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85화 (286/527)

제50장. 대외 홍보용이라(5)

실리케를 몰아내는 것에 일 년이 걸렸다.

에반을 치워버리는 것에 이 년이 걸렸다.

그렇다면 데블란은.

- 톡, 톡, 톡.

세크리티아 왕궁에 도착해서 기억을 좀 되돌아보고 그리웠던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할 틈도 없이, 일단 데블란부터 만났다. 만났다기보다는 불려갔다 하는 것이 맞겠지만 아무튼 만났다. 단 한 순간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이라는 허울에 갇힌 독을 나눴다.

찬 민트차가 담긴 유리컵을 쥔 손가락이 느릿한 소리를 냈다. 아침부터 한낮까지 몸 속으로 들어간 것이라고는 지금 손에 들린 민트차 한 입, 그리고 아침에 맡은 달콤한 커피 향기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독을 잔뜩 집어먹어 그러나."

서로간에 주고받은 독이 그렇게나 많았으니 특별히 무언가를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수 밖에.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답지 않게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고 앉은 칼리안은 팔걸이에 올려 두었던 손 끝으로 수십 수백 번 유리잔을 두드리며 생각을 했다.

왕비 디에나와 후궁 루이즈가 준비했던 독이 든 수면향은 더 이상 전달되지 않는다. 체이스의 변심과 루이즈의 배신을 알게 된 데블란은 더 이상 방심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냥 둔다면 데블란은 잔병치레나 좀 하면서 살다가 어떻게든 치료를 받을 것이다.

뱀이란 생물은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으며 그 무엇도 잊지 않으니, 그렇게 되면 데블란은 체이스와 루이즈를 향한 복수를 포기하거나 칼리안을 향한 깊은 관심을 접어버리지 않으리라.

그러니 어찌해야 하나.

'이를 또 어찌하나. 두고 보기에 이다지도 즐거운 이를 다시 돌려보내려면 내 아쉬움이 클 것 같으니.'

'불필요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내가 돌아가는 것을 전하께서 보실 일이 없을 테니.'

어찌해야 그 뱀을, 그 독을, 태워 없앨까.

카이리스의 왕자가. 세크리티아의 국왕을. 어떻게.

- 톡, 톡, 톡.

본래에는 자신과 제온의 연관성을 의심하게 하기 위해서 붉은 오러까지 보여가며 연극을 했었는데 플란츠가 건넨 멋진 뒤통수에 얻어맞았다. 덕분에 루이즈가 벌인 일을 마음에 두던 데블란이 칼리안을 향해 관심을 가지게 할 시간이 좀 부족해지지 않았던가.

그래서 데블란을 앞에 두고 짖었다.

결국 데블란의 입에서 칼리안의 안전을 염려해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짖었다. 계획했던 것과는 다른 방법이겠으나 그렇게 해서 루이즈를 향한 시선을 자신에게로 묶어두었다.

그 후 긴 사유를 이어나간다.

이 순간 자신과 완벽히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상대를 먼저 죽여 없애기 위해서.

"키리에."

몇 분이 흘렀는지 혹은 몇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하지 않고 나지막이 입을 열자, 칼리안이 돌아온 뒤로 줄곧 문 앞을 지키던 키리에가 안으로 들어왔다.

"헤르츠 경을 불러와줘. 조용히, 티나지 않게."

"네. 왕자님."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인 키리에가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까지 밖을 지키고 서 있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덧붙여줄까 하던 칼리안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키리에가 다시 들어왔다. 방문이 이전보다 조금 더 오래도록 열렸다 닫혔다. 그리고 칼리안은 키리에의 조금 뒤, 정확히는 아무도 없는 문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리 와 앉아요, 헤르츠 경."

그와 함께 허공에 걸어두었던 가림막을 걷어내듯 아르센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화 마법을 쓴 채 키리에를 따라 들어온 아르센이 인사를 건넨 뒤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티내지 않고 잘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짧게 답한 아르센이 더 이상의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차분해진 모습에, 칼리안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키리에 말로는 체이스 앞에서는 별다른 내색을 안했다더니 아무래도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자신이 그 세크리티아 왕궁에 와있다는 것에 대해서.

"경의 오리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완두콩 기분은 신경 썼어도 따까리까지는 미처 챙기지 못한 칼리안이 가벼운 질문을 건넸다. 그 와중에도 차마 '코코'라는 이름을 입에 담지는 못했다.

직관적이면서 기억하기 쉽고 뜻도 참 좋은데 심지어 입에도 착착 붙어 어디 하나 책 잡을 것 없이 그저 좋기만 한 튼튼이같은 훌륭한 이름을 짓지는 못할 망정 코코라니. 하여간 이름 짓는 실력 하고는.

