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장. 정녕 아름다운(3)
톡, 톡, 톡.
- 사안이 급히 진행되어 당국의 이러한 사정을 귀국에 통보하는 일마저 촉박하게 이루어진 것이 실로 유감스러울 따름이오. 하여, 당국에서는 얼마 전 귀국이 벌였던 무도한 일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고자 하니······.
몇 번이고 같은 내용을 읽었다.
두어 번 읽었을 때 이미 한 글자 한 글자 전부 다 머릿속에 새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을 읽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긴 서신이구나. 읽어도 읽어도 질리지를 않으니."
노골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세크리티아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담긴 편지. 둔하기로 이름난 르메인이 한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재밌는 내용.
그리고 다시 한 번 전해진 소식 하나.
"에일라 베르단디. 아니지. 이제는 성이 바뀌었다지. 하필이면 그 브리지트로."
혼잣말 끝에 웃음소리가 잠시 붙었다.
보란듯이 함께하는 푸른 솔새. 이름만으로도 세작들을 물리게 한다던 에우리아 세이렌. 눈속임이라는 것을 가릴 생각조차 없다는 듯 따라붙은 '직위 해제 상태'의 아르센 헤르츠.
거기에 더해진 또 하나의 이름.
"······ 칼리안."
치유사를 불러내는 말을 거절하는 방법이 어찌나 나와 닮았는지.
"다른 일이 바빴던 탓에 네게 동하는 흥미를 접으려 하였는데 이렇게나 나의 시선을 끌어내고 있구나. 그러니······."
당장 목을 매달아 광장에 걸어두어도 아쉽지 않을 새 한마리를 이끌고 오든, 한낮의 사신을 데리고 오든, 그리 자신있어하는 군대의 두 번째 우두머리와 오든.
"내가 감히 그 대단한 나라의 왕자들 앞길을 방해해서야 되겠느냐."
성미 사납다는 둘째 왕자를 또 어떻게 구슬렀는지 몰라도 핑계가 참으로 좋다. 그렇게까지 하여 굳이 이곳에 오려는 이유가 궁금해졌으니 잘난 얼굴을 좀 보려면 막아서지 말아야 하겠지.
"열어주거라. 전부 다, 원하는대로 데려오라 하라."
그 칼리안이 직접 오고 있다 하니.
* * *
칼리안 가라사대.
돈과 힘과 미모는 과할수록 좋다 하였으니.
미모는 타고났고 돈은 이미 과한 칼리안이 나머지 하나를 보강하기 위해 아르센을 불렀다. 여전히 의심해본 적 없는 연약한 형님 손에 뒤통수 맞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경에게 내가 줄 것이 있어서.'
'네, 왕자님.'
기대에 찬 아르센의 앞에 직위 해제 통보서를 내민 칼리안이 생긋 웃었고, 내일의 완두콩에게 뒤통수 맞을 칼리안에게 뒤통수 맞은 아르센이 싱긋 웃었다.
'이번에야말로 안네루시아 건네주시는 겁니까?'
그러더니 대뜸 이렇게 물었다.
죽기 전에는 절대 발칸에서 내놓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아니. 죽고 나서도 빌헬름 관 계단 앞에 묻어 줄 것처럼 굴던 사람이 갑자기 직위 해제 통보를 했으니 말이다.
'아. 그건 나중에. 반성문 먼저 열어 본 다음일테니 벌써부터 그 기대는 하지 말아요.'
'그럼 이건 무엇입니까.'
'사적인 일을 위한 권한 남용.'
당연하겠지만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먼저 꺼낸 칼리안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실 나는 발칸에 대해 내 권한을 요구할 생각 없었습니다. 스승님과 함께 만들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시간을 거스르기 전에 보았던 군대를 베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진심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자신의 세력으로 삼기 위해서 만들기는 했으나 이제와 발칸의 주인 자리에 대해 욕심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경에 대해서는 내가 권한을 좀 남용해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내 따까리에 대한 권한 정도는 챙겨도 괜찮겠지.
'세크리티아에 헤르츠 경과 같이 갔으면 합니다.'
