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80화 (281/527)

제49장. 정녕 아름다운(5)

'절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칼리안은 이렇게 장담했다.

데블란은 지금 플란츠의 속내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데블란은 브리센과 비슷했다. 하지만 달랐다.

브리센은 제 형제와 제 자식을 경쟁자로 보았다. 데블란은 그렇지 않았다. 적으로 보았다. 같은 피를 가지고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이들보다 더 위험한 적은 없노라 여겼다. 형제를 죽이고 자식을 다스렸다.

그러니 데블란은 차라리 란델의 생각을 읽어낼지언정 플란츠의 속은 모르리라고, 칼리안은 장담했다.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레이스 경을 불렀습니다.'

'기다려야 하나.'

'아뇨. 우리보다 늦게 출발했다지만 내일 국경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합류할 수 있을 겁니다. 만나보신 적 없어서 잘 모르실텐데 그레이스 경 발이 엄청 빠르거든요.'

갑작스러운 출발이었기 때문에 레이첼이 함께 오지 못했다. 칼리안은 앨런에게 연락을 취해 따로 오게 해달라 부탁을 했다.

앨런 마나실의 가족으로 카이리스에 찾아온 뒤 이동 마법진 구축을 위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느라 카이리스에서조차도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동 마법의 대가.

'데블란도 그레이스 경이 누구인지 모를 테고요.'

카이리스의 그 수많은 새들을 관리하던 것은 체이스였지 데블란이 아니었지 않나.

텐실의 신관을 가로막기 전까지만 해도 체이스는 데블란의 수족과도 같은 아들이었다. 때문에 데블란은 푸른 솔새처럼 텐실과 관련된 새들을 관리했고 카이리스의 새들은 체이스에게 넘겼다. 그리고 그런 체이스를 부렸다.

'게다가 데블란은, 제 정체에 대해서는 궁금해하며 신경을 썼겠지만 형님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카이리스의 정보를 담당했던 저 역시 세자위에 오르기 전까지의 형님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 없었으니까요.'

'······ 그래.'

물론 카이리스에도 데블란 직속의 새들이 있었다.

그들을 통해 데블란이 집중하여 경계한 것은 르메인과 발칸이었다. 아직 세자위에 오르지도 못한 세 왕자의 행보 따위는 관심에 둘 만큼 가치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한 명으로 줄어들 테니까.

아마도, 칼리안으로.

'그러니 데블란은 형님이 왜 이곳에 왔는지, 뭘 믿고 이곳까지 왔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형제를 적으로 둔 사람.

카이리스 왕자들에 대한 정보가 적은 사람.

실리케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 누구를 위한 행동이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할 그 사람은 절대로 플란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

'이해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 그 마법사를 불렀다는 말인가.'

'네. 산을 넘은 뒤부터 그레이스 경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 빠르게 당도하려고 합니다. 어차피 데블란의 뒤통수를 칠 계획이라면 도착할 때까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 나으니까요. 저 말고 형님부터 경계할 생각도, 또 다른 수를 쓸 생각도요.'

플란츠의 생일은 칼리안에게 있어서만 좋은 핑곗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데블란에게도 마찬가지다. 이 갑작스러운 이방인들을 데블란은 어떻게든 써먹으려 할 것이다. 사고방식이 다르고 정보가 적다는 것이 생각이 짧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서둘렀다.

'아우님의 옛 형님에게도 알려야 하지 않나.'

'네. 체이스 형님께도 이야기 해두었습니다. 준비하겠다 하셨습니다.'

'알았어.'

그렇게 도착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데블란으로 인해 잠시 잊고 있던 것.

달빛 비춘 먼 바다를 본 뒤에야 제대로 깨달았다. 밤새도록 지켜보며 잊고 있던 것을 가슴 깊이 다시 깨닫게 되었다.

이 곳이 어디인지를.

"아······."

굳게 닫아야만 했던 외성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휘몰아치던 불길은 아직 일지 않았으며 대지를 적신 검붉은 핏물의 아린 비린내 대신 차고 맑은 바람이 스친다. 새까만 화살의 비가 내리는 대신 새하얀 구름이 흐르는 그 하늘 아래, 발 밑에 놓인 자갈 하나조차 먹먹하여 차마 밟지 못하다가.

- 자박.

레이븐의 등에서 내려 간신히.

정말 간신히 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걸었다.

정녕 아름다운 세크리티아.

기억인지 추억인지 꿈인지 모를 것들이 머릿속을 채우고, 내 눈길 안 닿은 곳 없으나 더 이상 내 나라가 아닌 아름다운 땅. 차마 어디 하나 소중하지 않은 곳 없어 이곳을 내가 지키려 하였노라는 그 말 한마디조차 버거운 곳에, 눈물겹도록 많은 날을 지나쳐 비로소 왔다.