"네, 왕자님. 밥도 잘 먹고 하루하루 몰라 볼 만큼 잘 크고 있습니다."

분위기 좀 바꿔보려는 질문임을 알아들은 오리 엄마가 씩 웃으며 대답을 했다. 그 후로 몇몇 가벼운 말들을 주고 받은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내가 경에게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와 달라 했습니다."

"네, 왕자님.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은, 한참 전부터 내내 손에 들고 있어 얼음이 다 녹아버린 민트차를 다시 차게 식혔다. 그리고 그것을 한 모금 마신 뒤 아르센을 향해 부탁 하나를 꺼내놓았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아르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칼리안은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커피 향기와 민트 차 한 잔으로 밝은 시간을 보내고 참 많은 것을 싹싹 먹어치운 뒤, 어두운 밤이 되었을 때 사춘기 형님의 생일 타령에 못이기는 척 바다로 끌려가주기 전의 일이었다.

* * *

체이스와 함께 갔던 작은 바다를 가진 않았다.

체이스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고 플란츠를 데리고 가는 것은 첨탑 하나로 족했으니, 굳이 그 바다에까지 플란츠와 함께 갈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그 바다는 데블란이 모르는 곳이기도 했으니 그 쪽으로 발을 옮기지는 않아야 했다. 그 바다 인근에 있는 디에나 왕비의 무덤은 나중에 들러도 될 일이니까.

에스티나에 올라 아무 말 없이 따라오는 플란츠를 잠깐 쳐다본 칼리안이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변덕이 참 심해서 그 야밤에 꼭 바다를 봐야 하겠다는 플란츠와, 그런 플란츠를 결국 말리지 못한 칼리안을 세크리티아 왕실 소유의 바다까지 안내해 줄 세크리티아의 기사들이 보였다.

아는 얼굴들이 있다.

아니, 얼굴 모르는 이가 딱 두 명 있다. 나머지 열 세 명은 모두 아는 이들이다.

최후의 최후까지 왕궁 안에 남아있던, 그리하여 베른과 함께 왕궁 밖으로 나섰던 국왕 친위대의 기사들은 아니었다. 다만 친위대가 성문 밖을 나서기 전에 먼저 그 곳에 서 있던 이들이다.

"······ 나중에 엘프 대장로 나르잔과 이야기를 좀 해봐야 되겠습니다."

기사들의 이름과 그 마지막 얼굴 하나 하나가 전부 다 떠오르는 것을 애써 지운 칼리안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내 형님께서 이렇게나 바다를 좋아하시니, 아우 된 도리로 그 좋아하시는 바다에 언제든지 가보실 수 있도록 신경을 좀 써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두운 밤.

달리지도 않고 일정한 속도로 발을 맞추어 걷는 말의 발굽 소리.

들리는 소음이라고는 오로지 그것 뿐인 탓에, 칼리안의 조용한 목소리가 모두에게 들렸다.

"내 아우님께서 왜 소용없는 일을 계획하시나."

놀랍게도 플란츠는 '짖지 말라'는 말을 꽤 길게 했다. 덕분에 칼리안의 입술이 길게 올라갔다. 지금 플란츠가 어떤 식의 대화를 원하는지 눈치를 챘으니까.

아주 작은 웃음소리를 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소용이 있을지, 없을지. 시스파니안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미리미리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특히나 요즘에는 더더욱."

"선물 안 주시는 건 이해할테니 시끄러운 입이라도 좀 다물어주셨으면 좋겠는데."

"시끄럽다니, 서운하네요. 이 먼 길을 함께 와드리고 이렇게 번거로운 걸음까지 같이 걸어드리는 아우인데.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마음에도 없는 말씀 계속 뱉으실 거면 돌아가지."

"아닙니다. 어차피 내딛은 걸음이니 계속 가야죠."

생긋 웃으며 대꾸한 칼리안이 조금 더 작아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 생일을 맞이하셨으니."

세자위에서 멀어지게 되면 왕궁 안에 머물지도 못할 테니 그 좋아하는 바다나 좀 둘러보며 살 수 있게 배려해주겠다는 동생. 그리고, 세자위에 오를 것은 나인데 네가 왜 쓸데없는 계획을 세우는지 모르겠다 대답하는 형.

이렇게, '지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왕자들의 대화'가 일단락됐다. 그리고 기사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묵묵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또 얼마나 더 걸었을까.

짙은 소금 내음이 느껴지고 큰 물이 대지를 적시는 소리가 아주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곳입니다. 주변을 경계할테니 편히 둘러보십시오."

이유가 있어 찾아 온 곳이라 하여도 반가운 것은 다름이 없는 까닭에.

