치지 않았다.
붉은 빛이 어둠을 가르고 번뜩인다.
놈의 목에 긴 금이 생겨났다.
그것이 곧 어찌될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칼리안은 놈의 몸이 스르르 쓰러지는 것에 시선을 더 두지 않은 채 다시 발을 띄웠다.
"하나."
몰아치는 듯한 공격에 동료 하나가 죽어나가자, 남은 세 놈이 칼리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볍게 몸을 움직인 칼리안이 두 개의 공격을 쳐내고 한 번의 공격을 피했다. 짙은 갈색 머리를 길게 땋아내린 두 번째 전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림자 속으로 죽음이 스민다.
* * *
플란츠는 손에 들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플란츠의 얼굴에서 흥미가 사라진 두 고양이들은 이미 화면 저 편으로 멀어진지 오래. 레릭이 무어라 말을 하는 것을 그냥 흘려들으면서, 플란츠는 계속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들이 어떻게 갑자기 나타났다는 겁니까. 플란츠 왕자는 왜 그곳에 있고.
- 이유가 중요한 것 아니니까.
왼팔에 채워진 팔찌에서 미미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칼리안 쪽을 바라보던 플란츠의 눈이 조용히 잠겨들었다.
한 명의 목이 떨어져 백사장 위를 나뒹군다.
어둠 속에서도 놈의 빨간 머리가 잘 보였다.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던 플란츠가 수정판에 불어넣고 있던 마력을 해제했다.
- 오라고. 빨리. 그 잘난 기사 데리고.
- ······ 알겠습니다.
어찌됐건 칼리안 혼자 싸움을 이어나가게 둘 마음은 없던 플란츠가 수정판을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 조용히 한 발을 옮겼다.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독특한 검집 안에서 더 독특한 검이 뽑혀나온다. 세크리티아의 기사들이 그런 플란츠를 경계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자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신경 안 쓰는 것이 나을텐데."
방해하지도 말고 돕지도 말고, 그들은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침묵하는 기사들 사이로 플란츠가 한 발을 옮겼을 때.
"수정판을 모래 바닥에 두시면 흠 생깁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절대로 반갑지 않을 얼굴이 나타났다.
딱 한 발을 옮긴 뒤 다시 멈춰선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 뭐야."
칼리안 가라사대.
자고로 뒤통수란, 주고 받아야 제 맛 아니던가.
"왕자님께서, 왕자님의 말은 진짜 안 들으면서 엄청 연약하기까지 한 둘째 형님이시자 부군단장이신 플란츠 왕자님이 왕자님 뒤통수 치실 때가 됐으니 잘 지켜보다 이상한 일 하려 하면 말려달라 하셨습니다."
오리 엄마 복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