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84화 (285/527)

제50장. 대외 홍보용이라(4)

탐색. 그리고 공방.

데블란이 지키고자 하는 것.

칼리안이 빼앗고자 하는 것.

데블란이 빼앗고자 하는 것.

칼리안이 지키고자 하는 것.

빼앗으려 하는 이와 지켜내려 하는 이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래. 그렇지. 그대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지. 내가 그대를 궁금하다 여긴 만큼 그대도 그리 여겼을 테니 몰랐을 리 없지."

데블란이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칼리안이 입매를 움직여 긴 미소를 지어보였다.

"직접 만나보니 생경하구나. 그대에 대해 전해오는 말들은 지금과 참 많이 달랐었으니."

"아······ 그건 대외 홍보용이라. 아마도 많이 다를 겁니다. 전하께서 그러하듯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말을 퍽 많이 한 탓에 데블란이 기침을 했다. 칼리안은 별다른 표정 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아,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였다. 이것 참······ 진정으로 재미있는 말상대가 아닌가. 내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아쉬울 만큼 재미가 있구나."

"마음에 더 드신다 하니 그 역시 다행입니다."

이 정도의 말에 노여움을 느낄 데블란이 아니다.

데블란이 화를 내서 물러날 칼리안이라 생각했다면 일부러라도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겠지만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 절대로 화내지 않는다.

언젠가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이 호밀쿠키를 주었을 때, 그것이 프레이야를 조롱하는 의미였다 하더라도 백작에게 흥미를 가졌으리라 생각하던 칼리안 아니던가. 데블란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데블란이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음을 칼리안도 잘 알고 있었다.

"허나 큰 욕심은 버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땅에 조금 더 발을 디디고자 하는 마음이 욕심으로 보이느냐."

"욕심입니다. 전하의 발이 닿은 곳마다 피 비린내가 진동을 하는데 그런 곳에 더 머물겠노라 하는 것을 욕심이 아닌 무엇으로 칭하겠습니까. 곁에서 보고 견디기에 버거우니 이만 발을 물리셨으면 합니다."

"아니지. 아니야. 욕심이 아니다."

"그렇다면 겁입니까."

"그렇지. 그리 부르면 썩 어울리지 않겠느냐. 본디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겁도 많아서, 가진 것을 놓자니 하도 겁이 나 못하겠구나. 평생을 살아 온 곳에서 발을 떼는 일에 이리도 겁이 나는 것을 두고 어찌 할 도리가 없지 않겠느냐. 발을 떼지 않도록 노력을 좀 해 볼 수밖에."

이렇게 말한 데블란이 기침을 넘기려 커피를 들어 마른 목을 축였다. 잠시 쉰 듯하다 곧 본래대로 돌아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나저나 미안하구나. 그대와 이야기하는 단 향에 취해 내가 잠시 하려던 말을 잊었으니."

"괜찮습니다. 독이라는 것이 본래 그런 법이니."

만약 누군가 먼 곳에서 이들의 모습을 본다면 참으로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믿어 의심치 않을 만큼, 당장 꽃이라도 한 송이 피어날 듯 온화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염려 말고 하려던 이야기 다시 하십시오. 듣겠습니다."

"그래. 해주어야지. 내 죽을 날 세고 있다 하는데 기회가 왔을 때 꺼내놓지 않았다가 늦어지지 않으려면."

"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데블란은 질문을 바로 꺼내지 못했다.

칼리안은 터져나오는 짧은 기침 몇 번을 숨기지 않고 내보이는 데블란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고단하신 듯한데 이만 자리를 물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말씀은 나중에 하셔도 될 테니."

"그럴 수야 있나. 그대 말대로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을 생인데 기회가 되었을 때 미루지 말아야지. 게다가 이제부터 물어볼 것이 나의 진짜 의문인 것을."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데블란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나의 새······ 아니지. 에일라. 그래, 에일라. 그 아이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참 많이 전해주어서 흥미를 가지고 들어 왔는데, 특히 그대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들을만 하였지. 처음에는 나의 새들에게서 심장을 멈추는 독을 구해내고 이곳 기사들의 검을 쓴다 하더니 하루 아침에 오러를 내고. 꽤 영악한 방법으로 그대의 자리를 굳혀가는 모습들이 익숙하여 흥미가 생기더구나."

"그러셨습니까."

"그대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에일라에게 들었는데. 생각해보면 그것이 참 이상하지. 왜 그 이야기를 나는 에일라에게 듣게 되었을까. 그곳에 있던 나의 새들이 참 많았는데."

잠시 말을 멈춘 데블란이 칼리안을 바라봤다.

그것이 마치 의견을 묻는 듯 보여서, 칼리안이 가벼운 목소리로 답을 전했다.

"거쳐가던 손에서 새들이 멈춘 탓이 아니겠습니까."