'제가 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 왜. 내가 옛날 생각이라도 할까 걱정됩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그럴 것 같았으면 못 찾아가지, 나도. 내 이름자락 끝에 카이리스가 붙어있는데 누굴 데려가든 다를 것이 있을까.'
얀 몰래 차게 식힌 민트차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 둔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군인을 데리고 국경을 넘을 수는 없을 텐데 그렇다고 경을 완전히 해고하면 발칸에 절대로 안 돌아올 것 같고. 그래서 직위만 해제했습니다. 어차피 해고든 직위 해제든 그게 사실일 거라고 세크리티아에서 믿을 리는 없으니까.'
'아쉽다고 말씀드리면 화내실 겁니까?'
'응.'
'직위 해제 좋습니다, 왕자님. 해고하신 것이 아니라 정말 다행입니다.'
말마따나 해고는 아니었다.
군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에 제약이 걸리는, 소속만 발칸인 민간인이 되는 것이다. 명목상의 일이었다.
'이 소식이 좀 퍼져야 동행하기 편할 것 같아서 미리 손을 썼습니다. 언제 출발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전에 준비를 했으면 합니다. 아마 형님 탄생일 연회 이후가 될 것 같은데 이 참에 좀 쉬어요.'
덕분에 발칸 소속 민간인이라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 아르센은 신이 났다. 잠시나마 되찾은 자유에 다시 한 번 앨런의 집무실 앞에 가서 춤추고 싶은 기분을 꾹꾹 눌러 참아야 했을 만큼 신이 났다.
딱, 하루 동안만 신이 났다.
직위 해제됐다는 소식이 퍼지기는 커녕 플란츠나 니들렌에게 통보되기도 전에 플란츠가 왕궁 정문을 나서려는 낌새를 보인 까닭이다.
칼리안을 만나러 체르밀 궁에 갔더니 보여야 할 칼리안이 없었다. 그런데 얀은 혹시라도 레이븐이 장제사를 걷어차지 않도록 지켜보러 나갔단다. 그 후 왕궁을 나서려는데 왕궁 안에 세워진 마차들 사이에 왕실 마차가 떡하니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마차를 봄과 동시에 모골이 송연해진 것은, 오랜 기간 플란츠의 옆에서 지내 온 눈물겨운 나날들이 만들어 낸 하나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플란츠가 뭘 꾸미는지 알아챈 아르센은 그 길로 새끼 오리 '코코'를 맡기러 마법사 협회에 갔고, 칼리안이 이번 여정의 일행으로 에우리아까지 낙점을 해 두었음을 알게 됐다.
시간은 없고 소중한 코코 맡아 줄 곳도 없으니 어쩌겠나.
- 삐약!
데려가야지.
"꼬맹이 대단하네."
"제가 대단한 것이 한 둘이 아니라서 뭐가 대단하다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협회장님."
나이에 비해 대단히 능력 좋고 칼리안을 대단히 잘 따르며 폭발을 대단히 좋아하는 대단하게 미친 마법사가 이렇게 물었다.
"위대한 마차에서 오리 키우는 마법사라니. 대단하잖아."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마차 안에서 삐약거리는 소리가 났다. 국경 관문을 통과할 때를 제외하고 저 마차는 줄곧 코코의 차지였다.
일행의 맨 뒤에서 산길을 오르던 아르센이 에우리아를 보며 대답했다.
"여행 내내 안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입니다만. 나중에 플란츠 왕자님께서 이 일을 두고 또 뭐라 하실지 걱정됩니다."
"타국 가는 길에 오리 데려간 정신 나간 파란 머리 마법사라고 하시겠지."
"네.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 어처구니 없어서 실소한 아르센이 에우리아를 향한 말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도 대원들이 아니라 오리를 데려오게 된 것이 좋기는 좋습니다."
"뭐. 원래는 대원들도 오기로 했어?"
"아닙니다. 오기로 했던 건 아니고 그냥······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협회장님."