"고맙습니다."

기사들을 이끌어온 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칼리안이 잠시 레이븐의 발을 멈추고 여러 표정이 깃든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레이븐의 고삐를 다잡았다.

오래 전 체이스를 처음 마주했던 그 날처럼, 레이븐은 파도가 잘 보이는 곳으로 당장 달려가려 했으니까.

"여기서 기다려. 레이븐."

속삭이듯 말을 전한 칼리안이 레이븐의 등에서 내렸다.

곧 칼리안이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뒤 저벅 저벅 발을 옮겼다. 플란츠가 뒤를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은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두 사람이 파도를 향해 걸어갔고, 한 사람의 발자국만 남았다.

"또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 발자국의 끝에 선 칼리안이 소금 내음을 한가득 들이마시며 입을 열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을 반투명한 사일런트 막을 보던 플란츠가 대답했다.

"별로."

"아닌 것 같은데."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한 글자를 더했다.

"······ 요."

아직 완두콩 생일 안 됐다.

플란츠의 미간이 또 찌푸려지는 것을 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일단 오자 하시니 왔습니다만. 데블란을 속이시려는 건지, 저를 속이시려는 건지. 형님 꿍꿍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면 이곳에 오기 전까지 나눴던 둘의 대화가 데블란에게 전해질 테고, 데블란은 믿지 않을 것이다. 마법 쓰는 칼리안이 굳이 기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개인적인 대화를 할 리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 테니까.

과연 형제 사이가 좋다 믿을지.

혹은 사이가 좋지 않다 여길지.

결국은 속고 속이기 위한 걸음이나 섣불리 예측하기는 어려울 일이다.

"아니면 정말 바다가 보고싶으셨는지."

"둘 다."

꿍꿍이가 있기는 한데 바다 보러 온 것도 맞기는 하단다.

"궁금해서. 다르다기에."

그 꿍꿍이는 안 꺼내놓을 거냐 묻는 대신, 칼리안은 그냥 고개만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다르기는 합니다. 바다 색도 다르고 생긴것도 다르고. 그곳의 바다는 많이 짙었지만 여기는 아니라서요. 정말 맑을 땐 하늘인지 바다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운 그런 날도 있습니다."

"그래."

"그걸 보시려면 낮에 왔어야 하는데. 아쉽네요."

"······ 나중에."

"네. 다시 보여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속 편히 대구 드실 수 있게 되면."

곧 칼리안이 몸을 숙이더니 서 있던 자리에 앉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따로 앉을 수 있도록 의자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여기저기 아무데나 앉고 눕고 자고 했던 베른이 없었던 탓에 왕족이 바닥에 앉는 것을 처음 보았을 기사들의 놀라움에 대해서도 그냥 신경을 껐다.

"생일 선물은 준비 안했습니다. 워낙 드린 게 많아서 선물까지 드리면 갚으려고 드실 것 같아서요."

"달라고 안 했어."

"네."

"한 번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플란츠를 올려다 봤다.

한참동안 다른 말 없이 바다 이곳 저곳을 보던 플란츠가 칼리안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파도에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앉았다.

"르니에리를 심으셨던데."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쩌다보니."

"생일 선물로 드린 것 아닌데요."

"받은 사람 마음 아닌가."

게다가 어차피 비슷한 때였지 않나.

어쩐지 이런 말을 함께 들은 것 같아 짧은 한숨을 한 번 쉰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올려 하늘을 봤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지금 나이 즈음에는 하늘을 안 봤습니다. 뭐 단 한 번도 안 봤다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의식해서 하늘을 쳐다본 적이 없었습니다."

"왜."

"못 보겠어서."

칼리안은 말 그대로 쏟아져 내릴 듯한 은빛의 하늘을 보면서 계속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늘 한 번 못 보고 그냥 살기만 하다가 데블란이 죽고, 말씀드렸던 것처럼 왕궁에서 쫓겨난 뒤에 갈 데가 없어서 여기 말고 다른 작은 바닷가에 갔었습니다. 얼마든지 편히 쉬고 있을만큼 있으라 했던 그런 곳이었으니 그곳에서 적당히 시간이나 좀 보내다 돌아가려고요."

플란츠가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다가 날이 하도 더워서 도저히 오두막 안에 있질 못하고 밖에 나와 누웠더니 하늘이 보였습니다. 달이 밝았고, 별이 많았고. 한참을 그렇게 보고 있는데 이유도 모르게 웃음이 나서. 혼자 미친놈처럼 배를 부여잡고 웃었습니다."

"미친놈 맞지."

"아, 하긴 그렇지. 맞긴 맞네요."