원하던 대답이었던지 데블란이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지. 카이리스로 보낸 새들은 내가 지켜보지 않았으니, 나를 대신해 새들을 지켜보던 세자가 나에게 그 말들을 전하지 않았던 것이겠지. 때문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 보았다. 뜻밖에도 세자가 카이리시스로 잠시 찾아가겠노라 이야기를 하기에 그리하라 하였지. 그랬더니 그 아이가 카이리시스에 가서는 나의 새들을 참 많이 떨구어 없앴다. 그러니 그것은 또 무슨 이유일까."

"체이스 형님께서 나를 참 많이 아껴주시는 탓입니다. 그 역시 특별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니지. 그것이 특별하지. 왜, 세자가, 그대를. 그리도 아끼는지."

그리고 칼리안은 별 것 아니라는 얼굴로 답을 전했다.

"누군들 나를 보면 아껴주고자 할 마음이 안 들겠습니까."

앨런은 물론이고 얀과 키리에와 아르센을 거쳐 가까운 르메인과 저 먼 슬레이만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이들이 칼리안을 아껴주고 있지 않나. 심지어 시스파니안과 어머니 나무에게도 아낌을 받는데 체이스가 그렇게 구는 것이 특별한 일일 리 없지.

솔직하게 말해서 능력 많고 돈도 많고 정도 많고 이해심도 많은데 엄마는 엘프고 아버지는 국왕이라 핏줄마저 특별한 왕자가 이제 잘 참기까지 하니 누군들 아껴하지 않겠나.

아. 드미레아랑, 내 위층에 사시는 형님들 빼고.

"단지 그 이유 뿐일까."

칼리안의 입에 웃음이 어렸다.

"굳이 이유를 더 찾아보자면 한 가지가 더 있겠습니다."

잠시 데블란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켜보이며 말을 이었다.

"나를 보면, 마치 잃어버린 동생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칼리안을 바라보던 데블란이 소파에 등을 묻었다.

"잃어버린 동생이라······ 그렇다면 내가 그대를 볼 때 아들을 본 듯하다 느껴야 하는가."

"아······ 내 이름을 그리 말씀드렸는데, 벌써 잊으셨는지."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있는 얼굴로 고개를 한 번 가로저은 칼리안이 남은 대답을 전했다.

"함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내 아버지께서 서운해하실까 걱정이 큽니다."

데블란이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 되는 일이더냐."

"그렇습니다."

그 역시 기분 나쁜 대답은 아니었는지 데블란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을 움직여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다시 소파에 기대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하나만 더 물어도 되겠느냐."

"혹여 싫다 하면 묻지 않으실 겁니까."

"그리하지는 않겠지."

"네. 물어보십시오. 대답하겠습니다."

데블란은 잠시동안 기침을 몇 번 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세자는 그대를 그리 아끼는데. 그렇다면 그대는 누구를 그리 아끼는지. 그것이 궁금하구나."

레이븐이요.

라고 하려다가, 오가는 대화에 숨김과 거짓 없이 임하라 했던 형님의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그렇게 찾던 히나라는 치유사를 가장 아낍니다."

"그러하더냐. 그리 소중하다면 내가 그 치유사를 이 곳으로 초대해줄까 하는데. 어찌 생각하느냐."

"수고해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체이스 형님의 즉위식에 함께 하게 될 테니."

데블란이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실로 재미있는 이로구나. 이 얼마만에 가져보는 진솔한 대화인지 알 수가 없을 만큼, 그대와 이야기하는 것이 실로 즐겁다. 그러니 이를 또 어찌하나."

기침이 나오든 말든, 숨이 막히든 말든, 진정으로 기분이 좋다는 듯한 얼굴로 웃었다. 한참이 지나서 간신히 웃음을 멈춘 데블란이 칼리안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두고 보기에 이다지도 즐거운 이를 다시 돌려보내려면 내 아쉬움이 클 것 같으니."

그리고 비로소 독니를 꺼냈다.

* * *

그래. 내가 그렇게 말을 하기는 했다.

수습, 해준다고. 그렇게 말을 하기는 했다.

수습을 해주겠다 했지 전쟁을 해주겠다 하진 않았지만.

"······ 하."

시키는대로 잘 짖었다고 방긋방긋 웃고 있는 칼리안을 보며 참으로 깊디 깊은 한숨을 쉬어보인 플란츠가 테이블을 가리켜보였다.

"그래."

알았으니 먹던 거 계속 먹으란 뜻이었다.

먹든지 처먹든지, 아무튼.

"형님은 오늘 식사 하셨습니까. 또 풀만 드시네요."

먹었다.

체했다.

오늘 점심은 커녕 아침에 체했다. 점심은 별 생각이 없어서 대충 샐러드만 집어먹고 말았다. 그러고 나니 저녁에도 특별한 생각이 없어서 그냥 샐러드와 스프만 먹고 말았다.