이렇게 말한 아르센이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곁에서 그 시선을 따라간 에우리아가 큰 숨을 들이킨 뒤 말했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확실히 세크리티아는 대문 막기가 쉬운 것 같아. 카이리스랑 세크리티아 사이에 난 산맥이 워낙 험하니까 이쪽 길목만 막으면 빙 돌아가야 하잖아."
카이리스의 산보다는 험난하고 대사막의 산보다는 평탄하다. 숲이 우거졌다 하기보다는 뾰족한 바위가 높이 솟아있는 모양새의 산에 구불구불 길이 나 있었다.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모를 산길에, 그 너머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바위산이 가로막고 있으니 이 너머 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는 이들이 적지."
"협회장님 세크리티아에도 오셨었습니까?"
"어. 너 처음 보기 전에 국경 근처에서 일할 때였는데. 야만족 추격하면서 두 번 들어왔지. 이번까지 하면 세 번이네."
"여기까지 넘나드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세크리티아에서 국경 넘어오는 걸 허락할 정도면 꽤 강한 놈들이었나 봅니다."
"당연히 몰래 들어왔지. 허락을 해 줄 리가 있나."
"아······."
곧 에우리아의 얼굴에 꽤 오래전의 추억을 되짚는 듯한 아련한 표정이 새겨졌다.
"바질리카가 진짜 맛있었어."
"······ 네."
히몰리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독주를 떠올린 아르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보지 말고 너도 빨리 서클 올려봐."
"그게 하란다고 되는 거면 저는 이미 8서클은 됐을 겁니다."
"높기도 하다. 8서클이나 돼서 뭐 하게. 로이그란트 이후로 근 300년 동안 나온 적도 없는데."
"7서클 완성한 때로 다시 어려지는데다 아예 늙지도 않으니 말입니다."
"그게 좋아 보이나?"
"어지간해선 지겹도록 오래 살 것 아닙니까. 이꼴 저꼴 다 보면서요."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좋았으면 로이그란트도 여전히 살아있었겠죠."
"뭔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맨 정신에 취한 소리 하지말고 그냥 속 편하게 6서클만 해. 술이나 같이 먹게."
적당히 대꾸한 에우리아가 보라색 긴 머리를 풀었다 제대로 다시 묶으며 말했다.
"서클이고 뭐고 나는 그냥 국경 잘 넘어온 김에 바질리카나 실컷 마시고 가야겠다."
"저희 여기 술 마시러 온 것 아닌데요, 협회장님."
"마법사가 술 마실 자리 따져가며 마시나. 그냥 마시지."
"그건 마법사라서가 아니라 협회장님이 협회장님이라서 그러신 것 아닙니까."
"꼬맹이 카이리스에 겁대가리 놓고 왔나봐."
"아닙니다. 잘 가지고 왔습니다, 협회장님."
아르센의 빠른 대답에 에우리아가 피식 웃었다.
공사 구분 확실한 탓에 꽃 주고 꽃 받은 일 무색하게 만드는 마법사들의 대화가 그렇게 계속 이어졌다.
* * *
아직 오르지 않은 달 대신 별빛만 반짝이는 밤.
드문드문 드러난 바위들 사이로 마른 풀잎들이 흔들렸다.
이미 국경을 넘었으니 어쩌면 진작부터 도착했던 것이겠지만 바위산을 지난 뒤에야 그때부터 진짜 세크리티아가 시작되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이 바위산을 내려서면 정말 도착하는 것이다.
넓은 궁의 윗층에 형들이 사는 곳 말고, 그렇게나 지키고자 했던 바로 그 땅에.
"그렇게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꼭 마른 풀잎 같았다.
잊고 살던 것들을 마주해서 그런 소리를 내는지, 앞으로 만나볼 악몽에 겁을 먹어 그런 소리를 내는지 몰라 계속 쳐다보니 웃는다.
"생각나는 것들도 많고, 반갑기도 하고. 그래서 그럽니다."
바위산을 다 오를 즈음에는 언제나 밤이 되었다.
세크리티아의 사람이든 카이리스의 사람이든 둘 모두의 사람이든. 누구나 바위산의 정상에서 밤을 맞이했다.