그것을 진정으로 깨달았다.

그 날의 마법사들이 서 있던 곳에서 한 걸음, 두 걸음. 그 날의 플란츠가 서 있던 곳에서 다시 한 걸음, 두 걸음. 아무 말 없이 계속 발을 옮기다, 그 날의 아르센이 서 있던 곳에서 반 걸음. 그렇게 그 날의······.

- 자박.

그토록 보고싶던 첨탑을.

마지막으로 담고자 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던 모습을.

꾹꾹 내리누르듯 올려다보던 붉은 눈이 기어코 감겨들었다.

한참동안 눈을 감고 오르락 내리락, 누구보다 고요히 요동치는 숨 소리를 듣고 있던 키리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순간 칼리안의 곁에서 말을 건넬 수 있을 사람은 오로지 단 한 명, 키리에 뿐이었으니까.

"내성까지 안내할 사람이 왔습니다. 그리고 세크리티아의 후궁님께서 왕궁 앞으로 마중을 오신다 합니다."

"그래."

"인사는 플란츠 왕자님께서 나누시겠다 하니, 왕자님께서는."

"아니야. 내가 할게."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되돌아 걷기 어려움을 어찌 알았을까.

제멋대로 곁으로 다가와 선 레이븐이 머리를 내려 칼리안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괜찮아. 지금은 안 기대도 돼."

크고 검은 다정한 짐승을 달랜 칼리안이 발 아래 머무는 기억을 한 번 더 내려다봤다.

이미 마음 속에서 한 번을 보내고 그 바다의 푸른 불꽃에 한 번을 더 띄워보냈으나 미련한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참으로 미련할만큼 질긴 탓에.

아주 잠시동안 눈을 감고 다시 한 번을 보냈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미련 없이 레이븐의 등에 올라 왕성으로 곧장 올라갔다.

"카이리스의 2왕자이신 플란츠 룬 카이리스님, 그리고 3왕자이신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님입니다."

"반갑습니다. 후궁, 루이즈 넬라입니다. 체이스 세자로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루이즈와 키리에 사이에 짧은 소개가 오가는 동안에도 일렁이지 않았다. 그리 오랜 시간을 살지 못했던 아들의 단단하지 않은 마음을 잘 다스렸다.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진정으로."

반가움 가득한 얼굴로 루이즈를 향해 인사를 건네며 잘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 정말로 괜찮았다.

마음을 다스리고 다스리고 다스려가며 괜찮았다.

괜찮았는데.

······ 당신이, 감히.

* * *

단 한 번도 마주해본 적 없는 미소.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

- 그리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체이스는 알아봤고 키리에는 알아들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이해했다.

'칼리안.'

화났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참지 마.'

돌았다.

* * *

붉은 망토.

입을 일 없다 생각하여 준비하지 않았던 왕자의 정복.

'플란츠 왕자님께서 오늘은 이것으로 입으라 하십니다.'

그 날 아침 플란츠가 키리에를 통해 건넸던 붉은 망토가 바람을 머금었다.

다른 곳도 아닌 세크리티아에서 자신의 옷을 빌려 입게 할 만큼 생각 없을 리 없는 형님께서 얀을 통해 미리 받아 제 짐 속에 넣어뒀단다.

이곳에서조차 나를 카이리스의 왕자로 각인시키려는 그 행동이 참으로 형님답다 야속해해야 할지. 이곳에서조차 내가 카이리스의 왕자임을 잊지 않게 하려는 그 행동이 참으로 형님답다 웃어야 할지. 그것을 모르겠어서 알겠다는 말만 전하게 하고 두 말 없이 갖춰 입은 왕자의 정복.

그 붉은 망토가 검푸른 빛의 재킷을 감싸안았다.

체이스의 몸을 덮었다.

많은 것을 참아내라는 의미를 담아 동생을 잘 꾸며 입힌 것이 무색하게, 플란츠는 고민 않고 참지 말라 말했고 칼리안은 정말 참지 않았다.

- 자박.

망토에 새겨진 카이리스 문장을 본 체이스가 놀란 눈을 감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목줄 풀린 빨간 눈의 개 한 마리가 독기 숨긴 뱀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모습과 그 목줄 가차없이 놔 버린 이의 연두색 눈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놀랐다.

플란츠의 입가에 칼리안과 썩 닮은 웃음이 들어 있었다.

'잘 봐라. 내 동생이 얼마나 잘 짖는지.'

이런 말이 들리는 것 같다.