잠깐 웃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올려다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나, 싶어서. 그 뒤로 계속 그렇게 하늘을 봤습니다. 달도 보고, 별도 보고. 구름을 보다 비가 올까 안올까 체이스 형님과 내기도 곧잘 하고. 그렇게 지냈는데."

그러고보니 그놈의 내기돈 언제 가면 다 받아내야겠다고, 저도 모르게 떠오른 결심에 또 웃음 소리를 내던 칼리안의 목소리가 파도 위에 올려졌다. 빗소리같기도 하다가 바람 소리 같기도 하던 목소리가 파도소리처럼 흘러나왔다.

"고개를 숙이시더라고요. 그 날 형님께서. 그걸 봐버리는 바람에 저도 주저하질 않게 되어서. 그냥, 제가 뭔 생각인지는 신경 안 쓰고 그냥 심었습니다. 르니에리."

"모르고 살렸다더니."

"이유 모르고 그냥 살려야겠다 싶었던 건 맞는데요. 주저하지 않았다는 거지."

실리케의 앞을 플란츠가 가로막기 전. 누군가 죽었다는 말에 고개를 숙이던 것을 보게 되어서, 실리케의 비수에 죽을 뻔한 것을 막았다고. 그래서 르니에리를 심었다고 이야기 해줬다. 그것을 심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슨 말을 누구에게 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 원수같은 놈을 내가 왜 살렸는지 당신은 혹시 아느냐는 말도 했었고, 왜 그런 삶을 살았는지 끝끝내 알려주지 않을 것인지도 물었었고, 뭐가됐든 나는 당신한테 미안할 일이 없다는 말도 했었고. 조금 많은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전부 다 기억이 나지는 않아서 그냥 말하지 않았다.

"뭐, 아무튼."

적당히 말을 맺은 칼리안이 품에서 작은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을 몇 번 뒤적이다 손바닥 두 개 만한 크기의 무언가를 꺼내 플란츠에게 건넸다. 생일이 됐을 것 같긴 한데 생일 선물은 아니고 그냥 자신이 쓰려던 것을 내밀었다.

"뭔데."

"마력 다루실 줄 아니까요."

"선물 없다더니."

"선물 아닌데, 요."

내년 여름까지는 또 못 꺼낼 반말을 잊지 않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해준 뒤에, 칼리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저더러 여기 와서 살라고 하셨던 이유는 압니다. 옛 집도 여기 있고 옛 형님도 여기 계시고 옛 어머니도 함께 계시니 여기로 돌아오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셨을 것 같은데. 어머님이 저를 아시기에, 이미 저도 같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기 일을 해결하면 돌아가야지, 하고. 그러니 제 걱정은 안하셔도 괜찮지만······."

플란츠가 다른 말 없이 손에 들린 수정판을 쳐다봤다.

앨런을 위해 엘린느가 보냈던 것. 르메인과 앨런이 마셨던 난꽃 향 가득한 녹차와 함께 들어있던 것.

새로 생긴 아들과 차 한잔 마시고 새로 생긴 아들이 어딜 가든 얼굴 잘 보고 지내라며 보냈던 물건을 그냥 플란츠에게 줬다.

첨탑에서 돌아온 뒤에 앨런에게 부탁을 해 두었으니, 나머지 하나는 아마 지금쯤이면.

- 애옹!

- 니아옹!

레릭이 가지고 있을 거다.

수정판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기가 무섭게, 반대편에 무엇이 있는지도 보이기 전에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다른 말 없이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플란츠에게 칼리안이 한 마디를 더했다.

"혹시라도 저에게만 돌아갈 곳이 있다 생각하실까봐 드리는 겁니다. 제가 가진 게 많기는 해도 형님이 저보다 부족한 건 없으니 부러워하지는 마시라고."

"······ 짖지."

"선물 드렸는데 반응이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선물 아니라며."

"아. 그렇네요."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모래를 탁탁 쳐냈다.

"형님 얼굴은 안 까먹을 것 같긴 하지만 혹시 잊어버리면 안 되니까. 잠깐 인사나 하고 계십시오. 저는······."

칼리안이 먼곳을 잠시 살피다 슬쩍 웃었다.

좋은 먹잇감을 찾아낸 포식자의 것과 같은 만족스러운 으르렁거림이 붉은 빛을 만든다. 멀찍이, 자신의 손 끝에 모여든 것과 언뜻 비슷해보이는 색의 또 다른 빛들을 보던 칼리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똑똑하신 형님께서 준비해주신 뒤통수 맞고 오겠습니다."

검은 바다를 앞에 둔 검은 하늘 아래, 칼리안이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 우우웅!

붉은 빛의 잔상이 허공에 긴 빛을 내다 흩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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