그 바위산의 꼭대기에서 한동안 저 먼 곳을 쳐다보던 칼리안이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목소리는 플란츠 쪽에서 흘러나왔다.
"안 추워."
"네."
뭔 소리를 할지 뻔했으니까.
생글생글 웃는 칼리안의 손에 들린 것을 물끄러미 보던 플란츠가 물었다.
"뭔데."
"그때 산 술이요. 시즐리누."
"반말."
"시즐리누요. 스승님께서 챙겨주셨는지 레이븐 가방에 들어 있기에 가지고 왔습니다. 형님 여기서 술 좋아하셔야 되지 않습니까.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보는 눈이라 함은 바위산 정상의 감시탑에 있는 세크리티아의 기사들을 말함이다. 그러니 '그리 술 좋아하는 형님'을 위해 시즐리누를 꺼내왔다는 소리다.
"너. 히몰리카 한 잔······."
"아닙니다."
조금 급한 말로 플란츠의 말을 자른 칼리안이 와인병을 찰랑찰랑 흔들어 보였다. 나는 마실건데 형님 너도 드실 거냐는 얼굴을 한 채였다.
"지금 이런데서 취하자고 마실 생각 없으니 연약하신 형님 안지키고 취할까봐 걱정하지는 마시고요."
"짖지, 또."
속 시끄러울 것이 비단 칼리안만은 아니지 않겠나.
생전 처음 와 보는 이 곳에서, 언젠가의 내가 여기서는 무슨 말을 했을지, 어디를 어떻게 공격했을지.
무슨 얼굴을 하고 있었을지.
소득 없을 생각 접어놓고 그냥 술이나 마시자는 말을 굳이 거절 할 이유가 있겠나. 때문에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안이 건네는 잔을 받았다.
"와인도 처음 드시죠."
"마셔봤는데."
"술은 안드셨다면서요."
"안마셨어. 술."
혹시 형님 와인 냄새만 맡아도 취하시는 거냐고.
이런 표정의 칼리안을 향해 실소한 플란츠가 생애 두 번째로 손에 든 와인을 쳐다봤다.
오래 전 언젠가.
오래 전 어느날.
"······ 처음으로 내가 내 어머니를 막아섰던 날에."
실리케의 독차를 받던 칼리안이 축복의 힘을 막았던 날. 칼리안이 처음으로 실리케의 앞길을 막아섰던 날.
플란츠 역시 같았다.
처음으로 실리케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란델의 것으로 놓여 있던 와인을 비웠다. 칼리안의 속을 녹인 것이 그 안에도 있을지 모른다 여겼으니, 그것은 플란츠에게 있어 술이 아니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술 드시면 되겠네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다 전해들어 알고 있던 칼리안이 플란츠의 말을 막으며 잔을 가리켜보였다.
"맛있을 겁니다, 그건."
독이 아니니까.
"그래."
이 시간을 걱정한 마음 깊은 스승이 준비해 준 두 개의 유리잔이 청량한 소리를 냈다. 마른 풀잎의 노랫소리같은 바람소리 사이로 서로 다른 독한 기억들이 같이 흘러나가 흩어졌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와인잔이 계속 채워지고 계속 비워졌다.
믿기지 않게도 나보다 술 센 것 같은 완두콩을 보던 칼리안이 열심히 오러로 취기를 밀어내며 복잡한 얼굴을 애써 지우기를 반복하던 때.
먼 곳에서 새하얀 빛이 올랐다.
늦은 달이 떠오른다. 저 멀리 하늘에 나선 달빛이 저 멀리 일렁이는 맑은 물 위를 노닐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플란츠가 문득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께서 그 바다를 앞에 두고 무덤덤했던 이유를 알겠군."
"그렇습니까."
떠오르는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내는 광활한 땅. 그 끝에서 시작되는 그리운 곳.
그래.
바다였다.
"이번에는 형님께도 좋은 기억만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짙은 어둠으로도 채 가려지지 않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칼리안이 작은 웃음 소리를 냈다.
"정녕 아름다운 세크리티아······ 실로 아름다운 곳이니."