제대로 먹지 않고 체하기만 한 탓에 이번에도 축복의 힘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왜 체했는지 말해줄 수도 없는 일이라서, 알고 보면 순한 플란츠는 다른 말 없이 그냥 고개만 대충 끄덕여줬다.

그리고 데블란과의 독대를 끝낸 뒤 하루 종일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 바람에 저녁이 되어서야 만나게 된 칼리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먹어. 계속."

"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포크와 나이프를 다시 섬세하게 놀리기 시작했다.

올리브 향이 가득한 샐러드와 하얀 빵.

소고기와 하얀 버섯을 갈아 넣은 부드러운 스프, 버터와 마늘에 구운 랍스터와 홍합들. 향 좋은 트러플이 든 크림 소스 위에 올려진 송아지 고기 스테이크. 오징어와 새우를 넣은 토마토 스튜, 그리고 레몬과 함께 자리한 생굴.

시간이 되흐르고 사람이 바뀌고 머무는 곳이 달라져도 식성 하나는 변하지 않는 법이라서.

어찌 보면 가장 입맛에 맞을 식단을 준비해 줄 수 있는 곳에서 차려 준 고기 많이 해물 많이 생굴 많이 많이 식단을 앞에 두고 침착하게 가짓수를 줄여나가는 칼리안을 한동안 쳐다보던 플란츠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이러다 저 놈 연세 알기 전에 내가 더 늙을 것 같다.

실로 복잡한 얼굴로 칼리안이 데블란에게 짖었다는 그 수많은 내용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본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파란 머리 마법사."

"······ 네, 플란츠 왕자님."

아무 말 못할 아르센이 마지못해 대답했고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이렌 경, 그레이스 경. 불러."

협회장님은 세이렌 경이고 그레이스 경은 그레이스 경인데 왜 저는 파란 머리 마법사입니까, 연두 머리 플란츠 왕자님.

"······ 네. 플란츠, 왕자님."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이 분명한 얼굴이 된 아르센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일어났다. 어차피 식사는 이미 진작에 끝내고 칼리안의 입 안에 우르르 들어가는 생굴들을 보던 중이라서 더 앉아있을 일도 없기는 했다.

"카이리스에 연락하지 말고."

"안 합니다."

혹시라도 저 미친 마법사가 진짜 전쟁이라도 준비해달라 말할까봐 한 마디를 덧붙인 플란츠를 보며 툴툴거리듯 대답했다. 그리고 저벅저벅 걸어 밖으로 나갔다.

그 뒤 플란츠는, 부드러운 고기를 썰어 크림 소스를 한가득 묻혀 입에 넣은 뒤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동생 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늘 느끼지만.

잘도 처먹는다. 진짜 잘도 처먹는다.

아무튼 속이 허하면 배도 허해지신다는 아우님이라는 것을 참 잘 알아서, 플란츠는 잘 짖고 와서 하루종일 방 안에 처박혀있다 참 잘 처먹는 동생을 그냥 계속 내버려뒀다.

그리고 얼마 뒤 아르센이 두 마법사를 불러왔다.

잠시 밖으로 나가 두 마법사와 대화를 나눈 플란츠가 칼리안 혼자 있던 곳에 되돌아 오니, 칼리안이 손에 들린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있었다. 드디어.

"오랜만에 잘 먹었네요."

바로 어제도 너 되게 잘 먹었던 건 다 잊었나보다.

"그래."

아주 적은 양의 와인, 귤과 라임, 그리고 탄산수를 섞은 음료를 홀짝이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쳐다봤다.

"앉지도 않으시고 가지도 않으시고. 거기서 뭐하십니까."

"기다려."

"저는 왜 기다리십니까."

"나가려고."

"어디를요."

"밖에."

"왕궁 밖 말씀하는 건 아니시죠."

"맞는데."

탄산수에 가득하던 얼음에서 짤그랑, 하는 소리가 났다. 혀를 차는 것처럼 얼음 소리를 한 번 낸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 가십니까."

"바다."

내가 진짜 그놈의 바다 평생 안 보고 말지 형님 너 왜 자꾸 바다 타령이냐고.

이런 생각이 담긴 얼굴의 칼리안이 보다 정중한 말을 했다.

"형님 혹시 사춘기 언제 끝나십니까."

그리고 플란츠는 신경쓰지 않았다.

"짖을 거면 가서 짖고. 가자고."

"거길 왜 갑니까. 지금. 곧 밤인데요."

"바다 도착할 즈음이면 생일 되겠지."

"생일이라 바다를 보셔야겠다 그런 말씀입니까. 위험할 것이 분명한데도요."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동안 플란츠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가시죠."

그렇게 말하고 앞서 나가는 칼리안을 보는 플란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체이스에게 그랬다. 내가 미끼 노릇은 안 한다고.

내 동생을 미끼로 던질 생각 없다는 말은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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