낭패한 상황을 맞이했음을 안 것과는 무관하게 체이스의 눈가에 깊은 안도감이 어렸다.

체이스는 칼리안이 자신을 어떻게 불렀는지, 지금 칼리안이 벌인 행동의 뜻을 데블란이 알아들었는지, 주변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데블란은 무슨 반응을 보일지. 그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았다.

다른 생각 않고 그 망토에 남겨진 안온함에 잠시 마음을 기댔다.

"반갑습니다."

데블란의 시선이 칼리안을 향했다.

마음 감추는 것 잘 하는 사람의 눈을 보면서, 마음 감출 생각 사라진 사람이 웃음을 지었다.

"그래. 반갑네."

더없이 흥미로운 것을 앞에 둔 포식자의 눈을 한 데블란이 누구보다 온화한 표정을 그려냈다.

당신이 끌어내린 당신 아들, 카이리스 등에 업은 내가 보호하겠노라 선언해버린 칼리안이 데블란을 향해 갓 피어난 꽃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칼리안입니다. 내가."

* * *

탐색.

데블란이 고요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카이리스의 왕자가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와 그리 가까이 지냈을 줄은 몰랐던 탓에, 다소 의외라 여겼네."

"그렇습니까."

무례함을 꼬집어 보아야 이득 될 것이 없다.

행동만 본다면 착용하고 있던 망토를 풀어 직접 채워준 것 뿐. 지금의 일을 문제 삼으면 한 시간 동안 세자를 정원에 세워 두어 타국의 왕자가 그것을 '안타깝게' 여겨야 했을 이 상황부터 알려진다. 굳이 체이스가 귀족회의에 나설 필요도 없이, 데블란이 체이스를 이제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가 낱낱이 공개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데블란은 칼리안의 무례함을 묻었다.

"게다가 익숙히 여기던 아이를 그대의 곁에 두고 있으니 이를 무어라 해야 할까."

물론 무례함을 잊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웃고 있던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에일라를 한 번 바라봤다. 그 비녀 끝에 매달린 물방울같은 구슬을 잠시 눈에 담아내며 입을 열었다.

"날개를 꺾어 새장 속에 두었으니 익숙하다 여기셨을 수 있겠습니다만. 스스로 도망 온 새를 거둔 이에게 건넬 말씀이 생각나지 않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러한가. 스스로 나를 떠난 새가 그대에게 갔으니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이 없는 것이 맞군. 그렇다면 나는 그 새에게 이야기를 해야 하나."

"날개 꺾은 손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새는 그저 살고자 하였을 뿐이니. 그리고······ 내가 거두었다는 말을 함께 드렸는데 미처 듣지 못하신 듯합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데블란을 향했다.

"도망을 했든 날아왔든 내가 주웠든. 이제는 나의 소유이니 전하께서 이야기를 나눠보실 수 있는 이가 아니라 생각되는데. 어찌 보십니까."

"그것을 입에 담을 줄 아는 이가 나의 것에 손을 내미는구나."

"아······ 체이스 형님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이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남은 대답을 전했다.

"잘 지니신 것이 아니라 밑바닥으로 떨구려 하시기에. 대신 붙들어드렸습니다."

데블란이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다시 한 번 미소를 그려냈다.

곧 데블란의 눈길이 칼리안 뒤의 일행에 가 닿았다.

칼리안과 똑같은 왕자의 정복을 입고 서 있는 플란츠를 눈에 담았다. 둘의 대화를 낱낱이 듣고 있던 키리에가, 칼리안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지는 것을 본 뒤 입을 열었다.

"카이리스의 2왕자이신 플란츠 룬 카이리스님입니다."

그 뒤를 이어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세크리티아의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스스로를 소개할 필요 없는 집 주인 앞에서 제대로 된 예법을 빌어 인사를 건넸다. 완벽히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로.

표정은 예의바르고 입이 그렇지 못한 놈이 하나.

입은 예의바른데 표정이 그렇지 못한 놈이 하나.

실로 재미있는 조합이 아닌가.

"갑작스러운 방문이기는 하나 반가운 마음은 진솔하니, 편히 머물다 돌아가길 바라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말을 멈춘 데블란이 약한 기침을 감췄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까지 홀로 찾아왔다 돌아가는 그대의 길이 험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는구나."

"신경써주심에 감사드립니다만. 괜찮습니다."

플란츠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데블란의 눈 앞에서 바닥을 향한 플란츠의 손 끝이 긴 호선을 그려냈다.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원하는 것을 가져오려면······ 나의 것을 먼저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와 내 동생을 향한 의심에 파묻힌 당신을.

나는 나락에 넣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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